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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22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22

믿는 것 같았지만 믿지 않은 사람들

(사도행전 737~53)

 

[들어가는 말]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특별히 기억나는 만남이 있으실 겁니다. 저에게도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던 몇 번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태어날 때 부모님과의 만남이 있고, 그 후 배우자의 만남도 있지만, 어릴 때 학창시절에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님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목사님이셨는데, 바르게 목회하시고 강해설교를 열심히 하셨습니다. 그때 배운 대로 저도 지금껏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다니던 대학부에서 평신도 지도자의 본을 보여주셨던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입지전적인 인물이신데, 야간 대학을 나오시고 아주 어렵게 사시던 분입니다. 그런데 국비장학생으로 유학을 오셔서 나중에 세계적인 학자가 되시고 교수를 하셨습니다. 그 장로님이 대학부에 담당 장로로 오셔서 매주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제가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후 미국에 이민 와서 처음에 힘들었을 때 대학교에 편입했는데, 마침 거기에 유학을 오신 30대 초반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과의 만남이 제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 대학생들을 모아 성경공부를 하는데, 마침 그분을 만나서 그 목사님이 지도를 해주셨습니다. 왔다 갔다 모시고 다니며 좋은 대화를 했고 아주 좋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만남들이 있었던 사이사이를 생각해볼 때, 중고등부 학창시절에 교회를 다니던 친구들이 많았고 지금까지 연락을 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만남들 중에서 지금껏 신앙을 지키며 나아가는 친구들이 참으로 적습니다. 그때는 임원도 하며 열심히 했는데 지금은 아예 교회에 담을 쌓고 있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경에도 많이 있습니다. 믿음에 아주 근접하고 믿을 만했는데 끝끝내 믿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도 그랬고,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 역시 진리이신 예수님을 바로 앞에 두고도 결국 진리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와서 물었던 부자 청년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하셨을 때 근심하며 돌아간, 그래서 결국 믿지 못한,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믿는 줄 알았는데 안 믿은 경우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며 교육도 받고, 동고동락하면서 지냈으며, 재정까지 맡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결국은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오늘 본문이 이야기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수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오늘 스데반이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   광야 교회의 지도자 모세

 

1)  인생에서의 모든 만남들은 의미가 있다

 

스데반은 자신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고소를 당해서 그런지, 모세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 이야기에 비해서 아주 길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모세의 생애를 살펴보면, 크게 네 번에 걸쳐 사람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만한 획기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각각의 만남마다 그의 인생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모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그의 부모였습니다. 우리도 똑같지만, 그에게 특별했던 것은 그의 아버지 아므람과 어머니 요게벳은 레위 지파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신분은 이집트의 노예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노예인 부모 밑에서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사실은 강에 빠뜨려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이 바로의 딸인 이집트 공주였습니다. 역사적으로 투트모세 1세의 딸 핫셉수트인 이 공주가 갈대상자 안에 담겨 있던 히브리 아기 모세를 불쌍히 여겨 양자로 삼음으로써(물론 자신의 야심과 견제심리도 있었지만), 노예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신분 상승을 모세가 이루게 됩니다.

 

세 번째로 만난 것이 자기 동족입니다. 이집트 공주가 모세를 거두었지만, 거기에 누이가 있다가 젖을 먹일 유모를 구해드리겠다고 하여 그러라고 했을 때 자기 어머니를 붙여줍니다. 그래서 자기 어머니가 키워준 겁니다. 그러나 나중에 자기가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알고 동족을 돌아보려 했는데,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이 드러나서 그만 도망하고 맙니다.

 

