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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11일 주일예배

제자의 삶 산상수훈 11

너희 의가 더 낫지 못하면

(마태복음 517~20)

 

[들어가는 말]

 

미국에서 1960년대에 무려 50%의 역사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그 제목은 바로 <The Fugitive>(도망자)입니다. 한국에서도 방영했는데, 1980년대에 인기 드라마 도망자. 이제는 칼라로 보실 수 있습니다.”라는 홍보 문구와 함께 재방영되기도 했습니다.

 

주인공이 의사인데 아내를 살인했다는 누명을 쓰고 잡혀가다가 사고가 날 때 호송차에서 탈출하여 그 후 계속 도망 다니게 됩니다. 그러한 주인공과 그를 필사적으로 추적하는 형사 사이에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주인공이 수배자 명단에 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경찰의 추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 진짜 범인은 따로 있어서 그 진범이 잡히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나라에는 공소시효라는 게 있어서,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처벌할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살인에 대한 공소시효가 15년이었다가, 2007년에 25년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다 지난 2015년에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없어졌습니다.

 

미국에서는 주마다 범죄마다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징역 8년 형에 해당하는 중범죄의 공소시효는 6년이고, 징역 8년 미만의 범죄는 3년입니다. 그런데 살인과 같이 종신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공소시효가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의 율법은 폐기되었으니까 우리는 알아서 자유롭게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유가 있는 것은 맞는데, 마치 범죄를 저질러도 공소시효가 지났으니까 이제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구약시대 때 주어진 모든 율법이 영구적이고 공소시효가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은 언제나 불변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에 구약시대의 율법은 지키기가 어렵고 딱딱하고 권위적이라 지키기 어렵기에,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지키기 쉽게 복음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음이 결코 율법보다 더 지키기 쉬운 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처음 창조하셨을 때부터 시작해서 타락한 후에, 아니 지금까지도 변함 없이 그대로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이 폐기된 게 아닙니다. 계속 유효합니다. 그것을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1.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 파격적이고 과격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에는 지금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히 폐지하려고 한다고 오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7)

 

여기서 이제 율법과 선지자라는 것은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여기에 시도 들어가는데, 보통은 그냥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면 전체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폐하러 왔다는 것은 무효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제자들 중에도 예수님이 구약의 질서를 완전히 폐기하고 이제는 뭔가 좀 새로운 종교, 새로운 신앙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사실 구약 성경을 읽고 또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뭔가 좀 서로 맞지 않는다 이런 느낌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사실 오해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의 삶> 같은 공부가 중요한 것이, <말씀의 삶> 때는 짧은 기간(90일에서 100일 정도)에 성경 전체를 읽습니다. 물론 너무 빨리 많은 양을 읽다 보니까 마음에 남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혼자서 성경 통독을 하는 경우 굉장히 빨리 읽으시는 분들이 있는데, 읽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읽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읽고 그 말씀이 마음에 남아야 하는데, 짧은 기간 안에 너무 빨리 많은 양을 읽으면 남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의 삶> 시간에는 매주 자기가 읽은 분량 안에서 나에게 주신 말씀, 내 마음에 와닿은 말씀을 한 가지 뽑아서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같이 갖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냥 읽어봤다는 것만 남고, 내용은 남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쭉 읽어보면 한꺼번에 읽어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구약과 신약이 다른 성경이 아니라 같은 맥락으로 쭉 이어진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보통 성경에서 여기 읽고 저기 읽고 하며 여기 갔다 저기 갔다 할 때가 많습니다. 또 교회들을 보면 보통 이 본문을 설교했다가 저 본문을 설교했다 하는 설교자들이 많으니까 헷갈리기도 하고 또 뭔가 연결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한 성경의 책 순서는 시대별로 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문학적 양식에 따라서 구분해 놓은 것이지, 시간의 순서대로 배열해놓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의 삶>에서는 시간의 순서대로 쭉 읽는데, 그럴 때 더 이해가 잘 갑니다. 그래서 쭉 읽어보면 구약과 신약 말씀이 결코 다른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성경을 오해하는 것은 성경을 안 읽기 때문입니다. 읽지 않으니까 오해하는 것입니다. 한 번 쭉 읽어보십시오. 오해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을 잘 안 읽다 보니까 오해해서, 구약의 하나님은 막 죽이고 진멸하라 하시는 무서운 하나님, 분노하시는 하나님, 소멸하시는 불, 그 앞에 어떤 죄인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무서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반면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표현은 맞지 않는 겁니다. 사랑이 많으신 정도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냥 사랑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사랑으로 가득하신 분입니다. 너무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내어주신 분,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시대 때도 구약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다른 하나님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성내기를 좋아하고 조그만 죄도 참지 못하는 그런 고약한 분이 아니시고, 우리가 뭘 하든 무조건 용납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무섭게 공의로 심판하는 하나님은 말이 안 된다. 무조건 용납하시고 무조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죄를 지어도 다 포용하는 방향으로 자유주의와 진보주의가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먼저 인정하십니다. 다른 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 우리가 아는 성경과 많이 다르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당시 성경은 구약 성경이니까 그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차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구약의 질서를 다 무너뜨리고 뭔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이나, 무슨 혁명가 예수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오해한 겁니다. 새로운 신앙과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내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구약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하고 부족한 상태에 있는 것을 예수님이 채우시고 완성하시는 것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17절 말씀의 해석의 열쇠가 바로 18절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8)

