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부터 사도행전 강해를 해오고 있는데 이제 9장 중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내에서만 아니라 교회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도 사도행전 9장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설교 때는 자세한 내용을 전부 다룰 수 없기 때문에, 사울과 관련되어 사도행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보충되는 이야기들을 여기에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사울은 원래 소아시아 남동부에 위치한 길리기아 지역의 다소(타르수스) 출신입니다. 다소의 시민법에는 특이한 사항이 있었는데, 그곳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500드라크마 이상의 재산을 소유해야 한다는 자격 조건이었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될 때 로마 천부장에게 자신은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21:39)이라고 밝힌 것을 보면, 그의 이름이 다소의 시민 명부에 올라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유대인이었지만 다소의 시민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고, 그의 집안은 그곳 시민이 될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다소의 시민이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사울의 부모가 그의 출생 전에 이미 로마 시민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소나 로마의 시민권보다 훨씬 더 소중하게 여겼던 것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이 자신에 대해 쓴 것을 보면, ‘8일 만에 할례 받은 자,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보면 사울의 집안은 헬라 지역에 살면서도 히브리적 생활방식을 철저히 지켰고 이방 문화에 동화되는 것을 강력히 거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제1 언어는 히브리어였던 것입니다.

 

사울의 부모가 헬라 세계에 살면서도 얼마나 히브리적 유산을 소중하게 여겼는지는 사울을 어린 나이에 예루살렘으로 조기 유학을 보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파의 양대 학파가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인데, 힐렐의 직계 수제자였고 당시 힐렐 학파를 이끌던 수장이 가말리엘이었습니다. 사울은 바로 그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우는 가운데 탁월한 율법학자가 되는 과정을 밟았습니다.

 

사울은 율법과 유대교 전통에 철저했던 광신자로서,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라고 선포하며 유대교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이던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스데반을 죽이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시리아의 다메섹(다마스쿠스)까지 가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다가 산헤드린 공회 재판에 넘기려고 쫓아갔습니다.

 

다메섹에는 이미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사울이 다메섹까지 대제사장의 공문을 들고 간 것은, 원래부터 거기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박해를 피해 다메섹까지 달아난 헬라파 유대인 크리스천들을 잡으러 간 것입니다.

 

사울이 그토록 엄청난 열심을 가지고 살기등등하여 교회를 박해했던 가장 큰 이유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신명기 21:23)는 말씀에 비추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결코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중에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하였기 때문입니다.” (3:13, 새번역)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자발적으로 들어가셨고, 그럼으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어 우리가 받아야 마땅했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율법 중심으로 살던 그의 삶은 예수님 중심으로 완전히 바뀌었고, 그것이 그의 인생을 온전히 지배하며 생명을 다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