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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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일 수요예배
✦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약속 - 십계명 3 ✦
진실이 이웃 사랑보다 먼저인가?
(출애굽기 20장 16절)
[들어가는 말]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대학을 다니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아버지, 그동안 무고하신지요? 집안도 평안하지요? 자꾸 돈을 부쳐 달라고 편지를 써서 죄송합니다. 또 100만 원을 부탁하는 제 마음은 참으로 부끄럽고 아프기까지 합니다. 고향을 향해 무릎 꿇어 용서를 빕니다.
추신: 사실, 너무 마음에 걸려 우체부를 쫓아갔지요. 편지를 빼앗아 태우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정말 다시 회수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했지요. 그러나 너무 늦어 우체부를 놓쳐 버렸습니다. 제 불찰을 용서하십시오.”
며칠 후 아버지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아들아! 너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셨나 보다. 네 편지를 못 받았다. 그러니 잘 지내라.”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체부를 쫓아갔는데 놓쳤다는 것을 어떻게 편지에 씁니까? 아버지도 편지를 못 받았는데 하나님이 아들의 기도를 들어주신 걸 어떻게 압니까? 우리는 정말 거짓말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거짓말을 합니다. 첫째, 이웃을 해치려는 의도로 자행되는 나쁜 거짓말이 있습니다. 둘째, 농담으로 하는 거짓말도 있습니다. 셋째, 예의로 하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넷째, 불가피한 거짓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2002년 미국 매사추세츠대학교 심리학자 로버트 펠드먼(Robert Feldman) 교수는 거짓말과 관련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사람들을 2명씩 3개 조로 나눠 상대방에게 10분씩 자기소개를 하게 한 것입니다. 다만 조건이 있었는데, 1조는 자기를 소개할 때 되도록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도록 소개하라고 했고, 2조는 자기 능력을 최대한 보여 주라고 했으며, 3조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녹화 후 실험 상황을 분석해 보니,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게 요구한 1조에서는 평균 2개의 거짓말을 했고, 자기 능력을 최대한 보여 주라고 한 조는 평균 2.3개의 거짓말을 했습니다. 반면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은 3조는 0.88개의 거짓말을 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모든 참가자가 스스로 거짓말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로버트 펠드먼 교수는 초등학교에서 인기 있는 학생 대부분이 엄청난 거짓말쟁이라는 점도 지적했습니다. 언젠가 한 방송에서 국회의원 출신 정치인이 말하기를, 국회의원들이 하는 거짓말 중 1위는 다른 국회의원에게 ‘존경하는 OOO 의원님’이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장식한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경은 정치인의 자질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정치인은 내일을 예측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내일, 그다음 내일인 10년 후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10년 후에 예측이 빗나갔다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어야 정치인의 자질이 있는 것이다.”
틀려도 합리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정치인은 거짓말을 잘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정말 정치인은 거짓말을 안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과연 제9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1. 말 몇 마디가 이웃의 생명을 좌우한다
제9계명의 본래 의도와 정신은 재판 과정에서 위증을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범죄 사건이 벌어졌을 때 과학적으로 조사한다는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DNA검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security camera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재판은 증언에 의존했는데, 유일한 증거가 누군가의 증언이었기 때문에 말에 따라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열왕기상 21장에는 위증 때문에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서 벌어진 일입니다. 사건의 무대는 가나안에서 가장 비옥한 땅인 이스르엘 성읍이었습니다. 경치가 빼어나고 기후가 좋은 이곳에 북 왕국의 왕들은 별장을 짓고 쉬곤 했는데, 바로 인접한 곳에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던 나봇이라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아합은 별장 궁전의 정원을 확장하기 위해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고, 그래서 나봇에게 그의 포도원을 자기에게 팔라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나봇은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봇에게 있어 그 땅은 조상에게서 유산으로 받은 것이고,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은 팔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떡하나 근심하고 있는 아합을 보고, 왕비인 이세벨이 계략을 세웁니다. 한 통의 밀서를 이스르엘 성읍의 지도자들에게 보내서, ‘두 명의 거짓 증인’을 매수하여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거짓으로 고발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발을 근거로 나봇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구약의 율법에는 왕을 저주하거나 하나님을 저주하는 사람은 돌로 쳐서 죽이라는 내용이 있었고(레 24:15-16), 이런 이유로 범죄자가 처형되었을 경우 그의 모든 재산은 왕실의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세벨의 계략은 합법성을 가장한 것이었습니다.
