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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3일 수요예배
✦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약속 - 십계명 5 ✦
본능이라고 합리화될 수 없다
(출애굽기 20장 14절)
[들어가는 말]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에서 굉장히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내로남불’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불륜을 꿈꾸며, 간음은 인류의 보편적 현상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 땅의 각종 문화 매체는 간음을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하는지 모릅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 드라마들이 불륜을 주제로 한 것이 많이 나왔습니다. 드라마에서 불륜 커플이 나오는 장면은 배경도 아름답고 음악도 아름답게 나오는 반면, 진짜 부부가 나오면 배경도 어둡고 음악도 꽈광 하면서 이상한 게 나옵니다. 당시에는 사회에서 결혼한 사람들이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없으면 바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간음, 불륜을 저지르고도 ‘합의하에 했다’는 말로, ‘우리는 사랑했다’는 핑계로 그것을 죄라 여기지 않는 시대를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통죄가 처벌받지 않는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 계명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미국의 크리스천들에게 십계명 중 현대인에게 가장 맞지 않는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바로 이 계명을 뽑았다고 합니다. 간음이 불러올 무서운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7계명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더라도, 그 불편한 말씀을 명확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말씀에서 ‘여러분’에 자기 이름을 넣어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성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음행을 멀리하여야 합니다. 4 각 사람은 자기 아내를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5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과 같이, 색욕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6 또 이런 일에 탈선을 하거나 자기 교우를 해하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에도 말하고 경고한 대로, 주님께서는 이런 모든 일을 징벌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7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은, 더러움에 빠져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8 그러므로 이 경고를 저버리는 사람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살전 4:3-8, 새번역)
십계명이 주어졌던 광야 시대나,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시던 시대,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던 초대교회, 또한 지금 우리 시대에 변함없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제7계명입니다. 가장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하는 계명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표징이 됩니다. 성적 순결은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이라는 표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거룩하지 않고도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만큼은 거룩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일을 한다고 하는 우리가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비극입니까? 그러므로 제7계명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뜻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결혼을 지키라는 뜻이다
신명기 22장에는 간음에 대하여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2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23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24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신 22:22-24)
결혼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동의에 의해 간음죄를 범한 경우 둘은 똑같이 사형당했습니다. 만약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약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간음을 한 경우 그 장소가 성읍 안이면 역시 남자와 여자 둘 다 사형에 처했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규모는 작았기 때문에 여자가 소리를 지르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서로 동의에 의한 간음으로 본 것입니다.
“25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서 강간하였으면 그 강간한 남자만 죽일 것이요 26 처녀에게는 아무것도 행하지 말 것은 처녀에게는 죽일 죄가 없음이라 이 일은 사람이 일어나 그 이웃을 쳐죽인 것과 같은 것이라 27 남자가 처녀를 들에서 만난 까닭에 그 약혼한 처녀가 소리 질러도 구원할 자가 없었음이니라” (신 22:25-27)
다만 남자가 약혼한 여자를 범한 장소가 성읍 밖이면 여자는 처벌에서 제외되고 남자만 사형당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강간으로 본 것입니다. 우리는 남자들의 성욕을 ‘본능’이라는 이름 하에, 억제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어느 정도 묵인해 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남자들이 여자보다 성적인 죄를 더 많이 짓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러한 본능을 아시는데도 이렇게 무거운 형벌을 만드셨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본능이라고 해도 결코 합리화할 수 없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서운 형벌이 있어야만 본능을 억제할 만한 이유가 생기고, 유혹에서부터 자기를 지킬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28 만일 남자가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만나 그를 붙들고 동침하는 중에 그 두 사람이 발견되면 29 그 동침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를 아내로 삼을 것이라 그가 그 처녀를 욕보였은즉 평생에 그를 버리지 못하리라” (신 22:28-29)
남자가 약혼하지 않은 여자를 범한 경우는 처벌받지 않지만, 반드시 그 여자와 결혼해야 했고, 이런 일로 결혼하게 된 경우에는 남자 쪽에서 이혼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에서 여자는 그녀의 순결을 취한 남자와 결혼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성경은 결혼한 상대와 간음하는 것과 가정이 없는 상대와 간음하는 것을 엄격하게 구별합니다. 왜 그런 겁니까? 바로 여기에 제7계명의 핵심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단순히 간음하지 말라는 행동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정과 이웃에 대하여 이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결혼의 신성함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즉, 제7계명의 가장 중요한 정신은 단순히 간음이라는 행동 금지가 아니라 ‘결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특히 이웃의 가정과 결혼을 지켜주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보며 ‘무엇은 해도 되고 무엇은 하면 안 되느냐’가 아니라, ‘왜 하나님이 이 법을 주셨는지’ 그 하나님의 의도를 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제7계명은 단순히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 금지사항이 아니라, 결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명령입니다.
