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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46 ✦
“모든 계명 중에 가장 중요한 계명”
(마가복음 12장 28~34절)
1.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생명의 삶> 공부에서 처음에 꼭 물어보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다른 말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 단어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사실은 그것이 두꺼운 성경 전체를 요약하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바로 ‘관계’입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많은 내용이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하며 살 것인가, 또 어떻게 이웃과 관계를 하며 살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소위 ‘가장 큰 계명’ 또는 ‘대 명령’(The Greatest Commandment)이라고 부릅니다.
이 내용의 배경은 예수님이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활동하시다가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3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후입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입성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며 난리법석을 떨었기 때문에 그 날을 가리켜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예루살렘 입성 후에 베다니로 가셔서 주무시고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하셨습니다.
주일에 입성하셔서 금요일에 돌아가셨는데, 그 5일 동안 성전도 청결하게 하시고 많은 비유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불만을 품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도전을 하며 꼬투리를 잡아서 죽이기 위해 어려운 시험을 했습니다.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와서 도전한 내용들이 계속 나오는데, 그 중 마지막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 제일 중요한 게 뭡니까?’라고 물어봐서, A라고 하면 ‘B는 왜 안 됩니까?’라고 하고, B라고 하면 ‘A는 왜 안 됩니까?’라는 식으로 하며 꼬투리를 잡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 22장에도 있고 누가복음 10장에도 있습니다. ‘가장 큰 계명’을 살펴볼 때는 주로 마태복음 22장을 보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 찾아온 사람이 예수님의 말을 꼬투리 잡아서 책잡으려는 의도로 온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8절)
예수님이 지난주 본문에서 사두개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을 때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라고 하셨는데, “너희는 정말 무식하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곳에 서기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변론을 듣고 예수님이 아주 대답을 잘 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그가 거기에 있었던 이유가 뭔가?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실패한 것을 듣고 어떻게 할지 의논하기 위해 모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중 율법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사람을 보면, 한 사람만 그 질문을 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원래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온 자기 동료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도, 또 사두개인들도 모두 실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상황을 지켜보며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질문을 했는데 기가 막힌 대답으로 오히려 질문한 사람들을 창피하게 만드는 지혜의 대답을 하신 것을 보고 ‘저분이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궁금해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선생이 아닌가 하고 감탄하며 지켜봤음에 틀림없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간교한 질문들을 잘 대답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한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지혜가 있으신 것을 생생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소에 무엇이 가장 큰 계명인가 생각을 거듭했음에 틀림이 없고, 그도 역시 이 계명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너무나 놀라운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29-31절)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즉,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성경을 다 지킨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핵심 중의 핵심이 바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셨던 십계명입니다(출 20). 십계명의 핵심 정신이 뭡니까? 1계명에서 4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룹니다. 그리고 5계명부터 10계명은 이웃과의 관계를 다룹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이 두 가지가 율법의 핵심이고 그것이 곧 성경 전체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이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합니다.
<생명의 삶> 공부에 이런 예화가 나옵니다. 어느 신혼부부가 있는데 영화를 보러 나간 사이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섭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데, 가만 보니까 자기들은 집에서 저녁을 안 먹었는데 밥을 먹은 흔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도둑이 와서 물건들을 훔쳐갈 뿐 아니라 집에서 저녁을 해먹고 설거지까지 깨끗하게 해놓고 간 겁니다.
그러면 그 신혼부부가 그것을 보고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야, 참 신사적인 도둑이네. 저런 도둑만 들었으면 좋겠다.’라고 하겠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더 화가 날 겁니다. 그 부부 입장에서는 도둑을 생각할 때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도둑질을 당한 것에 대해 분개할 것입니다. 어차피 도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그와 같은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 것, 하나님이 제일 중요하게 보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즉 사랑의 관계에 실패하고 있는데 ‘나는 그래도 다른 것을 잘하지 않냐? 남을 미워하지만 내가 봉사를 이렇게 열심히 한다. 전도를 이렇게 열심히 한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바로 이 설거지 해놓고 간 도둑과 같다는 겁니다. 설거지 하고 깨끗이 정리 잘 해놓고 가면 뭐합니까, 도둑인데?
