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617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8

터져 나온 갈등의 아름다운 해결

(사도행전 61~7)

 

[들어가는 말]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비판을 받게 된 지가 꽤 오래 되었습니다. 안타깝지만 하도 잘 못한다고 심한 말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기득권층을 대변한다고 기득교라고도 하고 또 개독교라고도 합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분들은 잘 느끼지 못할 텐데,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거나 새로 나오는 분들은 교회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언어도 그렇고, 사회와 너무 동떨어진 분위기를 느낍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품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 자기들만을 위해 돈을 쓴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바로 얼마 전 미국에서 제일 크다고 알려진 휴스턴의 레이크우드(Lakewood) 교회의 재정이 공개되면서, 굉장히 많은 헌금이 나오고 예산이 높지만, 그 중 주변 이웃사회를 위해 사용하는 게 너무 적다는 비판 기사를 보았습니다. 자기들을 위해서는 많은 돈을 쓴다고 비난했습니다. 그 정도 큰 규모라면 자기 건물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당연히 써야 하지만, 이웃을 위해서 쓰는 데는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돈 문제가 너무 많이 일어나고,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 교회는 너무 쓸 데 없는 일로 싸운다는 겁니다. 권력 다툼으로 직분을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싸우는 모습이 안 좋게 비칩니다. 사실은 한국 교회가 구제를 많이 하고 있는데 뒤에서 숨어 하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가장 많이 구제하고, 고아원이나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역은 개신교가 가장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돌볼 책임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의 기대를 교회들이 충족시키지를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설교자들이 설교할 때 교회는 구제 단체가 아니다.’라고 선포하는데, 그 말 자체는 맞습니다. 교회는 구제 단체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교회 재정을 운영할 때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사역하는 것은 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본 세상은 교회에 점점 더 큰 실망을 느끼는 것입니다.

 

당연히 교회는 구제만을 위한 단체가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세상 사람들의 기대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초대 교회가 선교와 거의 동등하게 주력했던 일이 바로 구제, 즉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갈라디아서 2:9-10을 보면, 가장 먼저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바울과 바나바를 만나 악수를 하면서 부탁한 사역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였습니다. 최우선적으로 생각했던 사역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교회들도 구제 문제가 쉽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주제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1.   교회 내에서 일어난 갈등 (1~2)

 

1)  문제의 발생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초대 교회를 교회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삼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 안에도 상당히 문제가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한 사건은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와 관련되어서 심각한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도 있었고, 이제 6장에서는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사탄이 끊임없이 교회를 공격하는 것을 봅니다. 외부에서 핍박을 하다가 그게 안 되니까 내부에서 탐심의 문제를 일으키려 하고, 그것이 진정되니까 또 핍박을 하고, 이제는 내부의 갈등을 부추기는 겁니다. 성도들이 갑자기 많이 늘어나니까 헬라파와 히브리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1)

 

