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2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사도행전 16~14)

 

[들어가는 말]

 

아이들이 어릴 때 장거리 운전을 하고 여행을 가거나 일이 있어서 갈 때면 반드시 아이들이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한국 아이건, 미국 아이건, 똑같습니다. “Are we almost there yet?” 저도 제 아들이 어릴 때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러 운전하고 가는데, 6-7시간 걸리는 거리 중에서 한 시간 정도나 지났을까, 아들이 질문합니다. “Are we almost there yet?” 조금 가다 또 질문하고, 조금 가다 또 하고, 아주 수시로 거의 다 왔냐고 질문을 합니다. 요즘도 많이 컸지만 같은 질문을 계속합니다.

 

그런데 그 ‘almost(거의)’라는 단어는 상대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나이아가라 폭포나 뉴욕이나 워싱턴 DC로 여행을 한다면, 한 시간쯤 남았을 때 거의 다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운타운에 간다면 몇 분 남았을 때 거의 다 왔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여행 중에 부모에게 거의 다 왔느냐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마치 나이아가라로 가고 있는데 다운타운에 가는 정도로 제자들이 생각하고 계속해서 거의 다 왔느냐고 수시로 질문해대는 아이의 질문처럼 느껴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성령님이 예수님 위에 비둘기처럼 내려오신 것과 같이, 이제 성령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내려오시게 됩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의 전체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믿는 자들을 통해 전 세계에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이 되어 성령을 받을 때까지는 먼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이후 승천까지 40(3) 동안 계셨고, 그리고 승천하신 후 오순절까지 10일을 더 계셨습니다. 지금도 부활절 후 50일째 되는 날이 성령강림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50일을 기다리는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던 게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그들이 행한 네 가지 중요한 사건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 마지막 열흘 동안 그들이 뭘 했습니까?

 

첫째, 그들은 사명을 받았습니다(6-8).

둘째, 그들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9-11).

셋째, 그들은 함께 기도에 힘썼습니다(12-14).

넷째, 그들은 죽은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열두 번째 사도로 뽑았습니다(15-26).

 

이 네 가지 중 첫 세 가지 사건을 오늘 본문에서 다루게 됩니다.

 

 

1.   사명을 받은 사도들 (6-8)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보이시고, 부활의 여러 가지 확실한 증거를 40일 동안 보여주셨습니다. 40일 동안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최고의 집중 교육을 하셨습니다. 마치 대학입시 학원 강사가 시험을 얼마 안 남겼을 때 마지막 총정리로 집약해서 집중적으로 정리해주는 것처럼, 예수님은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이 40일 동안 총정리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이때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3)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동안 전하신 메시지의 핵심이었고, 부활하신 후에도 계속해서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받기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을 몇 날이 못 되어”(5)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가지 주제는 바로 하나님 나라성령에 대한 것입니다. 이사야와 에스겔과 요엘 같은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통해 새로운 왕국을 세우실 때 당신의 영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계속해서 선포했습니다. 특히 2장에서 베드로가 설교할 때 요엘서를 인용하면서,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영이 풍성하게 넘쳐흘러 세상 모든 백성들이 누리게 되는 것이야말로 진짜 복이고,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중요한 표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로 그것을 생각하며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6)

 

