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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18일 주일예배

제자의 삶 산상수훈 12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관하여

(마태복음 521~26)

 

[들어가는 말]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서 학생들 사이에 왕따현상이 굉장히 심각해졌습니다. 같이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 사이에 특정한 아이를 따돌리거나 요즘 표현으로 투명 인간취급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왕따 정도가 아니라, 신체적으로 괴롭히고 폭행까지 하는 학교 폭력 문제가 많이 일어나서 더욱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전 학창 시절에 다른 친구를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한 일이 드러나 어려움을 당하는 연예인들이 있고 운동선수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뉴스에 종종 등장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학폭을 당했다고 하며 유명인을 지적하면서 고소하고 밝히는데, 알고 보니 사실이 아니었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유명인으로 통해 이득을 얻어보자고 그렇게 가짜로 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인기 드라마였던 <더 글로리>처럼 잔인한 학교 폭력을 소재로 한 드라마도 많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학생들의 학교 폭력만 아니라, 데이트 폭력도 많고, 또 길거리를 가다가 아무 이유 없이 묻지마 폭행을 저지르는 사람도 많은 것 같습니다. 요즘 소위 돌려차기 남이라고 해서 뒤쫓아와 돌려차기로 쓰러뜨리는 일도 있었고, 20대 또래 살인 여성도 있었습니다.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미국에서도 최근 아무 이유 없이 총기를 난사해서 한인들이 죽는 일도 있었습니다. 지난번 댈러스에서 아웃렛 몰에 갔던 한인 가정이 총에 맞아 아이 빼고 세 명이 죽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또 지난주에는 시애틀에서 부부가 차를 타고 가다 빨간불에 서 있는데, 그냥 와서 총을 쏴서 만삭이던 아내는 죽고 분만하여 태어난 아기도 죽고 남편은 팔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이런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인데, 이런 일이 요즘 많이 일어납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요즘 초중고뿐 아니라 지성인의 배움터인 대학교에서도 선후배 사이에 길들이기나 폭행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놀라울 뿐입니다. 소위 군기를 잡겠다고 그렇게 합니다. 군대에서 고참이 신참을 괴롭히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게다가 간호사들 사이에서는 소위 태움이라고 해서 직급의 서열에 따라 행해지는 각종 괴롭힘도 있습니다. 직위를 이용해서 지나치게 후배를 괴롭히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한국 사회가 굉장히 많이 발전해서 이제는 선진국 수준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이번 여름에 한국 다녀오신 분들, 가 있는 분들, 또 앞으로 가실 분들도 있는데, 한국이 정말 많이 발전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런 학교 폭력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잔인한 폭행과 살인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까?

 

연구에 의하면, 남을 괴롭히는 일은 자기도 누군가에게서 그런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나 선배에게 그런 취급을 당했을 때 자기가 힘이 약해서 직접 보복할 수 없으니까 대신 자기보다 약한 상대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것입니다.

 

특히 괴롭힘이 지나쳐 살인에 이르거나 피해자가 자살하는 경우도 있는데, 최근에도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죽이지 않았으면 살인하지 않은 것이니까 괜찮은 겁니까? 내가 죽인 게 아니라 스스로 죽은 것이니까 살인하지 않은 게 되는 겁니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며, 살인은 단지 죽이는 행동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을 완전하게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오늘 본문에서 시작하여 여섯 가지 예를 들어가며 하나씩 설명해 주십니다. 설명을 하시면서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율법의 참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이런 표현법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드러냅니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에 이르기 위해 구약의 율법을 제대로 풀이해주십니다. 여기에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살인을 비롯하여 간음, 이혼, 맹세, 복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 들어 있는데, 여섯 가지 샘플을 들어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관한 예수님의 해석

 

율법을 완전하게 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며,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드신 첫 번째 예는 살인에 관한 율법의 해석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 중 제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율법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심으로써 율법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1)

 

