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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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2일 주일예배
✦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4 ✦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목적”
(베드로전서 2장 4~10절)
[들어가는 말]
요즘은 많은 교회들이 제자훈련을 하고 있어서 제자훈련이 뭔지를 대부분의 성도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 종류도 많습니다. “평신도를 깨운다”라는 기치로 하는 제자훈련이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제가 우리 교회에 처음 부임해서 실시했던 <일대일 제자양육>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고, 요즘에는 더 많이 나왔습니다.
또 우리 교회에서 많이 해오고 있는 ‘삶 공부’도 제자훈련의 일종입니다. 우리 교회는 모든 삶 공부의 강사를 제가 하고 있고 <생명의 삶>은 어느 교회나 담임목사가 하도록 되어 있지만, 다른 교회들을 보면 <새로운 삶>, <경건의 삶>,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특히 <일터의 삶>과 같은 공부들은 평신도 리더들이 감당하는 것을 봅니다.
그 중 우리가 목장에서 목자 목녀 목부가 일대일로 실시하는 <확신의 삶>이 있는데, 이것은 평신도 리더가 다른 평신도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제자훈련을 많이들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고 당연하게 넘어가지만, 오래 전에는 이런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평신도가 평신도를 인도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면서 소그룹 운동이 일어났고 소그룹 성경공부가 이루어지면서 평신도 인도자가 다른 성도들을 인도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제자훈련 과정을 하는 것에는 굉장한 관점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목회자만 제사장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이라는 관점입니다. 이것을 정말 믿을 수 있어야 평신도 중심의 제자양육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것이 불편한 교회들이 있고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평신도가 인도하는 제자양육 과정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는 가정교회야말로 평신도가 사역자이며 목회의 주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제자훈련이라는 것은 앉아서 성경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공부를 하고서 이렇게 예배도 하고 사랑을 나누고 행하는 삶 속에서의 실천이 있을 때 가장 좋은 제자훈련입니다. 가장 좋은 훈련은 연습을 하면서 배웁니다. 가만히 앉아서 이론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론(말씀)도 배우지만, 배운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진짜 제자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함께 예배도 드리고, 삶 공부에서 열심히 말씀을 공부하고, 또 배운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목장에서 말씀을 실천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기도해줍니다.
예수님은 지난주 본문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우리 모두가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그 질문을 약간 바꾸셔서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신다면 우리가 과연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질문하셨지만, 그것을 조금 바꾸어 ‘너는 너 자신을 누구라 하느냐?’ ‘너는 너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기독교인입니다.’ ‘주님의 제자입니다.’ 등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 맞는 답입니다. 그런데 그런 답변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예배에도 매번 참석하지만, 교회가 주변 사람들에게 별 영향을 못 미치고, 오히려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미주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교회가 지탄을 받고,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해주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나는 누구다’라고 언급한 대답들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는 그런 말들과 우리의 실제 삶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신분이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만약에 살지 못한다면, 크리스천으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 주님의 제자 등의 신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토요일에 너무 일을 많이 하거나 밤늦게까지 깨어 있으면 예배에 와서 굉장히 피곤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정이 있어서 피곤한 것이 아니라 상습적으로 예배에서 졸고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예배자다.’ 하는 사실을 정말로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 됩니다. 안 믿는 분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머리로는 아는데 실제 삶에서는 그것이 안 나타난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 공부와 목장과 예배를 통한 전인적 제자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정의’로 되어 있는데 그것이 우리의 인격이고 혼입니다. 그래서 삶 공부에서는 지적인 부분을 터치해줍니다. 목장에서는 사랑을 나누고 삶을 나누고 서로 기도해주는 가운데 감정을 터치해줍니다. 또 예배는 은혜를 받고 가는 게 아니고, 은혜를 받은 후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의지적인 결단을 하고서 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의지적인 면을 터치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정의가 다 터치되는 것이 전인적인 제자훈련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제대로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그렇게 제자훈련을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러한 사람으로서 생활 속에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를 잘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1. 빌립보 가이사랴에서의 신앙고백 (마태복음 16장)
지난주일 마태복음 16장 본문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황제의 도시인 빌립보 가이사랴의 한 복판에서, 로마 황제인 시저가 구세주가 아니라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베드로가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은 황제의 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겠다는 결단이며 선언입니다.
