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7일 주일예배

새해에는 이렇게 살라 3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는 신앙인

(사도행전 91~19)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꿈]

 

이번에 새해 첫 날부터 다니엘 금식기도에 많은 분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금식기도를 하는 분들은 잘하고 계십니까? 음식도 음식이지만, 미디어 금식을 잘하고 계십니까? 드라마를 너무 보고 싶은데 안 보니까 괜찮으십니까? 그런데 드라마를 보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몰라도 드라마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오래 전인 2009년 하반기에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가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 보신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 그 드라마 제목은 바로 <선덕여왕>입니다. 저는 그것을 안 보았는데, 글을 통해 그 드라마의 어느 한 장면에 대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후에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 공주가 문노라는 사람과 갈등하는 장면입니다.

 

문노는 신라의 모든 역사를 꿰고 있는 원로급에 해당하는 사람으로서, 최고의 학식과 무술을 갖춘 사람입니다. 문노는 덕만 공주의 인물됨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들도 이룰 수 없었던 일을 여자가 이룬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다는 문노의 논리에 대해 덕만 공주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갈등하는 두 사람이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먼저 문노가 질문합니다.) “도대체 무엇으로 신라의 왕이 되어 삼국을 통일하는 거대한 위업을 달성하실 겁니까? 남자도 이룰 수 없었던 그 일을 감히 여자가 무엇으로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무엇으로요?”

(그러자 덕만 공주가 대답합니다.) “무엇으로요? 꿈꾸게 하는 것으로요. 백성들을 꿈꾸게 하는 것으로요. 삼국 통일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백성들의 마음에 희망이 불타게 하는 것으로 이룰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보았다면 굉장히 감동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꿈꾸는 것으로요!” 우리가 드라마 하나에도 이런 감동을 받는데 하나님의 말씀에는 별로 감동을 안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라운 꿈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 다시 새로운 한 해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이 한 해가 어떤 해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냥 산대로 살겠다든지, 그냥 별 계획 없이 살겠다고 하시겠습니까? 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무엇보다 하나님의 꿈을 회복하는 한 해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꿈꾸게 하시며 하나님의 위대한 꿈에 우리를 초대하시는 책입니다. 그 꿈은 우리가 이곳에서 시작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동안 생각하고 기도하다가, 다음 주부터는 얼마가 걸릴지 모르지만 사도행전 강해를 시작하려 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사도행전 전체의 핵심을 보여주는 구절이 18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새번역)

 

이 구절에서 사도행전 전체의 방향을 보여주고, 하나님께서 품고 계시는 꿈이 얼마나 큰 스케일인지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예수님의 생명을 전해주시려는 엄청난 일이 될 것임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땅을 벗어나본 적도 없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도들이 이 일을 이루어냈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은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의심을 품을 수 있는 상황에서, 이곳도 나간 적이 없는데 어떻게 땅 끝까지 가겠는가 하는 상황에서,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 속에서도 꿈을 꾸게 하심으로써 그 일을 이뤄 가십니다. 이것은 상식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동네에서 밖에 살지 못했는데 무슨 해외를 나가는가?’ 하는 게 상식입니다. ‘나는 그냥 여기 살다 죽는 거지.’ 하는 것이 상식이고 경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꿈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섭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상식에 갇힌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니까 요렇게만 해야 되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되니까 조렇게만 해야 되고...’ 너무 상식 속에 갇혀 있고 경험 속에 갇혀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을 초월하는 꿈을 꾸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왜냐하면 그 꿈은 내가 만들어낸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그 꿈은 그냥 시시한 꿈이 아니라 위대한 꿈입니다. 비전(vision)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위대한 꿈을 꾸게 하시고 나가게 하셔서 그 일을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어떤 꿈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십니까?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이 위대한 역사에 우리를 어떤 모양으로 사용하십니까?

