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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23 수요예배

크리스천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 4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신 이유

(누가복음 10 1~12)


1.  올바른 제자도


흔히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예수님의 제자’라고도 부릅니다. 이것도 논란이 있습니다. 모든 크리스천이 주님의 제자인가? 그냥 믿는 사람을 제자라고 하면 맞는데, 그런 경우도 많은 같습니다. 제자라면 스승을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을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훈련을 ‘제자훈련’이라고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삶의 가치관과 자세 또는 그리스도인이 가야 길을 ‘제자도(discipleship)’라고 합니다.


한국 교회가 지난 1980년대부터 제자훈련이 시작되면서 굉장히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교회들이 아주 좋은 모습들을 보였는데,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좋지 않은 모습들을 보여주는 바람에 평가절하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제자훈련 세미나의 인기가 시들해졌습니다. 제자훈련 성경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훈련 받은 것을 가지고 나가 사회에서 말씀대로 실행하며 살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모습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길을 가야 하겠습니까? 제자는 누구이고, 무엇을 위한 사람이고, 어떻게 사는 사람입니까? 어떤 것이 진짜 제자훈련이겠습니까?


예수님께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특별히 함께 3 동안 생활을 하며 지낸 12명이 있었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 외에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마을로 파송 받은 70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70명이 등장합니다.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동네와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1)


9:1-6 보면, 예수님은 이미 열두 제자를 불러서 보내셨습니다. 내용도 오늘 70명을 보내시는 것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하지만 오늘 70(새번역에는 72) 따로 세우신 것을 보면, 분명히 그와는 별개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3)


예수님은 12 제자뿐 아니라, 70명의 제자들도 특별히 생각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70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신 사건을 읽을 , 제자들에게 행하신 전도 훈련이나 선교 훈련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하신 말씀은, 세상이 너무 악해서 전도나 선교가 그만큼 위험한 일이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순진한 크리스천들이 악한 세상 사람들에게 전도나 선교를 하는 일이 자칫 잘못하면 위험에 빠질 있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양은 어떤 동물입니까? 약해서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무방비의 동물입니다. 반면, 이리는 포악하고 잔인한 동물을 대표합니다. 야생의 먹이사슬로 보면, 양은 언제나 이리에게 잡아먹히는 존재로, 이리의 밥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 양과 이리의 비유는 분명합니다. 이리는 믿는 세상 사람들을 말하고, 어린 양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사람들도 원래는 이리 같은 세상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어린 양과 같이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어 이리에서 어린 양으로 변화된 제자들을 다시 이리 가운데로 보내십니까?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은 단순히 위험한 아니라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말 제자들을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이리 가운데로 보내십니까?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스승이 제자들을 죽는 데로 보냅니까?


조금 구체적으로 어린 양과 이리로 말씀하신 것의 의문점을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양을 지는 싸움에 보내시는가? 둘째, 제자들은 착한 양으로 보고 믿는 세상은 악한 이리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가 옳은 것인가? 정말 세상은 그렇게 악한가? 셋째,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전부 양처럼 순한가?


사실 요즘 온갖 비윤리적인 행동과 비리 관련 사건에는 교회 직분자들이 연루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작년과 올해 자살한 기업인들은 장로님들이고, 요즘 지탄을 받고 있는 여당 대표는 안수집사님이고, 최근에 촛불은 꺼진다고 망언(?) 국회의원도 교회 집사님입니다. 요즘 개신교가 욕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한국 교회의 상황이라면 오히려 반대일 있겠다는 생각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반대로 ‘양 같은 세상에 이리 같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수도 있겠습니다.