 

일점일획이라는 것은 작은 점 하나, 획 하나를 의미합니다. 구약 히브리어 알파벳 가운데 가장 작은 점을 가리켜 요오드라고 부릅니다. 정말 작은 점을 탁 찍는 겁니다. 그리고 획을 긋는 것은 와우인데, 작게 일자로 죽 긋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조금도 변경 없이 그대로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실제로 지금도 문자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그대로 다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율법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크다고 생각하는 게 있는데, 크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키고 작다고 생각하는 것은 안 지키는 게 아니라 아주 작은 부분도 폐지되지 않고 다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들을 때는 아주 율법을 폐하러 온 사람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저번에 요한복음을 살펴볼 때 봤는데, 안식일 문제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큽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니까 안식일을 안 지키는 겁니다. 물론 회당에 가서 가르치시기도 했지만,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범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많이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면 안 되는데 병자들을 많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런 걸 보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시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고 하며 새로운 신앙을 주려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그분의 뜻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도 말씀하듯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율법이 알려주지 않았으면 이게 죄인지도 몰랐는데, 율법에서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을 하라.’ 하니까 , 이걸 하면 죄구나. 저걸 안 하면 죄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처음 인간을 만드셨을 때부터 하나님은 인간을 향한 분명한 뜻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 뜻은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나를 보고 하나님을 보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만드신 겁니다. 지금도 그 뜻은 똑같습니다. 나의 삶을 통해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바로 그것이 율법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입니다. 그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 그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 인간을 처음 만드셨을 때부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인데, 죄로 인하여 타락함으로 그것이 다 깨지고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노릇 하던 것을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건져내시고, 출애굽 한 이후에 율법을 주시며 이렇게 삶으로써 너희는 내 백성이고 내가 너희 하나님인 것을 이 땅에 드러내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범죄 후에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을 약 BC 1,500년경으로 보는데, 지금은 약 3,500년이 흘렀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뜻은 똑같습니다. 율법을 주셨을 때나 지금이나,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나 지금이나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이 땅에 드러내는 것이 그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존귀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가 존귀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며, 또 그렇게 살지 못하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신 것은 무슨 종교가 아닙니다. 무슨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존귀한 삶을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격적인 삶, 존귀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질 때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사랑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아까 1부 영어예배 때 김현철 목사님이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85년 동안 연구한 프로젝트가 있다고 합니다.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 이것을 무려 85년에 걸쳐서 연구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첫 연구진은 이미 죽었을 텐데 계속 다른 사람들이 이어가면서 연구한 것입니다.