네 번째 만남은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다가 우물가에서 만난 십보라라는 여인입니다. 그녀를 만나서 남편이 되고, 그곳에 정착하여 80세가 될 때까지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는 미디안 광야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아무 의미 없이 광야에서 양만 치다가 끝나 버렸을 그의 인생은 그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인하여 영원한 의미를 지닌 인생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이처럼 모세의 인생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모세의 인생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고대 이집트에서 태어난 모세가 이집트 사람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이스라엘 노예를 부모로 만났기 때문에, 그 상황은 아주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오히려 이스라엘 노예가 부모였기 때문에 그는 어머니 태에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지배자인 이집트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수많은 이집트의 우상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노예인 부모를 만났기 때문에 당시 상황에 의해 강에 버려질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나일 강에 버려졌기 때문에 마침 그때 나타난 이집트 공주를 양어머니로 만나, 바로의 왕궁에서 40년 동안 위대한 이집트 제국의 왕자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40세에 자기 동족을 도우려다가 졸지에 도망자가 되어서 도망침으로, 모세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갖고 있어도 세상의 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의 우물가에서 만난 십보라와 결혼하여 미디안 광야의 양치기가 됨으로써, 모세는 인생이란 나그네일 뿐이라고 하며 첫 번째 아들의 이름을 나그네라는 뜻의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두 번째 아들은 엘리에셀’(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지으면서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만 인생이 온전히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거듭남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마치 우연처럼 보이는 네 번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종 모세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입니까? 정말 길이 없고 다 끝난 것 같았는데, 하나님은 거기에 새로운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오히려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 모세를 이끄셨고 놀라운 하나님의 종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 후 그는 이집트와 홍해와 광야에서 40년 동안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36).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온전히 역사하신 것입니다. 아무 쓸모없어 보이던 모세의 삶, 아니면 이집트 왕자로 승승장구했다면 결국 이집트의 권력투쟁 속에서 사라져버렸을 인생이었을 텐데, 하나님 안에서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절망적이든 죽음의 상황이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2)  수많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7-38)

 

37절은 신명기 18:15의 인용입니다. 모세가 그때 이 말을 했는데, ‘나와 같은 선지자라는 것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말한 이 선지자를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40년 동안 힘들었던 광야 생활을 스데반이 광야 교회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교회(church)를 말하는 게 아니라 모임 또는 회중(assembly)을 말하는 것이지만, 광야에서의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 교회의 목회자로 세우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리더로서 한 일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말씀을 받고도 행하지 않은 데에 있는데, 그 내용이 뒤에 나옵니다. 결국 모세는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낸 리더로서, 목회자로서, 훈련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세에게 백성이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39-40)

 

스데반의 설교의 목적 중 하나는 모세를 이스라엘의 리더로, 선지자로, 훈련자로, 목회자로 세워주셨던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를 하나님이 세워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모세에게 복종하지 않고 불순종하며 거역하고 반역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었습니다. 불평불만을 가진 세력이 그들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완벽한 조직이 있습니까? 또 완벽한 교회가 있습니까? 여기서 다른 데로 이사를 가서 교회를 찾으실 때 완벽한 교회를 찾아보겠다고 하면 당연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점이 많이 있더라도, 약점도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조직이든지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인격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관점입니다. 내가 좋은 점을 볼 것인가, 나쁜 점을 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나쁜 점만 있는 조직이나 교회라면 안 되겠지만, 어디 곳이든 100%는 없고 다 섞여 있습니다. 인간관계, 교회,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좋은 점을 볼 것인가, 나쁜 점을 볼 것인가 하는 것이 인생의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항상 약점을 잡고 나쁜 점만 들추어내고 끄집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약점을 지적하면 얼마나 설득력이 있습니까? 그것을 큰 문제인 것처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관계를 파괴하게 됩니다. 그 모임을, 조직을, 교회를 파괴하게 됩니다.

 

이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는데, 교회에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아니다, 저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들어보면 둘 다 일리가 있습니다. 본인들이 관계를 파괴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닐 텐데, 결과적으로는 분열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쁜 점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도, 저렇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괜찮습니다. 그럼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까?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괜찮지만, 서로 내가 옳다하며 싸우는 게 아니라 서로의 차이점을 극복하고 이해하고 격려하고 좋은 점을 봐주면서 마음을 합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불평의 세력을 심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런 그룹들이 모이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모세를 비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세를 비판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과 불만과 원망을 한 사람들은 결국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모세가 산으로 기도하러 간 사이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을 똑똑히 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장자는 다 보호해주신 것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앞에는 홍해로 막혀 있고 뒤에는 이집트 왕 바로의 군대가 쫓아와서 갈 곳이 없는데, 그 엄청난 바다가 갈라지고 거기를 건넌, 정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일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만나가 내려 먹고 또 메추라기가 와서 먹는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아무 물도 없는 곳에 샘물이 터지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서 40년을 살았다는 것은 엄청난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해주셨음에도 조금만 불편해지니까 금방 원망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하냐?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얼마나 노예로 고생했습니까? 그런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지금 이 광야에서 그들은 자유인이고 더 낫습니다. 그런데도 애굽으로 돌아가서 노예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입니까?