여기서 그때에라는 단어를 보면, 5장에서 연결되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 단락에서 사도들은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성전에서든지 집에서든지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5:42), 이제 그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치기와 전도하기의 결과로서 제자가 더 많아졌습니다. ‘제자’, 즉 단순히 왔다 갔다 하는 사람 수가 늘었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정말로 구주와 주인으로 믿고 영접하고 생명을 얻은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초대교회에는 두 가지 좋은 현상이 있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제자가 많아지고, 한 편으로는 구제가 실행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교회 밖이 아니라,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지면서 교회 내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 교인 숫자가 늘어나다보니까, 구제 활동을 할 때 본의 아니게 혜택에서 누락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섭섭함과 불만과 비판의 소리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렇게 된 사람들이 모두 헬라파여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섬김에서 빠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예루살렘 교회는 엄청난 대형교회였습니다. 처음에 120명이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고 나가서 하나님의 큰일을 여러 가지 언어로 이야기했을 때 베드로가 일어나 설교를 했고, 그 말에 마음이 찔린 사람들 3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교회로 들어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를 개척하자고 한 것이 아닌데,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오니까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3천 명이 넘어가고, 조금 후 4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서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보고 그를 일으켰을 때, 그것을 본 사람들이 남자만 5천 명이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갑자기 3천 명과 또 남자만 5천 명이 들어오니까, 그들과 함께 한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하면 최소 만 5천 명에서 2만 명은 된 겁니다. 교회가 서서히 성장해도 힘든데 갑자기 2만 명이 되면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게다가 거기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겠습니까? 100여 명만 모여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만 명, 이만 명이 되면 얼마나 다양하겠습니까? 그렇게 믿는 자의 수가 많아지다 보니까 헬라파, 즉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는 것(소홀히 여김을 받는 것)을 불평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초대 교회 내에 여러 그룹들이 있었다는 것을 봅니다. 특히 히브리파와 헬라파 사이에 약간의 긴장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내의 실권은 아무래도 주로 히브리파가 잡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를 주로 하는 정통 유대인들,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실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돈도 관리하고 구제나 봉사나 기타 사역들을 다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자기 밭이나 집을 팔았을 때 그 돈을 가져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는 표현이 계속 나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이 헌금을 받아서 집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이 많아지고 2만 명이 넘어가다 보니까 사도들이 전부 다 일들을 감당하기에 한계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헬라파는 이방인이 아니라,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었고 예수님을 믿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히브리파와 구분되게 헬라파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고향이 이스라엘 본토가 아니라 이방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 내의 여러 군데에 퍼져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유대인의 피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방 지역에서 출생한 교포 출신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한국 사람들이지만 이곳에서 태어난 2, 3세 들이 Korean American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로 그 당시 공용어였던 헬라어(그리스어)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굉장히 특이한 사람입니다. 분명히 헬라 지역인 길리기아의 다소(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지만, 그는 자기가 헬라파가 아니라 히브리파라고 이야기합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자기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헬라 지역에서 자란 사람이지만 모국어가 히브리어라는 겁니다. 어릴 때부터 히브리어를 하고 살았고, 히브리 문화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자기는 헬라 지역에서 태어났어도 히브리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굉장히 특이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택하신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겁니다. 그는 분명히 헬라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헬라 문화에 아주 익숙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정통 히브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방인 선교를 위해 정통 유대인의 신앙 속에서 자랐으면서도 헬라 문화를 너무 잘 아는 바울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런 교포 출신의 유대인들은 대개 예루살렘에 연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유월절이나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희생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나고, 그 후 사도들이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찔려 결단하고 회개하면서 예수를 믿어 세례를 받고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고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외국에서 왔지만 예루살렘에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그곳에 있던 히브리파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헬라파와 히브리파 사이에는 중대한 생각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이방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방인들을 이해하고 이방인들을 친구로 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이해합니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 자녀들은 당연히 미국 친구들이 많고 영어를 합니다.

 

하지만 본토 출신의 히브리파 사람들은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이런 관점의 차이 때문에 그들이 크리스천이 된 다음에도 본토 히브리파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헬라파 사람들까지도 별로 달갑지 않게 여겼습니다.

 

오래 전 한국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교포 학생들이 방문단으로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6월 항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녀들이 밝고 유쾌한 성향이니까 지나가면서 시끄럽게 떠들며 지나갔습니다. 그때 시위를 벌이느라 앉아 있던 대학생들이 있는데, 전경에게 맞아 죽은 학생도 있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교포 학생들이 웃고 떠들며 지나가고 복장부터가 다르니까, 80년대 무거운 분위기였던 한국 대학생들이 그들에게 가서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 알아듣지 못하기도 하니까 그냥 무시하고 가다가 뺨을 얻어맞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파가 헬라파를 미워했다는 게 이해가 갑니다. 문화가 다르고, 자기들 식으로 해야 하는데 자꾸 이방인 식으로 하려고 하니까 달갑지 않게 여기게 되는 겁니다. 히브리파의 이러한 배타적인 태도는 드디어 초대 교회의 가장 중요한 활동 중 하나이던 매일의 구제와 돌봄을 행하는 자리에서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매일의 구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의 봉사활동이었습니다.

