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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kKUTjc96wFA?si=kqakHw4aaaz8qRqd&t=75

 

 

20231126일 주일예배

제자의 삶 산상수훈 29

이것이 제자의 삶이다

(마태복음 724~29)

 

1.   진리를 선포하고 권위로 가르치신 예수님께 나아가라

 

오늘은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을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한마디로 이것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다. 이런 게 크리스천이다.’라고 말해줍니다. 믿지 않는 분들이나 타 종교인들도 산상수훈을 아주 좋아하고 격찬합니다. 심지어 어떤 무슬림은 산상수훈을 읽을 때, 그 내용이 얼마나 깊고 감동적인지, 읽는 내내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산상수훈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기독교의 진리와 윤리를 담은 본문입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이 서구 교회를 지배하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부정하면서 성경을 공격할 때조차 모든 학자들이 산상수훈만큼은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동의할 정도로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은 내용이 바로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의 마지막 본문은 사실 28-29절 두 절인데, 산상수훈을 들은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함으로써 산상수훈의 초점과 함께 성경에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를 알려줍니다산상수훈을 마무리하기에는 평범한 구절 같아 보이지만 아주 중요한 교훈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고,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다고 하시며 설교를 마무리하셨습니다. 그때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8)

 

한글 성경에는 놀랐다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신약성경이 쓰인 헬라어 원문을 보면 이 단어가 굉장히 강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주 크게 놀랐다’, ‘아연실색했다’, ‘경악했다’, ‘깜짝 놀랐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지난 몇 년 사이 나온 신조어 중 하나가 깜놀인데, 이 단어가 바로 그것입니다. ‘무리들의 그의 가르치심에 깜놀했다.’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들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을 만큼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놀랐습니까?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9)

 

무리들이 깜짝 놀란 이유는, 산상수훈이 깊이 있고 감동적이며 세상 어디에서도 듣지 못하는 삶의 진리를 담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내용이지만 그것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산상수훈의 내용 자체가 탁월하지만, 그 탁월함 때문에 놀란 게 아닙니다. 내용도 탁월하지만, 무엇보다 이 말씀을 전하신 예수님과 그분의 권위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소위 율법 도사인데 율법의 전문가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신학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과 다른 권위를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다 느꼈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이 같은 권위를 가지고 이런 내용의 설교를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설교의 내용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설교하신 그분과 그분의 권위에 놀랐습니다.

 

오늘 본문은 진리에 대한 감격과 깊은 깨달음을 얻고 충격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그것을 넘어 예수님께 관심과 초점을 맞추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놀라운 진리에 깊이 감동하여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요즘은 은혜롭다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영화를 보고도 영화가 은혜로웠다.’라고 합니다. 미모가 좋은 여성이나 잘생긴 남성을 보고도 외모가 은혜롭다.’라고 하는데, 감동을 받았고 참 좋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히 은혜를 받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아닙니다. 진리를 선포하고 권위 있게 가르치신 예수님을 붙들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2.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분을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실패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권능을 행하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많은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중 한 사건이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열 명의 나병 환자 이야기입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가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큰 소리로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열 명의 나병 환자는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려고 길을 가는데, 가던 도중 치유받은 것을 깨닫습니다.

 

열 사람이 다 병이 나았는데, 아홉 명은 다른 데로 가고,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한 명만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를 표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런데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 아홉 명에게 은혜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말씀하십니다.

