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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2일 수요예배

기도에 관한 의문 탐구 11

원수를 위하여 꼭 기도해야 하나?

(마태복음 543~45)

 

[들어가는 말]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이 가능합니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그런데 원수사랑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도 이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더 이상 원수가 아니고, 원수라고 하면 사랑할 수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어느 목사님과 스님이 만나서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종교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던 중에, 목사님이 기독교에서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불교에서는 원수가 없다고 가르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원수로 여기면서 사랑하자라고 하는 말에 대해 듣기에 따라서 우월감이나 독선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수는 누구입니까? 나를 원수라고 여기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내가 원수로 여기는 사람입니까? 또는 나와 가족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힌 사람입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용서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는 부분 중 하나는 가해자가 용서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피해자는 아직 용서할 마음이 없는데도 가해자가 자기는 하나님께 회개해서 용서받았다고 말한다는 것이고, 또한 자기가 잘못해 놓고는 상대방을 용서한다고 일방적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영화 <밀양>에서 보여진 모습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정말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직 감정이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사랑하라는 행동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경우에도 잘 용서가 안 되고, 용서했다고 하더라도 아예 없던 일처럼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용서라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이고, 나쁜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기도가 안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도 힘들고, 억지로 기도하더라도 그런 모습에서 위선이 느껴지는 것도 힘이 듭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위해서는 어떤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까?

 

 

1.   누가 원수인가

 

많은 경우에 시비를 가리는 일은 관점, 즉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바울은 기독교를 혐오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습니다.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겁니다.

 

“57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고서,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58 그를 성 바깥으로 끌어내서 돌로 쳤다. 증인들은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7:57-58, 새번역)

 

“1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 그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 그래서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그를 생각하여 몹시 통곡하였다. 3 그런데 사울은 교회를 없애려고 날뛰었다. 그는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서,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끌어내서, 감옥에 넘겼다.” (8:1-3, 새번역)

 

당시 사울에게는 그리스도인들을 때리고 가두는 것이 정당하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원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비롯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에 그토록 열정적으로 앞장섰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인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사회적인 사람들이고, 로마의 여러 종교들을 무시하는 무신론자들이며 사교 집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거해야 할 사회악으로 여겼습니다. 로마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은 정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사회의 질서를 해치고 권위에 도전하는 원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자라고 말하는 것을 로마인들이 듣는다면 어떻겠습니까? 더 화가 치밀어 오를 겁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감히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사랑한단 말입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상대방을 일단 악인으로 규정하고 자기는 그런 악인과 다르다고 차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 말은 독선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신을 반대하고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을 원수로 여기신 적이 있습니까? 당연히 없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23:34)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게 만든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이 자기의 원수라고 생각하시면서도 억지로 사랑하려고 애쓰신 게 아닙니다. 할 수 없이 사랑하고 용서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들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사랑과 용서의 핵심을 깨달은 스데반도 억울하게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똑같이 외쳤습니다.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7:59-60)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내가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누구도 원수로 여기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라고 할 때는 자기가 미워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를 미워하며 힘들게 하는 사람에 관해서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지만 나를 힘들게 만들고 괴롭히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지에 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용서한다는 것의 진짜 의미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3~44)

 

용서를 말하면 많은 사람이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합니다. 물론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솔직히 원수를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나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독일 나치에 의해서 성추행과 모욕을 당하고 수용소에 갇히기도 했던 네덜란드 출신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여사가 있습니다. 그녀는 전쟁 후에 어느 집회에서 과거 자기를 괴롭혔던 수용소 간수를 다시 보았는데, 그때의 악몽에 대한 감각이 되살아나 몸이 떨리고 속이 울렁거렸다고 합니다.

 

코리 여사는 결국 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게 되었지만, 이처럼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그런 경우도 그 사람을 무조건 용서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본래 뜻일까요?