 

2.  성공적인 열매를 거두려면


예수님께서 70명을 파송하신 사건에 대해 성경의 설명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것은 추수할 때에 일꾼이 적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2)


사업가의 논리로 생각해 보면, 사업가는 위험 요소들, 사업의 목표를 달성하는 있어서 방해 요소들을 어떻게 극복하겠습니까? 사업을 잘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위험해도 기회가 오면 투자를 합니다. 투자한다고 100%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으면 실패를 무릅쓰고라도 투자를 합니다. 사업을 안전하게 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안정적으로 수는 있겠지만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는 힘듭니다. 항상 안전하게 하는 사람이 최고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 이민을 와서 1 정도 되었을 대학교에 편입해서 아르바이트를 적이 있습니다. 그때 도매상에서 일을 했는데 21세였습니다. 주인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주로 주얼리를 분류하고 손님이 오면 파는 것이었습니다. 소매는 거의 하고 소매상을 하는 분들이 와서 많이 사가는 도매상이었습니다.


그때 주인아저씨는 싸게 팔아도 많이 팔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아주머니는 적게 팔아도 값을 주고 팔아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분이 그걸 갖고 티격태격 싸우는 겁니다. 하루는 이분들이 정말 대판 싸우고 아저씨가 열을 받아 뭔가를 집어던지고 밖에 나가버리는 바람에 아주머니가 울면서 저를 붙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걸 들어드렸습니다.


그때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 남편을 어떻게 만났는지 등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없고 그냥 “아, 예”라고만 했습니다. 후부터 아주머니가 저를 향해 너무 착하다고 하시며 너무 고마워하고 좋아해주셨습니다. 나중에 그만두고 방문을 다시 왔더니, 가게가 상가 칸을 빌려서 했었는데 아예 빌딩을 지어서 사업이 번창한 것을 보고 반가웠습니다.


뭔가 투자를 해야 그렇게 성공할 있습니다.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위험 요소를 극복해야 합니다. 곳곳에 실패의 요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최고가 되기 위해 도전하다가 실패하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결과가 좋지 않으면 무모한 욕심 때문이라고 말하고, 결과가 좋으면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고 말합니다.


옛날 권투선수 중에 홍수환 선수가 있습니다. 청년들은 모를 같은데, 요즘 여자 배우 권투를 하는 이시영이라는 배우를 처음에 가르친 코치입니다. 이분이 시합 다운을 당하고 다시 일어나 케이오로 이겼다고 해서 ‘사전오기의 신화’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옛날에 너무 잘나가던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세계는 넓고 일은 많다”라고 책도 쓰고 존경받았지만, 나중에 실패하고 결국 재기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세계는 넓어서 숨을 데가 많고, 일이 아니라 빚이 많다”라고 조롱을 했습니다. 끝이 좋아야 하는 같습니다.


한국의 유명한 항공, 운송, 물류 기업들은 대부분 월남전에 뛰어든 회사들입니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월남전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분야에서의 발전도 없었을 것이고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일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언제나 위험 요소와 난관을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업가의 논리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사업가는 같이 일하는 사람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인재를 뽑으려고 하고, 훈련시켜 중요한 일들을 맡기려 합니다. 물론 그러다가 회사 사람이 되면 비리를 숨기는 것으로 연결되어서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제대로 사업가라면 알고 있습니다.


일본의 유명 기업인 마쓰시타 그룹이 있는데, 신입 사원 채용 시험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번은 인사부 전산담당자의 실수로 신입사원 입사 시험에서 수석을 사람을 다른 사람과 혼동하여 불합격으로 처리한 적이 있었습니다. 떨어진 사람은 일본 최고의 대학인 동경대학을 그해 차석으로 졸업했고, 자라면서 시험에 번도 떨어져 적이 없는 수재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입사 시험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너무 괴로워하다가 결국 자살을 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인사 담당자는 전산 처리의 실수가 있었음을 나중에 발견하고 다시 수석 합격했다는 합격 통지서를 보냈지만, 이미 그는 자살을 뒤였습니다. 결국 회사는 크게 책임을 졌다고 합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은 일을 회고하며 나중에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 우리 실수로 죽은 청년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고 책임은 우리 회사가 충분히 졌다. 그러나 그때 청년이 우리 회사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회사로서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가 회사의 중역이 되어 일을 하다가 큰일이 닥쳤다고 가정해보라. 혼자 괴로워하다가 그렇게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한다면 우리 회사는 아주 어려움에 빠지게 것이다.”


