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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10 수요예배

포기할 없는 영적 리더십 42

최악의 위기에 주어진 기적의 승리

(열왕기하 19 1~37)

 

 

1.   히스기야의 믿음과 순종

 

평소에 악하게 살거나 하나님을 멀리 하며 살던 사람이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나면 ‘올 것이 왔다’라고 느끼거나 ‘뿌린 대로 거둔다’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평소에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순종하며 살고 이웃을 사랑하며 섬겼는데도, 이상하게 어려움이 닥치고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가 되기 때문에 마음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욥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어려움이 도저히 해결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일이라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벌을 받는 것은 이해가 가고 견딜 있지만, 잘못한 것도 없고 오히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섬겼는데 재난이 닥쳤다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에게 그런 어려움이 닥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심판이나 벌이 아니라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이 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이 받아서 누리기 위해서는 준비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 엄청난 시련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련이 약하면 뒤에 오는 것도 크지 않을 있지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데도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뭔가 것이 오고 있다는 겁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기도했을 기적의 승리를 맛본 히스기야를 통해 이것을 확인합니다. 복이 누리기 위해서는 시련을 통해 준비가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히스기야가 보여줍니다.

 

25세의 젊은 나이로 왕이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그는 먼저 성전을 정화하고 예배를 회복시켰습니다. 역대하 29, 30, 31장을 보면, 히스기야는 먼저 유월절을 회복시켜 모든 백성들이 구원의 하나님의 손길을 새롭게 깨닫도록 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성전 예배가 살아났고, 신앙에 근거한 지속적인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히스기야와 백성들은 나라 곳곳에 있는 우상들을 부수고 신전들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왕하 18:4)

 

여기에 보면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이 그때까지 있어서 사람들이 그것에 절하며 섬겼습니다. 이것은 무려 800 동안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던 것을 이때 부숴버렸습니다. 또한 히스기야는 성전 제도를 재정비하여 영적 리더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다하게 되면서 백성들도 십일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남쪽 유다에는 괜찮은 왕들이 있어서 부분적으로 개혁을 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히스기야처럼 헌신적으로 삶의 모든 부분들을 말씀 중심으로 개혁한 왕은 없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18:5-6)

 

6절을 <새번역>으로 보면그는 주님에게만 매달려, 주님을 배반하는 일이 없이,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들을 준수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그가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가사와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 (18:7-8)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리더는 이처럼 강하고 당당할 있습니다. 당시 강대국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 끼어 있었던 유다는,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에 있어서 나라가 모두 유다를 지배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왕들은 앗수르의 세력을 무서워하며 조공을 바쳤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이제 히스기야가 앗수르에게 반기를 들고서 섬기지 않게 것입니다. 앗수르 정책을 취하며 항상 유다를 괴롭히던 블레셋을 쳐서 지경을 넓혔습니다. 이처럼 히스기야가 막강한 대제국 앗수르에게 대항하여 이처럼 과감하게 나갈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으로 모든 일에 성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인생에 강력한 앗수르와 같은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앗수르를 두려워하거나 상황과 타협하지 말아야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며 당당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자꾸 거기에 굴복하고 타협하면 세력은 나를 잡아먹으러 들어오지, 해결이 됩니다.

 

 

2.   앗수르의 침략

 

1)  이스라엘의 멸망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른 4년째 되던 해에,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하여 공격합니다(18:9). 이스라엘 백성들은 3 동안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앗수르에게 항복하고 맙니다(18:10). 이로써 이스라엘은 멸망당하고 왕과 귀족들은 모두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갑니다(18:11). 그런데 성경은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군사적 원인이 아니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하나님이신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의 언약을 깨뜨렸으며, 주님의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순종하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왕하 18:12, )

 

여러분, 혹시 ‘나는 정말 망하고 싶다’라고 한다면 요대로만 하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언약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으면, 그것은 확실히 망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망하는 것이 당장 수도 있습니다. 당장 오니까 괜찮은 알고 악만 행하다가 결국 때가 되어 망했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동안 쌓여서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임한 것입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손에 사용된 심판의 도구였을 뿐입니다. 그들이 오래 같이 강했지만 실제로 얼마 갔습니다. 이처럼 나라의 운명은 군사력이나 외교적 능력이나 경제력에 달려 있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내다보면서, 역사상 영원한 제국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로마도 그랬고, 미국도 점점 쇠퇴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중국, 인도, 터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올라옵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국을 위해서, 남북통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만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을 하나님의 백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나라를 지켜주십니다.

