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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57일 수요예배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약속 - 십계명 7

부모는 사랑이 아니라 공경의 대상이다

(출애굽기 2012)

 

1.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

 

한국에서 아기를 키우는 초보 아빠들을 대상으로 한 가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이런 질문지를 주었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입니까? 최근에 아이를 안아 본 적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언제입니까?” 답을 써 내려가는 아빠들의 얼굴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다른 질문지가 아빠들 손에 주어졌는데, 그 내용은 아이대신 다른 단어로 하나만 바꾼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입니까? 최근에 아버지를 안아본 적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언제입니까?” 이제 막 아빠가 된 남자들은 그 질문지를 보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고 합니다.

 

왜 십계명에 자녀를 사랑하라라는 계명은 없고,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계명만 있을까요? 사실 자녀를 사랑하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것 같지 않습니다. 그냥 사랑이 됩니다. 자녀를 키워 본 부모라면 공감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계명으로 주신 것이 아닐까 합니다.

 

게다가 십계명 중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계명이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인데, 그중 첫 번째가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내용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룩함의 시작이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라면, 올바른 인간관계의 시작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날 수밖에 없듯이, 부모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하나님은 십계명에 이 명령을 넣으셨을 뿐 아니라 그것도 인간관계에 관한 계명 중 가장 첫 번째 자리에 이 계명을 넣으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부모의 다른 점이 있다면, 부모는 하나님처럼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에 공경받고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격 없는 부모도 많습니다. 남이면 그저 무시하거나 참으면 되지만, 가족은 늘 함께하니 그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5계명은 구약 시대에만 적용되는 내용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공경하라 하셨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모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모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공경과 경외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텍사스주에 한 남자가 있었는데,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떠났습니다. 30년 후 그는 무일푼으로 죽었는데, 그의 유언은 자기 시신을 고향 텍사스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자녀들은 분개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어? 그가 우리 아버지로, 어머니의 남편으로 우리에게 해준 게 뭐가 있어? 그 사람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왜 그 시체를 가져다 장사지내는 데에 우리가 수고하고 돈까지 들여야 한단 말이야? 우리는 안 하겠어.”

 

하지만 신앙심 깊은 큰아들은 자기 트랙터와 농기계를 저당 잡혀가면서까지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다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난 후 큰아들은 동생들을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얘들아, 성경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쓰여 있을 뿐, ‘어떤 부모라는 말은 없지 않니?”

 

경외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여러 번 사용되는데, 유일하게 하나님에게 사용됩니다. 잠언에서는 여러 차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하며, 이스라엘이 징계받고 멸망 당한 원인을 주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왕하 17:7)이라고 말씀합니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경외해야 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입니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19:2-3)

 

그렇다면 우리는 왜 부모를 경외해야 할까요? 바로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부모가 하나님과 함께 경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구약 시대 신앙에서 볼 때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결국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부모에 대한 불경은 곧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불경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기에 우리에게 대한 책임이 있으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새벽예배를 갈 때 이불을 차고 자는 아이들의 이불을 덮어 주고 가는 자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자식은 모르지만 언제나 지켜보고 챙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심정이,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우리를 사랑으로 늘 덮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닌가 느꼈다는 겁니다.

 

그 목사님이 한번은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갔는데, 도착하는 순간부터 쫑알대고 싸우는 아이들을 중간에 버리지 않고 다 챙겨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자신을 보면서 그래, 하나님은 웬만큼 깽판을 쳐도 나를 버리시지 않겠구나하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자녀 중에서 잘못된 길로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너는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야.’라고 할 부모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자녀이기 때문에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 중에도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 잘못 갈지라도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챙기십니다. 붙들어 주십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너희 자꾸 싸우면 여기다 그냥 놓고 갈 거야!” 하고 수없이 협박하지만, 진짜로 아이들을 내려놓고 오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너희 셋 셀 때까지 기회 준다! 빨리 나와.”라고 하지만, 정작 카운트할 때는 빨리하지도 않을뿐더러 까지 세는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시고 얼마든지 져 주려고 준비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사랑도 바로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만으로도 부모님이 자녀의 공경을 받기에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참 힘듭니다. 과연 내 부모님이 공경받을 자격이 있는가 생각할 때 그렇다라고 바로 대답할 자녀는 많지 않습니다. 10대나 20대 젊은 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님을 공경했습니까, 아니면 갈등했습니까?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봐야 부모가 되고, 부모가 세상을 떠나 봐야 비로소 자식이 된다고 합니다. 저 역시 그것을 실감합니다. 아들이 태어나서 부모가 된 줄 알았는데,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시고 나니 진짜 부모가 뭔지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아무리 부모에게 반항하며 덤벼도 결국 부모는 부모이고 자식은 자식입니다. 우리는 가족이고 부모 자식 관계인 것입니다. 이 인연은 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죄에 대해 무섭게 이야기합니다.

 

“15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17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21:15, 17)

 

하나님과 부모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부모에게 범한 죄는 하나님께 범한 죄와 같은 형벌로 대단히 엄하게 처벌되었습니다. 돌로 쳐서 죽이는 것입니다. 신명기에도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술 취해 방탕한 아들은 사형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21:18-21)

 

물론 이와 같은 말씀이 실제로 적용된 경우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자식이 악해도 돌에 맞아 죽을 것을 알면서 자기 자식을 고발할 부모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것은 그 정도로 아주 무서운 죄였습니다.

 

신명기 27장에 보면, 모세가 에발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를 선포하는데, 거기에는 열두 가지 종류의 저주받을 행동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중 가장 첫 번째는 우상숭배이고(15), 두 번째가 부모에 대한 죄(16)입니다.