먼저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율법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아주십니다. 원래 십계명의 제6계명에는 단순히 살인하지 말라”(Do not murder)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를 지나면서 여러 유대인 학자들과 랍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원래의 계명에 없는 새로운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라는 내용은 원래 십계명에 없는데 추가한 내용입니다. 살인에 대한 계명은 그냥 살인하지 말라라고 되어 있는데, 거기에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라는 말을 넣어서 심판이라는 것으로 계명을 오히려 제한하고 왜곡하여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실 때와는 거의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의미가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괜히 해코지한다든지 피를 흘리게 하고 죽이지만 않으면 이 계명을 지킨 것이 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계명을 살인이라는 구체적 행위로 제한해버렸습니다. 살인만 안 하면 된다고 된 겁니다. 또한 살인하면 재판관에게 심판받는 것으로 형벌이 끝나는 것처럼 제한합니다. 사실 살인하면 사형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왜 중범죄가 됩니까? 지금도 살인에 대해서는 법정 최고형을 선고합니다. 요즘은 사형 선고가 거의 없지만, 극악무도한 살인은 사형을 선고하기도 합니다. 사형이 아니더라도 미국에서는 100, 200년 형을 내리는 것을 종종 봅니다. 왜 그렇게 심한 형벌을 내립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지어짐으로써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이 있기에 그러한 사람을 죽이면 존귀한 존재,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를 죽이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재판만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랍비들은 재판관에게 재판받으면 끝나는 것처럼 계명을 축소한 것입니다. 게다가 이 계명을 보면서 거꾸로 그러니까 심판을 받기 싫거든 살인하지 말라. 사형당하기 싫으면 살인하지 말라.”라는 식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명을 지키는 이유는 단지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함이 아닙니다. 내가 괜히 범죄자가 되기 싫어서 살인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겠습니까?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것이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미를 유대인들은 왜곡했습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는 것은 단지 심판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고, 또 하나님이 만드신 존귀한 존재인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제한하고 축소하며 교묘하게 왜곡한 것입니다. ‘심판을 안 받으려면 살인하지 말라.’ 정도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 같은 유대인들의 성향은 주님 앞에 나온 한 부자 청년 관원을 통해 드러납니다. 복음서에 보면 한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께 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놀랍게도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와 같은 계명을 지켜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계명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이 얼마나 율법을 오해하고 있었는가가 잘 드러납니다. 계명을 축소하고 제한하고 왜곡했기 때문에 자기는 다 지켰다고 오해한 겁니다. 계명을 다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에서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간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그 부자 청년 관원은 자기가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합니다. 그것도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착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자기가 누구를 죽인 적도 없고, 간음한 적도 없고, 도둑질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떻게 다 지켰겠습니까? 하나님이 계명을 주실 때의 근본 의미를 그가 다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 그와 같은 유대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대부분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축소하고 왜곡하고 나름대로 자기 입맛에 맞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 놓고는 자기는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 믿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교회에서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나는 죄인이 아닌데 왜 다 죄인이라고 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원래 원하셨던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혀주심으로써 율법을 완전하게 하십니다. 단지 살인이라는 행동, 간음이라는 행동을 안 한 것으로 자기는 율법을 다 지키고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것을 오늘 확실하게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원래 의도가 무엇인지 그것을 바르게 해석해주십니다. 그런데 살인이라는 심각한 죄를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2)

 