 

 

2)  접대의 의미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어떤 형태의 구제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동안 일반적인 해석은, 이 구제가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매일 식사 대접을 했던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노숙자들을 위한 급식소를 차려 놓고 식사를 제공하는 형태였다는 것입니다. soup kitchen 같은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고 지금까지 해석을 해왔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보게 된 이유는 2절에 있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2)

 

개역한글에는 공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접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공손히 음식을 대접하다라는 뜻입니다. 개역개정에는 접대”, 공동번역에는 식량 배급”, 새번역에는 음식 베푸는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들이 이렇게 번역하는 이유는 접대를 일삼다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가 디아코네인 트라페자이스(diakonein trapezais)’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디아코네인먼지라는 말(코니스)과 전치사(디아)가 합쳐진 말로, ‘먼지가 일어날 만큼 열심히 일하다’, ‘열심히 봉사하다라는 뜻입니다. 영어의 집사에 해당하는 deacon이 바로 이 디아코네인에서 나왔습니다. ‘트라페자이스는 네 발 달린 테이블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테이블 봉사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테이블에서 먼지가 날 정도로 열심히 움직이며 봉사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테이블 봉사는 1절에 나온 것처럼 매일의 구제의 형태를 띠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의미를 따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매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는 사역을 했다고 해석이 됩니다.

 

하지만 이 매일의 구제가 지금의 Homeless soup kitchen처럼 단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일이었다면, 그것 때문에 사도들이 진짜 해야 할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지 못했다는 고백은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나누어줄 음식 준비를 위해 야채를 다듬고 빵을 굽고 썰고 하느라고 기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씀을 묵상하지도 못했던 베드로와 요한 같은 사도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사실 그런 생각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사도들이 직접 하지 않아도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이미 만 명이나 되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들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해 식사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많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식사 봉사 팀은 따로 있고 열두 사도들은 식사를 위한 재정 지출만을 주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더라도 여전히 문제가 있는데, 왜냐하면 식비 지출을 하는 데 있어 다른 모든 것을 다 못하고 매달릴 만큼 그렇게 복잡한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식비는 식사 인원이 어느 정도 고정되면 일정액을 정해서 고정적으로 지출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식비를 지출하는 것 때문에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를 소홀히 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초대 교회가 했던 매일의 구제가 과연 어떤 형태였는지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트라페자이스’(원형은 트라페자)라는 단어는 보통 테이블을 뜻하는데, 단순히 밥 먹는 테이블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돈 바꾸어주는 사람의 계산대라는 뜻도 있습니다. 넓게 보면 거기에는 은행이라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같은 은행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테이블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열 므나의 비유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화를 은행에 예금하지 않았느냐? 그랬더라면, 내가 돌아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것을 찾았을 것이다.” (19:23)

 

여기 나오는 은행이라는 단어의 원어가 바로 이 사도행전 6:2에서 사용된 트라페자이스의 원형인 트라페자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누가복음을 쓴 누가입니다. 같은 누가가 같은 단어를 썼다면 같은 뜻으로 사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을 성경이 해석하게 하라.’는 말도 있는데, 같은 책 안에서 같은 단어가 사용될 때는 같은 뜻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접대라는 말은 매일 식탁을 차려서 사람들을 대접하는 급식소 같은 형태였다기보다는, 일종의 은행과 같이 구제금을 지급하는 곳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들의 말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식사 대접에서 과부들이 빠졌기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화를 낸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식사는 줄을 서서 자기 차례가 되면 타 먹으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밥을 먹겠다고 줄 선 사람을 히브리파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헬라파라고 쫓아냈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4:32, )

 

이 기록만 봐도, 헬라파이든 히브리파이든 서로 도우며 함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직접 한 사람씩 구제금을 전달해주는 문제는 약간 다르다는 겁니다. 초대 교회에는 성도들이 밭이나 집을 팔아서 전 재산을 헌납하고 들어오거나, 들어와서 그렇게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 덕분에 큰 액수의 재정이 쌓여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일일이 가난한 자들에게 지급하는 것은 아주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사실 접대라고 번역된 단어에 주가 달려 있는데 재정 출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매일 은행과 같이 해놓은 사무실에 출근하여 아침 회의를 하고, 직접 창구에 앉아 탁자를 마주 대하고, 일일이 찾아온 사람들을 심사하여 구제금을 지불하던 열두 사도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와서 받아가는 사람이 진짜 과부인지 아닌지, 확인을 다 해봐야 하는 겁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루 종일 수천 명이 몰려오는데 누구에게 구제금을 지급해야 할지 안 해야 할지 사람들의 자격 요건을 심사해야 합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정부에서 생활보호대상자를 선정하는 데 많은 자격 심사가 필요합니다. 가끔 LA에서 보면 수입이 낮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아파트들이 있습니다. 그런 아파트인데도 벤츠, 렉서스, BMW 같은 차들이 즐비하게 서 있습니다. 물론 명의는 자녀나 다른 사람 앞으로 되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사실은 돈이 많으면서 서류상으로 속여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아닙니까? 그런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심사를 잘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가 생활보호대상자들을 선정해서 일정한 금액의 구제금을 지급하는 일을 했다면, 사도들은 그 일을 하느라 정신없이 매일 바쁘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매일 괴로움 가운데 보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들 중 다수가 원래 갈릴리 어부 출신입니다. 그런데 매일 돈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하니까 얼마나 복잡했겠습니까? 매일 구제금 지급 대상자 명단을 결정하여 지불해야 하고, 하루가 끝나면 일일이 장부를 맞추어봐야 합니다.