 

사실 나병은 불치병인데 어떻게 치유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열 명 모두 예수님의 권능으로 질병이 치료되는 놀라운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홉 명은 세상으로 달려갔고 오직 한 명만 예수님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아홉 명이 악한 사람들이라 오지 않은 게 아닙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가족에게 갔거나 너무 흥분해서 다른 데로 갔을 텐데, 딱 한 명,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를 바라보시며 영혼의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열 명이 모두 불치병인 나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했고 예수님의 권능을 체험했지만, 권능을 체험했다고 진짜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기적을 체험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체험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딱 한 명만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세워졌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낫게 해주셨다.” “주님이 내 문제를 풀어주셨다.”라고 간증하며 놀라운 체험을 한 것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그것을 넘어 그것을 해주신 분이신 주님께 나아가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그것이 참된 믿음이고 그것이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감동적인 교훈을 듣고 동의하는 것이나 은혜받았습니다.” 하고 끝나는 게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놀라운 종교적 체험을 통해 몸이 낫거나 기적을 체험했을 때, 전인격과 가족과의 관계와 사회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자리에 머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놀라운 교훈과 체험을 통해 예수님께로 나아가 살아 계신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으며 그분을 알아가고, 닮아가고, 사랑하고, 그분을 삶에서 따라가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교훈만 보면 기독교, 유교, 불교, 이슬람이 비슷해 보입니다. 악하게 하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그런 윤리와 도덕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윤리적,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지, 윤리적, 도덕적으로 살아서 어떤 경지에 올라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그분을 담는 윤리, 도덕이어야 참된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결과로 나오는 것이지, 그런 것을 행했다고 구원에 이르거나 어떤 경지에 오르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그와 같은 성도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정말로 믿고 따르는 사람의 삶입니다. 종교적인 체험만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의 핵심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신 예수를 믿고 따르고 닮고 사랑하며, 모든 삶의 현장에서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좋은 교훈에 감동하며 은혜받았다고 하고, 아무리 놀라운 종교적 체험을 했다고 해도, 진정한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그 귀한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고 사귀고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을 닮고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이 나에게 누구신가, 이것이 가장 핵심입니다.

 

그동안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 오셨습니까? 연세가 좀 있으신 분들, 특히 미국에 오래 전에 오신 분들은 많이 고생하시고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외국 땅에서 이 정도로 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열심히 해서 어떤 업적을 이루었을 때 어떤 마음이 드셨습니까? 뭔가 중요한 일에 성공했을 때, 뭔가를 성취했을 때 내 인생이 정말 보람되고 아주 의미 있는 인생이 되었습니까? 물론 어떤 중요한 일, 어려운 일을 성취했다는 것은 참 굉장한 일입니다. 아주 참 잘한 일이고,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했다고 내 인생이 더 고귀한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면 인생을 살면 살수록 뭔가를 해냄으로써 뭔가를 이름으로써 뭔가를 성취함으로써 내 인생이 더 보람되고 행복하고 가치 있는 인생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 느끼지 않습니까? 만약에 아닌데? 그걸 잘해서 나는 정말 보람되고 행복한 인생인데.라고 하며 거기에 머물고 계신다면, 사실은 속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할 때 세상에서는 혹시 좀 알아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어떤 성취를 이루었다고 내 인생이 별로 안 좋았는데 지금 좋아진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 정말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뭔가를 성취하는 것은 세상에서 의미 있는 일이지만, 우리가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떠한지의 중요함을 깨닫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인생이 정말 아름다운 인생이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내가 이것만 되면 좋겠다.’ 하며 그것을 추구합니다. 어떤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또 어떤 사업을 하기 위해서 추구합니다. 들어가서는 또 어느 위치에 올라가고, 사업도 어느 궤도에 올라가고, 정말 성공하기도 합니다. ‘내가 저 위치에만 올라가면 정말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했는데, 막상 올라가 보니까 잠깐은 행복하지만 그것이 지속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아마 다 경험했을 것입니다.