 

지금 중국이 그렇게 올라온 아십니까? 중국 교회가 선교를 엄청나게 하고 있습니다. 중국 교회가 선교를 잘하게 하시기 위해서 중국을 키워주시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잘못 가면 언젠가는 하나님이 옮기십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강대국이라고 하나님을 떠나서 잘못 가면 결국 언젠가 하나님이 중단시키실 것입니다. 그래도 미국도 중국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나라들이 가고 있는 겁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깨어야 하는데, 바로 우리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세계를 위해서 기도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앗수르가 강해서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아닙니다. 앗수르가 강했는데 유다는 망했습니다. 동시에 있었는데도 이스라엘은 망하고 유다는 망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죄가 이스라엘에 계속 쌓이면서 하나님의 보호막이 걷히게 되었습니다. 동안 보호해주셨는데 사람들이 그게 필요 없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거두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스스로가 하나님의 보호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망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나님을 거역할 때에도 나라의 힘이 강해지고 부귀영화가 대단했던 때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로보암 2 때가 그런 때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해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교만하게 계속 불순종의 길을 갔고, 마침내 하나님은 심판의 칼을 드셨습니다. 그렇게 되는 데는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멀리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당장 망하지는 않습니다. 열심히 하는 같다가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경우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당장 잘못되거나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죄악이 쌓이면서 때가 되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아주 갑자기 망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되겠습니다.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최대한 권면하여 그렇게 되지 않도록 도와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때가 엄청난 고난의 날이 오게 됩니다.

 

 

2)  앗수르의 유다 침공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한 유다의 히스기야가 계속 앗수르 정책을 펼치자, 앗수르 대군이 드디어 유다를 침공해 옵니다. 이때가 히스기야 14년이었습니다(18:13). 앗수르 산헤립의 대군이 엄청나게 몰려와서 주변 여러 나라들을 굴복시키고 블레셋의 성읍들도 휩쓸어 버렸습니다. 오래 전부터 요새화된 요충지 라기스도 점령하고 에그론을 해방시키더니, 아프리카의 강국 애굽과 에티오피아 연합군까지 격퇴했습니다. 싸움에서 산헤립은 유다의 46 성읍을 점령하고 20만이 넘는 포로들을 잡아갔습니다. 무시무시한 공성 장비를 갖춘 앗수르 대군의 침략 앞에 유다는 멸망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니까 히스기야도 조공을 바쳐 앗수르를 달래려 시도합니다.

 

유다의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삼백 달란트와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히스기야에게 내게 한지라. 히스기야가 이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주었고, 때에 유다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성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 (18:14-16)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이시여,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철수만 해주시면, 요구하시는 것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며 굴욕적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앗수르 왕은 300달란트와 30달란트라는 엄청난 돈을 요구했고, 이것을 들어주기 위해 히스기야는 왕궁의 보물은 물론, 성전 문에 입힌 금까지 벗겨서 주었습니다. 성전 창고와 국고에 보관되었던 보물들은 이미 십여 전에 그의 아버지 아하스가 써버렸기 때문입니다(16:8). 그래서 기둥의 금까지 벗겨서 정도로 비참한 상황입니다.

 

그토록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히스기야도 엄청난 공포를 느끼고서는, 기도 제대로 해보고 나라의 재정을 털어서 앗수르 왕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습니다. 사정이 너무 다급해지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해도, 이처럼 인간적 수단에 의지할 수가 있다는 것을 히스기야가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도 소용이 없다는 , 그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앗수르 왕이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로 하여금 대군을 거느리고 라기스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서 히스기야 왕을 치게 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라 그들이 올라가서 윗못 수도 세탁자의 밭에 있는 길에 이르러 서니라” (18:17)

 

앗수르의 전공은 받고 공격하기입니다. 돈을 받았으면 봐줘야 하는데, 받고 나서도 공격을 합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때도 그럽니다. 뒤통수를 치는 데에 전문입니다. 앗수르는 재물을 받아 챙긴 다음에도 약속을 어기고 거침없이 대군을 몰아 진격해 왔습니다. 이스라엘에 이어, 아예 유다까지 멸망시키겠다는 속셈을 드러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가 상대가 강하다고 해서 이처럼 돈이나 어떤 인간적 수단으로 해결해보려고 시도하더라도 결코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앗수르는 절대 그렇게 해선 물러가지 않습니다. 받을 받고 챙길 챙기고서 우리를 공격해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밖에 없습니다. 쉽게 가려고 하면, 돈은 돈대로 빼앗기고 당할 것은 결국 당하고 맙니다.

