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20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5

복음의 거침없는 전진

(사도행전 512~16)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보통 두려움을 느낄 때 어떻게 반응을 하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두려우면 이불 속에 숨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막 먹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는 등, 다들 반응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낄 때, 특히 어떤 영적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 어떤 사람들은 그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믿게 되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어느 집안에서 명절이 되어 가족 친지들이 다 같이 모였습니다. 거기에는 예수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던 중에 신앙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데, 한국의 어느 시골 교회에서 성찬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믿지 않는 사람 하나가 갑자기 들어와서 이딴 게 뭐가 필요 있어?” 하고 마구 고함을 지르며 성찬집기를 확 뒤집어엎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성찬식을 거행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얼마나 당황스럽고 당혹스럽겠습니까? 그래서 성찬식을 하다 말고 교회에 난리가 났습니다. 그렇게 예배 중에 난리가 나긴 했지만 어찌어찌 수습이 되었고 그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아무렇지도 않던 그의 집 담벼락이 별안간 무너졌고, 그 남자는 거기를 지나가다가 무너지는 담벼락에 깔려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네. 뭔가 보이지 않는 힘이 있고, 하나님이 정말 있는 모양이구나. 우리도 다음 주부터 교회에 나가자.” 하며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야야, 교회라는 곳은 갈 데가 못 돼. 그거 봐. 잘 살고 있는데 그런 데 괜히 가서 끔찍한 일을 당한 거잖아. 아예 교회 근처에도 가지 마!”라고 하며 교회로부터 더욱 멀어졌습니다.

 

 

1.   큰 두려움과 그에 따른 두 가지 결과

 

놀랍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초대 교회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교회에서 열심히 하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냥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모든 사람이 다 현장에서 목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난 본문의 마지막 절인 511절을 보면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도 있었고 들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다 큰 두려움이 임한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이 말로 전해들은 사람들이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두려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들으면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전해들은 이야기는 교회에서 부부가 헌금을 드렸는데 잘못 드렸다고 세 시간 간격으로 죽어 나갔다는 것입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더욱 나아간 사람들도 있었고,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교제를 끊어버리며 이제는 나가면 안 되겠다하면서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백성은 교회를 칭송했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고 그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공동체라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결과 믿는 사람들도 생겼고, 두려움의 결과 공동체를 멀리 떠나버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  더 가까이 나아온 사람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2)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성령이 살아 역사하시는 교회 공동체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서로 인간적인 친분에 의해서 친하게 왔다 갔다 하는 정도가 아니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형제자매 안에 있는 성령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마음을 같이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같은 분을 섬기고 예배하며 그 안에서 같이 교제하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친한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학연, 지연, 혈연, 또는 나이에 따라 그룹으로 만납니다. 그런 데서도 친하게 지낼 수는 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가족 같은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에 따라 만나는 그룹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계신 분이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같이 하여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이후에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는데, 성도들은 더 영적인 목마름과 갈증을 가지고 더 함께 모여서 더 같이 예배하기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는데, 믿는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 해서 더 모이기를 기뻐했고, 더 함께 나아갔고, 더 예배했고, 더 교제했습니다. 2장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예배와 교제와 훈련과 봉사와 전도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표시가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자꾸 교회에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모임에 자꾸 가고 싶어 합니다. 자꾸 모이고 싶고, 다른 형제자매들과 같이 예배드리고 싶고, 목장에 가고 싶고, 교제하고 싶고..., 이렇게 항상 주님 안에서 자꾸 모이고 싶은 것이 성령 충만의 표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혹시 주일이지만 가기 싫고, 목장도 가기 싫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 봉사를 해야 하는데 가기 싫고 그렇다면,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단지 이것이 인간적으로 내가 선호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기가 싫은 차원이 아니라 이것은 영적인 차원입니다. 나 자신의 신앙에 영적으로 문제가 생긴 표시가 됩니다.