 

무려 85년 동안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를 연구했는데, 돈이 아니었습니다. 성공도 아니었습니다. 높은 지위도 아니었습니다. 뭔가 엄청난 업적을 이루고 성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 놀랍게도 연구 결과가 성경과 똑같았습니다. 관계였습니다. 물론 거기서 조사했을 때의 관계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야기하지만, 성경이 학문적으로도 맞는다는 것이 그대로 증명되지 않습니까?

 

이전에도 많이 보았고 <생명의 삶> 공부 때도 항상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제일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그것을 한 단어로 이야기하면 관계입니다. 사실은 성경 전체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관계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세우나, 어떻게 하면 이웃과의 관계를 잘 세우나? 이것이 전체 성경의 요약입니다. 십계명과 율법의 요약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 이것이 우리 성경 전체의 핵심입니다. 이 관계가 좋으면 행복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은 당연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 세워져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채우고 이웃에게로 흘러가는 삶을 살 때 인생이 행복합니다. 여러분, 행복을 다른 데서 자꾸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채워서 그것이 이웃을 향한 섬김과 희생의 사랑으로 흘러 나갈 때 내 인생이 행복합니다. 뭘 자꾸 쌓아놓고 비싼 명품을 사서 행복해지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잠깐 행복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기쁨(joy)은 아닙니다. 관계에서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옵니다.

 

 

2.   율법의 완성

 

예수님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율법의 일점일획도 폐하여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 하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그렇게 문자적으로 지킨 사람들의 예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쓴 편지들이 여럿 있는데, 사도 바울이 많이 권면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 이 말씀을 보고 입을 내밀며 입맞춤하자고 하면서 이것이 성경적이라고 하면, 요즘은 잘못하면 성추행으로 잡혀갑니다. ‘이거 봐라. 성경에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했으니, 우리는 서로 막 뽀뽀해야 한다.’라고 하면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크게 만들어서 거기에 자기 이름을 적고 그것을 매일 지고 가는 사람들이 진짜로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몇 바퀴 교회를 돕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고 싶으십니까?

 

또한 예수님은 전도를 위해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시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전대, 즉 요즘으로 하면 지갑을 갖고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더 많이 갖고 가지 말라는 말씀인데,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다고 전도하러 나갈 때 지갑을 찢어버리고 나간 그런 사람들이 진짜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며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핵심은 거룩한입니다. 입맞춤이 아닙니다. 성추행, 성폭행이 무슨 거룩한 겁니까?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사할 때 건성으로 아무렇게나 하지 말고 마음을 실어서 인사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하늘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할 때 왜 굳이 사랑의 눈길로 서로 쳐다보고 축복하면서 하시라고 하겠습니까? 건성으로 하지 말라는 겁니다.

 

성경에는 prescription이 있고 description 있다고 했는데, 즉 처방이 있고 묘사가 있습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에서 처방은 뭡니까? , 원리, 원칙, 명령은 뭡니까? 전심을 다해 서로를 환영하라는 것입니다. 대충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는 것은 자기 생각, 자기 감정, 자기 야망을 죽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그 길에 고난이 오더라도 끝까지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또 전대를 가지지 말고 나가라는 것도, 차비나 다른 비용을 계산하고 머리를 굴리면서 여기는 얼마 들고 여기는 얼마 든다.’라고 따져 가면서 하지 말고, 정말 그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진짜 한 푼도 가져가지 말라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돈을 의지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서 전도하라는 겁니다. 특히 단기선교 나갈 때 그렇습니다. 선교하러 가서 돈을 계산하고 의지하며 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겁니다. 그랬을 때 정말 하나님이 역사해 주신 간증들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먼저 비용부터 개선하고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결국 율법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실천하는 삶, 특히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구약의 의식법은 예수님을 통해 폐지된 것이 맞습니다. 우리가 죄 씻음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거기로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기 가도 지금 제사를 드릴 성전은 없습니다. 옛 성전 터에는 지금 이슬람교 사원만이 서 있습니다.