 

 

3)  믿음으로 맞서는 히스기야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열정을 가지고 나라를 거룩하게 개혁하기 위해 애쓴 왕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한 다음에 이런 엄청난 위기가 왔습니다.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당장 시험에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내가 얼마나 헌신하며 섬겼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가 있는가?’라고 만한 상황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믿음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니면 실망해서 ‘해봤자 되더라. 하면서 최소한만 합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분명한 것은, 아무리 신앙이 좋고 믿음의 사람이라도 재난이 닥친다는 사실입니다. 엄청난 어려움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에게 섭섭한 감정을 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고통이 찾아옵니까? 하나님은 그토록 열심히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에게도 그런 위기를 허락하십니까? 그럼 그런 일이 오게 막아주시면 되는 겁니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믿음의 사람이 겪는 시련은 크고 엄청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려는 도구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견디면 엄청난 영광을 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을 정말 제대로 하고 있는데도 어려움이 닥치고 문제가 일어났다면, 다가올 엄청난 축복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받기 위한 준비과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그때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잠잠히 기도하며 시련에 담대히 맞서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인간적으로 있는 모든 준비를 다했습니다. 먼저, 밖에서 얻을 있는 모든 근원을 차단했습니다. 앗수르 대군이 몰려와서 성을 포위할 경우, 그들에게 식수 공급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미리 차단해 버리면 장기전으로 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밖의 근원을 막아 버렸습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결국은 예루살렘까지 것을 알고, 대신들과 장군들을 불러서, 밖에 있는 물줄기를 메워 버릴 것을 의논하였다. 그들은 왕의 계획을 지지하였다.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모든 샘과 들판으로 흘러 나가는 물줄기를 막았다. 앗시리아의 왕들이 진군하여 오더라도 물을 얻지 못하게 생각이었다.” (대하 32:2-4, )

 

이때 히스기야는 예루살렘 골짜기를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던 기혼 샘물을 막아서 지하를 통해 안으로 흐르도록 하는 기발한 공사를 단행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기술로는 너무나 뛰어난 수로 공사였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 히스기야의 터널이 실제로 발견되었고, 탐사가 진행되면서 히스기야가 이루어 놀라운 수로 공사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것이 진짜였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히스기야가 지하수로는 S 형이었고, 높이는 평균 2m 정도, 폭은 평균 80cm, 총길이는 570m였습니다. 수로 부분에서 발견된 비문은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거기에 보면 그룹의 일꾼들이 기혼 샘에서부터 들어오고, 다른 그룹은 예루살렘 안에서부터 들어가다가, 그룹이 중간에서 만나서 터널이 뚫리게 되었습니다. 첨단 장비도 없던 당시의 토목 기술로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정확히 터널을 뚫었는지 너무나 놀라울 뿐입니다.

 

수로는 밖에서 때는 막혀 있어서 적군이 도저히 알아차릴 없는 절묘한 설계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로는 예루살렘이 포위당했을 성안 사람들에게 식수를 공급해주는 샘이 되었고, 적군에게는 식수 공급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안에 만들어진 샘은 예루살렘 동남쪽에 위치했는데, 이곳이 바로 유명한 실로암 못입니다.