 

이렇게 매일 결산, 통계, 장부 정리, 새로운 구제대상자 심사 등 너무 많은 구제 업무 때문에, 사도들은 본래 자기들이 해야 할 말씀과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매일 돈 문제에 치여서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아무래도 신원이 확실하고 자기들과 언어도 잘 통하는, 또 원래부터 잘 알아서 확실한 사람들에게는 쉽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히브리파 사람들은 잘 받았고, 헬라파는 처음 보는 사람도 있고 그러니 진짜인지 가짜인지 심사도 많이 해야 하고, 그런 과정에서 빠지는 사람들이 나온 것입니다.

 

 

3)  문제의 원인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여러분, 어떤 교회가 환상적인 교회입니까? 예를 들어, 이사를 가서 다닐 교회를 찾아야 하는데, 제일 좋은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문제없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교회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환상적인 교회, 정말 좋은 교회는, 문제가 있지만 해결할 능력이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 내에 문제가 발생한 것을 알게 된 사도들은 지혜로운 판단을 가지고 개입하게 됩니다.

우선 사도들은 모든 제자들을 불러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2). 모든 믿는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정식으로 회개하고 믿고 세례를 받은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우리가 회의하며 투표할 때 출석하는 모든 사람이 다 와서 하는 게 아니라 활동교인이 된 사람들만 투표하는 것이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문제 해결에 참여시킨 것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공동의회를 하는 식입니다. 모든 제자들을 부른 사도들은 자신들에게서 나타난 문제점에 대해 솔직히 인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그 동안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너무 접대(구제) 사역에 몰두하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다는 원인을 정확히 이야기합니다.

 

헬라파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사도들의 반응은 짜증을 내거나 자기를 방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확히 문제의 핵심을 보고 자기들의 문제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밝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2)입니다.

 

접대(봉사, 구제 사역)가 나쁜 게 아니라, 자기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그것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데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선순위가 바뀌면 이렇게 문제가 생깁니다. 사도들이 말씀보다 음식, 구제에 더 관심을 가지니까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2.   사도들의 해결책 (3~4)

 

그래서 사도들이 제안을 하는데, 일꾼을 세우자고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3-4)

 

왜 일곱 명을 뽑았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7이 완전수라 그럴 수도 있고, 사실 12가 더 완전수인데(열두 사도처럼) 열둘로 안 하고 그냥 일곱 명으로 했다는 것은, 이 정도의 숫자이면 당시의 봉사를 감당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무 숫자에 집중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한두 명이 아니라 일곱 명을 뽑아서 일곱 명이 팀 사역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뛰어난 한 사람이 독불장군으로 다 맡아서 하는 게 아니라 팀으로 하게 했습니다.

 

여기 본문을 보면 분명히 제자”(1)가 있고 열두 사도”(2)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요즘 식으로 교인들이라고 할 수 있고, 사도는 목회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목사나 장로나 집사의 직분이 그 당시에는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제자는 지금의 교인, ‘사도는 목회자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습니다.