 

그런 게 율법의 폐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모든 제사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와 하나님의 원수 된 것이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더 이상 그렇게 짐승을 잡고 구약식의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러한 원수 된 관계가 예수님을 통해서 뚫렸기 때문입니다. 제사 때 양을 잡아 드렸는데, 예수님이 친히 어린 양이 되셔서 이제 모든 제사를 다 끝내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하면 더 이상 그런 구약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편안하게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 때는 제사가 정말 무서운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제사장이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섬길 때 죽을지도 몰라 벌벌 떨면서 했었는데, 예수님이 그런 것을 이제 다 끝내시고 예수님을 통해 마음껏 하나님 앞에 나가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쫙 찢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님을 통해 아무나 하나님께 다 나아갈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구약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은 늘 불안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자꾸 하라고 하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예를 들어, 지금 돈이 100달러 정도 있는 사람에게 100만 달러의 빚을 진 것을 갚으라고 하면 어떻게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때는 둘 중 하나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100달러밖에 없는데 어떻게 갚겠습니까? 그러니까 돈을 갚지 못하는 것을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전전긍긍하면서 갚아야 되는데, 갚아야 되는데...’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선택은, ‘어차피 내가 어떻게 갚아? 그냥 배 째라.’ 하는 식으로 있는 돈도 자기를 위해 그냥 다 쓰는 겁니다. 자기 쾌락을 위해서 마음껏 먹고 마시며 나는 갚을 돈이 없다.’라고 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중 정직한 사람은 당연히 미안한 마음으로 평생 자기가 먹고 싶은 것도 사 먹지 못하고 입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도 사지 못한 채 항상 미안해하면서 갚아야 하는데 내가 못 갚네.’라고 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구약시대가 바로 그런 식이었습니다. 자기 죄에 대해 겁이 나니까 벌벌 떨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러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 빚을 갚을까?’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사실은 다수가 아니라 소수였고, 어차피 못 갚을 것이니 그냥 알아서 살자고 하며 잠깐 제사만 드리고 나머지는 다 자기가 알아서 사는 사람들이 다수였습니다. 신앙의 양심이 조금이나마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내가 갚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나?’ 하며 늘 미안해하고 죄송해하고 떨면서 살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갚아야 하는데 못 갚는다고 항상 죄스럽게 사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율법을 무시하며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도 안 되겠으니까, 그 중간쯤에 타협점을 만들었습니다. 율법의 조항 중에서 어떤 것들을 열심히 지킴으로 이것을 지키면 율법을 다 지킨 것이라고 간주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요즘으로 하면 일종의 딜을 한 것이고, 딜 중에도 빅딜을 한 겁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존귀한 삶을 완전하게 살 수가 없으니까 자기들 나름대로 어떤 것은 우리가 강조하자고 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가 유대인들의 안식일인데, 이 안식일에 대해 성경에는 어떻게 지키라고 자세히 나와 있지 않으니까 그 규정을 아주 엄하고 자세하게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은 이렇게 지켜야 한다. 저렇게 지켜야 한다. 그리고 이것만 잘 지키면 다른 것들은 좀 못 지켜도 하나님이 봐주실 것이다.’라는 식으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제사를 열심히 드리면서, 나머지 시간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게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그런 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은혜 가운데 살면서 지금 우리는 구약의 유대인들의 안식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인 주일’(주님의 날)을 지킵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다 주일에 모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드리는 예배에 와서 한 시간여 정도 하나님께 예배하고 나서 이제 내 할 일은 다 했다.’고 하며 이 예배당을 떠나는 순간부터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면 구약시대에 그렇게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것만 지키면 다 지킨 거다.’라고 하면서 그것만 열심히 지키고 나머지는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딜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안식일을 정해놓고 그것만 지키는 그런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에게 완전한 삶을 살라고 하시고, 그렇지 못할 때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일단 인간으로 태어나면 살아야 할 존귀한 삶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삶이고, 그렇게 살지 못하면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죗값을 어떻게 다 치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존귀하고 거룩한 삶, 완전한 삶을 누가 살 수 있습니까? 안 되니까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완전하게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안에 들어오시면 예수님은 완전한 분이시고 완벽하게 존귀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시며 너는 완전한 사람이구나. 의인이구나.’ 이렇게 봐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전혀 의인이 아닌데, 의인이시며 완전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니까 하나님이 그 예수님을 보시고 너는 의롭다.’라고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종교적인 영역이 따로 있고 삶의 영역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삶 자체가 신앙이고 신앙이 삶입니다. 매일매일의 우리 삶은 분리되는 게 아닙니다. ‘종교적으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신자에게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야 그렇지 않지만, 믿는 사람이라면 그런 삶은 없습니다. 모든 삶이 하나입니다. 분리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전체에서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시지, 교회에서 예배할 때만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 삶 속에서는 영광 받기를 싫어하시는 게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라고 표현하신 구약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어떻게 다 지키겠습니까? 그런데 다 지키시는 예수님, 완전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보시고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키는 것으로 봐주시는 것입니다.

