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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KJeAJSJ0HWk?t=245

 

 

20221127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39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사무엘하 191~15)

 

[들어가는 말]

 

18세기 스코틀랜드 문학가였던 월터 스콧(Walter Scott) 경이 있습니다. 그분이 쓴 유명한 소설이 있는데 <아이반호(Ivanhoe)>(1819)라는 소설입니다. 12세기 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역사 소설의 예를 보여 주었다는 극찬을 들었는데, 1952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제 기억에 이 영화가 가끔 티브이에 나왔던 것 같은데, 워낙 오래 된 클래식이라 안 보고 돌렸던 것 같습니다.

 

<아이반호>는 잉글랜드에서 노르만계 귀족이 영국 귀족사회를 압도하고 있던 시기에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며 남아 있던 앵글로색슨 계열 한 귀족 가문의 이야기입니다. 색슨계 주인공 아이반호의 윌프레드(Wilfred of Ivanhoe)는 노르만계 왕인 리처드 1세에게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의 아버지 세드릭은 자기 아들 윌프레드가 노르만계 왕에게 충성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데, 결국 윌프레드는 아버지로부터 절연을 당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제3차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난 1194년에 시작되며, 이때는 많은 십자군 기사들이 유럽에 남아 있을 때였습니다. 사자 왕 리처드가 십자군 전쟁에 나갔다가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붙잡히는데, 십자군 전쟁에 나간 형 리처드를 대신하여 섭정하던 존은 리처드가 인질로 잡히자 아예 왕위를 빼앗고 온갖 못된 짓을 다 하게 됩니다.

 

그 사이 아이반호의 윌프레드는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보석금을 마련하여 왕을 풀려나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존과 반역자들을 물리치고 리처드가 왕좌를 되찾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사이 리처드가 풀려나서 이리저리 다니며 색슨인들의 삶을 보면서 이해하게 되어 나중에 그들과 화해하고 색슨인들도 그를 왕으로 인정하며 받들게 된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소설에서는 왕위에서 물러났던 리처드 왕이 다시 왕위에 오른다는 이야기이지만, 실제로는 한 번 왕위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왕위를 되찾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과거 역사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쳤다가 압살롬이 죽은 후 다시 이스라엘의 왕으로 복귀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잠시 피했다가 다시 왕위에 오르는 게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잠시 수도인 예루살렘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압살롬을 새 왕으로 세우는 동시에 다윗을 폐위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쿠데타 때문에 잠깐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온 게 아닙니다. 아예 왕위를 빼앗기고 압살롬이 왕이라고 했다가, 압살롬이 죽은 후 다시 돌아온 상황입니다. 그래서 결코 다시 왕좌를 차지한 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오늘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다윗의 슬픔과 요압의 책망 (1~8)

 

1)  슬퍼하는 다윗 (1-4)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압살롬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승리의 기쁨이 아닌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을 잃은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1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2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3 그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1-3)

 

다윗의 슬픔은 승리와 왕위 복귀의 기쁨을 잊을 만큼 극도로 크고 깊은 것임을 여기서 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신하들이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슬픔에 잠기는데, 그래서 그 소식을 접한 부하들은 기뻐하지 못하고 가만히 성으로 들어갑니다. 사실 고대 전쟁에서 승리한 날에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엄청난 축제가 벌어지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지금도 전쟁에서 이기면 기뻐하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겨놓고 슬퍼하며 통곡하는 게 말이 됩니까?

 

요즘 월드컵 축구대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개최지인 카타르가 더워서 처음으로 겨울 월드컵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조별예선이 진행되고 있는데, 일방적으로 이기다 끝나면 기뻐하기는 기뻐하지만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01로 지고 있다가 21로 역전승을 거둔 경우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지고 있다가 이기거나, 동점이다가 몇 분 안 남기고 극적인 골을 터뜨리고 이긴 경우에는 정말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는데 아이고, 괜히 이겼다.” 하며 마구 통곡하고 슬퍼하면 그게 말이 됩니까? 물론 기쁨의 눈물은 있는데, 그게 아니라 이겨서 너무 슬프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라고 슬퍼하면 그게 정상이겠습니까?