 

자꾸 같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고 같이 교제하고 싶은 것은 성령 충만한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자꾸 안 하고 싶고 가기가 싫은 것은 영적으로 식고 문제가 생겼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증상이 있으면 싫더라도 자꾸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도 모이기를 싫어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자꾸 같이 모이자고 권하는 것입니다(10:25).

 

솔로몬 행각은 그 당시 랍비들이 사람들을 가르쳐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으로 성전 동편에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이곳에서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벌써 교회가 수천, 수만 명이 되었는데 어디서 모이겠습니까


그러니까 2장에도 나온 것처럼 매일 성전에서 모이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넓은 장소에서 모인 겁니다. 수백 명이 모일 때도 있었고, 수천, 수만이 모일 때도 있었습니다. 성전 전체가 공짜로 빌려 쓰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 건물도 아니지만 당당하게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배웠습니다.



2)  떨어져 나간 사람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3)

 

감히 상종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런 교회 공동체에 합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성공에 따라서, 또는 학연, 혈연, 지연이나 혈통에 따라서, 재산이나 인맥에 따라서 멤버가 되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세상에서의 업적이나 성공이나 위치가 있더라도, 그것을 이룬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존경을 해드리며 훌륭하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회에서의 직급이 곧 교회에서의 직급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박사님, 교수님, 닥터님이라고 하지 않고 형제님, 자매님또는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등으로 부릅니다. 사실은 이 기준이 더 높습니다. 세상에서 높은 것보다 이런 기준이 더 높은 겁니다.

 

그런데 당연히 교회는 그런 직분 있는 사람만 나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 주님 뜻대로 살아보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오기만 하면 그냥 멤버가 되는 게 아닙니다. 동시에 아무리 오라고 해도 다 오는 게 아닙니다. 오는 사람도 있고 안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 나머지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누구냐에 대해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먼저는 사도들을 핍박했던 종교지도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성도들과 감히 상종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교회가 성령 충만하니까, 감히 거기 가까이 갈 수가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들이 무섭다고 멀리 도망간 게 아니라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것입니다. 기회를 노리느라고 뒤로 물러갔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교회에 오십시오.’라고 했을 때 왔다면 사실은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아무리 오라고 해도 안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어서 교회 공동체로 들어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세상에서 최고의 회사에 들어가거나, 회장이 되거나, 하버드에 들어간 것보다 훨씬 큰 축복이고 특권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초대장을 보내주신 것이니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렇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이 시대의 지역 교회는 믿는 분도 있고 안 믿는 분도 다닐 수 있습니다. 특히 목장에서는 안 믿는 분들을 같이 초대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교회, 진정한 보편적 교회는 사도신경에서 매주 고백하는 것처럼 각자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역 교회인 우리 교회도 사랑하며 같이 하지만, 다른 교회들도 주님의 교회입니다. 주님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교회의 일원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 있는 어떤 믿는 사람과도 우리는 한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도 처음에는 믿는 사람들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열심히 믿고 봉사하고 사역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적당히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적당히 믿는 사람들이 더 큰소리 치고 활동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그때 터진 겁니다. 엄청나게 교회가 성장하고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는 가운데, 대충 믿던 사람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겁니다. 자기들과 비슷한 부류, 아니 자기들보다 나은 사람들인데 죽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충격입니까?

 

사실 진짜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열심히 섬기고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큰 두려움에 휩싸이고 정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대충대충 믿던 사람들, 설렁설렁 다니던 사람들, 적당히 믿으려던 사람들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분위기가 좋다니까 나도 가볼까’, 사람들이 좋다고 하니까 가볼까, ‘다 가는데 왜 당신만 안 가요?’ 하고 들들 볶여서 간 사람들, 형식적인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 때문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똑같은 죄를 지었는데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대표로 죽은 겁니다. 속으로는 나도 죽는 게 아닌가? 내가 더 엉터리로 했는데.’ 하고 두려운 겁니다.