제자들이 한 질문을 보면서 우리는 쉽게 그들이 여전히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고 보통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만한 질문입니다. 제자들이 처음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나 3년 동안 따라다녔을 때는 여기 나오는 것처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생각하며 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정세나 주변 상황을 보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와 세례 요한이 오기 전 400년 정도의 긴 기간 동안 아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메시야를 기다리는 마음이 백성들 가운데 올라오고 고대하고 있던 바로 그때 예수님이 탁 나타나시니까,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세우신 분이라고 믿었고, 다윗 왕과 같은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은 그들이 보기에 메시야(구원자)로서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며 고난의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 예수님도 왕이 되기 전에 그런 기다림과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그분의 정부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고 싶었기 때문에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수시로 싸웠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자기 엄마까지 데려다가 치맛바람까지 일으키면서 한 사람은 오른쪽, 다른 사람은 왼쪽에 앉혀 달라고 청탁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2인자의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계속 싸웠습니다.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저런 능력이라면, 예루살렘에서 자기들을 압제하는 로마를 물리치고 왕이 되시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결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전 세계는 주님 앞에 돌아온다는 구약의 여러 예언들이 성취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최고의 나라가 되어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고, 유대 민족이 넘버원이 될 것이며, 그때 세상 모든 나라들은 자신들의 악함과 죄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복이 전 창조 세계에도 임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당시 오랜 기간 다른 민족들의 지배를 받으며 신음해온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메시야 대망 사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요약된 말이 바로 제자들이 한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이제 드디어 우리가 넘버원 되는 겁니까?

 

그런데 이 질문이 바로 어린아이들이 여행할 때 하는 질문과 비슷한 겁니다. “Are we almost there yet? 거의 다 왔나요?” 그들은 계속 그 질문을 하면서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이제 다 됐나요? 이제 다 됐나요?’ 이제는 정말 다 왔다고 생각될 즈음에 그들의 기대와는 완전히 반대로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잡히시고 잔인한 고문을 당하셨습니다.

 

요즘 한국에 <1987>이라고, 1987년에 고문당해 죽은 학생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져 인기라고 하는데, 그런 고문은 저리 가라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잔인한 고문을 당하셨습니다. 살이 쭉쭉 찢어지는 채찍질을 당하시면서 정말 많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유대인들이 끔찍한 저주라고 여기는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소망은 다 무너진 것 같았습니다. 저분인 줄 알고 따랐는데 아니었던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새로운 소망이 생깁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았다는 신명기의 말씀에 따라 그렇게 저주받은 자 예수는 메시야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저주를 깨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이분이 정말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저주를 깨고,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었는데 그렇게 하셨다면, 죽음을 정복하셨다면, 정말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기대감으로 충만하여 다시 묻습니다. “Are we almost there yet?”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그러나 그들의 질문은 단어 하나하나마다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이 말한 동사, 명사, 부사 모두 하나님 나라에 대해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먼저, 여기에 회복하다’(restore)라는 동사는 그들이 정치적인 나라, 영토를 가진 나라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땅이 있는 영토적인 개념이 아니어서, 어떤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고 표시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이스라엘 나라를 혼동함으로써 여전히 이런 영토적 개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이라는 명사는 자기들만의 민족 국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기 민족이 드디어 넘버원이 되는 것을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좁은 마음과 민족주의적인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행전을 죽 읽어보면 이 예수님의 제자들(사도들)조차 이 사상에서 벗어나는 데 굉장히 오래 걸렸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벗어나는 것이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독립을 회복시켜주실 것이냐고 예수님께 물은 것입니다. BC 2세기에 마카비 형제가 독립을 잠시 되찾아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처럼 독입을 주실 거냐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때라는 부사는 그 나라가 즉각적으로 지금 세워질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시켜주실 거냐는 점이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던 바였습니다. “Are we almost there yet?” 이것이 계속 묻던 질문이고, 지금도 똑같은 질문을 하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그렇게 많은 교육과 훈련을 받았고,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같이 살면서 훈련을 받았고, 또 마지막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 집중적인 재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적인 시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7-8)

 

이스라엘의 회복 시기에 관한 문제나 종말의 문제와 같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고유 권한에 속하고, 우리 인간이 알 바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정말 알아야 하고 행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넘버원이 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질 게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관심을 가질 것은 때와 시기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라. 그것이 곧 증인으로 사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 종류의 지역이 나옵니다. 예루살렘,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전체의 구성이 딱 이와 같습니다. 1-7장은 예루살렘에서 일이 벌어집니다. 8-12장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13-28장에는 땅 끝까지 복음이 나아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날 텐데,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권능(능력)을 받게 됩니다.

