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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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8일 성금요일 예배
✦ 성금요일 메시지 ✦
내가 목마르다
(요한복음 19장 28~30절)
[들어가는 말]
더운 날씨에 격렬하게 운동하다 보면 엄청난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이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나고 그 월드컵 축구의 열기에 자극받아서, 그해 여름 한낮의 땡볕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축구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 보면 땀이 줄줄 흐르면서 정말 목이 마르고 엄청난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뜨거운 중동의 태양의 열기 아래, 십자가 위에서 두 손과 두 발에 못이 박힌 채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조금만 운동해도 이렇게 목마른데, 예수님은 얼마나 목마르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1. 의학적으로 살펴본 예수님의 고통
예수님이 당하신 일에 대해 의학적인 측면에서 쓴 책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종합해서 볼 때 예수님은 이런 일을 당하셨습니다.
1) 수면 부족 및 공회에서의 구타와 조롱으로 인한 고통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하신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라도 죄인으로 몰아 죽이려는 악한 자들 때문에, 밤새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한숨도 못 주무셨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천으로 눈을 가린 후 주먹으로 때리고 손바닥으로 치면서 “누가 때렸는지, 맞춰봐라.” 하며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넘겨졌을 때 예수님은 이미 과도한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과 심한 폭행으로 지칠 대로 지치신 상태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흥분된 군중들을 가라앉히기 위해 일단 채찍질을 가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오래전(2004년) 나온 <The Passion of the Christ(그리스도의 수난)> 영화를 보면 이 장면을 아주 리얼하게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채찍질 형벌을 받는 죄인은 벌거벗겨진 채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기둥에 묶입니다. 그때 짧은 채찍이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각기 다른 길이의 가죽 줄을 땋아 만든 것으로, 각 줄에는 짐승의 뼛조각과 납 구슬이 달려 있습니다. 줄 끝에 달린 납 구슬은 피부를 멍들게 하고, 뼛조각이 그 약해진 피부 조직을 파고들어 살을 찢어놓습니다. 게다가 찢어진 피부에 납 구슬로 계속 맞으면 더 크게 벌어집니다.
가죽끈의 길이가 각각 다른 것은, 한 번의 채찍질에도 더 넓은 부분에 고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만큼 악랄하고 지독한 것이 이 채찍질입니다. 채찍질은 어깨, 등,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가해졌습니다. 이 채찍질 형벌은 죄인을 죽기 직전까지만 몰고 가는 데에 목적이 있었는데, 그 자체로 너무 강력해서 죄수들이 채찍질을 당하는 도중에 쇼크로 죽는 일이 많았습니다.
채찍으로 계속해서 맞으면 등은 피부 조직과 지방 조직 안의 근육층까지 드러나게 되고, 심지어 척추뼈까지도 겉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살가죽은 너덜너덜하게 되어서, 마치 리본처럼 되어 버립니다.
이때 채찍질을 당한 죄인에게는 과다 출혈이 일어나게 되는데, 의학용어로 ‘저혈량성쇼크’(hypovolemic shock)라고 하는 것을 불러오게 됩니다. 이 ‘저혈량성쇼크’는 몸 안에 있는 피의 5분의 1 이상이 빠져나갔을 때 몸이 쇼크 상태에 빠지는 증상으로, 요즘 이렇게 되면 즉시 응급실로 실려 가야만 하는 아주 심각한 상태입니다.
저혈량성쇼크가 일어나면 여러 가지 증세가 나타납니다.
첫째, 맥박이 약해지고 빨라지며, 숨이 차고 식은땀이 납니다.
둘째, 혈압이 떨어져서 정신이 몽롱해지거나 기절하게 됩니다.
셋째, 신장(콩팥)에 남아 있는 피의 양을 지키기 위해 소변이 줄거나 멈춥니다.
넷째, 신체 기관의 기능이 떨어지고 손상됩니다. 특히 신장이 망가집니다.
다섯째, 몸이 액체를 필요로 하기에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탈수증).
이러한 증상들을 가져오는 무지막지한 채찍질이 끝났을 때, 예수님은 이미 몸을 가눌 수도 없을 정도가 되셨고 죽음 직전의 상태까지 가셨습니다.