그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이제 드디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구원자)로 고백한 제자들에게 비로소 그리스도(메시아)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를 그때로부터 설명하십니다. 메시아가 하는 일은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당한다는 것, 심지어 죽임을 당한다는 것, 그러나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시작하십니다(21).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다음부터 이 가르침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의하면서,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고 꾸짖습니다(22). 그가 예수님을 야단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그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 16:23)
바로 몇 분 전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7-18)
하는 놀라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금방 “사탄”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까? 분명히 황제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가겠다고 말로는 고백을 했는데, 그것은 말뿐이었습니다. 말로 고백은 했지만,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이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과 부귀영화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의 길이라고 하시니까, “그것은 절대로 안 됩니다!” 하고 가로막으며 나오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길을 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여전히 속으로는 황제의 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길을 버리지 못하고, 이름만 바꾼 겁니다. 예수님의 길을 가겠다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황제의 길과 같았습니다. 메시아의 길이 황제의 길보다 더 높고 강한 위치에 올라가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주님은 “사탄”이라고, 또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꾸짖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 길을 갈 때 고난과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은 모른 채, 오직 예수님이 곧 예루살렘에 가셔서 로마를 물리치고 왕이 되어 영광의 메시아로 다스리실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의 뜻은 예수님의 뜻의 뒤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 개인이 사탄이라는 게 아니고, 지금 베드로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 즉 인간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원래 이름은 시몬인데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나 ‘반석’이나 비슷한 단어였기 때문에 헷갈렸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우쭐했습니다.
“너는 베드로다” 하실 때 ‘베드로’는 헬라어로 ‘페트로스(Petros)’입니다. 하지만 ‘반석’은 ‘페트라(Petra)’입니다. 다른 단어입니다. ‘페트라’는 여성명사이고, ‘페트로스’는 남성명사입니다. 그런데 ‘페트...’까지만 듣고 흥분해서 ‘봐라, 내가 이제 2인자가 되었다.’라고 우쭐한 겁니다.
지금 이때가 어떤 상황입니까? 예수님이 그 동안 말씀을 전하신 그 능력, 그리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고, 물 위도 걸으시고,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는 엄청난 능력을 보면서 ‘저분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아가 틀림없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이 분명한 상태에서, 제자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의 눈에 들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왕이 되시면 그분 밑에서 한자리에 차지하기 위해 서로 ‘누가 크냐?’ 하며 다투던 때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선수를 치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아, 이제 내가 쟤네들보다 앞섰다.’라고 확신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쭐해져서 주제넘게 행동한 겁니다. 요즘 말로 ‘오버’한 겁니다.
그리고 그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마땅히 지셔야 할 십자가를 지시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메시아는 고난 당하고 죽고 부활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자기가 정해주려고 합니다. 메시아는 그런 게 아니고 영광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하며, 자기가 정해주려 합니다. 바로 그것이 사탄의 생각이었고 사람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고백하면서도 주님께서 ‘그럼 이렇게 하자’라고 하실 때 ‘아니, 그게 아니라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한다면, 이처럼 자기가 삶의 주인이 되려 하고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산다면, 우리도 똑같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는 꾸중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심각하게 질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정말로 추구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 그것이 정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인가, 아니면 주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삶인가?’ 우리는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으로 주님의 뜻을 조종하려 한다면, 그것이 바로 사탄의 생각이고 사람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제목들입니다. 목장에서도 기도제목을 나누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줍니다.
예를 들어, ‘내가 건강하도록 기도해주십시오.’라고 했다면,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서도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 했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건강을 위해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 자체로서는 해야 하는 일이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건강해서 뭐 하려고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팠다가 건강해져서 못된 짓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계속 아팠으면 못된 짓을 못하고 이상한 데를 못 가는데, 몸이 나아서 날아갈 것 같으니까 이상한 데에 가고 못된 짓을 합니다. 그럼 건강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 겁니다. 내가 건강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삶을 살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건강해져서 내 맘대로 그 동안 못하던 것을 신나게 하면서 살겠다는 것인지, 우리는 심각하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2. 베드로의 깨달음 (4-8절)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반석”이 자기라고 생각해서 그런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고 자기가 성령을 받고서 변화되어, 그것이 자신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노년에 베드로전서를 기록하면서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깨달은 그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라고 하실 때의 “반석”이 베드로(Petros)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누구입니까?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4절)
여기서 분명히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라고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16장 이후로 ‘페트로스(Petros)’라는 단어가 ‘베드로’의 이름으로만 사용되지 ‘돌’이라는 뜻으로는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돌이라는 뜻의 단어로는 ‘리쏘스(lithos)’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4절에서도 ‘페트로스(Petros)’ 대신에 ‘리쏘스(lithos)’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돌은 ‘사람에게는 버림을 당했지만 하나님께 선택 받은 보배로운 산 돌’입니다. “The Living Stone”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보십시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5절)
4절에서는 산 돌이 예수님이라고 했는데, 여기 5절에서는 누가 산 돌입니까? “너희”입니다. 이 “너희”가 누구입니까?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 (1:1-2)
이 지명들은 지금의 터키 지역입니다. 거기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 쓴 편지가 베드로전서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을 말합니다.