하나님 앞에서 제일 중요한 관계에는 실패해놓고 아무리 지식을 쌓아서 뭐합니까? 봉사를 많이 하면 뭐합니까? 결국 크리스천은 어디 집중해야 하는가?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하지는 않으면서, 미워하면서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랑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성경지식을 쌓아 본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은 관계입니다. 우리는 관계에서 실패하면 신앙생활이 실패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닙니다. 이게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실패하면 크리스천의 삶에서 실패하는 겁니다. 관계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건강한 신앙인으로 자라가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지는 것,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가 좋아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늘면 늘수록 관계가 좋아지면 그 신앙생활은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고 나서도, 성경공부를 하고 나서도, 기도를 하고 나서도, 오히려 더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더 나빠지고 불편해지고 미워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제 말이 아니고 성경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2. 가장 중요한 계명 두 가지
1) 하나님을 사랑하라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30).
29절에 “이스라엘아 들으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쉐마’입니다. 이 이름을 딴 선교회도 있습니다. 이것은 ‘들으라’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나온 이름이 ‘사무엘’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이 사무엘의 뜻입니다. 쉐마는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명기 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첫째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했습니다. 나와 관계가 있는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내 아빠의 하나님, 엄마의 하나님, 남편의 하나님, 아내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와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사랑하라는 말씀입니까? 정말 불가능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들을 다 드리면 내게 남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끝이 없이 하라는 말씀인데, 그럼 실망과 절망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되지도 않는 것을 왜 하라고 하시나?
그런데 성경에서 어려운 것을 하라고 하실 때 왜 하라고 하십니까? 또 하지 말라고 하실 때는 왜 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먼저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하라고 하시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 하시는 것을 하지 않으면 최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하라고 하실 때에는, 특히 이렇게 사랑하라고 하실 때에는, 하나님이 먼저 그렇게 사랑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다해서, 목숨을 다해서, 뜻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사랑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충 사랑하신 게 아니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너희도 그렇게 최선을 다해 한 번 나를 사랑해 보아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안 하시고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먼저 하시고서 우리도 그렇게 해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최고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비결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주실 때에는 정말 사랑을 하시기 때문이고, 그 사랑을 통해 우리가 자라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그러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이렇게 와서 한 시간 정도 있으면서 일어났다 앉았다 몇 번 하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배 순서이고 이것은 예배 모임입니다. 이 예배 모임 가운데 우리가 정말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특히 이것은 공 예배, 즉 같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여기서만 예배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또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나의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당에서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나머지 삶은 내가 알아서 사는 게 예배가 아닙니다. 여기서도 다른 형제자매들과 같이 예배하고 내 삶에서 개인적으로 예배하고, 가정에서 가족들과 같이 예배하는 겁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게 예배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왜 이곳에 오셨습니까? 당연히 예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다릅니다. 참석은 했지만 예배를 안 드릴 수도 있습니다.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빠지면 벌 받을까봐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두려움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미움이 아닙니다. 무관심이라고도 하는데, 사랑의 반대말이 사실은 두려움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했습니다. 두려우니까 사랑을 못하는 겁니다. 두려우니까 예배를 못합니다. 두려우니까, 벌 받을까봐 나오고 그러는데, 그게 두려움입니다. 그건 전혀 사랑이 아닙니다. 아이가 아빠만 보면 무서워서 벌벌 떨고 숨으면 그게 어떻게 제대로 된 관계가 되겠습니까? 사랑하니까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하고 말씀을 읽어야 합니까? 의무감 때문입니까? 크리스천으로 해야 하니까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합니까? 더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도 왜 대화를 합니까? 하나님은 물론 우리 마음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굳이 기도해야 되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나를 위한 것입니다. 기도할 때 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그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어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합니다.