 

사도들은 제자들, 즉 교인들을 불러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지도자를 뽑도록 합니다. 어떻게 선출했는지 그 방식은 여기에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교인들이 이 일곱 명을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도 공천위원회가 열심히 작업하여 추천을 하지만, 활동교인들이 일꾼들을 선출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제자와 사도 외에, 세 번째 종류의 사람들인 일곱 명이 등장합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흔히 집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집사라는 말이 없습니다. 물론 장로라는 말도 안 나옵니다. 그저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지금의 교회 장로나 집사직의 초기 형태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열두 사도가 모든 것을 다 주관하며 인도했는데, 이제는 함께 사역을 나눠서 할 필요를 느끼고 일곱 명의 지도자들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들을 세운 이유는 함께 교회 사역을 감당하기 위함입니다. 누가 더 높은지 낮은지를 따지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위에 있고, 일곱 명은 그 밑이고, 나머지 성도들은 더 밑이라고 계급을 구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지금도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권사나 아니면 아무 직분 없는 보통 교인이나, 계급이 아니라 역할입니다. 사도는 우리가 더 높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사도로서 할 일이 있고, 이제는 할 일이 너무 많아져서 자기들이 원래 할 일에 집중해야 하니까 이 사역만 전담할 사람들을 뽑자는 것입니다. 역할이 다른 것이지, 누가 위고 아래인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일꾼을 뽑는 것도 똑같습니다. 장로는 집사보다 높고, 집사는 평신도보다 높은 게 아닙니다. 일꾼을 뽑는 것은 사역을 함께 할 동역자를 뽑아서 역할을 감당하며 교회의 일을 나눠서 하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선출함에 있어서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아무나 그냥 뽑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1)  성령이 충만한 사람

 

교회의 일꾼은 개인의 사회적 지위, 학력, 경력, 재력에 따라서 뽑는 게 아니라, 영적인 성숙도를 보고 뽑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선출되어야 합니다. 사회에서 박사라고, 교수라고, 국회의원이라고, 돈 많은 부자라고 교회에서 직분자로 뽑힌다면 정말 주님이 슬퍼하시는 교회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뽑혀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무엇이 성령 충만한 것입니까? 그 사람이 성령 충만한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게 뭡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니까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성령님의 뜻대로,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것을 실행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그러니까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결국 이웃 사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너무 성령 충만하다라고 말하는데, 다른 사람과 전혀 관계가 없고, 피하기만 하고, 전혀 함께 봉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섬기지 않는다면, 성령 충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차고 흘러 넘쳐서 이웃에게로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지혜가 충만한 사람

 

어떤 사람은 성품도 좋고 영적으로도 깨어 있는 삶을 살고 기도와 말씀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할 말과 못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성령 충만하다고 하고 열심을 가졌다고 해도 덕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이 지혜도 역시 혼자 지혜를 가진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나오는 지혜입니다. 성령 충만도, 지혜 충만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납니다. 분별력 있고, 상황을 잘 판단할 줄 알고, 할 말과 안 할 말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 것만 주장하는 사람, 자기 의견만 옳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의 의견에는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줄 줄 알고 부드러운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잠언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문제를 많이 발견하고 탁탁 지적하는 게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똑똑한 사람이긴 한데, 문제를 해결할 줄 알아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래 전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분이 하루는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하는데 기름기가 적은 고기를 주십시오.” 하고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종업원이 갖고 온 고기에 기름(지방)이 너무 많이 붙어 있었습니다. 부탁을 받은 종업원이 가져와서 그것을 보니까 얼마나 미안합니까? 그가 당황하고 있는데 김수환 추기경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집의 고기는 운동을 안 한 소를 쓰나 봅니다. 할 수 없지요. 제가 먹고 운동하지요.” 그리고 씩 웃으셨답니다.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게 뭐냐? 반대로 주문했는데 어떻게 이런 고기를 줄 수 있느냐? 매니저 불러와. 주인 불러와.’라고 따지며 환불을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분은 자기 이익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 종업원의 입장을 생각해준 것입니다. 자기도 얼마나 곤란하겠습니까? 도로 음식을 들고 가면 사장에게 얼마나 혼나겠습니까? 그 사람의 입장을 먼저 고려해준 것입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는 재치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따뜻한 사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나오는 지혜입니다. 우리 모두는 똑똑하기도 해야겠지만,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바로 그런 분들이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져야 되겠습니다.

 

3)  칭찬 받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인정할만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존경을 얻기가 가장 힘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가족입니다.