이 말씀 그대로 보면 마음에 찔립니다. 이렇게 안 하며 삽니까? 다 이러면서 삽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구체적인 행위로 누군가를 죽이지 않았더라도 살인 행위를 불러오는 근원이 되는 마음속의 분노와 미움을 갖고 사람을 대하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 앞에서 나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길 수 있고 속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밖에는 못 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나이스하게 보일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보면서 , 저분은 정말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라고 하거나 저분은 예수 안 믿어도 천국에 갈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진짜 그럴까요?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 다 드러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을 스크린에 다 비추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겉모습밖에 못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 중심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피를 흘려 사람을 죽이는 행위와 사람을 죽이고 제거하고 싶을 정도로 분노와 미움의 감정을 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인과 똑같이 여겨진다는 겁니다. 율법이 살인하지 말라라고 말할 때, 즉 하나님께서 그 계명을 주셨을 때 피 흘려 사람을 죽이는 일만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축소하고 왜곡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움이 가득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분노하는 것은 살인과 똑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우리가 죽이고 싶은 마음을 품었다고 잡혀서 감옥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워하는 마음을 품은 것만으로도 살인으로 여기십니다.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은 분노와 미움에서 살인이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이 계명의 본질이 살인이라는 행위 이전에 마음의 태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조금 미워하는 것과 살인이 정말로 동급이고 똑같다고 강조하시는 것이 아니고, 살인의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거기에 이르게 하는 마음의 미움을 들여다보라는 겁니다. 마음의 문제가 정말로 심각한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마음으로는 죽일 듯 미워하면서 나는 살인 행위를 하지 않았으니까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살인이라는 선을 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다 지켰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단지 남을 죽이지 않고 해코지하지 않고 ‘I am okay. You are okay. We are okay.’ 하며 적당히 거리 두고 살면서 살인하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하는 정도로 살라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며 그 사람의 인생이 제대로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우며 살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겁니다.

 

단지 살인만 안 했다고 끝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뿐더러 정말로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인생을 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내 생명과 이웃의 생명을 보존하고 보호하고 더 좋게 할 수 있을 만한 일을 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너무나 잘 이해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 3:15)

 

형제를 미워했으니 나도 살인자인가?’ 하고 마음이 뜨끔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계속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인데도 뭐 어때?’ 하면서 아무 양심에 거리낌 없이 계속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짜로 예수님은 믿는 사람이라면 지속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성령님이 자기 안에 계시기 때문에, 어쩌다 한두 번 인간의 연약함으로 저 사람 참 싫다. 너무 밉다.’라고 될 수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고 전혀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도 안 하고 양심에 거리낌도 없고 아무리 욕을 하고 다녀도 괜찮고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한 번 실수하는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은 사람은 형제자매를 향해 지속적으로 분노하고 미워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간이 약간 오래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미워도 내가 믿는 사람인데 이래도 되나? 주님을 믿는 크리스천인데 이러면 되나?’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면, 자기는 당연히 미워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이 관계를 개선할 마음이 전혀 없다면, 계속 미워하며 증오한다면, 정말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인지를 심각하게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안 믿는데 믿는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지속해서 분노하고 미워하는 것은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며 불가능한 일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그 의가 더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도들에게는 그런 것이 합당한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데리고 가십니다. 형제자매에게 분노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다음으로 라가라고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간다.”라고 하십니다. ‘라가라 하는 말은 쓸모없는 놈’, ‘무가치한 놈’, ‘아무 생각이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요즘 식으로 번역하면 무뇌충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향해 저거, 저거, 무뇌충이야.’라고 한 적이 없으십니까? 그렇게 하면 공회에 잡혀갑니다. 처음에 형제에게 노하면 지역 재판정에서 심판받고, ‘라가라 하면 공회 즉 국회와도 같은 상급 법원에 잡혀가고, 그다음은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점점 더 심각해집니다.

 