 

그렇게 선동을 하는데, 사람들이 거기에 혹 합니다. ‘저 가나안 땅에 우리가 뭐 하러 가야 하느냐? 모세가 왜 우리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들었느냐?’ 하고 선동하니까 사람들이 거기에 쓱 넘어갑니다. 현실적인 고통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동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쉽게 동의를 해줍니다. 앞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 채 너무나 쉽게 거기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이 너무나 반역적인 것은,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선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을 걷어 금송아지를 만들고 흥분해서 거기에 절을 하며 이게 바로 우리를 인도한 신이다.’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 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통해 선택을 받았고, 약속을 받았고, 복을 받았습니다. 복의 근원, 제사장 민족으로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이집트의 압제와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었고, 특별히 홍해가 갈라지는 엄청난 기적을 경험함 백성입니다. 그들은 40년 동안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에서도 살았습니다. 생업이 불가능한 곳에서 사는 동안에도, 그들의 의복이 해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인도하심입니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조금 불편하니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자기들에게 이제 모세는 필요 없다고 합니다.

 

광야를 생각하면, 최악의 상황이라도 하나님만 함께 해주시면 그곳은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조건 속에서라도 하나님이 동행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광야는 정말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곳입니다. 며칠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40년을 살았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손길이 보호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손길만 있으면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이렇게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많은 약속과 복과 기적을 체험했지만,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조금만 힘들고 순간적으로 어려움에 부딪치면 원망하고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41)

 

인간은 형편없지만 또 신기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많은 축복을 경험하고 이렇게 많은 기적을 체험하며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순간순간 하나님이 인도해주셨는데, 인간은 그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않고, 조금만 불편함이 생기거나 자기 마음에 조금만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금방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심지어 이렇게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시면서 안타깝고 슬프고 마음이 아프신데, 이들은 너무 기뻐하며 좋아했습니다.

 

 

2.   가짜 신앙과 진짜 신앙

 

1)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은 가짜 신앙이다

 

스데반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렇게 인도해주셨는데 과연 너희들이 제대로 살았는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42-43)

 

하나님이 이렇게 물어보셨다는 겁니다. “40년 광야 생활 동안 너희를 보호했고 지켜주었는데, 너희가 정말 내게 희생제물을 드린 일이 있었느냐? 너희가 정말 예배를 드린 일이 있었느냐?” 희생과 제물을 안 드린 게 아니고 드렸는데, 거짓으로 또 형식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의 규정에 따라 형식상 제물을 드렸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사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형식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부분에 있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헌신하고 봉사하고 섬기고 남들을 돕는 것도, 겉으로 보이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은 겉만 보고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남들이 보기 좋게 슬쩍 속이고 꾸밀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겉모습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정말 받으실 만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헌신이고 봉사이고 예배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예배가 그냥 형식적인 것이었고 하라 하시니까 억지로 할 수 없이 한 것이었지, 마음의 중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예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하나님께 드린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 예배가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한 것이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이용한 겁니다. 자기들이 먹고 살려면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을 찾을 수가 없는데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니까 잘 보여야 만나를 주시지, 괜히 예배도 안 드리고 그러면 안 주실까봐 그렇습니다. 또 목말라서 물이 필요하니까 샘물이 터지게 하시는 하나님이 필요했습니다. 자기들이 광야에서 보호를 받아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이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런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격하시키는 신앙생활로 잘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에게는 진짜 감격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해도 만족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일은 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형식적이고 종교적인 것은 있는데, 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은 기쁨도 없고 보람도 없습니다. 그냥 주기를 바라고 받고,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관계만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 밭입니다. 네 가지 종류의 밭을 이야기하셨는데, 길 가, 돌짝밭, 가시덤불, 좋은 땅입니다. 그런데 가시덤불의 문제는, 종교적으로 형식적으로 예배, 헌금, 봉사 등 하는 건 다 하는데, 인생의 염려, 특히 재물의 염려 때문에 열매를 못 맺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평생 염려로 시작하고 염려로 끝납니다.