 

 

2.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런데 부모 공경이 단순히 자녀에게만 부여된 의무입니까? 사실 언제까지 자녀로만 머물러 있는 사람도 없고, 날 때부터 부모로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자녀는 언젠가 부모가 되고, 그 부모도 결국은 누군가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공경받아야 하는 부모도 부모로서 어떠해야 하는지 그 책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20:12)

 

오늘 말씀은 부모를 공경하면 세상에서 생명이 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것이 단순히 장수의 축복을 말합니까? 여기서 생명은 단지 이 땅에서 오래 사는 장수가 아니라 영생의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에게 생명이 길 것이라는 약속은 자손 대대로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믿음의 부모가 된다는 복이 아니겠습니까?

 

자녀에게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안락한 환경을 주었다고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가장 중요한 신앙 교육의 장이며, 부모는 가장 훌륭한 신앙 교육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 쉐마의 말씀을 보십시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6:4-7)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자녀는 언젠가 부모의 품을 떠나 새로운 둥지를 틀고, 그곳에서 또 부모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녀가 어렸을 때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이 자녀에게서 떠나가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며 이 땅에서 생명이 길 것이라고 제5계명은 말씀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6:4)

 

안타깝게도 많은 자녀가 부모에게서 사랑을 배우지 못합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녀는 부모를 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날카롭게 야단만 치면 야단치시는 하나님만 느끼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가 되어야겠습니다. 부모가 신앙 교육에 책임을 다할 때 자녀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부모를 공경하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부모가 자기 방식으로 자녀를 사랑하고 양육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자식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며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자식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하는 말의 단골 메뉴가 있습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래?” 완전히 착각하는 겁니다. 그 결과 사랑은커녕 자녀에게 오히려 큰 상처를 주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어린 자녀든 성인 자녀든, 부모는 자녀를 대할 때 진짜 사랑으로 대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부모가 자기 위상에 걸맞게 자녀가 자라 주기를 바라며, 자녀를 통해 자기 체면이 세워지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성적이 떨어지거나 능력이 따라 주지 못하면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니까 안타까워하고 부끄러워하며 자녀를 질책하는 부모가 꽤 많습니다. 어린 자녀는 그런 부모의 모습에서 결코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부모의 모습들 때문에 아름답게 창조된 하나님의 본성이 파괴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한국은 모든 것이 입시 위주인데, 세상의 행복은 공부를 잘한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만 강조하며 키운 아이들은 이다음에 커서 절대로 부모를 먼저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부모가 자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때가 옵니다. 그러나 이기적으로 자란 아이들은 결단코 부모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모들아. 너희의 최선이 최선이라고 착각하지 말고, 나의 교훈과 훈계로, 나의 말과 방식으로 양육해라. 이것이 부모의 도리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녀의 부족함을 그대로 품고 사랑하는 부모가 되어서 자녀를 훈계할 때, 자기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자녀를 양육할 때, 그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로 자라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나는 자녀에게 어떤 부모입니까? 혹시 자녀가 잘못해도 무조건 감싸거나 괜히 말했다 불편해질까 봐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닙니까? 아니면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이 아니라 세상의 시선이나 나의 감정이라는 기준으로 자녀를 윽박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3.   부모를 위한 순종의 흔적이 있는가

 

5계명을 지키기에는 우리를 힘들고 괴롭게 하는 문제가 있는데, 과연 이 땅의 모든 부모가 공경할 만한 사람들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부모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증오심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부모님은 공경받을 만한 자격이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 혹은 자녀에게 불의한 일을 시키는 부모도 공경해야 합니까?

 

그런데 공경하라따르라라는 말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부모를 따르라고 하지 않고 공경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공경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히브리어의 근본 의미는 무겁게 여기다’, ‘비중 있게 생각하다’, ‘중요하게 여기다입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삶에서 부모의 위치를 비중 있게 둔다. 부모를 중요하게 여긴다.’라는 뜻이 됩니다. 비록 부모가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더라도, 부모를 중요한 존재로 여기라는 겁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간혹 신앙생활을 핑계로 부모나 가정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안 믿는 경우 신앙생활을 핑계로 부모님에게 소홀하게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 중에도 부모와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은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라는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부모를 공경하는 일을 게을리해도 된다고 정당화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 당시 고르반하나님께 드린바 되었다라고 말하면 그 물질을 가지고 부모님을 공양하지 않아도 된다고 정당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거룩하게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며 부모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 때문에 자기 가족에게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6:17)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율법을 지키느냐 마느냐로 논쟁이 있자, 자기 삶에 예수로 인하여 죽고 예수로 인하여 산 흔적이 있으니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자신감 있는 신앙인의 이야기입니까?

 

5계명이 그저 감정적 차원으로 끝이 난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 말씀이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새겨진 그 못 자국과 허리의 창 자국은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의 흔적입니다. 우리에게 부모님을 위해 흘린 피와 땀의 흔적이 있을 때 삶이 복으로 연결됩니다.

 

놀라운 일은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의 자녀에게로 이 복이 흘러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는 복은 부모와 자식, 그리고 모든 세대를 연결해 주는 중요한 계명이며,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한 가문이 잘될 수밖에 없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위해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내가 이 땅에 나오게 해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도 경외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우리 모두가 장수의 축복과 땅에서 잘되는 복을 누리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 중에서 자녀에게 소홀하게 대접받는 부모님이 하나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부모님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 역시 하나도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모님을 위해 삶을 희생하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부모님을 위해 의지가 꺾이는 경험이 있어야 하고, 부모님을 위해 경제적인 부담도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순종의 흔적입니다. 그러한 순종의 흔적이 내 삶에 있습니까?

 

비록 힘들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감으로써, 놀라운 복을 받고 그 복이 자손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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