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0MVVEQk_4cg?si=rZCEEXKgDYGP8N09&t=35
2025년 4월 30일 수요예배
✦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약속 - 십계명 6 ✦
생명을 빼앗는 무관심과 증오
(출애굽기 20장 13절)
[들어가는 말]
살인은 어쩐지 나와 먼 이야기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 적이 없으니 적어도 제6계명만큼은 철저히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사는 수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군목 시절에 그곳의 사단장님이 있었는데, 부대에서 유명한 신앙인이었고 교회 사역과 신앙이 삶에 최우선인 분이었습니다. 그러던 그분이 늘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닭대가리 같은 놈’입니다. 부하들을 보면서 “이 닭대가리 같은 놈!”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그분이 아무리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찬송해도, 그 목사님이 볼 때는 전혀 은혜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향하여 “닭대가리 같은 놈”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분의 봉사와 섬김이 별 의미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사단장님은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6계명을 잘 지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을 귀하게 여겼는가 생각해 본다면, 그분은 결코 이 계명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인데, 이것은 단순히 사람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타인의 인격을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그런데 전쟁은 어떻습니까? 전쟁터에서 적을 향해 총을 쏜 군인은 제6계명을 어긴 겁니까? 핵무기를 개발하는 북한에 대항해 한국도 핵무장을 하는 것이 옳습니까? 미국은 테러리스트들과의 전쟁을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정당한 전쟁’이 있는 걸까요?
또 항일 투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사에 일본에 대항해서 싸운 독립 투사 중에 크리스천이 상당히 큰 비율을 차지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안중근 의사입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는데, 가톨릭 신자들은 죽기 전에 종부성사라는 것을 합니다. 그런데 그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그 당시 신부가 종부성사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떻습니까? 그가 살인을 저질렀고 제6계명을 어겼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도 살인이냐 아니냐로 의견이 분분한 사안들이 있습니다. 낙태, 안락사, 자살, 사형제도 등의 문제입니다. 과연 이런 것 중 어떤 것은 살인이고 어떤 것은 아니라고 정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까? 참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늘 십계명을 외우며 남들에게 계명을 지킬 것을 강요했지만, 정작 어려움을 당한 이웃의 짐을 덜어 주는 데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당시 로마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 로마는 소위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불리는 평화의 시기였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정해 놓은 정의에 백성들이 무조건 복종했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층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복종과 희생이 따랐던 것입니다. 또 다른 나라들을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그것을 ‘로마의 평화’라고 불렀습니다. 로마에게나 평화였지, 식민지 사람들에게는 압제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이후 히틀러 시대에도 나타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회에 부담이 되는 생명, 장애인, 과부, 환자, 아이들은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인식입니다.
그런 시대에 예수님이 오셔서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윤리와 규칙을 철저히 깨트리셨습니다. 거짓 평화를 깨시고, 하나님의 진짜 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해 자기 기준이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어떤 마음으로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십계명은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는 금지법이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 역시 제7계명처럼 주어도 목적어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명령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줍니다. 다시 말해, 제6계명은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명에 대한 가치를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성경은 이 여섯 번째 계명을 통하여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과, 모든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 앞에서 똑같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1. 성경에서 말하는 살인
제6계명의 ‘살인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라차흐’로, 구약에서 47번 등장합니다. 같은 의미의 다른 동사인 ‘하라그’나 ‘헤미트’가 자주 나오는 것과 비교하면, 이 단어는 상대적으로 적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민수기 35장에서는 무려 20번 사용됩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 ‘라차흐’는 ‘고의적 살인’의 의미로 사용됩니다(민 35:19-21, 30). 성경에는 사형 제도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자기 피도 흘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사람을 죽이면 복수하는데, 4~5배를 갚았습니다. 내 자식을 죽이면 그 죽인 자의 가정을 아예 몰살하는 것이 그 당시 법적 상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살인한 자만 죽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형제도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뭡니까? 이 법은 무고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법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에 대해서만 사형을 허용합니다.