 

정말 하나님 중심으로 섬기며 예배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평생 염려에서 해방되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삶이 되고 맙니다. 항상 이거 어떡하지? 저거 어떡하지?’ 하다가 그냥 끝납니다. 진정한 예배, 진정한 헌신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내 마음을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지금 주일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크리스천이니까 어쩔 수 없이 일주일에 한 번은 가야 하니까 가는 것인지, 회비 내니까 가는 것처럼 오는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와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손해가 아니라 우리에게 큰 손해입니다.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기쁨이 없습니다. 아무 보람이나 만족이나 감격이 없습니다.

 

 

2)  진짜 신앙과 가짜 신앙을 가르는 기준은 희생이다

 

그렇다면 그런 잘못된 자세를 바꿀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희생입니다. 희생이 없는 신앙생활은 진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내가 지금 얼마나 희생하며 얼마나 손해를 보고 있는가? 내가 한 번도 손해를 보지 않았다면 진정한 헌신이 아닐 것입니다. 희생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면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시간을 희생해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시간을 내어 온 것도 희생입니다. 돈도 희생합니다. 교회에 오는 데 개스 값도 들고 헌금도 합니다. 그런 희생이 있는 게 예배인데, 그 정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정말로 내가 희생을 하고 있는가?

 

지금 전 세계적으로 문제인데, 믿는다고 하는 크리스천들의 신앙생활의 태도가 최소한만 하자는 것입니다. 아주 최소한으로 주일날 잠깐 왔다 가고 끝입니다. 나머지는 다 내 마음대로 합니다. 그럼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까? 전혀 기쁨이 없습니다. 누가 열심히 믿어보려고 하면 적당히 믿어라. 너무 빠지지 마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적당히 하는 신앙생활은 보람도 없고 감격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업을 하신다고 하면, 지금 하시는 사업을 적당히 해보십시오. 재미가 있습니까? 돈을 법니까? 혹시 운이 좋아서 돈을 벌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말 재미가 없습니다. 적당히 사업을 하면서 딴 생각을 합니다. ‘빨리 끝내고 가서 골프 쳐야 되는데. 빨리 가서 샤핑해야 하는데.’ 사업을 하는 게 재미가 없습니다.

 

직장생활도 똑같습니다. 몰입해서 일하지 말고 적당히 해보십시오. 하나도 보람이나 기쁨이 없습니다. 오히려 직장생활도 사업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거기에서 보람을 느끼고 기쁨을 느낍니다. ‘이거 진짜 내게 딱 맞는 직업이다. 너무 좋다.’ 하며 더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적당히 하는 사람은 정말 재미가 없습니다. ‘내가 언제 여기서 벗어나나?’ 하는 생각 밖에 없습니다.

 

교회 신앙생활도 똑같습니다. 적당히 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얼마나 보람도 없고 감격도 없습니까? 희생이 들어가고 헌신이 들어가야 그게 진짜 신앙생활이고, 그렇게 하면 손해 볼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쁨이 옵니다. 감격이 옵니다. 그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3)  진짜 신앙을 위하여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배의 핵심은 은혜 받는 게 아닙니다. 물론 은혜를 받아야 되는데, 은혜를 받고 결단하며 헌신을 하고 나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의 핵심은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그런데 결단만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결단하고 나가서 잊어버리면 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가서 훈련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말씀을 듣고 결단하며, 나가서 진짜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겁니다.

 