원래 ‘산 돌’은 예수님이신데, 그분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산 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함께 신령한 집으로 지어지고 있는 중이며, 그 목적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기 위함입니다(5).
무슨 말입니까? 산 돌이시며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함께 모여 교회를 이루는 것이고, 교회는 완벽히 지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지어지고 있는 중이며, 또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제사장이 뭡니까? 원래 제사장의 구약에서의 역할은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에서 중간자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제사장입니다. 그 거룩한 제사장의 역할을 교회(믿는 자들)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근본적으로 우리를 단순히 즐겁게 해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함께 사랑을 나누면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뒤바뀌니까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기쁨(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나)을 먼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무엇이 이익인가, 자기에게 좋은 게 뭔가를 먼저 얻으려고 하다 보니까 문제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좋아하는 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인데,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먼저 구하다 보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먼저 구하다 보면 하나로 모아집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오래 전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자신을 가리켜 “이 반석”이라고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깨닫고 보니 자기가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그 반석이라는 것, 또한 그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반석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물론 베드로(Petros)도 “이 반석(페트라 petra)”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고백할 때 인간 ‘페트로스’가 ‘페트라’로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뿐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고백할 때 그 “반석”(페트라)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6-7절)
이 구절들을 다시 보십시오.
- 5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6절: “내가 택한 보배로운 한 모퉁잇돌” (사 28:16)
- 7절: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시 118:22)
여기서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퉁잇돌이란 것은 당시 돌로 건물을 지을 때 모든 돌들이 그곳에서부터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돌입니다. 모퉁잇돌이 중심을 잡고 있어서 건물을 짓게 됩니다. 모든 돌과 다 연결되는 돌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건물이 안 됩니다. 우리가 산 돌들로서 신령한 집으로 함께 지어져 간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인해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되셔야 교회가 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예수님을 가장 최고의 자리에 모시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머리라고 말은 하는데, 실제로는 머리가 목사이거나 장로거나 집사거나 권사라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며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갈 수 없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의 결국이 어떻게 됩니까?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8절)
이것은 이사야 8장 14절의 인용입니다. 성령 받고 변하니까 베드로가 몇 백 년 전에 쓰인 구약의 말씀을 깨닫게 된 겁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는 자들인 우리에게 예수님은 보배이십니다(7).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자들은 결국 그 돌에 부딪쳐 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3. 교회의 정의 (9-10절)
이제 베드로는 “너희”가 누군가, “산 돌”이며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다고 했으며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한 사람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더 자세히 설명해줍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9-10절)
여기서 첫째, “택하신 족속”이라는 것은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는 것은 왕이신 예수님과 같으며 또 세상을 위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거룩한 나라”는 세상과 구별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영역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것은, 소유주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표현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사실입니다. 여러 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자체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혼자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혼자서 신앙생활을 잘하겠다는 분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교회가 너무 문제가 많으니까 집에서 가족들과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면서, ‘나 혼자 잘 믿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정에서 정말 예배를 드린다면 그 가정 자체가 교회가 되고 공동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나 혼자 잘 믿겠다. 나를 그냥 놔둬라.’라는 식의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공동체로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기 이 표현들을 보십시오. 전부 다 복수입니다.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모여서 그저 쓸데없는 짓을 하고, 함께 즐기며 먹고 놀라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선전)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리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세상에 전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인 교회의 목적입니다.