물론 아주 비정한 말입니다. 사업가의 입장에서 그랬다는 말입니다. 마쓰시타 회장의 말은, 사람이 크게 되기 위해서는 고난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쓰시타 회장 자신이 어려서부터 아주 약했고, 가난했고, 그리고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아픔과 스스로 싸워 이겨 사람이었습니다. 병약함이라는 어려움, 가난의 어려움, 그리고 배우지 못했다는 어려움을 이겨냈을 , 결국 그를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자리에 앉힌 것입니다.


요즘 다시 화제가 되는 한국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가 있습니다. 선수의 별명이 ‘대인배 김슨생’입니다. 2010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첫날 쇼트 프로그램에서 실수를 많이 해서 점수가 낮았습니다. 그날 호텔방으로 들어와 자기 SNS 남긴 글이 화제였습니다. “쇼트에서 말아 드시고, 방에 들어와 시리얼 말아 드심. 아주 힘든 상황인데 그것을 유머로 넘겼다고, 그래서 멘탈이 강하다 하여 ‘대인배’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2010 동계올림픽에서 한국피겨스케이팅 최초로 금메달을 땄습니다. 2014년에도 금메달을 따는 건데 심판들이 이상하게 해서 은메달을 땄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일을 맡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좋은 결과를 내고 발전하려면 가지 요소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위험 요소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둘째, 누구에게 일을 맡길 것인가?


 

3.  하필이면 어린 양인가?


여기서 예수님은 사업가의 마인드로 이야기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금 추수를 성공적으로 하기 위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실패의 요소도 있고 위험의 요소도 있지만, 포기할 없는 추수의 기회이기 때문에 최고의 일꾼들을 세우려고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말씀의 뜻은 분명합니다. 극복해야 위험 요소는 ‘이리들’이고, 위험한 상황에서 사명을 훌륭히 감당해야 일꾼은 바로 ‘어린 양’입니다.


그런데 이리들이 득실거리는 데에 어린 양을 보낸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은, 중요한 일을 함에 있어서 위험한 상황인 아시면서 하필이면 어린 양을 보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리가 득실거리는 곳에 힘센 사자를 보내도 될까 말까 텐데, 어린 양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뭔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예수님이 뜻하시는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동안 기독교 출판계에서 인기가 있던 주제가 바로 ‘제자도’였습니다. 특별히 제자훈련으로 급성장한 몇몇 교회들이 요즘 윤리적인 문제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면서 몰락하니까, 더더욱 ‘참된 제자란 누구인가? 참된 제자훈련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것입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옛날이든 지금이든, 제자도에 있어서 좋은 제자의 조건을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한다. 둘째, 열심히 배워서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 셋째, 스승의 가르침을 뛰어 넘어야 한다.


배운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으면 그는 제자가 없습니다. 제자의 의미가 없습니다. 진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우고 따라 해서 그것을 전수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수를 하기 위해서는 스승의 수준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것이요, 그보다 일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 14:12,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을 뛰어넘었고, 플라톤도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뛰어넘었습니다. 맹자도 학문의 스승인 공자를 뛰어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신학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제기된 것이 바로 제자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의 거센 도전이 있었는데, 그들이 제기한 문제의 중심에는 바로 12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홀로 십자가를 지시도록 제자들이 그냥 놔두었는가?’하는 문제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었고, 베드로는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으며,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예수님께는 신성이 없고 인성만 있다 주장은, ‘제자들을 보면 선생을 있지 않느냐?’라는 의견에 근거했습니다. 시원치 않은 제자들을 두신 덕분에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에도 오래도록 오해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제자라면 마땅히 스승을 위해 스승이 길을 가야 하고, 후에는 스승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승의 사상을 전수해야 합니다. 나중에 실제로 제자들은 결국 길을 가긴 했지만, 당시의 기준에서 예수님의 제자라면 마땅히 스승을 뛰어넘어야 참된 제자가 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을 뛰어넘는 길이 무엇입니까? 순교 밖에 없습니다. 무차별적으로 박해가 여기저기서 가해지고 세례 요한도 죽은 상황에서, 순교하지 못한다면 그는 제자라고 없을 것입니다. 스승이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데 제자가 순교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상 제자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죽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 20:28, )