우리가 목장을 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다른 것을 하자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훈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일 중요하다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목장을 통해 정기적으로 하는 겁니다. 사람은 놓아두면 안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정기적으로 나를 끌어다 붙여 놓고 자꾸 섬기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도 가서 보고, 매번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도 들어주고, 내가 한마디 했는데 저쪽에서 피식 비웃으면 기분이 상하지만 그래도 또 하고, 그러면서 용서하는 법, 사랑하는 법을 진짜 배우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믿지 않는 분들을 주님께 인도해보자고 하고, 서로 기도하며 응답도 받고, 모르는 게 많다고 느낄 때 삶 공부를 들으며 배우고, 또 배운 것을 가지고 나가 실천하는 겁니다. 사랑하자고 배웠으면 사랑하는 방법 1, 2, 3을 배우고 끝나는 게 아니라, 나가서 진짜 사랑을 해보는 겁니다. 나가서 진짜 용서를 해보는 겁니다. 진짜 희생을 해보는 겁니다. 그런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생명의 삶>을 하신 분들이 의아해하실 수도 있는데, 로마서에서는 계속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행함이 없으면 안 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방인들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믿음으로 반응할 때 받는 것입니다.’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반면 야고보서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 쓴 것입니다. ‘당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아무 삶의 변화가 없고 행위가 없으면 그게 어디 믿는 거냐?’라고 하는 겁니다. 정말 믿는 사람이라면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행함은 구원받는 행함을 말하는 게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의 행동을 말하는 겁니다. 구원받았으면 행동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행동이 없고 아무 변화가 없다면 그게 어디 구원받은 것이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구원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들이라면 이런 희생, 사랑, 용서, 헌신이 우리 삶에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도 닦는 크리스천 신앙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주셨습니다. 교회에 와서 함께 그 사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전체가 다 같이 하기가 힘드니까 우리가 목장별로 모여서 그 섬김과 사랑을 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훈련 없이 어떻게 우리에게서 사랑이 쑥쑥 나오겠습니까? 전혀 연습도 안 하는 사람이 국가대표가 되겠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훈련이 매일매일 필요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훈련하고, 같이 모여서도 훈련합니다. 특히 같이 모여 사랑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4)  우상은 우리를 파멸로 인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된 예배와 참된 헌신이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서 섬겼습니다.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섬겼습니다. 몰록은 암몬의 아주 악한 우상으로 자기 자녀까지 죽여서 희생하는 악한 것이었습니다. 레판의 별은 잔인한 앗시리아 사람들이 섬기던 별이었습니다.

 

이런 우상은 영원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상을 만듭니다. 우상은 절대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하는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놓고 그 앞에서 좋다고 하며 거기에 절을 합니다.

 

유명한 무신론자 중 데이비드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라는 사람이 있는데, 몇 년 전 죽었습니다. 문학계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실질적인 무신론자는 없다. 신을 안 믿는 사람은 뭔가를 믿게 되어 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않으면 사람은 다른 것을 경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면서도 우상을 여전히 섬길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럴 수가 있습니다.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에 왔다 갔다만 하면, 틀림없이 뒤에 다른 우상이 있는 겁니다. 자기 우상을 따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면 우리의 눈은 다른 데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대신 지금 섬기는 우상인 것이 뭐가 있습니까? 나를 위한 최고의 가치, 최고의 결정이 우상이 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나에게 뭐가 유리한가?’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것을 기뻐하실까?’가 아니라 나에게 무엇이 유리한가?’만 철저히 따집니다. 하나님과 의논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건가?’만 생각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가가 아니라 나에게, 내 가족에게 어떤 게 유리한가?’를 따집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가장 큰 우상이 자기감정인 것 같습니다. 내가 좋으면 하고 내가 싫으면 안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하라. 용서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별로 나는 사랑하고 싶지 않고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안 합니다. 자기감정이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습니다. 그런 게 우상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대신 권력과 돈과 지식과 명예를 의지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겉으로 다 찬양하고 기도도 합니다. 교회도 나옵니다. 헌금도 합니다.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우상을 갖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우상이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상을 섬긴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 결과는 파멸이라는 것을 여기서 말씀합니다. 43절에서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하신 것처럼, 실제로 다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것이 아모스 5장의 말씀인데,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한지 아십니까? “너희가 그렇게 우상을 섬기고 싶어 했으니까, 이제 우상 섬기는 데 가서 실컷 섬겨봐라.”라고 하셨습니다.

 

 

5)  은혜의 보호막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라

 

42절에 보면 아주 무서운 말이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는 나름대로 자기 우상을 갖게 되어 있고, 어떤 형태이든 우상을 갖게 되면 심판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형태로 옵니까? 걸어가는데 갑자기 번개가 번쩍 쳐서 벼락 맞아 죽는 겁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은 그냥 그 죄 가운데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호막이 없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보호막이 우리를 가려주고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도생활을 잘 안 하고 있는데, 내 배우자가 열심히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내 자녀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내 부모님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 내가 잘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은혜의 보호막 아래 있다는 것을 지금 모르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시던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나를 위해 이제 기도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던 형제자매를 내가 떠나버리니까 나를 위해 기도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 즉시 죄악에 빠져버리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원래 본질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지켜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정도로 사는 것인데,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은 그 은혜의 보호막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그냥 두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도 그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지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때, 죄 가운데 살고 예배도 안 하고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내 맘대로 살고 심지어 악을 꾀하고 남을 등치고 사기를 치더라도 특별한 사건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겉으로는 평안해 보여도 아주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절대 좋은 게 아닙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게 좋은 겁니다. 그게 사실은 축복입니다.