[나가는 말]
1) 마태복음 16장: 바 = 아들(son) / 요나 = 요한(John)
예수님이 베드로를 가리켜 ‘바요나 시몬’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는 아들이라는 뜻이고, ‘요나’는 이름입니다. 히브리식으로 요나이고, 헬라식으로는 요한입니다.
2) 바요나 시몬(Simon son of Jonah) = Simon Johnson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이라고 하신 것은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요한의 아들 시몬’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하면 ‘John's son Simon’인데, John’s son이라는 말이 Johnson이 되었습니다. Simon도 흔한 이름이고 Johnson도 흔한 이름이고, 또 Simon Johnson도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원래 ‘베드로’는 이름이 아니라 별명이고, 이 사람의 원래 이름을 성경적으로 하면 Simon Johnson입니다.
3) 바요나 시몬 (Simon Johnson) + 예수 그리스도 = 베드로(반석)
이 ‘바요나 시몬’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니까 뭐가 됩니까? ‘반석’이 됩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그 페트라, 즉 ‘반석’이 된 겁니다.
4) 베드로전서 2장: 각 사람 + 예수 그리스도(보배로운 산 돌) = “산 돌” (곧 페트라)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2장에서는 예수님이 원래 산 돌이신데 “너희도 산 돌 같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인 우리 각자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도 ‘산 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산 돌이 바로 그 페트라(반석)입니다.
5) 우리 모두 + 예수 그리스도 = 산 돌들 = 교회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고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산 돌들이 되고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그 교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곧 신령한 집이며, 거룩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주보를 보십시오. 안쪽에 보면 우리 교회의 비전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성도가 행복한 교회”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영혼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듦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영혼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든다’는 것이 뭡니까?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바로 예배, 교제, 양육, 사역, 선교를 통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드리고, 함께 교제하고, 말씀으로 양육하고, 열심히 서로 봉사하고 섬기며,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며 나아가다 보면,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드는 교회가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며 성도가 행복한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어릴 때 다니던 교회가 분열된 슬픈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그분의 책에서도 보고 듣기도 했습니다. 그 교회가 갈라지게 된 원인은 50원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50원짜리 ‘아이스케키’ 때문이었습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의 막내아들이 어렸는데, 교회 사찰 집사님의 아이도 비슷한 나이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사모님이 막내아들에게 아이스케키 50원짜리 하나를 사주었습니다. 목사님 아들은 자랑하면서 먹는데, 사찰집사님 아들이 그것을 보고 먹고 싶어서 한 입만 달라고 했지만 안 줬습니다. 나중에 다 먹고 버린 막대기를 집사님의 아이가 주워서 흙이 안 묻은 쪽으로 핥았습니다.
그 아이의 엄마가 그것을 보고 “네가 거지야?”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마침 거기 사모님이 있기에 아이를 때리고 야단을 치면서 메시지는 그쪽으로 보냈습니다. “네가 거지냐? 자기 아이 입만 입이냐?” 하면서 막 뭐라고 했습니다. 사모님이 가만히 들어보니까 자기에게 뭐라고 하는 소리니까 와서 따졌지만, 잘 안 되니까 목사님에게 가서 일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사찰집사님을 불러 부인 집사님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찰집사님도 열을 받았습니다. 이분이 평소에 정의를 부르짖던 분이었기 때문에, 그 전에 있었던 안 좋았던 일들을 사람들에게 막 말하며 성토하다 보니까, 목사님 편과 집사님 편으로 나뉘어 싸우다 결국 교회가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아이스케키 50원짜리 하나 때문에 교회가 갈라지다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런데 사실은 평소에 쌓인 것들이 이때 폭발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도 이런 교회도 많고 더 한 교회도 많습니다. 법정까지 싸움까지 가거나, 싸우다가 다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형편인데 교회가 계속 있어야 하는가? 교회가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데도 교회가 필요한가?
주님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래도 교회는 있어야 한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 외에는 이런 사명을 주신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하셨는데, 그 교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해서 그런 것이지, 그것이 교회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여기 보십시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인 교회! 예배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또 복수로서 공동체인 교회! 교제하는 겁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 양육하고 훈련하는 겁니다. 긍휼을 얻은 자로서 긍휼을 베푸는 교회! 서로 섬기고 봉사하고 사역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덕을 알리고 전도하며 선교하는 교회!
이러한 일들을 통해 우리 교회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모두도 주님 안에서 행복한 성도가 되어, 주님께 영광 돌리는 개인과 가정과 온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