“피를 보복하는 자는 그 살인한 자를 자신이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면 죽일 것이요” (민 35:19)
성경은 사형 결정을 신중하게 하라는 의미로 몇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먼저, 살인이 의도적이냐 우발적이냐의 결정은 장로들이나 몇 사람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한 성읍의 회중이 내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악의를 가지고 손으로 쳐죽이면 그 친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는 살인하였음이라 피를 보복하는 자는 살인자를 만나면 죽일 것이니라” (민 35:21)
고의로 살인한 자라고 판결할 때는 반드시 두 명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사람을 죽인 모든 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민 35:30)
둘째, ‘라차흐’는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도 사용됩니다.
“22 악의가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23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을 때에 이는 악의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 (민 35:22-23)
하나님은 특별한 원한이나 악의 없이 우연히 또는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 살인자가 보복당하지 않도록 도피성에 피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실수로 살인한 경우는 제6계명에서 말하는 살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도피성 제도는 ‘생명 존중’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실수가 있었다면 그 실수한 생명을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실수로 인한 살인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교통사고가 거기에 해당합니다. 특히 한국은 교통사고로 인해서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고를 당했을 경우 유가족에게 합의금을 줌으로써 가해자가 너무 쉽게 형사처벌을 면하고 윤리적 책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도피성 제도는 모든 실수를 무조건 용서해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성은 피해자로부터 보호받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가해자를 일정 기간 동안 구금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형무소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비록 고의가 아니더라도 살인을 저지른 것은 큰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해자가 일정 기간 도피성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민 35:26-28).
도피성은 가해자의 보호와 동시에 가해자가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 장치였습니다. 결국 성경에서 다루고 있는 살인과 사형제도는 하나님이 얼마나 생명을 소중히 대하시는가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셋째, ‘라차흐’는 ‘간접적 살인’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박해’에도 사용됩니다.
“너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네가 살인을 하고, 또 재산을 빼앗기까지 하였느냐? 나 주가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바로 그 곳에서, 그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왕상 21:19, 새번역)
열왕기상 21장에는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엘리야가 아합의 행위를 지적하는 장면을 설명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합은 나봇을 직접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아내인 이세벨이 모든 것을 꾸몄고, 장로들을 통해 거짓 증인을 세우고 법을 이용해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네가 살인을 하고”라며 말씀하십니다.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살인들 중 정치적으로, 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제6계명에 해당하는 살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시에 이러한 정치적 살인의 대상이 대부분 ‘사회적 약자’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시편에도 등장합니다.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들을 살해하며” (시 94:6)
여기서 사용된 동사도 ‘라차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직접 죽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약자들을 박해하고 학대하여 삶의 가능성을 빼앗은 것 역시 성경에서는 사회적 살인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넷째, ‘라차흐’는 ‘혼을 죽이는 행위’에도 동일하게 사용됩니다. 당시 사회에서 성폭행당한 처녀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것과 같았고(신 22:25-27), 수치스러움으로 인하여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때 ‘라차흐’를 사용했습니다. 즉 그렇게 한 것은 그 처녀를 죽인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생물학적 죽음만 살인으로 보는 게 아닙니다. 넓은 의미로 삶 자체에 대한 의미를 상실하게 만든 것,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게 만든 것 역시 살인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런 관점으로 볼 때 이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 2:17)
비록 선악과를 따 먹고 아담과 하와가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이 말씀은 곧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했기에 죽는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2. 어떤 생명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손댈 수 없다
인류 최초의 살인은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살인에 대해, 인간의 한 생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 4:9-10)
하나님은 살인을 저지른 가인에게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가인에게 생명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묻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핏소리’를 들었다고 하십니다(창 4:10).
하나님은 직접 창조하신 생명에게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인 후 죄책감과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13 가인이 주님께 말씀드렸다.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14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창 4:13-14, 새번역)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창 4:15, 새번역)
살인한 사람조차도 사람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인자의 생명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생명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해칠 수 없습니다. 결국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인간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생명이 소중한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만드신 소유이기 때문입니다(시 24:1).
둘째,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창 9:6).
셋째,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엡 1:7).
넷째,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이기 때문입니다(고전 6:19-20).