 

내가 저걸 꼭 갖고 싶다.’라고 해서 그것을 가지게 됐는데, 그것을 꼭 소유하고 성취해야 보람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또한 경험하지 않습니까? 정말 하나님 사랑을 알고, 주님을 기뻐하면서 마음껏 사랑하고 축복하는 만남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값지고 복된 삶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관계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런 관계를 우리가 세우고 살게 하시기 위해서 보잘것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우리와 이렇게 사귀어주셨으며, 또 당신을 알아가면서 살아가도록 하신 그 신앙의 핵심을 우리가 깨닫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본문은 당시 사람들이 산상설교의 내용에도 감동을 받았지만,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권세에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어디에 초점을 두어야 할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팔복으로 시작하셨는데, 팔복 중 마지막 여덟 번째 복을 가르치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5:11)

 

주님은 내가 말하는 이 교훈 때문에 핍박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하지 않으셨고, ‘이 교훈을 따라 순종하고 말씀대로 살려 하다가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나로 말미암아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자리에 계실 때 그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다면, 아무리 탁월하고 놀라운 가르침에 동의하고 은혜받았다고 해도 아직 핵심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격적이고 체험적으로 만나 바르게 사랑하고 누리고 닮아가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아까 누가복음 17장에서 열 명의 나병 환자가 낳은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우리가 복음서를 쭉 읽다 보면 그런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또 다른 하나가 뭐냐 하면,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다가, 즉 하혈하다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짝 만짐으로써 치유 받은 여인 이야기입니다.

 

지금 수많은 인파가 밀고 당기며 엄청나게 사람이 많습니다. 근데 그 옆에 몰래 조용히 와서 예수님의 겉옷 자락을 살짝 만짐으로써 자기가 나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시고 그 여인이 와서 만진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러면서 두리번 두리번 하시며 누가 내 옷을 만졌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기가 막힙니다. ‘아니, 지금 밀고 당기고 인파가 엄청나게 많은데 누가 만졌냐니?’ 그때 제자들은 아마 ,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만졌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왜 예수님이 굳이 그 여인을 기다리십니까? 그 여인이 나와 스스로 고백하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때 그 여인이 두려워하면서 예수님 앞에 나와 자기가 그랬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병만 살짝 나아서 가기를 원하신 게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세워지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뭔가 어려움이 있으면 당연히 같이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했을 때 응답만 살짝 받고 가는 것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그런 기적과 응답을 통해 우리 주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세워지는 것을 원하시는 겁니다.

 

사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엄청난 돈을 내야 간신히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원하면 대통령을 만날 수 있습니까? 어느 나라든 대통령 욕은 아주 잘합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얼마나 비판을 많이 합니까? 그러나 이게 틀렸고 저게

틀렸다고 아무리 욕을 해도 그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니 거의 만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대통령을 맘대로 만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대통령과는 비교도 안 되는 높은 분이십니다. 온 우주 만물을 다 만드신 창조주이신데, 그분은 오히려 짐을 싸들고 와서 나를 만나겠다고 하십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유명한 사람들은 내가 있는 줄도 모릅니다. 내가 만나자고 하면 콧방귀 뀌고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제발 나와 좀 만나자.’라고 하신다는 게 도대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절대 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영광스러운 시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나와 말씀과 기도와 예배를 통해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는 게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평소에 욕을 하더라도 대통령이 나를 초대해서 나와 같이 만찬을 하고 싶다고 따로 부르면 안 가겠습니까? 그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입니까? 그런데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는 이 사실 앞에 우리는 겸손히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믿음은 예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졌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을 더욱 알고 사랑하려는 바른 신앙을 갖고 있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을 더욱 알고 사랑하려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그분을 닮아가고, 삶 속에서 그분과 동행하는 것, 특히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나는 그분의 종으로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3.   모든 것 위에 뛰어난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을 붙들라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복이라고 말하는 것들, 그러니까 자기와 자식이 잘되고, 돈 많이 벌고, 큰 업적을 이루고, 장수하고, 건강하고, 높은 지위와 신분을 갖는 것, 이런 것을 복이라 하지 않으시고 다른 복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팔복에서 본 것처럼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세상의 복과 완전히 다릅니다. 어떻게 박해받는 것이 복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한 번밖에 없는 짧은 생을 살고 있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금방 지나갑니까? 연세가 있으신 분들 앞에는 죄송한 표현이지만, 저도 이제 50대 중후반으로 가면서 , 인생이 너무 순식간에 지나고 짧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연세가 더 드신 분들은 더욱 그렇게 느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50대는 50마일로 가고, 60대는 60마일로, 80대는 80마일로 간다고 하는데, 정말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느껴집니다. 인생이 참 짧고 금방 지나갑니다.