이러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생각하며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은 양이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을 정말 사랑하셨다면 보내지 말아야 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말씀의 본래 뜻은 이것입니다. ‘이리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가는 너희를 내가 보호해 줄게’가 아니라 ‘이리 가운데로 너희를 보내서 정말 미안해’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가서 죽어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마태는 예수님이 단호하고 호전적으로 표현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10:17-18)


스승과 제자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보면, 제자들은 분명 자신들이 파송된 현장, 이리들이 득실거리는 가운데서 죽을 때만이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보내신 목적인 추수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4.  우리가 죽을 이리들도 어린 양이 있다


지금은 이전에 비해 순교의 의미가 다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사회에서 또는 한국에서 중동 이슬람 국가들처럼 핍박하거나 죽이지 않습니다. 물론 비난도 있고 점점 공격은 거세지지만, 그래도 예수 믿는다고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순교를 하고 싶어도 순교할 없는 상황입니다. 순교할 방법이 하나 있긴 있습니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선지자 모하메드를 모독하는 일을 공개적으로 하면 와서 순교하게 해줍니다. 파리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 알라를 모독하면 그냥 두는데 모하메드를 모욕하면 공격을 한다는 겁니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순교할 일이 별로 없는데, 그렇다면 순교를 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여기서 실제 순교를 하지 못한다 해도, 순교적인 자세로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순교는 목이 잘려 죽고 그런 것만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인가를 버리는 , 안의 무엇인가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 순교적인 삶을 비로소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16:24-25)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자리에서 순교적인 삶을 ,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를 , 우리는 주님의 목표대로 추수를 잘할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득실거리는 이리들이 우리처럼 또다시 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의 믿는 사람들, 이리에서 양이 것처럼, 우리가 죽을 다른 사람들이 이리에서 양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밀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12:24)


예수님의 눈에는 추수할 것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12명의 제자가 모자라 70명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70명의 제자도 모자라, 우리까지 보내십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시는 같이 위험 부담이 크지만, 그냥 놔둘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두면 저들은 지옥으로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추수거리들이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된 제자들이라면, 주님의 참된 일꾼들이라면, 사명을 감당해서 스승이신 주님께서 계획하신 추수를 감당할 있을 것이라고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가 추수를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술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힘이나 권력이나 학벌로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추수는 제자들의 죽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은 줄을 됩니다. 우리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절대 뛰어넘을 없지만, 예수님의 제자라면 죽음으로써 제자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죽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리들이 가득한 세상으로 보내시는 목적은 싸워서 이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주시니까 그들을 힘으로 누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럴 힘을 주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가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같이 순진하고 미련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죽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증명하며 살다가 손해 보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죽을 때만이 진정한 주님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참된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다 죽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장하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따라 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그런데 주님의 목적대로 나가지 않고, 죽지 않고, 계속 자기 원하는 감정대로 생각대로 살다 보면,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결국 잃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면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부활과 승천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오른편의 영광의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그래서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 물을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죽을 각오로 나아가고 있는가? 저희 모세 목장도 VIP 분들이 계신데, 나름대로 섬긴다고 하지만 되지 않습니다. 되는가? 내가 죽지 않아서 그런 같습니다. 정말 영혼 구원은 죽음으로써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으면 영혼도 살리시고 나도 살려주십니다. 그리고 영광의 자리로 올려주십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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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나의 교회" (요일 3:16-18) - 간증설교 (5/01/19) - 권성욱 장로 kpccoh 2019.05.02 107
197 "예수님 주위를 맴도는 두 부류의 사람들" (눅 15:1-3, 11-32) -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 >- 1 (4/24/19) kpccoh 2019.04.2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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