살인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생명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살인은 단순히 제6계명 때문이 아니더라도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되는 죄입니다.
3. 무관심이 생명을 빼앗는다
몇 년 전 한국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택시 기사가 손님을 태우고 공항을 가던 도중에 심장마비가 왔습니다. 그런데 비행기 시간이 급했던 손님은 응급차도 부르지 않고 바로 골프 가방을 챙겨 공항버스로 갈아타고 갔습니다. 결국 택시 기사는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손님은 처벌받아야 할까요? 사실 이 사람이 한 것은 없습니다. 흉기를 들었던 것도 아니고, 택시 기사가 심장마비를 일으킬 어떤 행동을 한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이 손님은 법적으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약 4:17)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살인이 이웃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일어납니다. 직접 흉기를 들지는 않았지만, 사랑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우리가 돌아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이 죽어 가고 있는데, 이것 역시 살인이라는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의 모습을 한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냉담함’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자기에게 직접적인 유익이 되지 않는 일은 하고 싶어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에게 피해가 올 것 같은 일들은 외면합니다. 그러면서도 참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 방관자 효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964년 뉴욕 퀸스에서 제노비스라는 20대 후반의 여성이 밤늦게 괴한에게 습격당하여 살해된 사건에서 생겨난 말입니다. 이 여성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35분 동안이나 괴한에게 쫓겼고, 세 번씩이나 칼에 찔려 살해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녀가 습격당하는 것을 본 사람이 38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목격했지만 그중 아무도 경찰에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뉴욕 타임스에서 “현대인들의 무관심과 냉담함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1면에 톱기사로 실렸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뉴욕에 살고 있던 라타네(Latane)와 달리(Darley)라는 심리학자는 왜 38명의 목격자가 아무도 제노비스를 돕지 않았을까에 대해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을 도와줄 개인의 책임감이 분산되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한 사람의 행인이 있는 곳에서 한 대학생이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척 연기를 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는 85퍼센트의 구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5명의 행인이 있는 상황에서는 겨우 31퍼센트의 구조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여러 사람이 있으면 책임감을 덜 느낍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저 사람을 돕겠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무관심 때문에 책임감이 분산되어서 어딘가에 죽어 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6계명은 ‘생명에 대한 책임’을 묻는 명령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판하면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마 27:24)라고 말했다고 해서 책임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앞에 고통당하고 쓰러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생명은 7억 명이나 한 명이나 다르지 않게 무겁고 소중합니다. 우리에게 가슴 아픈 죽음이 있다면 다른 누군가도 그런 아픔을 겪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일이 아닌 일들에 대해서는 쉽게 잊어버립니다. 내가 신경 쓰지 못하는 바람에 누군가에게 쉽게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제6계명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관심한 그 사람, 내가 귀하게 여기는 그 생명에 대하여 너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제6계명을 단순히 살인에 대한 명령으로만 보지 말고, 이웃에 관심과 사랑을 보여 주라는 계명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제6계명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을 살릴 수 있는 이는 바로 너밖에 없다.” 우리의 무책임과 냉담함 때문에 누군가가 죽어 가고 있다면, 우리의 관심과 사랑 때문에 죽어 가던 누군가가 살아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 우리의 사랑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이 새롭게 피어날 것입니다.
4. 중요한 것은 사랑했는가이다
크리스천에게는 누군가에게 ‘잘못하지 않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랑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혹시 우리가 사랑하지 않아 한 영혼을 구원하지 못했다면 그것이 큰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도 자격 없는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롬 5:10).
우리가 잘 아는 짐 엘리엇(James Elliot)은 1956년, 에콰도르의 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잔인하게 살해당합니다. 그는 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쏘지 않고 죽음을 택했습니다. 당시 사회는 그의 죽음을 ‘낭비’라고 했지만, 그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오래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다만 주 예수님처럼 꽉 찬 삶을 원한다.”
사도 바울은 그의 삶에서 멋진 신앙의 고백을 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매일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조금 더 살고, 덜 살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사는 게 바람직한 삶인지 날마다 마음속으로 고민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그럴 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하여 진정한 행동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줄로 믿으며,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