지금 이 시대는 외모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몸짱이나 얼짱이 되려고 많이들 애를 씁니다. 한국은 외모를 가꿔주는 사업이 얼마나 잘되는지, 동남아나 중국 같은 데서 한국에 성형수술을 받으러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외모를 비롯하여 학벌, , 신분, 재능, 능력 같은 것으로 사람의 가치를 마구 평가합니다. 그런 기준에 따라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가치 있는 사람과 가치 없는 사람, 유능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 같은 식으로 사람을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크리스천들, 성도들, 예수님의 제자들도 비슷한 기준으로 사람을 대할 때가 많다는 겁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볼 때 그런 기준으로 보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볼 때 저분은 믿음에서 참 신실하다.’라는 것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얼마나 가졌나, 지위가 얼마나 높은가, 얼마나 배웠나 등으로 평가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을 받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런 업적이나 성취, 재능, 능력, 신분, 돈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진정한 가치의 핵심입니다. 사회에서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해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 존귀한 것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존귀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뭘 잘해야 하나님 앞에서 가치가 높아지는 게 아닙니다. 사회에서는 그렇게 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십니다.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네.”라고 조금 전 찬양으로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고 사랑하신다고 하니까 그대로 왔다 그대로 가면 안 되고, 내 모습 이대로 왔을 때 받아주셨지만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변화되어 결단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 다른 사람에게 무가치하다’, ‘있으나 마나 하다’, ‘살 의미나 가치가 없는 놈이다.’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고 존재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인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자기 방식으로 말씀을 아무렇게나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해선 곤란합니다. 여러분, 산상수훈을 죽 읽어보시면, 이전에 팔복에서도 그랬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불편한 말씀들이 계속 나옵니다. ‘, 나는 이렇게 살기 싫은데. 나는 이렇게 못 사는데.’라고 할 만한 말씀들이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살아야 크리스천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살아야 믿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안 살면 믿는 사람답지 못하다는 것을 계속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왜 망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는 하나도 살지 않고 불순종만 하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다.’ 하며 자랑하다가 망했습니다. 제사 같은 종교 행위를 하니까 괜찮다고, 성전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하면서 불순종만 하며 살다가 망해서 바벨론에 잡혀 끌려갔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고 크리스천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내 입맛에 맞는 말씀만 좋아하지 말고, 아주 불편한 말씀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필요합니다. 자기 방식대로만 해석하다 보면 유대인들과 똑같아지는 겁니다.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못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재판관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가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존귀한 사람으로 바라보신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데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십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 라가라 하는 자를 말씀하시고, 이제는 미련한 몸이라 하는 자를 말씀하십니다.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22). “미련한 놈은 앞에 나온 라가와 거의 비슷한 말로, 형제에게 인격 모독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마음에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 뭡니까?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상처는 찢어지고 피가 났어도 치료받고 조금 지나면 맞았는지 안 맞는지 모를 정도로 아물게 됩니다. 그러나 비수와 같은 한마디 말을 들은 것이 마음에 남아서 평생 상처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격을 모독하는 말은 인격 살인입니다.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깎아내리는 것은 인격을 죽이는 것이고 살인과 같다는 겁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노한다는 것은 마음의 분노를 품는 단계이고, ‘라가라 욕하는 것은 악한 말을 하거나 악성 댓글(악플)을 다는 단계이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명예를 철저히 짓밟고 비하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어쩌다 실수로 몇 번 하고 멈추는 게 아니라, 그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게 되면 틀림없이 살인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에게 노하는 사람은 이미 살인자의 길로 들어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생각과 감정이 말로 과격하게 표현되고 결국 살인 행위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회를 보면 말을 너무 가볍게 합니다. 그것이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것처럼 아프고 중한 것임을 모릅니다. 앞에서도 날카로운 말을 하고 뒤에서도 날카로운 말을 합니다.

 

야고보서에서도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면서 혀를 다스릴 줄 모른다면 그들의 경건함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좋아 보이고 영적으로 뛰어난 것처럼 보여도, 말을 그런 식으로 하면 그 믿음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말로 영혼을 죽이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허망한 이야기를 퍼뜨리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똑같은 살인자로 여겨진다고 주님은 율법을 제대로 해석해주십니다.