또 일상생활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하게 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에 대한 험담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일합니다. 남을 속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생명의 삶> 성경 요약 숙제가 요한복음 13-16장인데, 바로 거기에 이 내용이 나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 계명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이것을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데 주님이 기뻐하시니까 하는 겁니다. 주님을 사랑하는데 주님이 싫어하시니까 안 하는 겁니다. 무슨 율법주의적으로 하고 안 하고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물론 이 자리에 나와 예배하고 있는 것은 정말 귀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런 공 예배라는 것은 다른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삶의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면 다 풀립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지 못하니까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또 이런 것으로 체크해볼 수 있습니다. 예배에 올 때 어떤 마음으로 오십니까? ‘나는 정말 빨리 가서 예배드리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오십니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형제자매도 사랑하는데, 같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다.’라고 하십니까? 토요일 밤쯤 되면 ‘빨리 이 밤이 지나가고 내일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다.’라고 하십니까? 사실 저도 안 그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가 나옵니다. 드라마 보기 직전의 내 마음이 어떻습니까? ‘야! 이거 진짜!’라고 흥분합니다.
여러분,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다른 것을 사랑합니까? 무엇을 하기 전에 흥분이 되고 기대가 되는 것을 보면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 얼마나 흥분되고 기대되고 그렇습니까? 그럼 사랑하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올 때 얼마나 흥분되고 기대되고 그렇습니까? 말씀을 펴고 기도할 때도 ‘아, 또 해야 되나? 왜 이렇게 하루가 짧고 매일 돌아오나?’라고 하는 게 아니라, ‘아, 하나님과의 이 시간, 이 사랑의 속삭임을 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좋은가!’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가를 늘 점검해야겠습니다.
2) 이웃을 사랑하라
종적(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고, 횡적(수평적)으로는 이웃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첫째”(29)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31절에 보면 “둘째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와 둘째를 이야기하십니다.
여기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레위기 19:18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보면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이보다”라는 말은 “이 두 계명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단수가 아니라 이 두 가지를 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는 것, 즉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는 별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는 겁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둘째도 이것과 같은데”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첫째와 둘째가 같다’, 즉 중요도가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는 결코 별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예배를 통해 또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눈에 보이도록 어떻게 드러나는가? 내가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면 보인다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면 파악이 됩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는 별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멀리하고 불편하니까 멀리 떨어지고 저 사람 오니까 안 가고 그런다면,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은혜가 되는 말씀인지 아십니까?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보다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부모님이나 배우자나 자녀가 있어도, 나 자신을 더 생각하지 결코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나 자신 사랑하는 정도로만 생각하며 사랑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상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내가 나를 케어하고 내가 나에게 관심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그 정도의 관심을 쏟는다면 최고의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것은 완전히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요일 4:20-21, 새)
주님께서 이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형제자매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데도 ‘아, 나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라고 한다면 완전히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별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지를 알려면 이웃과의 관계를 보면 됩니다. 아무리 눈물을 흘리며 찬양을 부르고 기도하고 예배 때 은혜 받고 그래도,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알고 찬양을 많이 하고 그래도, 이상하게 다른 사람들과 자꾸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안 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눈물과 기도와 성경 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한 다음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진짜입니다.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불편한 관계가 생겼다면, 그 사람과 만나서 대화하며 풀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푸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서 이웃과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압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어 있으면 누가 뭐래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 화가 나고 그러면 그 사람과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그때는 빨리 무릎 꿇고 성경 펴고 예배할 때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서기관이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그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2-33절)
참 놀라운 말입니다. 예수님은 번제나 제사를 이야기하지 않으셨는데, 이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말합니다. 제사와 제물을 드리는 게 안 중요하고 할 필요 없는 것이라는 게 아닙니다. 이웃과는 제대로 못하면서 제사만 드리는 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구약에도 이사야나 하박국이나 아모스 같은 데 보시면, 하나님이 “너희가 드리는 그 제물이 싫다. 아주 역겹다. 그만 했으면 좋겠다.”라고 하십니다.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제대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가서 온갖 악을 다 행하며 이웃을 해치고 자기 배만 불리고 호의호식아며 남들은 압제하면서 와서는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뜻을 말씀하신 것인데, 그런 내용을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어도 이 서기관이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관계에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외롭게 혼자 있는 것은 지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게, 디스코텍이나 클럽 같은 데서 불이 번쩍번쩍 돌아가고 사람들이 미친 듯이 춤추는 것을 보며 지옥이라고 합니다. 지옥에 가면 저런 광란의 파티를 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한 오해입니다. 지옥은 그렇게 어울려서 사람들이 미친 듯이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곳이 아니라 혼자 있는 곳입니다. 아무와도 관계를 할 수 없는 곳, 철저히 외로운 곳, 관계가 없는 곳입니다. 사랑을 나눌 대상도 없고 능력도 없고, 철저히 외롭고 고립되고 암흑과 같은 곳입니다.