 

이외에도 히스기야는 성을 튼튼히 쌓고, 무기를 준비하며, 지휘관들을 체계적으로 배치해서 철저한 방어 태세에 돌입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한다고 해서 내가 있는 준비를 게을리 해서는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전적으로 의지하는 동시에, 내가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어서 히스기야는 백성들을 모으고 위로하면서 격려했습니다. 리더는 이처럼 백성들을 야단치고 분열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말로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을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봅니다. 그것도 인간적인 격려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기초하여 믿음으로 격려의 말을 해주는 겁니다. 히스기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굳세고 담대하여야 한다. 앗시리아의 왕이나 그를 따르는 무리를 보고,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아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은 앗시리아의 왕과 함께 있는 자보다 크시다. 앗시리아의 왕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군대의 힘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우리의 하나님이 계신다.’ 백성은 유다 히스기야의 말을 듣고, 힘을 얻었다.” (대하 32:7-8, )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어떤 강적이 몰려와도 해답은 같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상대보다 훨씬 크고 강하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격려를 보십시오. 앗수르 왕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군대의 힘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군대가 오합지졸입니까? 엄청난 대군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겨우 정도 밖에 없다’라고 표현하는 아닙니까? 왜냐하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불면 날아가는 정도 밖에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도우시며 싸워주시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합니다.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우리도 이것을 믿습니다.

 

말을 들은 백성들이 힘을 얻었습니다. 잘되고 있어도 불안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떤 위기 상황이라도 영적 리더는 믿음의 언어를 말합니다. 그럴 사람들은 안심하게 됩니다. 우리도 믿음의 언어로 주변 사람들에게 힘을 있기를 바랍니다.

 

 

3.   위기 속에서 기도로 나아가는 히스기야

 

산헤립의 유다 침공은 워낙 굉장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열왕기하 18-19장뿐 아니라, 역대하 32장과 이사야 36-37장에도 자세히 나옵니다. 예루살렘 남서쪽 28마일 정도에 위치한 라기스를 이미 정복한 앗수르 대군은 이곳을 예루살렘 침공의 거점으로 삼고 전열을 정비하여 질풍같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옵니다.

 

그들의 장수는 랍사게라는 왕의 심복이었는데, 말에 능한 그를 앞세워 먼저 말로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항복을 받아내려고 시도합니다. 랍사게는 자신을 맞으러 나온 유다의 신하들 앞에서 오만방자하게 큰소리치며 앗수르 왕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역대하 32장과 18:19 이후에 보면 랍사게가 말한 것이 자세히 나오는데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첫째, 유다에게는 의뢰할 자, 즉 마땅히 도와줄 자가 없다고 합니다(19-20). 예루살렘이 포위된 주제에 누구를 의지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구해줄 것이라고 하는 히스기야의 말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30). 또한 앗수르와 맞설 수 있는 강대국인 애굽도 믿지 말라고 합니다(21). 강대국이던 애굽이 당시에는 랍사게의 말대로 “상한 갈대 지팡이” 같이 국력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신흥 강대국 앗수르에게 대적할 만한 힘이 없는 게 사실이었습니다.

 

둘째,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우상 제거와 거룩한 성전 개혁을 비난하면서, 하나님이 결코 유다를 지켜주지 못할 것이라고 비웃습니다. 이때까지 어떤 나라들이나 그들의 신들도 앗수르를 대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33-34).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산헤립의 아버지인 사르곤 2세 때부터 시작된 앗수르의 정복 전쟁과 영토 확장은 아주 무시무시할 정도였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왔다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떨었습니다. 수많은 나라들이 차례로 앗수르에게 무릎 꿇으며 항복하거나 멸망당했습니다.

 

랍사게는 한 술 더 떠서 앗수르 군대가 온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까지 합니다(25). 이것은 진짜로 하나님을 믿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열방의 수많은 신들과 같은 정도로 보며 비꼰 것입니다.

 

“민족의 모든 신들 중에 누가 그의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18:35)

 

이런 말을 할 때 유다 대신들이 성 위의 백성들이 듣지 못하도록 유다 말이 아니라 아람 말로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랍사게는 이 간곡한 요청을 한마디로 무시하며 이제 유다 백성들이 자기 대소변을 받아먹고 연명해야 할 것이라고 유다 말로 모욕합니다(18:27-18). 결국 이 세상의 누구도 앗수르 왕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건질 수 없으니 히스기야도 믿지 말고 하나님도 의뢰하지 말고, 빨리 항복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 아주 좋은 땅을 주어서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18:32).

 

앗수르가 랍사게와 같이 유다 말에 능통하고 무례하며 교활한 사람을 대표로 보내어 이런 거친 말들을 한 의도는 분명합니다. 먼저 백성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들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항복하기만 하면 백성들을 좋은 땅으로 옮겨서 더 잘살게 해주겠다는 거짓말을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역사를 보면 앗수르는 단 한 번도 정복한 나라의 백성들에게 그렇게 해준 적이 없습니다. 다른 곳으로 이주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끌려간 사람들은 모두 낯선 땅에서 노예가 되어 평생 중노동에 시달리다 죽었습니다.