이 천인공노할 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두 명의 증인’입니다. 제9계명의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말은 그저 말 몇 마디 거짓말하는 것으로 한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거짓 증언을 방지하기 위하여 무서운 법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6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7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신 17:6-7)
사형 판결이 이루어지면 그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증인이 앞장서서 형을 집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말에 직접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위증이 판명될 경우는 위증한 사람이 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18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19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신 19:18-19)
이 말씀을 보면, 거짓말 때문에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에 대하여 제9계명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실을 알면서도 고의로 말하지 않는 행위 역시 죄로 간주했습니다.
“누구든지 증인 선서를 하고 증인이 되어서, 자기가 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사실대로 증언하지 않으면 죄가 되고, 그는 거기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레 5:1, 새번역)
하나님께서 제9계명을 주신 기본 정신은 이웃의 생명을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말실수나 진실을 감춤으로써 누군가가 피해를 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거짓된 증거들로 인하여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가고, 거짓된 혀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인간 사회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몇몇 사람들의 말이나 잘못된 소문들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받고 아파할 때가 있습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했대.’ 하며 쑥덕거리는 일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에는 그런 일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데를 가보십시오. 분위기가 이상한 경우가 꽤 많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주변에도 안타까운 소식들이 들립니다. 앞에서는 안 그런데 뒤에서는 쑥덕거리는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무책임한 말 몇 마디로 누군가가 고통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무서운 일입니다.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도 다른 교회에 가서 잘 정착하고 믿음 생활을 잘하면 그래도 낫지만, 문제는 그렇게 상처받고 떠나서 믿음을 떠나버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심심풀이로 나눈 몇 마디 대화가 이웃의 생명을 상하게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고의로 잘못된 말을 퍼뜨려 상처를 주는 일이 절대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1 너희는 근거 없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하여 죄인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 2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며,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출 23:1-2, 새번역)
2. 무조건 솔직하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과연 솔직한 것이 모두 좋은 것입니까? 사실 요즘 같은 시대에 자기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 모든 일에 솔직하게만 말한다면 제대로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거나 사실을 숨겨야 할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몇 가지 모호한 상황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성경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때로 성경에서 거짓말을 용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1장에서 애굽의 바로 왕이 히브리 민족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산파들에게 아들이면 다 죽이고 딸이면 살려두라고 명령합니다(출 1:16). 그때 산파들은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아기들을 살립니다. 왜 그랬습니까?
“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18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출 1:17-19)
왕의 추궁에 대해 산파들이 히브리 여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린다고 대답한 것은 사실 거짓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거짓말을 한 산파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21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출 1:20-21)
하나님은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고 강해지게 되는 도구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산파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가운데 모세를 건지셔서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불의에 따르지 않거나 이웃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거짓말을 하나님이 거짓말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에게 한 거짓말은 하나님 기준에서 거짓말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는 악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악한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거짓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왕도 무섭지만,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했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행하며 바로가 원하는 악한 뜻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정직에는 ‘사랑’이 전제되어야 하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거짓말은 하나님이 거짓말로 취급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리고에 숨어든 이스라엘 정탐꾼 두 명을 숨겨주고 왕의 신하들에게는 이미 떠났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라합과 온 집안이 여리고 멸망 때 유일하게 그 집안만 구원받았습니다.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여 불의한 일을 거부한 것입니다. 여리고 왕이 내린 명령, 즉 정탐꾼들을 잡아 죽이라는 것은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둘째, 성경에는 모든 진실이 드러나야 한다고 이야기합니까? 이것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생각을 모두 드러내는 것이 반드시 옳은 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우리가 보는 시각이 반드시 진실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자기 생각이 진실이고, 자기감정에 충실한 것을 정직이라고 착각합니다.