 

우리는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놓고 치열하게 서로 싸우고 다투고 논쟁을 벌입니다. 교회에서도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라고 많이 말하지만, 지금 보면 그게 얼마나 부지 없는 일이었습니까? 인생에서도, 직장에서도, 사업에서도, 학교에서도, 이렇게 저렇게 서로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참 부지 없었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지금 그런 가운데 있다면, 조금만 지나면 내가 왜 그때 그랬을까? 그렇게 안 해도 되는 것을...’이라고 아마도 생각하게 되실 겁니다.

 

우리는 짧은 인생을 살고 있는데, 게다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그렇게 치열하게 열심히 살고 있지만, 그런 것들 중에 내가 죽은 다음에 가져갈 수 있는 게 얼마나 되는지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내가 죽어도 나와 함께 해줄 수 있는 게 지금 내가 하는 일 중에 얼마나 됩니까? 그걸 한번 우리가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도 나와 함께하며 영원히 남는 것, 그것이 바로 관계입니다. 우리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특히 우리가 함께 구원받은 성도로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과의 관계는 영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영원합니다. 바로 그것이 진짜 복이고, 그래서 그것을 위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인생의 목적을 두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 내가 하는 일을 통하여 바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매일매일 나아가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에게 다른 사명을 주셨고, 그러기에 우리는 각자 있는 곳에서 그 사명을 감당할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눈을 열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성도, 크리스천, 예수님의 제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 산상수훈을 통해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선생들과 다르게 가르치십니다. 그 당시 유대교 선생들은 자기보다 탁월하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권위를 가진 선생들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가르쳤습니다. 요즘에도 석사,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서 논문을 쓸 때 창의적인 결론을 내기 위해서 자기의 주장을 할뿐 아니라 자기 견해를 지지해 주는 유명한 사람들과 세계적인 석학들처럼 전문성을 인정받는 사람들의 의견을 인용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으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누가 그러는데 이렇다더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분 자체가 권위이시기 때문에 누구의 지지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그분은 권위와 권세가 있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하며 권세를 가지고 바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고라는 식으로 어떤 가능성이나 가정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주 확신을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렇다.’라고 하면 요즘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건 반드시 이렇다.’라고 하면 아닐 수도 있다.’라고 자꾸 상대적으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 주제에 대해서 이런저런 주장이 있는데 이런저런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이 제일 타당하고 좋은 견해인 것 같다.’라고 해야 사람들이 합리적이라고 여기며 좋아합니다.

 

오래전에 제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 TV를 보시다가 가끔 분통을 터뜨리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TV에서 누군가가 인터뷰하는 것인데 무슨 그렇게 분통을 터뜨릴 게 있나 하며 같이 봤더니, ‘이번에 이렇게 돼서 참 좋습니다. 기분이 좋습니다.’라고 하거나 아니면 마음이 아주 안정됩니다.’라고 말하면 되는 것인데, ‘이렇게 되니까 좋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참 안정적인 것 같습니다.’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 마음을 표현하면서 왜 자꾸 확신을 못하고 ‘OO 같습니다.’ ‘OO 같습니다.’라고 하느냐면서 분통을 터뜨리신 겁니다.