 

다윗이 보이는 행동이 바로 그런 겁니다. 지금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기뻐해야지, 어떻게 슬퍼하며 무너집니까? 다윗 왕의 슬픔은 전쟁에서 돌아오는 군사들에게도 신속하게 퍼져서 그들은 마치 패잔병과 같이 사기가 꺾여 성으로 조용히 들어갑니다(3). ‘우리가 뭘 잘못했나?’ 하면서 들어가는 겁니다.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4)

 

다윗은 왕이었지만 동시에 아버지였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잃고 나서 이렇게 슬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왕으로서의 책임을 망각한 행동입니다. 이 아들은 그냥 아들이 아니라 자기에게 반역하여 심지어 자기를 죽이려고 군대를 출동한 못된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었다고 이렇게 통곡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조금 슬퍼하고 그친 게 아니라 계속해서 멈출 줄 모르고 슬퍼합니다. 처음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위층으로 올라가서 울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18:33) 하며 울었습니다.

 

이건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자기가 대신 죽었더라면 좋았겠다니, 이게 왕이 할 말입니까? 그런 자기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군사들이 있는데, 그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슬픔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정말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 위대한 다윗도 이럴 때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개인적인 슬픔 때문에 자기의 이런 행동이 부하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슬픔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위해 생명을 걸고 죽도록 싸워서 이기고 돌아온 군사들은 다윗이 그렇게 극도로 슬퍼하며 통곡하는 것을 보고 자기들이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기고 돌아와서 우리가 이겼습니다!”라고 하는데 갑자기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대신 죽었더면...” 이러고 있으니까 이기고 온 군사들의 사기가 얼마나 꺾이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이 머물던 마하나임 성의 분위기는 승리로 인하여 대대적인 축제가 벌어져야 마땅했지만, 통곡하는 다윗 때문에 마치 장례식장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장례식장에 가서 기쁘다. 잘 돌아가셨다.’라고 하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조용히 애도하고 같이 슬퍼하며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지금 승리했는데 그런 장례식 같은 분위기가 된 것입니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목숨 걸고 싸워 이기고 돌아온 군인들은 승전가를 울리며 입성한 것이 아니라, 마치 지고 온 것처럼 부끄러워서 슬며시 성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지나친 슬픔 표현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의 표현입니다. 물론 아들이 죽어서 슬픈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는 반역자입니다. 다윗의 모든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을 위기에 빠뜨린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고 해서 이렇게 하다니, 이것은 한 아들의 아버지가 아닌 한 나라의 왕으로서의 공적인 책임을 망각한 데서 오는 아주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런데 다윗만 그런 게 아닙니다. 다윗도 이렇게 된다면, 우리 중에 누가 이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우리도 무슨 일이 탁 벌어질 때 이렇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다윗도 무너졌는데 우리가 안 무너지겠습니까? 그래서 평소에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을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의 신실함을 믿는 믿음으로 다스리고 통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쉽지 않습니다. 사실 감정이라는 것은 참 아름다운 것입니다. 음악이나 미술이나 시를 보면 그것이 감정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감정은 아름다운 것인데, 감정이 상하면 지옥이 되어 버립니다. 감정이 아름답게 표현되면 천국인데, 상한 감정이 되면 지옥 같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감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감정이 이기적으로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어야겠습니다. 진리를 아는 거듭난 이성이 감정을 다스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화가 나면 천국도 안 가겠다고 합니다. 분이 나면 천국에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분이 풀리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이끄는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자신의 감정을 진리로 복종시켜서 하나님의 나라 지도자로서의 일을 하는 데 차질을 빚지 않게 하는 게 필요합니다. 누구라도 이렇게 될 수 있지만, 그럴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훈련하는 게 필요합니다. 훈련되어 있으면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마음을 잘 다스리는 법을 평소에 훈련해야겠습니다.

 

 

2)  슬퍼하는 다윗을 책망하는 요압 (5-8)

 

요압은 다윗이 자신들과 부하들이 생명을 걸고 싸워서 거둔 승리를 기뻐하기는커녕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겨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에게 달려가 왕의 부당한 행동을 직설적으로 책망합니다.