 

권능이라는 단어가 헬라어 원어로 두나미스(dunamis)’입니다. 바로 여기서 dynamite, dynamic과 같은 단어들이 나왔습니다. 두나미스는 요즘 말로 하면 핵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위력을 말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핵폭탄이 없으니까 다이나마이트로 표현했지만, 핵폭탄과 같이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능력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런 엄청난 권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의 증인이 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일종의 예언입니다. ‘증인이 되어라가 아니라 증인이 될 것이다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증인이 아니면 주님의 제자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정말 나를 따르는 사람이면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땅 끝까지 가서 주님의 증인의 사명을 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이 제자들은 외국에 나가본 적도 없고 대다수가 갈릴리 촌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령의 핵폭탄을 받으니까 가능한 겁니다. 그런 능력을 받으니까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이 사도들만 아니라 그 후에 모든 믿는 사람들, 우리들까지도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주님의 증인이고 능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시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서로를 볼 때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결코 시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핵폭탄을 품고 다니는 아주 위험한사람들입니다. 가끔 보면 테러리스트들이 옷 속에 폭탄을 달고 다니고 보여주면서 위협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가 테러리스트는 아니지만 그렇게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기피합니다. 위험하기 때문에. 정말 예수를 제대로 믿고 살면 위험하기 때문에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엄청난 위력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9)

 

예수님의 승천은 비밀리에 혼자 몰래 이루어진 게 아니라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공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 잘 보면 올려져 가시니라고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올라가신 게 아니라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올리셨다는 것입닏. 물론 예수님을 승천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정말 신비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끌어올리심으로 중력의 힘을 초월하시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옛날에 에녹이나 엘리야 같은 사람들도 하나님이 직접 데려가셨다고 했는데, 예수님도 직접 데려가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예수가 지구에서 우주의 다른 별로 갔다고 하는 책 제목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연구를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은데, 이 지구에서 우주의 어느 지점으로 가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지금 올라가 계신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창조 세계에 속한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물리적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지식을 뛰어넘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이해가 안 간다고 엉터리라고 하면 안 됩니다. 스마트폰처럼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게 어디 있냐고 상상하지 못하던 것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자연스러운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없는 게 아닙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시시하거나 엉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의 지식을 뛰어넘습니다. 그런 세계로 가신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순간까지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 제자들은 그저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며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예수님이 올라가신 곳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때 두 천사가 나타나 그들에게 말합니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0-11)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하고 말하는 것은,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잊고 기적 현상 자체에 지금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멍하니 있지 말고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항상 우리가 감당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호기심이나 어떤 현상 때문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떤 신비로운 현상이 벌어졌을 때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멍하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점입니다이것은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늘로부터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구름을 타고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어린아기로 조용히 오셨지만, 재림은 초자연적이고 공개적이며 전 세계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

 

 

3.   함께 기도에 힘쓴 제자들 (12-14)

 

이처럼 주님의 승천을 목격하고 천사들의 메시지를 들은 제자들이 그 다음에 무엇을 합니까?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2)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감람산 기슭 어딘가에서 승천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번에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감람산에 가보았는데 가까운 거리입니다.

 

이때는 사실 아주 큰 위기의 순간입니다. 그들이 믿고 따랐던 주님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셨기 때문입니다. 리더가 없어진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럼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어디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까? 그들에게는 무엇을 하라는 구체적인 지침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것은 딱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라는 한 마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의 끝인 24장에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신 것을 기록했고,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도 똑같은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이때 제자들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두려움과 불안이 있는 동시에, 뭔가 기대와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사라지셔서 불안하고 두렵지만,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으니까 기대도 됩니다. 그것이 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그러나 불안하면서도 기대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들이 한 일은 같이 모여 기도한 것입니다.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13-14)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사도들이 다 모였고, 그 외에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도 있었습니다. 15절에 보면 거기 모인 사람의 수가 약 120명 정도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기도를 할 때도 뿔뿔이 흩어져 각자 알아서 한 게 아니라 같이 했습니다.