 

이것은 교회를 다니는 게 전부가 아니라 제대로 다니고 제대로 믿어야 한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 척만 하지 말고 마음으로부터 제대로 믿어야 함을 깨닫게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겉으로는 바리새인들처럼 거룩하고 아름다워 보일 수는 있지만 속은 썩어버린 경우도 있고, 속이 썩었기 때문에 겉으로 아무렇게나 방자하게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실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사건 이후에 두 부류로 확 나뉘었습니다.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 더 나아간 사람들, 또 무서워서 이제 안 되겠다고 하며 밖으로 나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이고, 큰일 났네. 나 같은 사람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곳이네. 나도 계속 있다가는 저렇게 죽어 나가겠네.’라고 하며 떨어져 나간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   두려움의 원인

 

여기서 두려움을 갖게 했던 것은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기 때문인데,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표적이라는 말이 재미있게도 헬라어로 원래 토큰이라는 뜻입니다. 오래 전 어릴 때 버스를 탈 때는 토큰을 냈는데 요즘은 카드로 합니다. 몇 년 전 한국에 갔을 때 청년들이 자꾸 엉덩이를 갖다 대기에 왜 그런가 했더니 뒷주머니에 카드가 든 지갑을 넣었기 때문에 그것을 갖다 댄 것입니다.

 

토큰은 원래 증거물이라는 뜻입니다. 표적이라는 말 속에 증거물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 일어날 어떤 사건에 대해 미리 보여주는 예표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텐데, 그것을 미리 전조 현상으로 보여주는 것이 표적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공동체, 영적인 공동체에 이런 두려움의 사건을 허락하신 것은 앞으로 일어날 어떤 사건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정기검진을 받으러 병원을 가는데, 여러분이 검진을 받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것을 검사하고 피 검사도 했습니다. 2주 후에 알려줄 테니 다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자꾸 내 결과를 보면서 이상하네, 이상하네.”라고 합니다. 그럼 어떤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가슴이 철렁하면서 뭐가 잘못됐나?’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에 의사가 아무래도 다음 주에 수술을 받으셔야겠습니다.”라고 하면 환자로서 어떻습니까? 경고장을 받은 느낌이 들 수도 있고, 큰일 났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고, 큰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의사가 환자에게 다음 주에 우리 수술합시다. 수술하면 낫습니다.”라는 말이 환자를 두렵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말입니까? 오히려 수술하면 낫는다는 희망을 주는 말입니다. 환자의 건강과 행복과 유익을 위해 수술하자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가 그런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일, 두려운 일이 생길 때 무서워서 벌벌 떨게 하시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가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의 두려움을 주시는 이유는 빨리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하면 낫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갈 때 표지판이 있는데 보니까 “100미터 앞에 한 번 빠지면 올라올 수 없는 깊은 웅덩이가 있음이라고 경고가 쓰여 있습니다. 그럼 길 가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 이 마을 사람들은 되게 이상한 사람들이네. 누구 겁을 주나?’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누구나 , 위험한 웅덩이가 있구나. 조심해야겠네.’라고 합니다.

 

이런 게 표적입니다. 이런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두려움을 느끼게 해주시는 것은 우리 인생길 앞에 놓인 위험을 알려주는 표지판과도 같습니다. 우리에게 경각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일이 탁 벌어질 때 정신 못 차리고 계속 잘못 가지 말고, 빨리 정신을 차리고 위험을 피하라는 목적입니다. 그것을 무시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동차를 운전할 때 액셀러레이터가 고장 난 차가 더 무섭습니까, 아니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가 더 무섭습니까? 액셀러레이터가 고장 난 차는 아예 가지도 못하니까 위험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는 사고가 엄청나게 많이 나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위험합니까? 브레이크를 줘야 하는데 그게 고장 나면 죽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두려움을 느낄 만한 표적과 기사로 어떤 사건을 주시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계속 가면 큰일 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무섭다고 떠날 게 아니라, 빨리 정신을 차리고 주님이 지금 내게 뭘 원하시는가?’를 캐치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역사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게 해주시는 것은 그런 기능이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14-15)