간음이 무서운 이유는 누군가의 가정을 깨뜨리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누군가의 가정이 깨어지는 것을 하나님은 무섭게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7계명은 단순히 혼전 순결이나 성폭행에 대한 것이 아니라, 결혼의 소중함, 가정의 소중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구약의 모세오경과 예언서를 통해 제7계명의 간음을 정의하면 이렇습니다. ‘간음이란, 한 남자가 이웃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는 것과 결혼한 여자가 남편 이외의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십계명의 핵심 정신은 ‘이웃’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간음하면 자기 결혼과 자기 가정이 망가지므로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자기 가정과 자기 결혼을 보호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가정과 결혼을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을 주신 것이고, ‘이웃의 결혼’을 보호하기 위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일단 동거해 보고 결혼하거나, 결혼하고 나서도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 혼인신고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합리적인 선택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이런 것을 분명히 간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결혼의 원리는 인간의 합리적인 선택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간음의 결과를 뭐라고 말씀합니까?
“32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사람은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이다. 자기 영혼을 망치려는 사람만이 그런 일을 한다. 33 그는 매를 맞고 창피를 당할 것이니, 그 수치를 절대로 씻을 수 없을 것이다.” (잠 6:32-33, 새번역)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런데 간음은 이 성전을 더럽히는 일이기 때문에 무섭습니다(고전 6:28). 그뿐 아니라 간음은 사람을 망치고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타락하게 만듭니다.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히 13:4)
그리스도의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졌던 초대교회 당시의 상황은 참으로 문란한 성범죄가 로마 제국 전체를 뒤덮고 있던 때였습니다. 성행위를 하는 남녀의 그림을 각종 예술품, 공예품들 속에서 볼 수 있으며, 집단 성관계를 하는 그림도 있었습니다. 그런 음란한 그림을 어린아이들까지도 다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로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그곳 사람들은 이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타락한 문화는 정결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문화가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가 그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이 사도들을 통해 전해졌고,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반드시 자신을 구별해야 하며 옛사람의 방식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방식은 로마 사회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문명이 망해 가는 과정들을 보면 틀림없이 거기에 성적 타락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신약 시대에도, 지금도, 그것은 여전히 똑같습니다. 간음이라는 것이 마치 ‘관행’처럼 이 시대에 자리 잡은 가운데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우리가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계명을 무겁고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2. 사랑할 대상을 잘못 고르는 것이 죄다
한국의 어느 가정에서 아버지가 보기에 30대 초반인 두 딸의 결혼이 너무 늦어지는 것 같아서 “너희들 이제 결혼해야 할 것 아니냐? 이 사람은 어떠냐? 그럼 저 사람은 어떠냐?” 물어보니까 딸들이 대답합니다. “아빠, 필(느낌)이 와야 만나죠.”
사실 우리가 결혼할 때는 ‘에로스’에 초점을 맞춥니다. 두근거리는 감정, 사랑한다는 느낌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로스를 가능케 하는 서로에 대한 매력이 얼마나 갈까요? 살다 보면 권태기라는 것이 찾아옵니다. 결국 결혼을 유지하는 것은 에로스가 아닙니다.