사람은 관계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관계가 끊어지면 불행해집니다. 관계가 끊어지고 홀로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이 수명도 더 짧습니다. 외로운 사람은 건강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부귀와 명성과 권력과 학벌을 다 갖추고 있어도, 가족이나 친구나 직장동료나 다른 교우들과 냉랭한 관계에 있는 사람은 삶의 만족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만드셨고, 사랑해주시기 위해서 만드셨고, 또 그 사랑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인간관계가 빈약한 사람들은 고독에 시달립니다.
십 년 전쯤에 동아일보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인제대 서울 백병원과 코리아리서치와 함께 직장인의 행복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가? 가장 큰 것이 다름 아닌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삼성전자 대리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도 똑같았습니다. ‘조직 내의 인간관계 갈등’이 직장생활에서 가장 힘든 점으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것은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 불행하다면 부부간에 또는 부모와 자녀 간에 관계의 문제가 생긴 겁니다. 교회생활을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도 다른 교우들과의 관계입니다.
미워하는 것은 치열한 연습과 훈련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미워하는 것은 아무 연습이 없어도 저절로 됩니다. 그런데 사랑은 연습을 해도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연습을 의도적으로라도 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그 훈련을 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고 목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장에서 섬기는 연습을 합니다. 예배에 살짝 갔다가 오는 식으로 해서는 도움이 안 됩니다. 교회 내에서도 친밀한 사랑을 나누는 소그룹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목장에서 그것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내 스케줄에 맞추어서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때 안 하고, 시간 있으면 하고 시간 없으면 안 하고 그러면 도움이 안 됩니다. 운동도 똑같습니다. 꾸준히 해야 도움이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때 안 하고, 시간 있을 때 하고 시간 없을 때 안 하면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는 힘들어도 모이고, 하기 싫어도 해보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다 보면 귀찮기도 하고, 꼴 보기 싫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하는 겁니다. 연습을 하고 훈련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불편하면 자꾸 떨어지려 하고 안 보려 하고 도망을 갑니다. 그래서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에 밖에 머물지 못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연륜은 쌓여 가니까 자기가 신앙이 자라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입니다. 전혀 연습과 훈련이 안 된 상태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거라면 내가 하기 싫지만 그래도 하는 겁니다. 또 나는 너무 하고 싶은데 주님이 원치 않으시니까 하지 않고 참는 훈련을 하는 겁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보기 싫은 사람을 계속 봐야 하고, 듣기 싫은 말을 계속 들어줘야 하고, 똑같은 말을 해도 들어줘야 하고, 미워하면 안 되고, 그런데 그런 것을 자꾸 훈련하다 보니까 예수님을 닮는 겁니다.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을 읽는다고 저절로 자라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기초로 하여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성장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둘 다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첫째, 둘째”라고 하시는데, 그것은 순서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어도 친절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되어야 진짜 사랑이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끔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없으면서 도덕적으로만 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해보려 해도 안 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원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가페 사랑(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물론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아름답지만, 그러나 거기에도 계산을 합니다. 내게 더 잘해주거나 내 맘을 흡족하게 해주는 자녀에게 사랑이 더 가지 않습니까?
