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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5일 수요예배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교훈 7

우리가 미처 몰랐던 세족식의 참 의미

(요한복음 133~11)

 

 

1.  섬김 이상의 의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세족식에는 섬김과 사랑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족식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섬기고 사랑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사실 세족식이 있었던 최후의 만찬의 날까지도 제자들은 서로 누가 높은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며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항상 관심이 있었고, 그것이 노골적인 다툼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하던 목요일 저녁, 세숫대야와 물이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발을 닦아주는 것을 하지 않고 있던 것을 보면, 제자들은 낮아지는 것에 대해 거북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마음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손수 그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족식을 통해 조금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이 세족식이 섬김의 본을 보여주시려는 목적만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서로 높아지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높아질 것에 관심을 두지 말고 섬기는 데에 초점을 맞추라는 의미로서만 세족식을 손수 행하신 것인가 하는 말입니다.

 

세족식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행하신 일들 중 우리가 거의 유일하게 흉내 낼 수 있는 행위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각종 병자들을 고친 것, 죽은 자를 살리신 것, 물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것 등은 우리가 따라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세족식은 우리가 충분히 따라할 수가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인지 교회에서 세족식은 행사에 많이 활용됩니다. 우리도 <경건의 삶> 과정에서 섬김의 훈련을 할 때 세족식을 실습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교회들이 임직자의 훈련 프로그램에서, 목자 임명식에서, 학생부나 청년부의 수련회 마지막 밤에 세족식을 하기도 합니다. 가장 많이 활용되는 시간은 부부 세미나 때인데, 부부끼리 서로의 발을 씻겨주게 합니다. 세족식을 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섬김의 삶을 살리라 다짐합니다.

 

세족식의 핵심 목적은 섬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섬기셨듯이, 우리도 섬김을 배우고 훈련하기 위해 세족식을 행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서로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섬김은 정말 중요한 일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섬김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0:45)

 

세족식은 우리가 생생하게 바로 이 섬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 세족식이 거행된 때는 최후의 만찬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를 하시던 중 갑자기 일어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3-5)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의 차이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하시며 세족식을 하신 이때는 예수님이 체포되시기 불과 몇 시간 전이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 날인 목요일 저녁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을 영어로 Good Friday라고 하는데, 최후의 만찬을 드신 목요일은 Maundy Thursday라고 부릅니다. “Maundy”란 말은 라틴어 ‘mandatum’에서 온 단어로, ‘계명(commandment)’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후 새 계명을 주신 것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4)

 

이때 예수님의 마음은 몇 시간 후 달리실 십자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의 사명을 다 이루어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계획을 온전히 완성하는 것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 상태이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완전히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이 이제 권력을 잡으시면 누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누가 그분의 오른팔이 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평소에 누가 크냐?’ 하고 싸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식사 자리에서는 대체로 발을 씻기는 의식이 행해집니다. 그런데 너무나 유명한 그림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면서 우리는 그 장면에 대해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그림에는 긴 테이블이 있고 모두가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사실 그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신을 벗고 방 안에서 비스듬히 누운 채 먹는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신 다음,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식사 자리에서 발을 씻어야 한다면 누가 누구를 씻어야 마땅합니까? 그 집의 종들이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있다면, 신분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의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제자들 중에서 가장 낮거나 가장 어린 사람이 예수님과 다른 선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제자들은 모두 발을 씻는 일에 선뜻 나서지 않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상황에서 괜히 먼저 나섰다가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낮은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왕이 되셔도 자기는 높은 벼슬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놀라운 반전을 보여주십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하며 발을 씻는 데 나서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발을 예수님이 손수 씻어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허를 찔린 기분을 느끼며 깜짝 놀랐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 차례가 왔을 때 놀라며 거절을 했는데, 그것은 어떻게 선생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수가 있는가?’ 하는 불편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6)

 

그런데 베드로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참 이상합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7)

 

이 일의 뜻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가 무엇을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베드로가 아무리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 출신이라고 해도, 발을 씻어주는 것이 섬김의 본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에게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사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세족식을 보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섬김만 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도 그것을 따라 하면서 우리도 주님처럼 남들을 섬기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며 나아갑니다. 그것은 결코 틀린 게 아니며, 아주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이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거기에서 조금 더 깊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세족식에 어떤 숨은 의도가 담겨 있습니까?