 

“5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6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7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5-7)

 

이 얼마나 통렬하게 왕을 꾸짖고 있습니까. 요압은 다윗의 조카이자 부하인데, 다윗의 도망자 시절부터 계속 함께했던 사람이며 군대 장관입니다. 요압은 아주 묘한 사람입니다. 어떤 때는 아주 잘하는 것 같다가도, 또 어떤 때는 비열하고 음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압의 책망은 구구절절 맞는 말 아닙니까. 다윗은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반역죄를 저지른 아들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 감정보다 반역자를 무찌르고 승리한 군사들을 먼저 생각했어야 당연합니다. 아들은 아들이지만 반역자입니다. 그러니까 아들로 볼 게 아니라 반역자로 봐야 하는데, 원수를 무찌른 군사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요압의 책망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왕을 위해 싸운 군사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이 목숨 걸고 싸워서 왕과 그의 아내들과 자식들과 후궁들의 목숨을 구했는데, 어떻게 왕은 그들의 영웅적인 행동을 부끄럽게 만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5).

 

둘째, 왕은 자신의 군대가 패하고 차라리 압살롬이 승리하기를 원했던 것 같은 이적행위를 삼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6). 왕인데 이적행위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진짜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극도로 슬퍼하는 것을 통해 승리하고 돌아온 부하들에게 그런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왕에게 누가 또 충성하려 하겠습니까? 지금 군사들은 다윗을 위해 싸워 이기고 돌아왔는데, 마치 왕은 자기들이 이기지 말고 그냥 패하여 죽기를 원했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셋째, 왕은 지금 당장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군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지 않으면 또 다른 반란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7). 여기서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라고 말하는데, 이전에 다윗이 도망자 시절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그런데 반역을 진압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군인들이 낙심하여 다윗을 떠나고 백성들의 민심이 동요된 후에는 다윗이 왕위를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이것은 안 하면 안 된다.’라고 협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 사람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간단히 되어 있지만, 왕이 슬퍼하며 통곡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요압이 그대로 들어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군사들을 살피고 백성들을 살피며 그들이 동요하는 민심을 살피고 온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 큰일 났구나.’ 하며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빨리 왕이 사람들의 마음을 수습하지 않으면 그들이 다 떠나고 또 다른 반역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다윗처럼 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라도 순간적으로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이렇게 슬픔에 빠지면 논리적이나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가끔 그런 말을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아니, 사람이 어떻게 저래?’ 그러나 그것을 거꾸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니까 저러지.’ 사람이 아니면 저러겠습니까? 하나님이라면, 천사라면 저러겠습니까? 사람이니까 저러는 겁니다.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인간이니까 저럴 수 있는 겁니다.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악하면 문제가 있지만, 잘하다 갑자기 잠수 타고, 연락이 안 되고, 안 보이고, 거꾸로 가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이 어떻게 저러냐?’가 아니라 사람이니까 저러지.’라고 하며 기도하는 게 필요합니다. 기도하면서 권면하는 겁니다. 내치고 배척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니까 저럴 수 있지. 순간적으로 뭔가 힘든 일이 있나 보다.’라고 하며 다가가고, 그쪽에서 차단하면 일단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열리고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내쳐버리면 다시 돌아오는 길이 막히는 겁니다.

 

그리고 특히 그런 경우가 생길 때는 누군가가 옆에서 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런 것이 교회이며, 주님이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다 연약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 중에 나는 완벽한 인간이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한다면 거짓말이나 허풍밖에 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슬픔이나 어려움을 당했을 때는 이렇게 감정적으로 무너질 수가 있는 겁니다. 다윗도 무너졌는데 우리 중에 나는 절대 안 무너진다.’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연약해서 쓰러지고 무너질 때가 있지만, 그때 옆에서 잡아줄 수 있는 형제자매, 믿음의 공동체가 필요한 겁니다.