 

사람마다 각자 다 다르고 개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모여 있는 이 사람들은 서로의 인간적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한곳에 모여 지금 똑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들은 교회를 시작하려고 해서 시작된 게 아닙니다. 그냥 이 자체가 교회가 된 겁니다. 성령이 임하시면서 본격적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다 다릅니다. 성격도, 배경도, 지위도, 학력도, 능력도, 취미도 다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다 다른 사람들이지만 마음을 같이 할 때 하나가 되어서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3주 동안 했던 다니엘금식기도도 바로 그런 취지입니다. 우리가 각자도 물론 기도하지만 같이 기도하자는 겁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4월의 목회자 컨퍼런스도 바로 그런 같은 마음으로 감당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여서 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회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하는 말장난 중에 회의를 많이 하면 회의가 생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부분 문제가 생기면 먼저 모임부터 하고 회의부터 합니다. 심지어 문을 잠가 놓고 밤새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제가 오래 전에 섬겼던 교회에서는 당회가 너무 길어져서 밤 12, 1시까지 하다가 그래도 안 끝나서 또 다른 날 모여서 하기도 했습니다. 하루가 아니라 며칠씩 토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이냐?’ 하고 회의를 하지 않았고 토론을 벌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무엇을 했습니까? 기도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한 다음에 기도를 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전 세계의 크리스천들의 문제가 뭔가 하면 너무 상식적인 것입니다. 물론 복음은 절대로 몰상식하지 않습니다. 상식을 무시하지도 않고 비상식’(상식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초상식’, 상식을 초월하는 게 복음입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이 너무 상식적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다 믿습니다. 하나님은 믿는데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합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범위 내에서만 믿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건 하나님도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말은 그렇게 안 해도 행동을 보면 그렇게 믿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게 문제가 아니라, 믿는데 하나님을 제한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너무 내 상식에 하나님을 가둬놓는 게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내 상식을 초월하여 엄청난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나와 우리와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짧은 경험과 지식과 상식으로 하나님을 제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게 죄입니다.

 

또 문제가 뭐냐 하면, 성령이 역사하셔서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게 하신 것,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쓰게 하신 것,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의 역사로 구원받게 하신 것을 믿는데, 딱 그것만 믿는 것입니다. 오늘도 놀랍게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엄청난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그것을 제한합니다.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것은 다 틀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경험을 의지하면 안 되고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에 나와 있는데도 내가 경험을 안 했기 때문에 틀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았고, 같이 먹고 마시고 자고, 같이 지냈고, 십자가도 보았고, 부활을 목격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너희가 체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나는 이제 떠나지만, 나 대신 너희가 따를 리더를 보내겠다.”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임하실 때 이들이 놀라운 일들을 했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마음이 하나가 되어 같이 한 것이 바로 기도였습니다. 이들은 정말 합심해서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를 다 열심히 합니다. 혼자 새벽기도도 하고 이번 다니엘 금식기도처럼 특별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기도에 있어 문제는, 기도를 안 하는 게 아니라 기도할 때 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데 기도할 때 온갖 잡생각이 다 들어옵니다. 입으로는 기도하는데 머리로는 딴 생각을 하거나, 대표기도 때도 마음을 모아 같이 기도해야 하는데 머리로는 딴 생각을 합니다.

 

문제는 기도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생명을 걸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제가 저를 봐도 이렇게 기도해서 되겠나?’ 하는 때가 많습니다. 너무 캐주얼하게 하고 해야 되니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실한 기도를 하지 않고 시간만 때우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물론 그 자체도 귀합니다. 어떻게든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는 것이 기도니까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한다면 문제라는 겁니다.