 

 

2.  세족식에 숨겨진 비밀

 

지난 200812월에 당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방문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누리 알말리키 이라크 총리와 회담을 한 후 둘이 같이 한 기자회견에서 이라크 전쟁이 미국의 보호와 이라크의 안정과 세계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며 이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순간 기자석에 있던 한 남자가 이 전쟁은 끝났다라고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면서 갑자기 신발 두 짝을 부시 대통령을 향해 잇따라 던졌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재빨리 고개를 숙여 피해서 신발을 맞지 않았습니다.

 

신발을 던진 그 기자는 경호요원들에 의해 기자회견장 밖으로 끌려 나갔고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집트 카이로에 소재한 이라크인 소유 -바그다디야텔레비전의 기자인 무탄다르 알-자이디로 확인됐으며, 그는 끌려 나가면서도 아랍어로 부시 대통령을 향해 라고 욕하며 외치기도 했습니다.

 

알자이디가 끌려 나간 후 부시 대통령은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신발 사이즈가 10이라는 것밖에 없다.”라는 우스갯소리로 분위기를 수습하며 곧바로 기자회견을 계속했습니다.

 

그때 그 이라크 기자는 왜 신발을 벗어 던졌을까요? 그것 밖에 던질 게 없어서였을까요? 사실 그의 손에는 당시 기술 수준에 맞게 무거운 금속 케이스의 노트북 컴퓨터와 카메라도 있었을 것이고, 날카로운 펜도 손에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이것저것 마구 집어 던지며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것이 아닌 신발을 벗어 던졌습니다. 저도 그때 TV 뉴스로 그 장면을 봤는데, 그것만 보면 마치 아이들 장난과도 같아 보입니다. 신발로는 큰 타격을 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랍 문화권에서 신발을 사람에게 던지는 것은 중대한 모욕 행위를 뜻합니다. 2003년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사담 후세인 동상을 쓰러뜨렸을 때 이라크 사람들이 와서 그 동상을 신발로 때렸던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게 중동 지역에서는 신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주종 관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대할 때, 종이 주인을 대할 때, 신하가 왕을 대할 때, 신발을 벗습니다. 그것은 철저한 복종을 뜻하며, 높은 상대방 앞에서 나를 감추고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따르겠다라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3:4-5)

 

여기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인도를 받겠다는 표현입니다.

 

실제로 그 후 모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을 평생 믿고 따릅니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을 끝까지 변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은 모세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던 것입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40년 걸려서 가야 하는 길을 2주 만에 갈 수 있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능력이 자신의 삶 속에 임하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무한한 능력으로 자신의 삶에 기적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안 그렇습니까? 그런 능력의 하나님, 기적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 원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모세의 하나님은 그와 정반대셨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그런 하나님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2주면 충분히 걸어 갈 수 있는 길을 40년이나 걸려서 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것도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전혀 없는 삭막한 광야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세는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순종하고 따랐습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에는 바로 이런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 자신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당신의 뜻대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신을 벗으라고 하시며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2주면 갈 수 있는 너의 인생길을 내가 40년 동안 광야의 길로 인도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너는 나를 신뢰하며 따라올 수 있느냐?’ 이러한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래도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그분을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결코 쉽지 않은 대답입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든 신뢰하며 따랐습니다. 심지어 너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고 여기서 죽어야 한다.”라고 하셨을 때도 순종했습니다. 아니, 그런 삶이라면 바보 아닙니까? , 맞습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바보처럼 무조건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신을 벗는 것의 의미입니다그렇다면 나는 주님 앞에서 신을 벗었습니까?

 

모세만이 아닙니다.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도 똑같이 했습니다.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5:14-15)

 

이 사건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의 할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돌칼을 만들어 할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가나안의 첫 성이자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여리고 성과의 전투를 바로 앞에 두고 군사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시다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됩니까? 상식에 어긋납니다. 할례를 받고 괴로워할 때 적군이 쳐들어오면 다 죽는 겁니다. 그런데도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순종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애굽의 수치가 떠나가는 길갈의 역사를 선포하십니다(5:9). 그리고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킵니다.