 

나쁜 짓을 하고 남을 속이고 사기를 쳤을 때 들통이 나고 거기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축복입니다. 매를 맞는 것이 사실은 사랑입니다. 채찍이 있는 것이 오히려 사랑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악을 행하고, 아무리 사기를 치고, 아무리 남을 미워하고, 아무리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가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게 오히려 저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막이 사라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간섭받고, 들키고, 매 맞는 것이 좋은 겁니다.

 

나쁜 일을 해서 슬쩍 넘어가면 좋겠는데 들키면 보통 사라들은 뭐라고 합니까? ‘재수 없게들켰다고 합니다. 재수 없는 게 아닙니다. 그건 재수가 좋은 겁니다. 아주 복을 받은 일입니다. 오히려 슬쩍 넘어가는 게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 일이 쌓이고 또 쌓이며 계속된다면 나중에 엄청난 비극이 생깁니다.

 

 

3.   성막과 성전

 

스데반은 이제 조금 더 깊은 이야기로 나아갑니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44-45)

 

증거의 장막은 성막을 말하는데, 영어로 Tabernacle이라고도 하고 Tent of Meeting(회막)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이 만나주신 장소입니다. 그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하나님을 만나는 법궤도 거기에 있습니다. 증거의 장막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동행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광야에서 성막 중심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신앙뿐 아니라 그들의 삶의 중심도 성막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나의 삶에 들어와 동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말처럼 주관적인 말이 없습니다. 그냥 믿는 사람과 정말 동행하는 사람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믿는 것과 동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믿는 것은 내 중심, 내 주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뭘 믿는지를 자기가 결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주일날 와서 이렇게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다 할 수 있는데, 정말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느냐가 관건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24시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사실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기대며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입니다.

 

이런 증거의 장막은 하나님이 인간 속에 오셔서 우리 삶을 간섭해주시고 인도해주시고, 먹고 마시고 사는 모든 것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곳인데, 그렇게 구체적인 하나님의 동행으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성막이 솔로몬 때 와서 완전히 성전 건물로 지어집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6-47)

 

열왕기나 역대기 읽어보시면 여기에 대해 자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다윗은 정말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자기는 화려한 집에 사는데 하나님의 법궤는 너무 초라한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셨지만, 다윗이 아니라 그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지만 정말 하나님이 거기에 사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48-50)

 

이것도 시편 66편의 인용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전을 주신 것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은 항상 너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위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안 믿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식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할수록 이게 더 문제입니다. 저처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녀서 50년 이상 교회를 다닌 사람일수록 더욱 그런 경향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분명히 믿기는 믿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믿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게 아니라 자기 관점으로 보는 겁니다. 성경의 관점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생각해야 하는데, 내 생각, 내 경험, 내 지식대로 하나님을 자꾸 가두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결국 하나님을 자기가 소유하고, 하나님을 자기가 부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도록 만들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 계속 지적하셨던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자기들이 부리려고 하는 무서운 일을 저지르고 말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스데반의 결론과 도전 (51~53)

 

지금까지 스데반이 이런 이야기들을 죽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깜짝 놀랄 말을 스데반이 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51-53)

 

편안하게 듣고 있는데 갑자기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그게 바로 너희다!”라고 하니까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들은 항상 성령을 거스르고 슬프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를 죽이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이 격분하여 결국 스데반을 죽이게 됩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오늘 우리가 다시 한 번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매일 살아가고 있습니까? 외적인 어떤 형식과 관습과 전통을 지키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며 살았던 것은 아닌지, 그런 유대인들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영원히 책임져줄 수 없는 유한한 것들이나 어떤 우상을 붙들고 그것을 지키느라 애쓰면서 그와 동시에 영원한 말씀은 잃어버리는 미련함을 버리기 원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시게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우리를 맡기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지키라 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영원한 삶을 준비하도록,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는 것임을 잊지 말기를 원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아브라함과 모세와 스데반을 지금까지 지켜주고 계시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영원한 말씀으로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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