사랑에 권태기가 찾아왔을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아가페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결국 소중한 결혼을 지키는 것과 신앙은 서로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가페로 사랑의 위기를 견디고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이 식었을 때 인간은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지켜야 할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또한 사랑에 느낌이 전부가 아니라,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더 소중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2장과 에스겔 23장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결합을 결혼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만든 것을 ‘영적 간음’이라 이야기합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신을 찾았을까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를 안 드린 게 아닙니다.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제사드리고 나서 성전을 나서는 순간 자기 마음대로 살며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그렇게 뜨거웠던 우리의 마음이 식으면 다른 것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간음한 사람이 변명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한 게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주 맞는 말입니다. 사랑은 죄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게 어떻게 죄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랑의 대상을 잘못 선택한 것이 죄입니다.
제7계명의 핵심은 사랑의 대상을 잘못 선택한 것에 대한 엄중한 명령입니다. 아무리 그 사랑이 순수하고 열정적이라고 해도 대상이 잘못되면 타락의 길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식었다고 잘못된 대상을 찾을 게 아니라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결혼 예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결혼 서약을 합니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신실한 남편, 신실한 아내가 되어….” 그런데 이 부분이 사람들을 참 힘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어떤 교회에서는 결혼 서약 때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말을 삭제해달라고 요구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교회에서는 왜 이 어려운 서약을 꼭 집어넣은 것일까요?
사실 결혼은 인간의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하여 주신 것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단순히 ‘결혼식’이 아니라 ‘결혼 예배’입니다.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례할 때 목사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마 19:6)
성경은 죽음이 나눌 때까지 나눌 수 없는 것이 결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사랑’보다 ‘결혼’이 더 중요하고 위대하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결혼을 지키기 위해서 최소한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는 서로에게 신실하고 순결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순백색의 드레스를 입는 이유는 흰색이 순결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 순결이야말로 거룩함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이혼한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조건 이혼을 정죄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깨졌겠습니까? 혹시 그렇게 깨어진 결혼으로 아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성폭력이나 성추행을 당한 것 때문에, 죄책감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희망이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지켜야 할 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고 기도하고 찾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가정을 하나님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아픔을 경험하고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얼마나 신실하게 서로를 위해 좋은 배우자가 될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새롭게 빚으신다
미국의 영성가인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James Bryan Smith) 목사는 그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루는 동생과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신앙적인 대화를 하면서 해변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서 비키니를 입은 늘씬한 여자가 다가오고 있는 겁니다. 신앙 이야기를 하던 두 남자의 시선이 그 여자를 향했습니다. 과연 이것이 죄일까요?
스미스 목사는 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남자가 묵상하며 신앙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비키니를 입고 나타난 여자에게 눈길이 가는 건 본능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여자를 보고 또 뒤돌아 보는 겁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여자를 생각하게 될 때 이것이 행동으로 옮겨지게 되고,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즉, 성경이 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본능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처럼 음욕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2-5)
지금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십니까? 지금 내 삶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성화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믿으며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면 이렇게 인사드릴 것 같습니다. “예수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심방을 가서 어느 집사님에게 “지금 집사님에게 성령님이 계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잠깐만요. 찾아보고요.” 믿는 것은 같은데 예수님도 성령님도 내 마음에 계시지 않는다면, 이것은 정말 큰 일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끝까지 강조하는 것은 ‘거룩’입니다. 구별된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노력하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거룩을 훼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만큼 약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을 지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혼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간음하지 말라는 금지법이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행위로써의 금지법을 넘어 마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 음란과 성적인 죄악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으며, 이 죄악에서 온전한 자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인간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완벽할 것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숨을 쉬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누구나 죄악의 가능성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끊임없이 죄에 대해 이기려고 고민하며 괴로워하며 회개하는 모습을 보시고 받아 주시는 분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부족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돌아온 우리를 새롭게 빚으십니다. 지금까지의 내 모습이 어떠한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우리를 새롭게 빚어 나가실 그 모습을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우리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