 

오늘 본문이 바로 주님께서 땅 끝까지 복음을 들고 나아가야 하는 우리와 함께 나누고 싶으신 하나님의 꿈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전혀 변하지 않을 것 같이 굳은 마음과 강한 인생도 변할 수 있다는 꿈입니다.

 

그런데 땅 끝이라고 하면 약간 막연하거나 거창한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계신 오지를 생각하곤 하는데, 사실은 이 땅 끝이 우리가 매일 살고 있는 가정, 직장, 사업체, 학교, 이웃을 말합니다.

 

오늘 사울의 회심 사건은 우리를 바로 그런 땅 끝으로 담대하게 나가게 하는 하나님의 꿈을 알려주는 메시지입니다. 정말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할 만한 인생을 변화시키셔서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가야 하는 땅 끝에서 수없이 많은 사울 같은 인생들을 만날 때 그들도 변할 수 있고 놀랍게도 하나님의 꿈을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1.   사울에게 나타나신 주님 (1-9)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품게 하시는 첫 번째 꿈은, 어떤 인생이든 바로 이렇게 주님을 만나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저히 가망이 없는 것 같은 인생도 주님을 만나면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울이 나중에 나오는 사도 바울인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이겁니다. ‘사울이 주님을 만나서 바울이 되었다. 사울은 작은 자이고 바울은 큰 자다. 사울은 교만한 자고 바울은 겸손한 자다.’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이름이 두 개였습니다. 사울은 유대인이니까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사실 바울은 회심 이전부터 이방인 선교를 위해 준비된 인물입니다. 어릴 때부터 예루살렘 최고 랍비였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문을 연구해서 구약에 정통했던 인물이고 굉장한 학자였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큰 쓰임을 받습니다.

 

로마의 정책으로 유대인들이 많이 흩어지고, 셀류코스 왕국에 의해 이주를 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제국 때부터 그런 현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릅니다. 사울은 그러한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어릴 때부터 헬라와 로마 문화를 자연스럽게 익히며 자랐기에,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이기도 했습니다.

 

또 주님이 그를 특별한 방식으로 만나주신 것도 그를 위대한 사역을 위해 준비된 일꾼이 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주님을 만난 것은, 그가 예수 믿는 자들을 다 잡아 끌고 오겠다고 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공문(요즘 말로 체포영장)을 받아다가 다메섹(다마스쿠스)으로 갈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3-6)

 

주님께서 사울을 부르신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너무 훌륭해서, 그가 너무 잘난 사람이어서 이렇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안 부르실 수도 있었는데 부르시고 만나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를 이런 극적인 방식으로 만나시고 부르신 이유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방인 선교의 중요한 사역을 맡을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복음에 가장 적대적인 사람, 이런 복음 전파 사역을 맡을 가능성이 가장 낮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1장부터 8장은 예루살렘 교회 중심으로 나오고, 9장부터 끝까지는 바울의 사역 중심으로 나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만일 주님이라면 어떤 사람을 부르고 싶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떤 사람을 부르시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이미 잘 섬기며 사역하고 있는 사람, 아니면 최소한 복음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을 부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완전히 의외의 인물을 발탁하시는 것입니다.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 오히려 기피해야 마땅한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바울도 그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의 괴수(우두머리)’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상식을 깨십니다. 교회를 향해 살기가 등등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1-2)

 

여기 1절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 볼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입니다. 이 사람은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때도 여전히살기가 등등하여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었습니다. 도무지 복음을 위해 쓸 수가 없는 사람이고, 그런 쪽으로는 희망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사울은 처음부터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없애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목숨을 건 사람입니다. 십자가(나무)에 달린 예수는 메시야일 수 없다고 하는 유대교적인 확신이 그로 하여금 교회를 박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쓰셨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7장에 보면 교회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스데반인데,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돌로 쳐서 그를 죽일 때 사울이라는 청년 앞에 자기들의 옷을 놓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무슨 옷 보관소를 했다는 말이 아니라,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일의 브레인이었고 뒤에서 지휘하며 조종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을 죽인 사람이고, 이제도 예루살렘에서 6일쯤 걸리는 다메섹(다마스커스)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가는 길입니다. 그는 여전히 교회를 박해하는 교회의 대적자이며 원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부르신 겁니다.