 

이렇게 순종하고 애굽에서의 과거를 다 정리했을 때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군대장관을 만났고,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명령을 받고서 즉시 순종한 것입니다. 이미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나아간 여호수아는 다시 한 번 신을 벗으면서 절대 순종을 고백했습니다.

 

 

3.  세상에서 믿음으로 치열하게 싸워 이기라

 

다시 요한복음 13장의 베드로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직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이 발을 씻겨주신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뭐라고 하고 또 예수님은 그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8)

 

베드로는 예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네 발을 씻겨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순종과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에 발을 씻어주는 일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과 상관이 없어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깜짝 놀라 다시 말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9-10)

 

베드로는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부탁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베드로에게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발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왜 발이 중요합니까?

 

신을 벗고 예수님이 자신의 발을 씻기시도록 내어드릴 때,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관계가 세워지고 주님의 뜻이 무엇이든지 그분의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따라 살겠다는 순종의 표현이 됩니다. 그 길이 혹시 내가 원하는 것과 달라도 주님께 순종하며 걷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획은 나의 계획보다 정확하고 주님은 내 인생을 완벽하게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러한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주님을 위하여 쓰임을 받아야 하는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험하고 힘들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발을 붙들어주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디베랴 호수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을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는 대답을 들으실 때마다 내 양을 먹이라(치라)”라고 하셨고, 그 다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1:18-19)

 

오늘 본문에서 발을 씻겨주시면서 지금은 네가 모르지만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베드로가 아직도 황제의 길’, 영광의 길을 따라가려 하고 있지만, 앞으로 그가 순교의 자리에까지 가게 될 것을 생각하며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 길을 끝까지 잘 갈 수 있도록 그의 발을 씻어주신 것입니다.

 

취직을 하기 위해서 회사에 지원할 때 내는 것이 이력서입니다. 그런데 이력(履歷)’이라는 것은 내 신발이 걸어온 자국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자는 신발 이()’ 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신고 있던 신이 어디를 밟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적는 것이 이력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떤 이력서를 쓰고 있습니까? 어디를 걷고 있습니까? 어디를 향해 걷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세족식은 분명히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은 섬김의 의미를 넘어서는 세족식의 참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섬김을 넘어 믿음의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족식은 섬김의 훈련일 뿐 아니라, 주님께 발을 내어드림으로 세상에서 믿음으로 싸워 이기는 훈련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싸울 대상은 많습니다. 무엇보다 돈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맘몬의 영과 싸워야 합니다. 또 힘과 권력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세상의 가치관과 타협 없이 싸워야 합니다. 섬김의 대상과 싸움의 대상을 제대로 구분해야 합니다.

 

서로를 섬기며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과 믿음의 싸움을 싸우라는 것이 주님의 뜻인데, 그 당시 제자들은 서로 싸우며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주님 앞에서 신을 벗고 씻김을 받는 세족식의 의미입니다.

 

결국 세족식은 단순히 섬김의 본만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순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철저히 신뢰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이 세상에서의 인생길을 담대히 갈 수 있도록 우리를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우리의 발을 끝까지 붙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세족식은 전투에 나가는 군대에게 출정식과도 같습니다. 세족식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서로를 사랑으로 섬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세상과 싸우러 나가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함께 하겠다는 용기를 주시는 의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싸움에 나가는 제자들은 담대하게 싸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5)

 

우리가 사랑할 때 사람들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을 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에게 진짜 사랑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는 뜻인 동시에,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 다른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섬김과 더불어,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며 이 땅에서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제자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이런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서 살 수 있기를 또 승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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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평화를 위한 기도" (데후 3:6-18) -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11 (9/25/19) kpccoh 2019.09.26 412
219 "큰 환난 중에서의 기도" (고후 1:3-11) -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10 (9/18/19) kpccoh 2019.09.19 932
218 "제일가는 믿음: 백부장의 믿음" (마 8장:5-10절) - 간증설교 (5/11/19) - 박명효 장로 kpccoh 2019.09.12 171
217 "담대한 전도와 선교를 위한 기도" (엡 6:10-20) -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9 (9/04/19) kpccoh 2019.09.05 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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