 

유대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왜곡하거나 제한하면 안 되겠습니다. 마음속 생각과 의도, 그리고 행동을 포함하여 내가 한 말 전부가 하나님이 나를 판단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한 모든 것으로 판단을 받는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누군가를 찔러 죽이며 피를 흘리지 말라는 말만이 아닙니다. 그것도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하지만, 나의 말과 생각, 사람을 향한 분노와 미움, 응어리를 풀지 않고 거부하는 모든 것들, 화해하지 않고 계속 미워하는 모든 것들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 중 그런 분은 안 계셔야 하는데, 인터넷에 악성 댓글을 다는 행위는 절대 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 때문에 자살한 연예인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짜뉴스도 남을 죽이는 것과 같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짜뉴스의 대부분은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편을 띄우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 가짜뉴스의 대부분입니다. 상대편을 죽이고 깎아내리기 위한 가짜뉴스를 퍼 나르는 행위도 거기에 동참하는 것이니까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2.   율법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적용

 

주님은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신 후, 우리에게 적용하도록 하십니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3-24)

 

예물을 제단에 드린다는 것은 예배드린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얼마나 중요하고 우선 되게 여기시는지, 예배를 드리러 왔는데 어떤 형제자매의 마음을 내가 상하게 하여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그것은 정말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입니다. 그전에 자기는 모르고 있었는데 예배를 드리다가 갑자기 , 내가 그 사람에게 잘못했구나.’ 하고 깨달아지는 것은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기억나면 예배를 드리다가도 그것을 중단하고 가서 형제자매와 화해한 후에 다시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물론 그 당시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다르고 우리는 차를 타고 다니니까 거리도 다르기에 문자적으로 똑같이 적용되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게 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이 뭐겠습니까? 바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이시고 차원이 다르신 하나님 앞에 유한한 인간이 나아간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매주 이렇게 예배드리지만, 이것이 놀라운 은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께 어떻게 마음대로 나아갑니까? 구약시대 때는 1년에 한 번 대제사장 한 명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마음껏 아무 때나 나아가지 않습니까?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최상의 가치를 지닌 일인데, 그 중요한 예배를 드리다 말고 자기가 마음 상하게 한 일이 있으면 형제자매와 화목하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보다 화해가 더 시급하다고 하십니다. 예배보다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을 바로잡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시는 게 아닙니까?

 

우리는 보통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예배가 중요합니다. 왜 안 중요합니까? 믿는 사람으로서 예배를 안 드리면 안 됩니다. 주일을 지켜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리면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했더라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예를 들어, 내가 말을 함부로 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하나님, 제가 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당연히 하나님은 용서해주십니다.

 

그런데 회개했으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진짜 회개했으면 거기에 맞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내가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그쪽에서 용서해주든 안 해주든, 내 쪽에서는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것이 진짜 회개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분은 없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며 하나님께 회개했으니까 이제 다 됐다고 하며 사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게 샤머니즘입니다. 그게 세상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는 사람과의 관계는 적당히 묻어두고 신이나 신적 존재에게만 나아가서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사를 하거나 굿을 하면 됩니다. 그런 게 샤머니즘입니다. 그런 샤머니즘적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샤머니즘이나 다른 종교에는 신적인 존재에 공을 들이면 사람에게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라는 보상의 개념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회개했으면 자기가 잘못한 사람에게도 가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를 풀어야 합니다. 사람의 영혼을 상하게 하고 미워하고 누군가를 죽이는 것과 같은 나쁜 말이나 인격을 훼손하는 말을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살인죄와 똑같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자녀를 낳았는데, 가인과 아벨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가인과 그 제물은 안 받으시고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은 안 받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가인과 그 제물은 안 받으셨고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제물에 문제가 있거나 제물이 핵심이 아니라 제물을 드린 사람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배자가 문제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문제라는 겁니다. 사람이 먼저라는 겁니다. 제물은 그 결과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정말 예배하고 싶다고 해서 제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그냥 이것 먹고 떨어지세요.’라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예배에 나오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까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다.’라는 열망으로 내가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드리고 싶다.’라고 하며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과 상관없이 살짝 갔다 와줘야 찜찜하지 않고 벌 받지 않아야 하니까 일단 예배는 참석해주는 식은 진짜 예배가 아니라는 겁니다. ‘가인과 그 제물’, 즉 가인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벨과 그 제물’, 즉 아벨은 올바른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받으셨습니다.