 

본문이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사울이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온 것도 아니고, 아무리 찾아봐도 이 사람만한 적임자가 없기 때문에 그를 부르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원수조차도 하나님은 부르시고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측량할 수 없는 은혜 안에서 교회의 원수도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한 놀라운 일꾼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바울이 주님을 만나 새롭게 되는 장면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땅 끝으로 나가다 보면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 마음이 열리기는커녕 대적하는 사람, 아무리 그를 위해 기도해도 꼼짝도 하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포기하게 됩니다.

 

사실 저도 기도하더라도 전혀 마음을 열지 않으면 이 사람을 이제 포기하고 열린 사람에게 가야 하나보다.’라고 고민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한꺼번에 다 만나서 섬길 수는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순서를 정해서 섬길 필요는 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을 섬겨도 꿈쩍 않는 사람을 계속 섬겨야 합니까?

 

여러분도 그런 사람이 있으시죠? 주변이나 가정에 있을 수 있습니다. 배우자, 자녀, 부모님, 형제자매, 또 주변에 있는 이웃들... 그러나 그런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고민하며 기도하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도 이렇게 사도 바울처럼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렇게 제대로 만나게 되면 누구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앞에 있는 현실이 아닙니다. 현실은 꿈쩍도 안 하고 변화도 없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가 중요합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이 사람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 주변에 이 정도의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살기등등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체포영장을 받아다 가는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도 하나님이 변화시키셨다면 누구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지금 전혀 변하지 않는 분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기도하실 때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때에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2.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을 회복시키시는 주님 (10-19)

 

이렇게 우리가 소망을 갖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사울이 주님을 만나서 회심을 했는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 이후에 계속 기록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렇게 변한다. 그런 꿈을 가지고 나아가라.’ 하는 것이 오늘 교훈의 전부라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그냥 사울이 주님을 만나서 변화되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20절 이후에 나오는 대로 나가서 막 전하는 것으로 넘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10~19절 사이에 한 이야기가 더 들어가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서 눈이 먼 사울의 시력이 회복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 일어나는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1-9절 사이에는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사울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런데 10절 이후에는 직접 하지 않으시고 누군가를 보내서 하십니다. 주님은 뒤에서 지휘하며 인도하시고 누군가를 보내어 일을 계속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나니아라는 사람입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0-12)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왜 조금 전까지 직접 일하시던 주님께서 계속 직접 하시면 간단할 텐데 왜 여기서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불러서 사역을 하게 하십니까? 사울을 부르시고 회복시키시는 데에 아나니아를 쓰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할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어떤 인생이든 변화될 수 있다는 것뿐 아니라, 그렇게 변화되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인생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들(교회)의 영적 도움과 교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교회를 주신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는 사람은, 온전히 변화되고 주님의 제자로 자라가기 위해서 교회가 반드시 필요한 겁니다. 혼자서 믿는 신앙은 없습니다. 교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에서 하는 것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아까 1부 예배 때 스티브 홍 전도사님이 중요한 말씀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사실이지만, 이 세상이 지금 전부 미 제너레이션(Me Generation)’이라는 것입니다. 나 밖에 모르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고, 내가 세상의 중심인 사람들로 가득한 것이 이 세상입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다 나 중심으로 살고 내 가족 중심으로 살지, 다른 사람 중심으로 삽니까? 내게 정말 중요한 일이 있는데 교회를 더 우선합니까, 내가 더 우선하지? 그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Me Generation입니다. 실제로 어린 아기들도 처음 영어 처음 배울 때 먼저 배우는 게 my, mine, me, I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렇게 전부 자기 밖에 모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교회를 주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모여야 합니까? 싫어도 와서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겁니다. 또 더 나아가 우리가 목장 같은 데서 서로 나누면서, 싫어도 모여서,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을 배우는 겁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나 밖에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그냥 자기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갑니다. 그런데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구나,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는구나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럼 누구에게 유익입니까? 그 사람에게 유익입니까? 나에게 유익입니다. 내가 주님의 제자로 자라가는 겁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예수님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 뭐든지 자기 가족 우선, 자기 위주의 예수님이 계시겠습니까? 그런 예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항상 남을 위해 사셨고,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크리스천(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분과 같이 살아야 하는데, 그래서 연습을 하는 곳이 바로 교회이고 목장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연습을 계속 해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빠지면서 연습을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나 중심, 나 밖에 모르는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나 밖에 모르고 내 가족 밖에 모르는 데서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신실한 제자가 되게 해주시려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교회이고 목장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울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아직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저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게 해준 인물이 세 명 있습니다.