우리는 애초에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채우고 흘러넘쳐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채우는 겁니다. 그럴 때 그게 넘치며 옆으로 흘러갑니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34절)
이것은 극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이런 놀라운 답변을 들은 사람들이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더 물었다가는 더 창피를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관계 우선의 삶
우리는 관계를 우선순위에 두기에 힘쓰는 동시에 그렇게 하는 기술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관계에 탁월한 사람들을 보면 정직하고 성실하고 투명합니다. 또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기술에도 뛰어나고, 말하는 것이 섬세하고 설득력이 있고, 유머감각이 있습니다.
3년 전쯤 제가 얼마나 여유 없게 살고 있는가를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이웃집의 중요한 우편물들이 제 우편함으로 잘못 배달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집이라 가서 벨을 눌렀더니 백인 아주머니가 나와서 우편물을 전달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럴 때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Thank you!’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분은 정말 여유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Oh, thank you!”라고 먼저 하더니, “근데, 네가 대신 좀 내주지 그랬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너무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스타벅스 같은 데 가서 커피를 사려고 하다 보면 친절하게 인사를 합니다. 그때 제가 느끼는 것은, 저는 너무 굳어 있다는 것입니다. 좀 인사 한 마디 하면 어디 덧나는 것도 아니고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너무 굳어 있습니다. 오직 빨리 커피를 사서 나가겠다는 생각 밖에 안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은 참 친절하게 해줍니다.
결혼관계에 대한 책들에 많이 인용되는 말 중에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결혼의 성공 여부는 자기에게 ‘맞는 사람’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고, 자기가 결혼한 사람에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행복한 결혼이란 얼마나 완벽한 사람을 만났느냐, 얼마나 나에게 맞는 사람을 만났느냐가 아니라, 서로가 얼마나 잘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교회생활도 똑같습니다. 행복한 교회생활은 나에게 맞는 교회, 내게 이익을 주는 교회, 나에게 맞는 목회자나 맞는 교인들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고, 내가 그들에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이 교회가 얼마나 완벽한가, 목사가 얼마나 훌륭한가, 나에게 잘 맞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비슷한 형편의 교인들이 얼마나 있는가 등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함께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점들이 보일 수가 있습니다. 목사가 이런 줄 알았는데 저런 면이 있구나, 저 성도가 저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놀랄 때도 생길 수 있습니다. 가깝게 서로 지내다 보면 상대방의 이상한 면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사람은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며 만남을 피하거나 슬그머니 그곳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신앙도 인격도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오히려 내가 그 사람에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자랄 수 있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 안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왜 하필 저런 사람을 내 앞에 가져다 놓으셨는가? 저 사람만 없으면 내가 행복할 텐데.’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나를 훈련시키시기 위함입니다. 조금만 싫으면 도망가고 그래서는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를 훈련시키시고 자라게 하시기 위해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만찬을 거행합니다. 성만찬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냥 단순히 떡 하나 받아먹고 잔을 마시는 게 아닙니다. 바로 이 사랑의 관계를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갖고 살게 하시기 위해서, 내가 이웃과 그런 사랑의 관계를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성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이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떡을 받아먹고 잔을 마실 때, ‘나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그 사람을 제가 용서합니다. 제가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섬기겠습니다’라는 결단을 하면서 받아먹고 마시는 겁니다. 이것 없이 먹고 마시는 게 잘못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이 사랑을 저도 실천하겠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제가 이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이 하나님 사랑, 이 이웃 사랑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고 행복한 성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