 

 

3.   큰 계명과 작은 계명

 

원래 하나님의 법인 구약은 다양한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야기로 되어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구약 성경은 많은 부분이 내러티브(narrative)로 되어 있습니다. 한편 레위기나 민수기 같은 책은 율법으로서, 법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시편처럼 시의 형태로 되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다양한 형식의 구약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게 되고 또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자기의 부족함과 죄성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랍비들은 구약을 몇백 개의 법률 조항으로 바꿔 버렸습니다. 말씀을 규칙으로 바꿔 버렸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조항마다 점수를 매겼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은 몇 점, 어떤 것은 몇 점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에서 1계명부터 4계명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이웃과의 관계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도 섬기지도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키라.” 같은 것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인데, 그것들에는 점수를 높게 매겼습니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윤리적인 조항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같은 것은 점수가 낮았습니다.

 

그러니까 더 중요한 계명이 있고 덜 중요한 계명이 있다고 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윤리적인 조항은 좀 덜해도 괜찮다고 된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과의 관계만 잘하면 점수가 확 만회되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대충 하면서 살아도 제사를 열심히 드리고 성실히 헌금을 한 겁니다. 그러면 점수가 확 올라가니까 자기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19)

 

바로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이 지극히 작은 것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랍비들이 이건 중요하다. 이건 덜 중요하다.’라고 점수를 매겨놓은 것 중 덜

중요해서 잘 안 지켜도 괜찮다는 식으로 점수를 낮게 책정해 놓은 것 중 하나라도 버리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두 잘하기를 원하시지, 그렇게 점수로 구분하여 매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종교적인 점수가 높은 것만 하고 점수가 낮은 것은 제대로 안 하는 삶이 아닙니다. 일관적인 삶, 변화된 삶을 통해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종류의 사람 둘이 있는데, 하나는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남을 가르칠 정도로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을 가르치는 자’, 즉 유대교 지도자들이 율법에서 중요한 것을 구분했을 때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 행위를 더하게 만들었지 진짜 신앙인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준 게 아니라, 종교적인 행위만 하고 삶은 엉망인 사람들만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천국에서 작다고 일컬음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그런 종교 행위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에게는 쌩쌩 찬바람이 불고 다른 사람들을 대할 줄도 모르고 섬길 줄도 모르고 사랑할 줄도 모르면서 나는 하나님을 잘 섬기니까 괜찮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이지 별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잘 믿는다면 그 사랑과 믿음이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계속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대로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친 자입니다. 그냥 가르치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행하며 가르친 자, 무엇보다 말씀이 자기에게 적용되어서 자기의 삶을 바꾸고 변화된 사람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정말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천국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 구원만 이야기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 의미도 물론 들어 있지만, 여기서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그런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 예수님이 세우고 계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제사를 드리고 성전에 매일 나가고 안식일을 잘 지켜도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이 얼마든지 종교적인 행위가 가능합니다.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인가를 생각하며 기도해 보고 하나님, 이렇게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하는 겁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이 해라’, ‘하지 말아라하시는 경우는 사실 별로 없지만, 그럴 때 뭔가 마음에 이렇게 하면 괜찮을 것 같다.’라는 마음이 들면서 나가십니까? 아니면 그냥 내가 알아서 합니까?