 

내가 힘들 때는 다른 형제자매가 나를 붙들어주고, 다른 형제자매가 힘들 때는 내가 붙들어주며 서로가 서로를 붙들어주는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 일을 하라고 우리 각자에게 주신 것이 성령의 은사입니다. 나에게는 A라는 은사를 주셔서 다른 사람을 섬기게 하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B라는 은사와 C라는 은사를 주셔서 나를 섬기게 하셔서, 서로가 서로를 섬기도록 묶어주신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생활을 충실하게 해야 하고, 목장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더 친밀한 공동체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마음을 나누고 또 서로를 위해주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요압의 경고를 들은 다윗은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린 것 같습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 이것이 얼마나 위기 상황인지를 깨달은 겁니다.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신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 (8)

 

다윗은 자기가 더 이상 아버지로서의 슬픔 때문에 계속 슬퍼할 수만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다시 한 군대를 지휘하며 나라를 이끄는 왕으로서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문으로 나가 군사들을 위로했고, 그를 본 군사들은 드디어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됩니다. ‘우리가 죄인인가? 어떻게 해야 하나? 떠나야 하나?’ 하며 고민할 때 왕이 성문에 앉아 계신다.”라는 말을 듣고 드디어 다시 돌아오셨구나.’ 하며 다시 모인 겁니다.

 

다윗이 요압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지만, 요압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요압이 없었으면 안 되었을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윗을 가장 힘들게 한 사람이 또 요압입니다. 그러니까 요압은 아주 특이한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인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지만 악할 때가 더 많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가장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 뜻대로 해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다윗 군대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장군이었지만, 자신의 적수는 비겁한 방식으로 살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넬을 몰래 살해하고, 또 나중에 자기를 대체한 아마사를 살해하는 비열한 살인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윗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했지만, 다윗의 마음을 가장 상하게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에게 요압은 친구인지 적인지 헷갈리는 존재였습니다.

 

혹시 이런 사람이 있으십니까? 너무 나에게 필요하고 나와 친한데 가장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 말입니다. 사실 친할수록 더 그렇습니다. 친하지 않으면 이럴 일이 없습니다. 부부간에, 가족 간에, 친구 간에, 또 교회에서도 친한 성도 간에 이럴 수 있습니다. 아주 좋고 나와 친하고 나에게 잘해주고 필요한 사람인데, 동시에 나에게 불편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요압을 통해 하나님은 다윗이 할 수 없는 심판을 행하기도 하십니다. 또 다윗을 왕의 자리에 돌아오게도 하십니다. 악한 요압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그도 사용하셔서 선한 뜻을 이루셨다는 겁니다.

 

만일 요압이 다윗의 마음대로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압살롬에 대한 심판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압살롬을 살리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반역자인데도 아들이라는 정에 이끌려서 그에게 잘 대해달라고 했습니다. 죽이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요압은 그를 그냥 죽여버렸습니다. 그것은 왕의 명령에 불복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도구로 쓰임 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참 미묘합니다. 또 요압이 아니었으면 다윗이 왕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도 힘들었을 겁니다.

 

우리도 주변에서 이렇게 좋은데도 힘든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때로는 그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가끔은 그들 때문에 또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참 친하기도 한데 미워하기도 하는 그런 관계입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주변 사람들이 항상 움직여준다면,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은 절대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도 불완전한 사람인데 다 내 뜻대로만 된다면, 나는 형편없는 사람으로 남고 맙니다. 또 내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어도 나를 돌이켜줄 사람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종종 불편한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의 잘못을 책망하시고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변에 요압 같은 사람이 있을 때, 도움이 되면서도 어떤 때는 불편한 그런 사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실 이때 요압이 책망하지 않았으면 감정만 무너지는 게 아니라 왕위가 다 무너지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왕위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요압의 책망을 듣고 마음을 돌이킴으로 잘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압 같은 사람이 때로는 나를 어렵게 하고 불편하게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나의 성화, 즉 내가 예수님을 닮아가며 신앙인으로 바른 시각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게 돕는 고마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내가 불편한 것이 꼭 하나님께 해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불편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고치시기 위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 가기 때문에 나를 불편하게 하시더라도 바른 시각을 갖게 하시는 것일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만약 사무엘하를 기록하는 사람이라면 다윗의 이런 약한 모습이 아니라 센 모습을 보여 주기를 원할 겁니다. 다윗이 살아 있었다면 자기의 약한 모습은 빼고 센 모습만 기록하라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성경의 인물들이 다 형편없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왜 성경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위대한 왕인데도 이런 형편없는 모습을 보인 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사람 때문에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의 그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할 때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잘해야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우리가 제대로 못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이뤄지지 않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강함도 사용하시지만 우리의 약함도 사용하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인데도 죄를 범하고 실수도 하고, 또 하나님 백성들인데도 서로 갈등하고 미워하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일부러 악을 일으키는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이 악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연약함이나 죄악이나 불편한 관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진다는 시각을 기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한 일이나 좋지 않은 일이 있어도 그러한데, 평범한 일상생활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단순합니까? 저는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고, 큐티하고, 또 아침 9시에 라이브영상 목회편지를 하고, 또 예배가 있으면 준비하고 모임이 있으면 그것을 합니다. 모든 것을 할 때 당연히 사명으로 하지만 가끔 생각이 드는 것이 너무 평범하다. 특별한 게 없다. 이런 걸 가지고 뭐가 되나? 이렇게 해서 주님의 일이 이뤄지나?’라는 것입니다.