 

그럼 마음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예배하지 말라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24절을 잘 보십시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먼저입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에게 가야 하느냐, 하나님께 가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둘 다 해야 하는데, 우선순위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정말 예배하려면 사람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어야 하나님께 진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진짜 예배를 드리려면 먼저 사람과의 관계가 올바로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무조건 예배를 드려야 한다.’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예배 이전에 사람과의 관계를 잘하라고 했다. 그러니까 예배는 안 드려도 사람과 관계를 잘하면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둘 다 해야 합니다. 먼저 관계를 잘 풀고,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같이 나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26)

 

다 갚기 전에”, 즉 형제와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옥에서 못 나온다는 겁니다. 여러 책에 그런 말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다가 용서해주면 한 사람이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을 경험하는데, 그 한 사람은 그동안 내가 미워한 사람을 감옥에 가두어놓았다가 용서를 통해 풀어주는 게 아니라, 사실은 내가 미워하는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용서해줄 때 내가 풀려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형제자매와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그 감옥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평생 괴로움, 불안, 염려 가운데 평안도 없이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예배라는 종교 행위를 통해 해결해보고자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는 풀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면 되겠지 하면서 예배에만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진짜 예배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미움과 분노를 일으키고, 나쁜 말을 쏟아내고, 인격을 무시하고 모독하고, 증오심을 품게 하고, 관계가 어그러졌을 때, 먼저 그 사람과의 관계를 해결하고 그다음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 해결이 없이 드리는 예배는 진짜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신앙,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기대하고 요구하시는 것이 얼마나 적극적입니까? 단지 남을 해코지하지 않는 정도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아껴주고 품어주고 세워주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저 살인하지 않는 정도로 적당한 관계에 머물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5)

 

계속 보십시오. 예수님이 살인에 관한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계속 무엇을 이야기하십니까?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계속 이야기하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쟁이 생겨서 재판정으로 가는 도중에 상대를 만나면, 재판정까지 가지 말고 길에 있을 때 관계를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문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법정을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옛날 법정 앞에서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결국 끝에는 하나님이 심판을 해주십니다. 하나님이 평가하시고 판단하십니다.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면 모든 것은 끝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는 1, 2, 대법원까지 갈 때가 있는데, 어쨌든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지면 끝입니다.

 

하나님의 판결은 대법원보다 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결이 내려지면 다 끝나고 더 이상 바꿀 수 없는데, 그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깨지고 어그러진 관계를 빨리 해결하고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와 미움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을 빨리 해결하고, 남을 무시하며 무가치하다고 욕하고 평가 절하하고 인격 모독한 것들을 빨리 다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아니, 저 사람이 나에게 먼저 상처를 주었다.’라는 걸 따지지 말고 빨리 관계를 해결하라는 겁니다. 그런 관계의 문제를 안고서 매주 예배를 드려봐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야 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고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사람을 사랑하고, 천하보다 귀한 그 생명을 존중히 여기고, 자기의 시간과 물질까지 사용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며 사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나가는 말]

 

예수님이 살인하지 말라고 하실 때는 행위만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마음의 문제를 이야기하십니다. 관계를 이야기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여러 인종을 만납니다. 겉으로만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마음속으로 다른 인종을 무시하고 깔보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인종 차별을 당하면 분개하지만, 정작 우리는 얼마나 인종 차별을 하는지 모릅니다. 다른 인종을 무시하고 깔보며, 그들을 다 묶어서 이 민족 사람들은 다 그렇다.’라고 하는 것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들 중에도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한 행동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사람 자체에 대해 우리가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관계를 회복해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해결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화목 제물로 오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도 그 길을 기꺼이 따라갈 줄 아는 백성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는, 세상의 종교가 샤머니즘이 흉내 낼 수 없는, 세상의 윤리, 도덕도 흉내 낼 수 없는 참된 의가 우리의 삶에 넘쳐흘러서 우리 때문에 이 땅이 새로워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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