 

이에 유다 신하들은 그 내용을 히스기야 왕에게 전하는데, 옷을 찢으면서 비통함을 나타냅니다(18:37). 자신들의 조국과 왕을 그토록 멸시하는 앗수르의 무례함에 슬프고 분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이것이 자기와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기 위한 계략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이미 백성들에게 어떤 대꾸도 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18:36).

 

이제 히스기야도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서 여호와의 전으로 가서 비상 기도에 돌입합니다(1). 왕의 모든 대신들도 다 굵은 베를 입고 같이 기도에 동참합니다(2). 히스기야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이 다급한 상황을 전하면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3절을 보면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라고 하는데, 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한 상황입니까? 그래서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4절을 보면 “히스기야는 이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랍사게의 오만 방자한 말을 다 들으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 사악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꾸짖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전갈을 받은 이사야는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라” (19:6-7)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말에는 아무 힘이 없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앗수르 왕은 어떤 소식을 듣고 급히 본국으로 철수하게 될 것이며, 거기서 그는 반역을 당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히스기야가 얼마나 힘이 났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힘이 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황이 어려울수록 누구를 찾아가고 전문가의 말을 듣는 등 세상의 소리를 찾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것도 힘들 때는 이렇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힘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과 그의 부하 대신들은 그 후에도 계속 하나님과 히스기야를 비방하는 심리전을 펼칩니다. 그리고 산헤립은 친서를 히스기야에게 보냅니다. 그 내용은 랍사게가 앞에서 한 말과 비슷한데, 요점은 자신의 손에서 건져낼 신이 없으니까 빨리 항복하라는 것입니다(10-13).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평소의 앗수르라면 편지를 보내고 사람을 보낼 필요 없이 그냥 예루살렘으로 진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산헤립은 그냥 편지만 써서 보냅니다. 사실 산헤립이 두 번이나 간접적으로 항복하라고 위협한 데에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구스 왕 디르하가가 앗수르를 공격하려고 군대를 움직이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겁니다(9). 아프리카 구스의 사나운 군대는 앗수르도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급해진 산헤립은 병력의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사 급히 유다의 항복을 받아내고 구스와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히스기야에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사야에게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나아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군대를 점검하거나 무기 창고를 정비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그 무서운 협박 편지를 들고 성전으로 올라갑니다(14). 그리고 그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 놓고는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15-19).

 

이 히스기야의 기도는 사무엘하 7장의 다윗의 기도와 열왕기상 8장의 솔로몬의 기도를 생각나게 해줍니다. 이처럼 위대한 영적 리더는 자기가 위대한 게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께 꿇어 엎드려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기도의 주제는 항상 자기가 잘되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개인적인 필요에서 시작할 수 있지만, 그 초점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도 이 히스기야처럼, 나 자신을 위협하는 가장 큰 근심거리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펼쳐 놓고 부르짖으며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히스기야의 기도처럼 우리의 기도도 항상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그 핵심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개인적인 필요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응답을 받습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20절)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아무리 장황하게 기도하고 큰소리로 기도하고 오래 기도해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은 그 기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라는 뜻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들어주겠다고 하신 것을 뜻합니다.

 

왕위에 오를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순종했던 히스기야, 철저히 준비된 지도자 히스기야, 위기 앞에서도 사람의 도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로 엎드린 히스기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기도한 히스기야를 하나님은 버리지 않고 지켜주겠다고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앗수르의 그 막강한 군사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 뉴스를 보십시오. 온통 머리가 아프고 세상이 복잡하게 보입니다. 또 불안해집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기죽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으며 답답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시 2:10-12)

 

이 말씀 그대로 여기서 일어났습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35절)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멸시하며 나오던 사람들이 하룻밤에 18만 5천 명이 죽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수십 년 동안 유다를 공포에 떨게 했던 앗수르의 대군이 단 하룻밤 사이에 궤멸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한 번만 움직이시면 수십 년 동안 해결이 안 되던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이 됩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이분께 나아갈 때 이런 역사가 우리에게도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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