2) 로마 군인들의 조롱과 폭행으로 인한 고통
총독의 군인들은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는 예수님을 희롱하려고 관저 안으로 데려갑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주색 가운을 입히고 가시 줄기로 면류관을 엮어 그것이 왕관인 것처럼 머리에 씌우고, 나무 지팡이를 손에 쥐여 줍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유대인의 왕이시여!”라고 비아냥거리며 절하면서 조롱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침 뱉고, 손에 쥐여 준 지팡이를 빼앗아 머리를 연속해서 때립니다. 또 왕은 왕관이 있어야 한다면서 가시로 왕관을 만들어 푹 눌러 씌웁니다. 면류관의 가시 길이는 1인치에서 2인치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렇게 굵고 긴 가시로 만든 관을 머리에 꾹 눌러 씌우면, 가시가 연약한 부분을 파고들기에 엄청난 고통을 주며 피가 줄줄 흐르게 됩니다. 그런데다 가시관을 씌운 채 나무 지팡이로 머리를 연달아 때렸으니, 가시가 머릿속을 더 깊이 파고들어 예수님은 거기서 오는 엄청난 고통을 계속해서 견디셔야 했습니다.
이제 놀리는 것도 시들해진 군인들은 십자가 처형을 준비하며 예수님을 다시 벌거벗깁니다. 처음 몸에 입혔던 자주색 가운을 벗겨내는 것입니다. 이미 채찍으로 엄청나게 맞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부는 너덜너덜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채찍질을 멈추고 가운을 입혀 놓았을 때, 피와 진물 때문에 그 옷이 예수님의 등에 엉겨 붙었는데, 이제 그것이 말라서 옷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그 가운을 무자비하게 벗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엄청난 고통을 주는 동시에, 멎어 있었던 피가 등의 군데군데에서 다시 터져 나옵니다. 이것은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십자가에서 처형할 때는 죄인이 채찍질 형을 받은 곳으로부터 십자가에 달리는 곳까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십자가 전체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기둥 위에 설치되는 가로 막대만 지고 가게 했습니다. 하지만 가로 막대만 해도 약 75~125파운드나 되는데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기둥까지 합하면 300파운드 정도나 됩니다.
죄인은 목과 어깨 위에 십자가를 얹고 십자가 처형 장소를 향해 걸어가야 했습니다. 무거운 가로 막대는 어깨와 등을 짓누르며 피부를 파고듭니다. 이미 체력이 바닥 나서 쇼크 상태에 빠져 있던 예수님은 죽을힘을 다해야만 겨우 한 걸음을 옮기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안간힘을 써서 움직여야 했으므로 온몸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채찍질을 당하신 때부터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까지 끊임없이 피를 흘리셨고, 피가 모자라는 상태가 되셨습니다.
3)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인한 고통
사형 장소에 도착하면 먼저 죄인의 옷을 벗기는데, 이때 피와 진물로 등에 엉겨 붙은 옷이 벗겨질 때 또다시 살이 뜯어지고 상처가 터지게 됩니다. 그다음에는 죄인을 땅에 눕히고, 죄인이 매고 온 가로 막대에 두 손을 고정합니다. 땅에 눕혔으니, 피범벅이 된 예수님의 몸이 이번에는 흙투성이가 됩니다.
예수님의 손목을 고정하는 데 쓰인 못은 길이가 13~18cm(5~7인치)에 폭은 1cm(0.4인치) 정도였습니다. 아주 큰 사이즈입니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사람을 매달면, 손이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찢어지기 때문에 손목의 뼈 사이에 못을 박았습니다.
손목에 못이 박힐 때는 말할 수 없이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손목 한가운데로 굵은 정중신경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손목에 못이 박힐 때는 그 굵은 정중신경이 거의 절단되다시피 심각하게 손상됩니다.
손목이 가로 막대에 못 박힐 때 예수님의 손목을 지나는 신경이 파괴되면서 두 팔에는 전기에 감전되는 것처럼 불같은 고통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못이 박힐 때의 고통은, 커다란 펜치로 팔꿈치를 잡아서 몇 번을 뒤트는 것과 같고, 두 손은 절반 이상 마비되어 오그라들게 됩니다.
이렇게 죄인의 두 손이 고정된 가로 막대는 십자가 처형대 기둥 위에 설치됩니다. 그다음으로는 죄인의 무릎을 굽히고 두 다리를 많이 구부려서 옆으로 젖힌 뒤 두 발을 모아 동시에 못으로 기둥에 박습니다. 철로 된 대못이 발의 가운데 뼈 사이를 통과할 때 종아리와 발바닥 신경들이 손상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채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숨을 쉬려 할 때마다 온몸이 찢기는 고통을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 팔이 위로 고정된 채로 십자가에 매달리면 숨을 내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폐에 숨이 점점 차오르게 되고, 이러한 호흡 곤란은 ‘과탄산혈증’, 즉 혈액 속에 이산화탄소가 많은 상태를 가져오며, 근육에 쥐가 나게 하고 경련을 일으킵니다.