 

첫 번째가 스데반입니다. 자기가 그를 죽이는데 앞장섰지만, 그 스데반에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평안하게 죽을까?’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죽어가는 스데반을 보며, 심지어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용서해달라고 주님 앞에 기도하며 가는 스데반의 모습을 본 사울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때 마음에 금이 간 겁니다. 그랬을 때 주님이 탁 나타나셔서 만나주셨습니다. 그래서 빛을 보자마자 주여, 누구시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뭔가를 기다리고 있던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사람 중에 바나바가 있습니다. 바나바는 정말 사울을 키워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되게 해준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이 본문에 나오는 아나니아입니다. 이 스데반이나 바나바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는데, 아나니아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 않고 놓칩니다. 그런데 아나니아가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이 세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전에 유대교의 확신 속에 살아가던 사울이 이제는 정말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복음 속에서 살도록, 그 간격을 메워주도록 부르신 사람이 아나니아입니다. 아나니아가 무슨 특별한 지도자는 아니지만, 신실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이 주님의 복음을 더 깨닫고 주님의 제자로 나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는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땅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신 예수님을 우리는 먼저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안 되고, 먼저 빛이신 그분으로 인하여 어두움을 몰아낸 우리가 성숙한 배려와 사랑과 섬김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땅 끝에서 만나는 사울 같은 사람이 돌아서는 데 있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의 도전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의 섬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굳어버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주님 안에 들어와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스데반과 같은 희생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런 희생이 없을 때 한 영혼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한 영혼이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은 죽기까지 희생하는 섬김이 있어야 하고, 또한 주님을 만나면서 충격을 받아 마음이 열린 상태에서 아나니아와 같이 이끌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같이 옆에서 격려하며 세워주는 사람이 필요한 겁니다.

 

10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나니아를 부르셨을 때 아나니아가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마치 회장이 비서를 부르니까 하고 나오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응답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편하게 쓰실 수 있는 사람입니까? 그러면 이런 아나니아 같은 사람을 들어 쓰시면 되는데 사울 같은 사람을 썼다는 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리고 사울을 부르시고 쓰시는 데에 아나니아를 쓰셨습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쓰시는 것이 다릅니다. 아나니아는 언제든지 주님의 명령이라면 다 따를 준비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잠시 아나니아가 편견 때문에 꺼려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3-16)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바꾼 다음에 순종하여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갑니다. 사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울이라는 사람은 자기들을 지금 잡아서 끌고 가려고 온 사람입니다. 체포영장을 들고 온 사람입니다. 그러니 꺼려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설명해주시니까 즉시 순종합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7)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말을 할 때 이 웬수 사울아라고 하지 않고 형제 사울아라고 하며 형제라고 불러 줍니다. 형제라는 말은 같은 믿는 사람끼리 부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같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 인정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며 너도 우리의 일원이다라고 인정해준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지금 눈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이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마음에 큰 감동이 왔겠습니까? ‘아니, 지금 자기들을 잡아 죽이러 온 나를 형제라고 불러주다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을 모르던 분들이 목장에서 같이 나누고 자기 이야기를 할 때 마음을 안 열다가, 어느 순간 바로 이런 사랑 때문에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주님 안에서 변화되는 것이 교리 때문에 변화되는 게 아니라 사랑 때문에 변화가 됩니다. 형제로 대접해주고 자매로 대접해주며 진짜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을 경험할 때 변화가 됩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사울이 공식적으로 들어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줍니다. 그리고 나중에 완전히 끌어들여온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18-19a)