 

여기 보면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 이들과 상종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처럼 두려운 일이 벌어졌을 때 어휴 무섭네. 더 믿으면 안 되겠네. 교회에 나가면 안 되겠네.’ 하며 떠나는 사람과 멀리하는 사람은 너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믿고 주님께 나아온다면 정말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가운데 병든 사람들을 메고 나왔습니다. ‘침대와 요 위에 누였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침대라고 하니까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편안한 침대를 생각하면 안 되고, 아주 작은 간이용 침대를 말합니다. 들고 다니면서 놓고 쓰는, 사실 침대로 분류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라는 것도 거적 데기 같은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비싸고 좋은 요가 아닙니다.

 

본문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평소에 침대라고 할 수도 없는 간이용 침상이나 거적 데기를 사용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가난해서 병을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의사에게 갈 수도 없고,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생했던 여인처럼 의사에게 다 갖다 바쳤지만 병이 낫지 않아 이제는 돈이 하나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가난한 사람들을 간이용 침상이나 거적 데기 위에 누여서 거리에 놓고, 특히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림자가 덮이면 낫지 않을까 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심정으로 있었습니다. 이것은 미신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엄청나게 위대한 사람이라는 차원도 아닙니다. 그만큼 베드로는 초대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사도였다는 것이고, 또한 그만큼 그들이 간절한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수만 명이 있기 때문에 사도들이 병을 고쳐주고 있어도 사도들 앞에까지 갈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병이 중한 사람들은 움직이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사도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환자들을 뉘여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길에 그림자라도 덮여서 고쳐지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온 겁니다. 이것은 베드로 개인을 우상화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그만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며 뉘였다는 것입니다. 너무 가난했던 이들의 그 믿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우리가 마음에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에게 이런 간절함이 왜 없는가 하면, 우리는 너무 의사도 많고 병원도 많고 약도 많아서 그렇습니다. 아무 그로서리 스토어에만 가도 약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히려 너무 많이 먹으면 부작용이 나니까 적게 먹으라고 할 정도로 효능이 너무 좋습니다. 그러니까 간절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선교지에 가면 병원도 없고 의사도 없고 약도 없으니까 얼마나 간절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도 선교지에 가서 기도해주면 낫는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성령님이 역사해주십니다. 거기는 성령님 밖에 믿을 구석이 없습니다. 약도, 병원도, 의사도 없고 오직 주님만 믿으며 주님만 신뢰해야 하니까, 그 간절함을 보시고 하나님이 보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들의 간절한 믿음의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16)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랐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도들에게 온 모든 병자들과 귀신 들렸던 사람들까지도 다 나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나은 게 아니라 나음을 얻은 겁니다. 성령이 사도들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사도들에게 무슨 신통한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그들을 통해 일으키셔서, 이들이 주님에 의해 치유를 받았다는 것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가 병원처럼 병자들을 치료하는 곳은 아닌데, 교회는 세상에 없는 것을 주어야 합니다. 세상에 없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입니다. 세상에도 물론 사랑하는 게 있지만, 주님과 같이 나의 생명을 내어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사랑을 주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아실 겁니다. 젊은 유대인 귀족인 유다 벤허가 우연한 사고로 로마군의 반역자가 됩니다. 노예로 팔려 로마군 전함의 노 젓는 노예가 됩니다. 그때 해전이 일어나고 배가 난파되는데, 그 난파된 배의 함장이 로마 해군의 사령관격인 아리우스 제독이었습니다. 조각난 배의 파편을 의지해서 벤허가 아리우스 제독을 구해줍니다. 제독은 로마가 해전에서 패한 줄 알고 칼로 자결하려 하는데, 벤허가 그것을 막습니다. 패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겨서 군함이 이들을 구하러 옵니다. 그때 아리우스 제독이 벤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믿는 너의 하나님은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로마에 승리를 주었구나.”