근육 경련이 일어나면 더 이상 숨을 쉬기가 힘들어집니다. 팔다리에 힘을 주어서 몸을 위로 당겨 숨을 내뱉어야 호흡할 수 있는데,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면 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습니다. 수영하다가 종아리에 갑자기 쥐가 나면 발차기를 계속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상태는 심장을 끼고 있는 심막과 폐를 싸고 있는 늑막에도 물이 차게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폐를 둘러싸고 있는 가슴막에 물이 차거나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심낭에 물이 차게 되어 더 이상 숨을 쉬기가 힘들어집니다. 이렇듯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자기 몸을 기둥에 의지하며 밀어 올려서 간신히 숨을 내쉬고 곧바로 털썩 떨어져 매달리게 됩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가까스로 숨을 쉬셨습니다. 숨을 쉬려고 기둥에 등을 대고 온 힘을 다해 밀어 올릴 때, 채찍질로 인해 생긴 상처들이 또다시 터지고 기둥의 더러운 먼지와 균이 상처 안으로 들어가 통증을 더하게 됩니다. 게다가 그 끈적거리는 상처에 벌레들이 달려들고 새들도 와서 쪼아 먹으려고 합니다.
2. 왜 예수님은 이런 고통과 죽임을 당하셨는가?
이제 거의 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극심한 고통과 목마름 가운데 처절히 외치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사실 예수님은 이런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목이 마르는 것은 육신을 입고 사는 인간이나 동물들이 느끼는 것이지, 영이신 하나님은 목이 마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1)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먼저, 예수님이 목마르고 피를 흘리며 고통을 당하는 육신을 입어야만 당신의 몸을 인류를 위한 대속 제물로 드리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 1:14, 새번역)
참 인간으로 오셨기에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배고프시고, 피곤하시고, 목마르시고, 병들어 아프시고, 외로우시고, 시험받으시고, 오해받으시고, 배신당하시고, 마침내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최악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극심한 두통과 갈증 속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셨습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외침에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히 4:15, 새번역)
그러므로 “내가 목마르다”라는 주님의 외침은 바로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너의 목마름을 내가 안다, 너의 그 아픔을 내가 안다, 네가 그런 극심한 고통을 당할 때 내가 너를 이해한다.” 이렇게 우리를 향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외치시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이 바로 “내가 목마르다”입니다.
육신의 극심한 고통을 당하신 주님은 육체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이해해 주십니다. 우리가 몸이 아플 때 이해해 주십니다. 이 땅에서 목수로서 일하셨던 주님은, 사업의 어려움, 직장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십니다.
솔직히 예수님이 목수로 일하실 때 로마 군대에서 뭔가를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는데 그 근처에 엄청나게 큰 도시가 있었습니다. 나사렛 근처에 세포리스(Sepphoris)라고 굉장히 중요한 도시가 있었는데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필요한 물건들을 많이 만들어 달라고 하면서 로마 군인들이 돈을 제대로 줬겠습니까? 준다고 해놓고는 안 주었을 것입니다. “왜 안 줍니까?” 하면 “우리 마음이지.” 하며 강압적으로 나온 적이 한두 번이었겠습니까? 또 사기를 치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이런 어려움을 다 이해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가족들로부터 오해받으셨고,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하는 아픔을 겪으셨으며, 항상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로부터 감시와 견제와 도전과 미움을 받으셨던 예수님은, 인간관계로부터 오는 어려움과 아픔과 갈등을 이해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나올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이든지, 어떤 어려움이든지, 주님께서 이해하시지 못할 만한 일은 전혀 없습니다.