 

매일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일하고, 직장이 없는 분들은 집에서 일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그러는데, 아주 평범합니다. 얼마나 일상적입니까? 그래서 내 인생은 이게 뭔가? 한국에서는 일도 하며 살았는데 여기서는 하는 것도 없고 너무 단순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여기서 오래 사신 분들은 내가 여기서 몇십 년 살았는데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나? 이렇게 살아온 게 뭐가 특별한가?’ 하며 답답할 수도 있고 안타까울 수도 있고 허무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그 매일의 삶이 별것 아니라고 느낄지라도 별 게 아닌 게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 평범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뤄가시는 것의 일부라는 겁니다. 내가 지금 평범하더라도 제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평범하지만 성실하게 매일 살아갈 때, 그 평범한 나의 일상생활을 통해 하나님은 구원 역사를 이뤄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한 때로는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악한 사람은 왜 이렇게 잘되나? 나는 잘 안 되는데.’라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의 정의와 진리가 이 땅에 서게 될 것을 믿으며 나아가는 겁니다. 대강절이 바로 그런 절기입니다.

 

대강절의 큰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어린 아기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어두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 그런데 너무나 연약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장군으로 오셔서 다 때려 부수고 내가 왕이다. 나를 믿어라.’라고 하셨으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너무나 연약하여 어른들의 보호가 꼭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아기로 오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반전입니다. 그런데 그 아기로 오신 그분이 구원자로서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놀라운 역사가 대강절의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지금 악이 다스리는 것 같고 힘이 센 사람들이 다스리는 것 같지만, 결국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를 기억하며 우리는 대강절을 지내는 겁니다.

 

우리 역시 다윗처럼 실수하고 죄를 짓고 갈등하고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삶을 통해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고야 마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눈을 주님께 고정시키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2.   예루살렘 귀환 준비 (9~15)

 

1)  변심했던 백성들의 돌이킴 (9-10)

 

“9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10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 (9-10)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무렵, 다윗을 왕좌에서 몰아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다시 다윗을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는 일을 위해 토론을 벌입니다. 자기들이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운 압살롬이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이라고 하니, 자기들이 압살롬을 왕으로 세웠는데 죽었으니까 다시 다윗을 왕으로 추대해서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자고 합니다.

 

그러니까 북쪽 열 지파는 압살롬을 왕으로 기름 부어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들에게 압살롬은 반란군 지도자가 아니라 왕이 된 겁니다. 단순히 쿠데타를 일으킨 수장이 아닙니다. 왕입니다. 압살롬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 말이 뭡니까? 그와 동시에 다윗을 폐위시켰다는 말입니다. 유다 한 지파 빼고는 모두 다윗을 폐위시키고 압살롬을 왕으로 세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유다도 안 한 게 아니라 독자적으로 압살롬 편에 착 붙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고민이 있습니다. 압살롬이 죽었다고 다윗이 자동으로 다시 왕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다시 왕위에 오르려면 이스라엘 지파들이 다시 다윗을 왕으로 추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다시 왕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전 백성의 공식적인 지지 선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기서 가만히 있지 말고 왕을 모셔 와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압살롬이 죽어서 반역의 리더가 죽었으니까 왕으로서 잠시 피신해 있다가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닙니다. 그들에게 다윗은 이미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왕은 압살롬이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을 다시 왕으로 세우자는 말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차원이 다른 말입니다.