 

이들은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되어 있습니다. 열흘 동안 이 사람들이 다른 것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기도만 했습니다. 그것도 각자 한 게 아니라 다 같이 했습니다. 혹시 옆에서 누가 봤다면, 그리고 그때 신문이 있었다면 ‘120명이 모인 곳에 이상한 짐승 소리가 났더라라고 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이 정말 마음을 같이하여 뜨겁게 기도했는데, 사실 이렇게 기도하는 게 정상입니다. 정말 생명을 다해 기도할 때는 그렇게 이상한 소리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러 이상한 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진짜 짐승소리가 나는 것은 너무 나간 겁니다. 그런데 오늘의 비극은, 이런 생명 걸고 하는 기도가 너무 드물다는 것입니다. 거의 없습니다. 이런 순수함, 이런 간절함, 이렇게 생명 걸고 순종하며 드리는 영적인 기도가 없다는 것이 비극입니다.

 

물론 시끄럽게만 한다고 그게 좋은 기도는 아닙니다. 알맹이 없이 시끄럽게만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목숨을 건 기도, ‘이것 아니면 안 되겠다. 내가 하나님 아니면 안 되겠다.’라고 하는 절박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가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이런 유혹을 합니다. ‘너희들이 열심히 찬양하고 예배해라. 그런데 기도는 하지 마라. 전도는 해라. 그런데 기도는 조금 해라. 봉사하고 선교하고 다 해라. 그런데 기도하지 말고 해라. 기도하지 말고 그냥 네 생각대로 해라. 설교 준비도 설득력 있게 해라. 그런데 기도하지 말고 해라. 제직회도 하고 당회도 하고 공동의회도 하고 위원회도 하고 훈련도 하고 삶 공부도 하고 다 해라. 그런데 기도는 하지 마라. 그냥 조금만 해라. 기도는 원래 골방에 조용히 앉아 혼자 하는 것이지 그렇게 다 모여서 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조용히 혼자 해라. 그렇게 촌스럽게 기도하지 마라. 네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그렇게 촌스럽고 이상하게 기도하느냐?’


래서 우리가 기도를 잘 안 하게 됩니다그런데 이런 사도행전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바로 마음을 합하여 기도한 데 있었습니다


먼저, 이들의 기도는 한마음 한 뜻으로 기도한 합심기도였습니다. 우리 장로교회에 오래 된 분들 중에 통성기도를 별로 안 좋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조용히 묵상기도만 했겠습니까? 사도행전에 나중에 나오지만, 이들은 마음을 합해서 한 목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합심기도, 통성기도를 한 겁니다. 같은 제목을 놓고 합심해서 통성기도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이들의 기도는 전심기도였습니다. 정말 생명을 건 기도였습니다. 여기서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헬라어 단어가 전념하다, 몰두하다, 헌신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직 기도에 전심전력하고 딴 생각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얼마나 절박했겠습니까?

 

우리가 이번에 다니엘금식도 하고, 특별새벽기도도 하고, 일반금식도 하면서 기도하지만, 금식은 하는데 생각은 다른 데 가 있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금식은 하지만 마음이 갈라져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합심해서 전심으로 기도할 때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일어난 사건이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었습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정말 성령을 사모하십니까? 능력과 지혜와 은사들을 체험하고 싶으십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엎드려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할 것을 믿고 오순절 성령 체험이 바로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임할 것을 믿고 간절히 사모하며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이렇게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일을 한다고 했지만, 내 생각과 내 계획과 내 방법으로 했고 너무 피곤했습니다. 모든 일들이 잘되는 것 같았지만 영적인 열매는 별로 없었습니다. 서로 관계가 안 좋아지고, 불평하고, 복잡해지고, 일을 하면 할수록 다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립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사모합니다. 오셔서 저를 지배하여 주십시오. 온전히 제가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여러분, 이런 기도를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런 기도를 할 때 이런 사도행전의 놀라운 역사가 바로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순종하며 기도함으로 이런 엄청난 능력을 체험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