2)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신 예수님은 단지 자기의 목이 말라서 그러신 것만은 아닙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8절)
“모든 일”이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이 땅에서 이루도록 맡기신 모든 사명을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이제 다 이뤘다는 것을 아시고 목마르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무슨 성경을 말합니까?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그들은 나에게 독을 타서 주고, 목이 말라 마실 것을 달라고 하면 나에게 식초를 내주었습니다.” (시 69:21, 새번역)
이 구절은 메시아에 대한 놀라운 약속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실 때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29절)
이것은 정확하게 시편 69편 21절 말씀의 성취입니다. 바로 이 예언의 말씀, 이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이 고통의 절정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헤아리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그런데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셨다고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입에 대줄지 안 대줄지 어떻게 압니까? 천 년 전에 이미 시편에 예언된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확률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얘긴데, 이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게 된 것과 목마르다고 외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순간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검으로 베어버렸을 때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 (요 18:11, 새번역)
그렇다면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신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인류 구원이라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치겠다는 결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최후의 순간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면서 “내가 목마르다, 그러므로 이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겠다.”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3) 우리가 목마르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요한복음 4장에는 인생의 갈증으로 소망 없이 살아가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편을 다섯 명이나 바꾸어 보았어도 여전히 목마르고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녀가 추구한 어떤 삶의 방식도, 어떤 해결책도, 어떤 선택도, 자기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울고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이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한낮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와서 우물물을 긷던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3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요 4:13-14, 새번역)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고 외치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 인생이 겪는 이 땅의 모든 종류의 목마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돈을 많이 벌면 목마름이 없어집니까? 돈 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만족합니까?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자녀가 좋은 학교 가고 성공하면 목마름이 없어집니까? 세상에서 권력을 가지면 목마름이 없어집니까? 지식이 많거나 학벌이 좋으면 갈증이 사라집니까? 쾌락을 추구하면 목마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런 것들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영혼의 타는 듯한 갈증은 오히려 더 심해집니다. 그런 것들이 아무리 좋아도 목마름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것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심한 갈증으로 목말라하던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하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나가는 말]
지난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 전쟁(또는 제2차 걸프 전쟁)을 일으켰을 때, 처음부터 미국과 처음부터 연합하여 함께 싸운 나라가 영국입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최종 권위와 책임을 지고 모든 것을 이끌어 나간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당시 영국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였습니까? 아닙니다. 토니 블레어 총리였습니다.
영국에는 왕이 있고 왕족도 있지만 형식뿐이고, 실제로 나라를 이끄는 사람은 총리입니다. 왕은 신하들의 문안 인사를 받아주고, 외국 사절이 오면 파티에 나가 밥이나 같이 먹어주며, 특별한 날에 왕궁 앞에서 사진 기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줄 뿐, 정치적인 실권은 전혀 없습니다. 완전히 형식적으로 이름만 왕입니다.
그런데 마치 이런 식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예수님을 마치 영국 국왕처럼 이름만 있고 실권은 없는 존재로 전락시킨 채 살아갑니다. 주님을 실권 없는 허수아비 왕으로 세워놓고, 실제로는 자기가 실권을 다 행사합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주님, 주님’을 외칩니다.
이번 주 동안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고난주간을 잘 보내셨습니까? 아니, 오늘 하루의 삶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결정을 내리고 행동했습니까, 아니면 내가 알아서 다 했습니까? 심지어 다니엘 금식을 하더라도 뭘 먹고 뭘 안 먹고, 뭘 보고 뭘 안 보고, 이런 것들을 누가 결정하는 겁니까? ‘이것을 주님이 과연 기뻐하실까?’라는 기준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좋으면 하고 내가 싫으면 안 하고,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까?
사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행세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내 생각이 더 중요하고, 하나님 뜻보다도 사실 내 계획이 더 우선이 아닙니까?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에 여전히 목마른 겁니다. 그렇게 살면 목마릅니다. 그렇게 살면 목마름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인으로 믿고 영접하지 않으면 영원히 목마름 가운데 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자기 삶에서 예수님을 매일 진짜 주인으로 믿고 모시며 살지 않으면 목마름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안 믿는 사람이 느끼는 목마름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목마름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지 않고 다른 물을 자꾸 마시려 하니까 목마른 것입니다. 아니, 목마름을 넘어 끊임없이 근심, 걱정, 불안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입니까?
이 시간 자기에게 솔직히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그리스도인인데, 정말로 예수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가? 정말 하나님의 뜻이 내 뜻보다 중요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내 계획보다 중요한가? 정말로 내 삶과 내 가정과 내 일터의 주인이 예수님이신가? 정말로 내 시간의 주인이 예수님이신가? 정말로 내 지갑의 주인이 예수님이신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더라도 별로 변화되지 않고 신앙의 성장과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면, 그 주된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매 순간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엄청난 것을 세상에서 이루었다 해도,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성공한다 해도, 이 목마름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네가 원하는 것을 해도 네 목마름은 해결되지 않는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다른 물을 마시면 잠시 해결되는 것 같지만 금방 또다시 목마르게 될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목마름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아셔서 “내가 목마르다” 오치신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내가 목마르지 않게 하시려고 이 목마름의 고통을 당하셨던 그분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나의 고통과 목마름을 그분 앞에 드리십시오. “주님, 제가 이렇게 목이 마릅니다. 이것 때문에 목이 마릅니다.”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물을 받아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 하고 외치시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을 살리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목마름의 고통을 당하신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매일 받아 마시며,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 그 주시는 물을 받아 마시며 살아감으로써, 모든 갈증이 다 해결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또 이 삶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