요즘 그런 것을 많이 봅니다. 페이스북(Facebook) 같은 데 보면 글들이 많이 올라옵니다. 글도 아주 잘 씁니다. ‘왜 대통령은 탄핵되어야 하는가? 탄핵이 마땅한 내란 수괴다.’라고 아주 잘 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댓글들이 죽 달리며 ‘맞습니다’, ‘옳습니다’, 동의합니다’, ‘퍼갑니다’ 등등.
또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기각이다’, ‘당연히 각하다’라고 글을 씁니다. 논리도 정연합니다. ‘헌법학자들에 의하면 이렇고 저렇다.’라고 하며 아주 대단합니다. 그러면 거기에도 댓글들이 죽 달립니다. ‘당연한 말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등등.
이쪽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 옳고 저쪽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 옳은데, 도대체 누가 옳다ㅓ는 말입니까? 모든 사람은 자기 생각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방향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유대교 전승에 의하면 랍비들이 고민하는 것이 있습니다. ‘결혼하는 신부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무조건 가장 아름답고 우아하다고 말해주어야 하는가?’입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합니까?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사실 신부께서 가장 아름다운 건 아닙니다.’ 하고 사실을 이야기해야 합니까? ‘당신보다 더 아름다운 신부들이 많스니다.’ 하고 진실을 말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냥 아름답다고 해야 합니까?
사실 ‘당신보다 예쁜 사람이 더 많아요.’라고 한다면 얼마나 무례한 일이 되겠습니까? 결혼하는 신부는 신부이기에 가장 아름답습니다. 무엇보다 신랑과 가족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신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흔히 솔직해야 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물건을 사러 갔는데 배우자가 마음에 들어서 사야겠다고 하는데, 그것을 두고 디자인이 엉성하다는 둥, 센스가 없다는 둥 이야기하는 것은 정직한 게 아닙니다. 제가 조금 그런 경향이 있는데, 옳은 게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관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감정을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이야기하면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내 생각에는 이런 것 같은데 이게 낫지 않겠어?’ 하고 제안하는 것은 괜찮지만, 이건 틀렸고 저것도 틀렸다며 진리인 것처럼 말하면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만듭니다. 그럴 때는 무조건 솔직한 것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아름답고 신앙적인 일입니다.
어떤 부모는 아직 모든 것이 서툰 자녀에게 “잘했네”, “잘하고 있어”, “참 멋지다!” 하는 말에 인색합니다. 잘하지 못했으니 잘했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옛날 분들은 더욱 그렇지만, 요즘 젊은 분들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격려하고 세워 주는 말, 이웃에게 덕을 끼치는 말은 거짓말이 될 수 없습니다. <생명 언어의 삶>에서도 격려 언어, 인정 언어, 칭찬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배우지 않습니까? 거짓말로 칭찬하면 안 되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 때 ‘잘될 거야. 괜찮아.’라고 격려하는 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게다가 내가 지금 판단하는 것이 전부 다 옳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보고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 정보조차 때로는 진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가짜 뉴스가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판단할 때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실이 아닌 내 주관적인 판단을 ‘진실’이라고 하면서 쉽게 전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셋째, 나약함으로 같은 죄를 반복하는 것은 무조건 거짓이고 위선인가 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위선자’, ‘독사의 자식들’, 심지어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질책하셨습니다. 겉으로는 선량한 척, 종교적인 척하지만, 내면으로는 사악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경우에 위선은 거짓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완벽한 척하지 않고 부족함을 시인하면서 완전을 향해 노력하는 것은 위선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에서 죄의식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다음부터는 절대 이러지 말자면서 계속해서 같은 죄의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완전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은 위선이나 거짓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람직한 일입니다.
3. 사랑 없는 정의는 칼과 같다
인간에게 전혀 거짓말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또 때로는 거짓말을 하는 편이 서로에게 더 좋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9계명은 거짓말을 금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출 20:16)
제9계명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등장합니다. 바로 ‘네 이웃에 대하여’라는 말입니다. 즉, 계명을 지켰느냐 어겼느냐의 포인트는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했느냐에 있습니다. 이것은 새번역을 볼 때 더 분명합니다.