 

가만 듣고 보니까 정말 그랬습니다. 좋으면 참 좋습니다.’라고 하면 될 것을, ‘좋은 것 같습니다.’라고 합니다. 확정적으로 말하는 데에 뭔가 다들 두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확정적으로 말하는 데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확정적으로 이건 이겁니다. 저건 저겁니다.’라고 하기가 조금 그러니까 이런 것 같습니다. 저런 것 같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심지어 자기감정까지도 그럽니다. 감정은 그냥 좋습니다또는 싫습니다하면 되는데, ‘싫은 것 같습니다. 좋은 것 같습니다.’라고 하니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복이다. 이게 진짜 복이다. 복인 것 같은 게 아니라 복이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은 복이 아니다.”라고 아주 확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권위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생명으로 가는 길 좁은 문, 좁은 길이다. 저것은 멸망으로 가는 넓은 문, 넓은 길이다.”라고 확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좁은 길 같고 넓은 길 같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선명하게 선을 그어서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분명히 가르치고 선포하셨습니다.

 

 

4.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 온전히 순종하라

 

산상수훈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또 다른 주님의 모습은 예수님이 좋은 선생으로 그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선생이 아무리 훌륭하고 존경할 만해도 제자들은 그 조언이나 가르침을 따를 때도 있고 또 따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좋은 선생으로서 우리 삶에 권면하고 조언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순종하라고 명령하고 요구하며 또 기대하는 주인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주님, 주님하는데, 그 말은 주인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지금 이 시대에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 선택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높이 세우고 자기 선택이 더 중요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 사실 요즘 시대정신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렇게 살면 망합니다.’라고 보통 많이들 생각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 말씀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자기 선택이 하나님 말씀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대라.”라고 하시는 내용을 산상수훈에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주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살면 말이 안 되고, 그렇게 살면 도태되며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아무리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아무리 이것이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내 방식대로 하는 게 더 낫다.’라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강요하시는 게 아닙니다.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이 담긴 결단과 결정을 존중하십니다. 사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아주 간단한 게,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그냥 로봇처럼 만드시면 됩니다. 명령하면 바로 순종하게 만드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특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게 하셨느냐고 많은 사람이 질문합니다. 그것을 안 두셨으면 인간이 지금까지도 계속 장수하고 무한하게 살며 영원할 텐데, 왜 그것을 만들어서 따먹게 하셨느냐는 겁니다. 그 답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 따먹게 할 수 있으셨습니다. 아니, 아예 나무를 안 두실 수도 있었고, 또 두셨어도 먹지 못하게 프로그램을 뇌 속에 해 놓을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셨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자발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강요된 순종, 복종, 굴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자발적으로 사랑에서 나와서 하는 순종을 원하십니다. 사랑은 언제나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자원해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역을 할 때도 이렇게 광고합니다. ‘이것이 필요합니다. 저것이 필요합니다.’ 특히 요즘 예배를 위한 기도 중보 기도를 같이 하실 분이 필요합니다. 그런 분을 찾습니다.”라고 광고합니다. 누구를 붙들고 강압적으로 당신은 이것을 안 하면 우리 교회에서 멤버십을 파버리겠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순종은 자발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강제적으로 의지를 꺾고 복종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제직회를 할 때도 많은 직분자들이 안 나오십니다. 그래도 안 자릅니다. 왜냐? 자발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다 잘라 버린다고 무서워서 나온다면 그게 무슨 진짜 순종이겠습니까? 그게 무슨 진짜 사역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 여기서 계속 말씀하시는 것도 이렇게 훌륭한 교훈을 말씀하셨는데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부터가 벌써 자발적으로 이 땅에 오셔서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종이 되어 주셨습니다. 자격 없고 허물 많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주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순종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받아들여도 되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조언이나 권면을 사실은 듣고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고 순종하며 말씀으로 인하여 자기를 깨뜨리고 부정하고 순종하는 자리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강요하지 않으시고, 힘이 있으신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꽉 붙들어서 안 하면 안 되게 하시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그것을 감당하기를, 그렇게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살아가는 동안 내 생각과 다르고 또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해석이 안 되는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나의 판단과 평가와 경험과 논리를 붙들고 하나님을 향해 어떻게 보통 반응하십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될 때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은 여전히 나의 순종을 받으셔야 할 뿐이라고 그 순간에도 인정하십니까? 