 

성령 충만하고 세례 받고 음식을 먹고 강건해집니다. 이제 앞으로 온전한 변화의 지점으로 힘차게 나갈 것을 암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주님을 원망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주님, 왜 이 사람을 변화시켜주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미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놓으셨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아나니아의 역할을 안 해서 변화가 안 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못합니까? 아나니아처럼 편견이 있어서 그럴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저렇고, 이건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전도는 이렇게 해야 하고...’ 나름대로 내 생각이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냥 가라. 내가 저 사람을 향한 뜻이 있다. 가라.’ 그러시는데도 우리는 아닙니다, 주님. 이건 말이 안 되고, 상식과 경험에 의해 말이 안 됩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처럼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겁니다


아나니아는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지식이 다 있었지만, 주님이 이렇게 이야기하시니까 알겠습니다하고 순종하며 갔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회복시켰습니다바로 이겁니다. 우리는 주님, 왜 저 사람을 변화시켜주지 않으십니까?’라고 할 게 아니고, 내가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아나니아 같은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나를 쓰시도록 해야 합니다. 자꾸 내 상식과 경험에 갇혀서 이건 안 되고 저건 안 된다고 할 게 아니라, 그냥 나가는 겁니다. 주님이 가라고 하셨으니까 가서 섬기는 겁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 그 한 영혼이 주님을 만나야 할 뿐 아니라 이런 성숙한 아나니아 같은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성숙한 아나니아로 인해 주님을 만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먼저 깨달고 예수님을 먼저 믿은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에게 나가지 않으면 이 세상은 주님께 돌아올 길이 없는 겁니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데에는 누군가 그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데반과 같이, 아나니아와 같이, 바나바와 같이.

 

그래서 우리가 안 믿는 VIP 분들을 주님께 인도하자고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렇게 VIP 분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나아갑니까? 원색적으로 이야기해서, 가만히 놓아두면 지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지금 지옥으로 가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지옥으로 가시오.’ 하며 어떻게 그냥 놓아둘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붙들어서 같이 천국으로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 끔찍한 곳으로 가도록 그냥 어떻게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한 영혼을 주님께 돌려드리기 위해 같이 기도하고 섬기고 초청하는 가운데,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천국에서는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올 때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 영혼만 유익일까요? 천국만 유익일까요? 당연히 그 과정을 담당한 그 사람, 아나니아 같은 그 사람이 엄청난 복을 누리게 됩니다. 엄청난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왜 이런 사명을 주셨습니까? 바로 그 사명을 감당하는 자만이 아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만이 아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 주님은 사울을 강렬한 빛으로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사용하셔서 그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아나니아와 같이 한 영혼, 한 영혼에게 나아가서 그들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직분자들이 임직을 합니다. 그런데 직분자들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바로 이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파트너로 부르셔서 이 하나님의 꿈을 꾸게 하시고, 꿈만 꾸는 게 아니라 바로 이 꿈을 들고 나가서 이것을 이루도록 우리를 동역자로 불러주셨습니다.

 

그 꿈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분명히 가능합니다. 동시에 성숙한 아나니아와 같은 사람들로 인하여 그 사역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혼이든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소망을 마음에 품고 아나니아의 사명을 감당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는, 그리고 이 꿈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신앙인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