“너희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지 못한다.” (출 20:16, 새번역)
정의와 정직이 중요하지만, ‘사랑’과 ‘은혜’가 없는 정의는 위험한 칼과 같습니다. 진실을 이야기한다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의와 정직은 아주 중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은혜와 사랑과 이웃을 돌보려는 마음이 없다면, 그런 정의와 정직은 오히려 남을 해치는 아주 무서운 칼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문제가 되는 것이,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면서 ‘모든 것을 다 파헤쳐주마’라고 하며 스캔들을 들춰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인 것들도 있지만 아닌 것들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사자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고, 그것 때문에 목숨을 끊은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무서운 칼이 되어 찌른 겁니다. ‘나는 정의를 추구한다.’라고 했지만,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직하고 신실하면서도 이웃을 돌보는 마음의 여유를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근본적인 자세는 무엇보다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직에 관하여 흔히 하는 착각이 있는데, 내가 정직해서 손해를 보았으니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직의 대가가 무엇입니까? 정직한 삶을 산 사람에게는 보상이 주어집니까? 오히려 정직한 삶을 살면 손해를 보는 일들이 생기고, 대가를 치러야 할 경우도 생깁니다. 정직한 삶 그 자체가 의미 있고 행복한 것입니다. 정직에 보상을 바라면 상처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정직 그 자체가 복입니다. 믿으십니까? 정직함과 진실함 때문에 영생을 얻는 것, 그것이 복임을 인정하십니까?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 영생을 얻습니다. 진짜로 진실하게 또 정직하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목회하면서 보니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며 세례를 받았는데, 그 이후에 보면 교회를 떠나거나 믿음 생활을 전혀 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뭡니까?
믿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되었을까 생각해 볼 때, 본인이 착각했거나 거짓으로 했을 수가 있습니다. 정말 믿어지지는 않으면서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제가 믿겠습니다.’라고 하며 세례를 받은 경우, 나중에 보면 믿음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삶이 됩니다. 또한 자기는 믿은 줄 알았는데 정말 정직하고 진실하게 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믿을 때 영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직하고 진실한 것이 복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얻어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보상을 바라면서 치사하게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 자신에게도 떳떳한 삶이 진정으로 의미 있고 복된 삶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복입니다.
4. 정직을 말해야 하는 복음의 증인으로 살라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님을 봅니다.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 합니까? 오히려 그때까지는 그 생각을 안 하다가 하지 말라고 하니까 그것을 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말로 사람들을 해치며 상처를 주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9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거짓 증거 하지 않는다’라는 차원에 머문다면 신앙생활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또 하나의 죄책감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나쁜 일을 하지 않는 삶이 아닙니다. 나쁜 일을 하지 않는 삶이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 은혜를 받은 백성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선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나쁜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증인’은 다른 사람의 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9계명은 위증의 피해를 막기 위한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증인의 개념이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조금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인 것입니다. 즉 은혜받은 자의 삶은 거짓 증거 하지 않는 삶에서 한 단계 뛰어넘어, 생명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한 삶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초대 교회에서 가룟 유다의 배신 이후 제자를 보충할 때의 유일한 기준은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행 1:22)이었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난 후 행한 설교의 초점은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예수 부활의 증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행 5:32)
‘증인’은 헬라어로 ‘마르투스(martus)’인데, 순교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martyr’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순교자가 된다는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것이야말로 성령으로 거듭난 크리스천의 정직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순교자들의 피와 그들의 증언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들의 증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것이며, 그들에게는 그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순교자의 삶을 사는 사람, 증인의 삶을 사는 사람, 그것이 참된 복이며 능력입니다. 거짓 증거에는 능력이 없지만, 참된 증거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엇을 하지 말라’가 아니라 ‘무엇을 하며 살겠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라고 가르쳐줍니다. 혹시 우리에게 아무 보상이 없더라도, 증인 된 삶을 통해 순교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예! 제가 그렇게 살아가겠습니다!’ 하고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에 머물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정직과 진실함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서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복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순교자의 삶, 증인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 인정받는, 참으로 복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