아니면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믿어도 소용없다. 기도해도 소용없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마치 거짓말을 하시는 분인 것처럼 신앙 자체를 흔드는 그러한 방향으로 혹시라도 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주님께 순종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너무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우리 인생이 잘되고, 또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인생이 행복할 수 있는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는 솔직히 말해서 내 핏줄 속에 뭐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의사들도 여러 기계를 써서 스캔을 해도 잘 모를 때가 많은데, 하나님이 우리 몸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분은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러한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정말 고귀한 인생이 되는지 잘 아십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주시고 이렇게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요해서 억지로 하게 하지 않으시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하기를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세상에서는 인간의 능력이 무한하다고 하고 또 사람이 꿈을 꾸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자기 암시 같은 식으로 많이 이야기합니다. 또 과학기술 문명을 보라고 하면서 얼마나 눈부시게 발전시켰는지 그런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칭송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위대한 과학적인 발견을 이루고 또 엄청난 업적을 이룬 사람들도 사실 개인의 차원에서 불행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일이 꼬이고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사실 대부분 아닙니까? 아무리 앞에서 잘하더라도 실제 자기 삶에서 일이 잘 안 풀리는 경우, 자기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업적 같은 성취도 뭔가가 이렇게 탁탁 고리가 맞물려서 잘 풀려야 잘되는 것이지, 아무리 뛰어난 것을 해 놓았어도 누가 탁 막아 버리면 빛을 못 보는 겁니다. 사실 지금까지 역사에 그런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잘했는데도 정치적인 입김으로 막아 버리거나 권위로 눌러 버림으로써 세상에 빛을 못 경우가 빛을 본 경우보다 사실 더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스스로 씨름하고 자기가 해본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을 자기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반드시 외부에서 도움이 와야 합니다. 이 문제를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것이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때 바로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세상이 기대한 메시아는 백마 타고 와서 엄청나게 강한 군사력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유대 민족에게 독립을 가져다주는 그런 메시아(구원자)였지만, 예수님은 그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너무 연약하게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 죄와 허물과 비참함을 친히 당하심으로써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자격도 없지만 그분의 공로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 생명이 그분께 속한 것을 알고,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이렇게 나 자신을 드리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제가 마음에 와닿은 것은, 이렇게 깜짝 놀라고 아연실색하고 정말 경악하고 그렇게 충격을 받았는데, 그래서 예수님의 발아래 나와 무릎 꿇고 자기 인생을 드렸다는 기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엄청난 설교를 듣고 권위 있는 가르침과 교훈의 탁월함에 놀랐는데, 이들은 여전히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그냥 듣고 떠났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아니라 무리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있고, 또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닙니다. 그런데 정말 제자가 아니라 무리에 머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들과 똑같은 자리에 우리가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교회에는 오랫동안 다녔는데, 하나님 말씀을 듣고 충격받고 감격하고 눈물 흘리고 은혜받고 깨닫기도 했는데, 인생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유대 사회의 높은 위치에 있던 니고데모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3). 위로부터 한 번 더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산상수훈 말씀을 듣고도, 그 가르치는 권세에 깜짝 놀라고도,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고 그냥 원래대로 돌아가 버리는 그런 안타까운 사람이 한 명도 없기를 바랍니다. 열 명이 함께 불치병인 나병을 치유 받는 기적을 경험했지만, 한 명만 돌아오고 나머지 아홉 명은 주님과 아무 관계 없는 그런 자리로 그냥 돌아가 버리는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 여기에 한 명도 없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그 발아래 무릎 꿇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위로부터 참으로 거듭나는 삶을 통해 온전한 구원의 삶을 살며, 그래서 성도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아름다운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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