 

그래서 올랜도 비전교회는 직분자를 세울 때 아이들에게 물어본다고 합니다. 장로 후보가 된 분의 자녀를 불러서 너의 아빠가 이번에 장로 후보가 되셨는데, 네가 보기에 네 아빠는 충분히 장로가 될 만하냐?” 그러면 아이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다, 아니다 말한다고 합니다. 같이 사는 사람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정말 그렇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사람이라면 진짜입니다. 함께 하며 사역할 때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칭찬 받고 인정받는다면 그 사람은 진짜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어떤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합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있으면 일은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이 아니라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도, 목장을 하는 것도, 삶 공부를 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신앙인과 제자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4)  너희 가운데서

 

리더는 교인들 가운데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병을 수입해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요즘 월드컵 축구대회가 시작됐는데, 월드컵도 그렇고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을 볼 때 특히 중동 국가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귀화시켜 출전시키는 경우가 많은 것을 봅니다. 농구에서도 미국 대학 농구나 NBA 출신 선수를 귀화시켜서 자기 나라의 선수로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일꾼은 용병을 수입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 자라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대형 교회에서 훌륭한 일꾼으로 잘 섬기던 분이 왔다고 바로 우리 교회의 장로로 모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휴스턴이나 올랜도 등 가정교회를 잘하는 교회에서 목자를 열심히 하던 분들이 왜 우리 교회에는 오지를 않나? 와서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분들이 왔다고 바로 되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하나가 되어 신앙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되는 것이지, 어디서 수입해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기준은 완벽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냥 보기에 괜찮은 사람들을 뽑은 것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뽑은 것도 아니라, 이미 훈련을 받고 검증된 사람, 특히 그렇게 많은 교인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지고, 특히 영적으로 또 인격적으로 잘 갖춰진 사람,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겠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섬기던 사람 중에서 선출했다는 말입니다.

 

 

3.   일꾼들의 선택과 결과 (5-7)

 

제자들은 사도들이 한 제안에 대해 기뻐하면서 제시된 기준에 따라 일곱 명을 선출합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5-6)

 

이들을 흔히 일곱 집사라고 부르는데, 사실 원어 성경에는 집사라는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섬기는 목적을 위해 뽑혔다고 해서 흔히 집사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교회 재정 담당 업무를 맡았습니다.

 

열두 사도가 하던 일이 단순히 매일의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면 굳이 일곱 명의 지도자들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으로 뽑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일 잘하고 요리 잘하고 돈 계산을 잘하는 사람으로 뽑는 것이 낫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일은 식사를 나누어주는 봉사가 아니라, 재정을 직접 운영하는 일종의 사회 복지 금융 업무, 교회의 재정을 맡는 일이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도 성숙하고 사람들로부터도 칭찬을 받으며 신뢰를 얻은 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를 뽑았습니다. 뒤의 다섯 명은 잘 안 나오지만, 스데반은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고, 빌립은 나중에 8장을 보면 전도를 열심히 하다가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단순히 재정을 맡은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하여 세웁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왜 놀라운가? 일곱 명의 이름이 하나같이 헬라파였던 것입니다. 헬라파가 문제를 제기하면 보통 그럼 43으로 하자. 우리가 조금 더 많으니까 히브리파 넷, 헬라파 셋!’ 이런 게 보통 교회에서 많이 하는 일 아닙니까? 꼭 나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원 다 헬라파로 합니다.

 

그러니까 이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성숙한 교회였습니까? 자기 이익을 따져서 한 게 아니라, 교회에 가장 유익한 길이 뭔가, 이렇게 빠진 과부들을 가장 잘 돌볼 수 있는 길이 뭔가를 생각하며, 전원 다 헬라파로 뽑은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7)

 

초대교회가 일꾼을 바르게 세우니까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왕성해졌습니다. 이 말은 성경 교훈의 말씀이 더 많아지고 질이 깊어졌다는 것입니다. 재정은 일곱 명에게 맡기고 사도들이 말씀에 전념하고 기도에 전념하게 되니까 가르침이 깊어지고 넓어진 것을 봅니다.

 

둘째,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그것이 진짜 부흥입니다. 그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셋째, 세상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죽이려고 위협하던 자들이 제사장들인데, 그 제사장들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가는 말]

 

이처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 명이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졌을 때, 그래서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고 집중하며 나아갔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더욱 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부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바른 일꾼들을 세우느냐 못 세우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년 공천위원회가 이맘때면 열심히 일꾼을 세우기 위해 기도로 준비하는데, 공천위원회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성령이 충만한 사람, 지혜가 충만한 사람, 그리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이러한 분들이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지고, 목회자는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며 나아갈 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성도들이 행복한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