 

그럴 때 억울하면서도 마음에 부담을 느끼는 이유는 하나님의 용서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나를 괴롭히고 해치는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에 대해 억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용서에 관해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런 부담 때문에 오히려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는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할 때는 나는 저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의지적 결단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저런 악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라는 의미이고 그래서 감정 조절이 안 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중에 나에게 못되게 굴거나 나를 괴롭히거나 더 나아가 해를 끼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너무나 쉬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에 용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한 번 상처를 입으면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더라도 그 사람을 대할 때 이전과 똑같은 마음이 되지 않습니다. 이전에 그 사람이 사랑스러웠더라도, 다시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용서했으면 다시는 안 보고 싶지, 다시 얼굴을 대하면 상처가 떠올라서 견디기가 힘듭니다.

 

그와 같은 감정이 들 때 그것을 잘 추스르는 것도 물론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고 해서 불필요한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용서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서한다는 말은 이전처럼 관계가 다시 회복되고 친구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받은 대로 보복하지 않을 것을 결심한다라는 뜻입니다. 조금 더 풀어서 말하면, 용서란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내가 스스로 갚아 주려 하지 않겠다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이유 없이 비방하지만 나는 똑같이 그 사람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 용서입니다. 비열한 거짓으로 공격당하여 너무 억울하지만, 나는 똑같이 비열하게 거짓말로 공격하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저 사람이 내 오른뺨을 때렸지만 나는 그의 오른뺨을 때리지 않겠다는 것이 용서입니다. 또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지 않겠다는 것이 용서입니다.

 

하나님이 다 보셨고 아시니까 하나님께 그 결과를 맡기겠다는 의지가 원수를 용서한다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요구는 정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하나님을 정말로 믿고 신뢰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차원이 아니라 신적 차원의 일입니다.

 

 

3.   원수를 위한 기도는 결국 나를 위한 기도다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4~45)

 

44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다음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사실 원수를 용서한다고 할 때 직접 보복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이라는 뜻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자기의 원수가 잘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이 복 받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합니까?

 

사실 그것은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기도는 불의하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은 악인의 형통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악인이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 됩니다.

 

저번에 살펴본 누가복음 18장에서 과부가 불의한 재판장에게 원한을 풀어달라고 계속 찾아간 것처럼, 원한이 있으면 원한을 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원수가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식당을 운영하는데 후배가 찾아와 자기도 식당을 하고 싶으니 식당 일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며 가르쳐주기를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선을 다해 그 후배에게 식당 운영의 모든 노하우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후배가 자기 식당 바로 옆에 식당을 크게 차린 겁니다. 이 얼마나 화가 나는 일입니까? 그런데 날이 갈수록 후배의 식당이 자기 식당보다 훨씬 더 잘되는 겁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해서 잠도 잘 수 없었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며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으니까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까?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 식당이 확 망해 버리면 좋겠습니다. 그런데도 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후배가 잘되라고 기도해야 합니까?

 

물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있는 사람은 정말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기도해야만 주님의 신실한 제자이고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가 형통하고 잘되도록 기도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더 열심히 너희를 박해할 수 있도록 축복해주어라.’라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악한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위한 기도는 그들의 악함을 인정하거나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죄라도 무조건 괜찮다고 용납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올바르게 변화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원수를 용서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을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원수가 나에게 악을 행하더라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반드시 갚아 주실 거라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께 모두 맡기기로 했더라도,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볼 때마다 원수를 갚아 주고 싶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결국 나 자신이 원수를 갚으려는 충동을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믿지만, 하나님께 결과를 맡기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 맡긴다고 하면서도 원수가 잘될 때는 견딜 수가 없고, 그 사람 때문에 내가 힘들 때는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치열한 영적 전쟁이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정하는 진실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정말로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도와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할 때 그저 한두 번만 하고 말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경험한 상처와 아픔과 분노는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수와 박해자를 위한 기도는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위하여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기도입니다. 내 모든 상황 가운데, 심지어 너무나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에서도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며 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무슨 철천지원수까지는 아니더라고 지금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나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 또는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원수이고 박해하는 사람입니다. 그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보복하지 않겠다고 결단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원수를 사랑하며 자신을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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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

세상에 살면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미움받지 않으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억울한 일을 만나기도 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하면서 마음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수를 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에게는 원수를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나에게 해를 입히거나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겪은 일들을 다 보셔서 아시는 하나님의 손에

우리가 당한 모든 일의 결과를 맡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땅에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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