 

이게 얼마나 놀랍습니까? 벤허를 구하시기 위해서 로마에게 승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도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서 이 사랑을 함께 느끼고, 그 사랑을 보여주고, 그 사랑을 그들도 느낄 수 있게 해줄 수 있습니다. 직장이나 사업에서 일을 할 때, 하나님이 나 때문에 그 자리를 변화시키시고 복을 주시는 놀라운 특권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겁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앞으로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셨습니다. 나 한 사람 때문에 환경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나 한 사람 잘 먹고 잘 살라고 그러시는 게 아니라, 바로 그런 일을 통해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주님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는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삶입니까? 이런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4.   믿음과 현실이 다를 때의 바른 태도

 

그런데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이 나음을 다 입었다고 해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다 육신의 질병이 나았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위대한 사도 바울도 평생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심지어 육신의 가시또는 사탄의 가시라고까지 하면서 세 번을 기도했습니다. 밥 먹을 때 하는 것처럼 간단히 기도했다는 게 아니라, 생명을 걸고 하는 기도를 세 번 했다는 것입니다. 40일 또는 그 이상의 금식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세 번을 기도했는데도 나의 은혜가 네게 충분하다.’라고 하시면서 고쳐주지를 않으셨습니다. 또 그렇게 많은 기적을 일으켰던 구약의 엘리사가 있는데, 죽은 사람도 살려냈습니다. 그런데 정작 엘리사는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사람들의 병은 낫지 않았습니까? 왜 바울 같은 사람은 병이 안 나았습니까? 그들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랬습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많아서 그렇습니까? 당연히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뭘 고백합니까? 자신의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더 주님을 붙들고 더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은혜의 삶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픈 분들이 계실 겁니다. 지병을 평생 달고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와 똑같은 병이 있는 저 사람은 같이 기도하니까 병이 나았는데 왜 나는 안 낫나?’ 또 어떤 경우에 똑같은 암이 걸려서 함께 교회에서 기도했는데, 저 사람은 나았다고 할렐루야하면서 간증을 하지만 내 남편은, 내 아내는 그와 똑같은 암으로 죽습니다.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이런 질문에 100% 만족스러운 답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육신에 아픔이 있거나 병이 있거나 연약하다면, 이것은 나를 괴롭히는 수준이 아니라, 아프기 때문에 더 간절히 하나님을 바라며 찾는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디가 아프십니까? 당연히 우리는 낫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병을 낫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뜻이 있으시면 낫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뜻이 있으셔서 안 낫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질병이 낫든지 또는 낫지 않든지, 어느 쪽이든지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고 계시고 사랑하시고 또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특히 안 낫는 경우는 그 아픔을 통해서 뭔가 일을 일으키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아픔을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전에 그런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 완전히 가정이 깨어지고 엄청난 어려움 속에 거의 자살로 끝내려고 했던 순간에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나중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아가다 보니까 자기 주변과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다 끝났다.’라고 하며 거의 자살 충동이 일어나는 사람들이 보이면서 그들을 붙들고 눈물로 호소했고,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가는 사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살 소망을 얻게 되고 치유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 나의 아픔, 나의 어떤 어려움이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나로 하여금 은혜를 깨닫게 하셔서 놀라운 사역의 도구로 변화시키실 수 있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지금 나에게 육신의 아픔이 있고 질병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봐야 하겠습니까? 분명히 주님은 이 병을 낫게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먼저는 간절히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그림자가 나에게 덮였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먼저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는 붙잡을 수 있는 주님의 옷자락이나 베드로의 그림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 2천 년 전 주님 앞에 나아갔던 병자들을 다 고치셨던 예수님, 그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께서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 않으시지만, 성령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써 간절히 주님 앞에 손을 내밀며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그러므로 오늘 주님을 바라보면서 결단을 해야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표적 앞에 나는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믿고 나아온 사람들처럼 간절히 주님을 찾으며, 주님께 매달리고 신뢰하며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 무섭다하면서 멀어지고 마는 사람이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