 

 

2)  배반했던 유다 지파를 포용하는 다윗 (11-15)

 

“11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왕궁으로 도로 모셔 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12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 (11-12)

 

온 이스라엘이 다윗을 향한 태도를 적극적으로 보이지 못하고 있을 때, 유다 지파도 비슷한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유다 지파이니까 자기 친족인 유다 지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자신의 측근 중 가장 경건한 사람들인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보내서 그들이 다윗을 다시 모셔 오는 일에 적극성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태도를 지적합니다. 북쪽 지파들도 이렇게 공을 세우려고 의논하는데, 다윗 자신의 혈육인 유다 지파는 왜 가만히 있느냐는 겁니다.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는데, 헤브론이 유다 지파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기들이 다윗을 반역했는데 전세가 역전되고 다 끝났습니다. 그때 전적으로 다시 다윗을 환영하기가 껄끄러운 상황입니다. 자기들이 저지른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역해놓고 어떻게 다시 왕이시여하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헤브론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압살롬의 반역에 동조한 것이라고 자기는 생각한다는 것을 넌지시 그들에게 내비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헤브론 사람들에게 다윗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는 명분을 주어서, 그들의 불편한 마음을 해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13)

 

이제 다윗은 노골적으로 압살롬 편에 섰던 사람들에게도 소위 햇볕정책을 펼칩니다. 압살롬 군대의 총사령관이었던 아마사를 요압의 자리에 세우겠다는 겁니다. 아마사도 유다 지파이고 다윗의 친족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정치적인 의도가 아주 짙습니다. 먼저 압살롬을 도왔던 북쪽 지파들의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킴으로써, 더 이상의 동요를 막겠다는 의도입니다.

 

동시에 다윗은 자기에게 큰 도움이 되면서도 자기를 힘들게 하는 요압을 견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마사를 총사령관에 세움으로 그렇게 합니다. 요압과 아마사는 사촌인데 아마사를 총사령관에 임명합니다.

 

사실 아마사도 다윗의 조카로 압살롬 군대의 총사령관이었습니다. 반역 군대의 총사령관이었던 사람을 자기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요압 대신 세우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를 따랐던 유다 지파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내고 반역했던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시 얻겠다는 겁니다. 게다가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했던 자신의 명령에 불복해서 압살롬을 죽여 버린 요압에 대한 징계 차원이기도 합니다.

 

“14 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같이 기울게 하매 그들이 왕께 전갈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께서는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15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길갈로 오니라” (14-15)

 

유다 지파에 대한 다윗의 제안은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압살롬을 따라 반역했던 죄를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역의 선두에 섰던 아마사를 군지휘관(총사령관)으로 삼겠다는 것은 유다 지파와 압살롬 편에 섰던 모든 사람에게 환영할 만한 소식이었습니다.

 

다윗의 제안을 받아들인 유다 지파는 다윗이 돌아오는 것을 신속하게 돕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단 너머 길갈까지 와서 다윗 일행이 요단을 건널 수 있게 돕습니다. 길갈은 여호수아 정복 전쟁 때 캠프를 쳤던 곳이고,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이 왕위에 오른 곳입니다. 거기서 다시 다윗을 왕위에 올리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시대에 아주 좋았는데 사람들이 배반하고 압살롬을 왕으로 세워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다 압살롬이 죽고 나니까 다시 다윗 왕에게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왔다 갔다 합니까? 사람은 항상 이렇습니다. 왔다 갔다 합니다. 변덕이 심하고, 배신도 했다가 충성도 했다가 그럽니다.

 

그런데 바로 이게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전적인 충성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랬다저랬다, 배신도 했다가 충성도 하면서 오락가락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와 구원의 감격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에게 참 평안과 구원을 베풀어 줄 수 없음을 깨달으면서, 우리의 눈을 항상 하나님께 고정하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배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이 공동체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매일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격려하며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가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대강절을 시작하면서, 세상은 강한 자가 다스리는 것 같고 악이 득세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뜻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뤄진다는 것, 너무나 미미해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이뤄진다는 것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온전히 왕으로 모시고 승리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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