 

어떤 때는 하나님이 이건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은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냥 뭐 어때? 내가 좋아하는데 그냥 하지.’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또 반대로 이건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것 같은데?’라고 하면서도 하기 힘들고 귀찮으니까 하지 말지.’라고 하십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예배하고 난 다음에 나가서 운동도 하고 쇼핑도 가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합니다. 그런 것을 전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잘 드리고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예배를 안 드리면 찜찜하고 뭔가 벌 받을 것 같으니까 일단 걸쳐놓고 그다음에 내가 원하는 대로 다 산다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신종 유대주의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놀랍게도 가르치는 자들을 향해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많이 변한 자가 큰 자입니다. 몇십 년을 믿었는데 별로 변한 게 없고 똑같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천국 백성은 천국 백성인데 구원을 못 받았다.’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런데 작은 자라고 하십니다.

 

 

4.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

 

예수님 당시 최고 수준의 종교성을 보여주던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서기관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20)

 

이것을 보며 구원받지 못했다고 해석하면 정확하지 않지만, 그것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천국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 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라고 하시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든 삶을 다 통틀어서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대부분 종파적으로 바리새파였는데, 일반적으로 바리새파라고 하면 요즘 우리 식으로 평신도를 이야기하고, ‘서기관은 그중에도 목회자급으로서 말씀을 필사하는 사람이고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 교사였습니다. 그냥 바리새파라고 할 때는 철저히 율법에 헌신한 평신도를 가리켰고, 삶 전체가 종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종교적인 사람인 서기관은 율법의 지식을 가지고 가르치는 율법 전문가입니다.

 

그들은 모두 시간을 정해서 기도했고 십일조도 철저하게 드렸는데, 얼마나 철저했는지 박하와 향료나 채소의 십일조까지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종교적인 행위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생활 자체가 종교였습니다. 그들은 정말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천국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오직 한 길입니다. 우리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너희 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예배 참석 행위나 구제하는 행위나 선행 자체가 아니라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특히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자동차이고 하나님이 운전자이신 것처럼 하나님이 운전하시는 대로 차가 가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있는데 운전자가 원하는 대로 가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가면 어떻게 된 겁니까? 고장 난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보시고 오른쪽으로 가자. 왼쪽으로 가자.’ 하시는데 자동차가 그렇게 안 가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면 고장 난 겁니다. 인생이 망가진 겁니다. 그럼 고쳐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바른 생각을 품고 또 삶에 그것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내용들에서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사는 것을 설명하십니다. , 노하는 것, 간음하는 것, 맹세하는 것 등에 대해 설명을 쭉 해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뭔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저 자리에 올라가게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자리에 올라가는 것, 어느 학교에 가는 것, 어느 직장을 잡는 것, 돈을 얼마 버는 것 등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수단입니다.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헷갈릴 수가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천국을 이야기하니까 나는 그럼 구원을 못 받은 게 아닌가?’ 하고 헷갈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구원과 천국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후 죽으면 가는 곳을 말씀하신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의미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왜 천국을 이야기하십니까? ‘너희가 하나님 백성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너희 삶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있는 삶이냐?’라는 것을 지금 물어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영적이고 종교적인 행동을 다 해도 너희 마음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을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외치며 믿는다고 말하더라도 실제로 다스리는 존재가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입니다. 자기가 자기 삶을 다스리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 천국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부담되는 말씀일 수도 있고 또 무서운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나는 어떤 결정을 할 때 어떤 식으로 결정하나 잘 보시면 됩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대로 결정하며 나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가고 있는가? 하나님이 원하셔도 내가 하기 싫으면 안 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셔도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그런 삶입니까? 아니면 힘들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보자고 애쓰며 나아가고 있습니까? 이것을 우리가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리며 말씀도 함께 나누고, 삶 공부도 하고,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뭔지를 알아야 그 뜻대로 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예배하는 것이 우리 신앙에 너무나 중요하고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하니까 교회가 조롱받으며 비난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기대하시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 종교가 만들어내는 무슨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같은 수준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님이 만들어내시는 삶, 예수님이 보이는 바로 그러한 삶을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번 주 나의 삶 동안 정말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참된 믿음의 백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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