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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9일 수요예배
✦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약속 - 십계명 1 ✦
쉬운 길로 가라고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0장 1~2절)
[들어가는 말]
우리가 가진 성경책 표지 안쪽을 보면 주기도문, 사도신경과 함께 십계명이 있습니다. 성경 본문을 찾지 않아도 언제든지 펼쳐보고 기억하라는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십계명을 가리키는 히브리 원어는 ‘아세레트 하데바림’인데, 이것은 ‘열 마디 말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마음을 담아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사랑의 약속을 오해하고, 십계명이 우리를 옭아매는 엄격한 규율로 생각하며 부담스러워합니다.
하지만 한마디로 십계명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약속이며,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해주는 중간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오늘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약속입니다.
오래전부터 십계명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했는데, 마침 몇 년 전에 십계명에 대한 책을 발견했습니다. 그 책은 한국 분당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님이 쓰신 <살아내는 약속>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을 중심으로 십계명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십계명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종종 십계명에 대해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유목민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계명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유효하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오래전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던 십계명이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악함과 나약함은 똑같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구약 시대이든, 신약 시대이든, 중세이든, 종교개혁 시대이든, 아니면 지금 이 시대이든, 인간의 본성과 죄 문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1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2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1~2절, 새번역)
이것은 십계명을 주시기 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어떤 단어가 제일 눈에 들어오십니까? 저는 ‘너희’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하나님은 불특정 다수 모든 사람에게 이 말씀을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인 대상인 ‘너희’, 즉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를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이 3500년 전 ‘너희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인격적이고 개인적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배경은 이방 땅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을 이끌어내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도록 하신 시점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셨을까요? 다시는 이 백성이 이방 땅에서 노예가 되지 않고, 거짓된 우상과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십계명에는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이끌어준 이 땅에서 나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 너희가 나의 백성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시는 사랑의 속삭임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마음이 우리에게 들어와야 합니다. 여러분은 십계명의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1) 너는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 우상을 만들거나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
3)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하지 말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제1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내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십계명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남의 것을 탐내거나, 도둑질하거나, 간음하거나, 거짓 증거 하는 겁니까? 결국은 자기가 스스로 삶을 이끌어가기 위함이 아닙니까? 죄는 하나님의 계획에 불만을 품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3500년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2. 사랑하기 때문에 지킨다
오래전 어떤 남자 대학생이 연애하는데 여자친구에게는 통금 시간이 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7시 전에는 집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통금 시간만 생각하면 여학생은 밖에 나가서 무엇을 해도 신경이 쓰였습니다. 계속 시계를 봐야 했습니다. 그럴수록 통금 시간을 정해둔 아버지가 밉고, 조금 늦게 들어가면 서로 다투며 갈등도 일어났습니다.
여학생의 아버지는 왜 통금 시간을 걸어 두었을까요? 당연히 사랑하는 딸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대학생이 7시까지 집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에도 그랬습니다. 대학생이 어떻게 7시까지 들어갑니까? 완전히 초저녁인데 그때까지 들어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그녀의 아버지가 몰랐을 리 없습니다. 사실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면 통금 시간을 지키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마음이 보이지 않으면 힘들고 부당하게만 느껴지게 됩니다.
청춘남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서로 많은 약속을 하게 됩니다. 자기 전에 꼭 전화 통화하자, 주말에는 꼭 함께 시간을 보내자, 기념일은 꼭 기억하고 함께 보내자 등등 많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약속을 지키는 게 목적이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사귄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해지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상대방을 정말 사랑하면 이런 약속을 써 놓고 외우지 않아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계명도 그렇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왜 주셨을까 생각하며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본다면, 계명을 지키는 일이 더 이상 힘들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 저절로 삶에서 지켜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계명을 대할 때 ‘어떻게 이 계명을 지킬 것인가?’가 아니라 ‘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일까?’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점을 아주 잘 보여주는 성경 본문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 10:38-42)
우리는 이 말씀에서 흔히 마리아는 신실한 사람이고, 마르다는 ‘일’로 인해 예수님께 질책받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40절의 ‘준비하는 일이 많아’라는 말은 실제로 그렇게 부정적인 뜻이 아닙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디아코네오’라는 단어인데, 바로 ‘섬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함이다.”라고 하셨을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교회를 돕고 섬기는 역할을 하는 ‘집사’에도 바로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여 섬기는 일을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41절에서 ‘마르다야 마르다야’라고 두 번 부르신 것은 유대인의 애정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꾸짖으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교훈을 주시고자 애정이 담긴 말투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스캇 솔즈(Scott Sauls)는 자신의 책에서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세상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먼저 나를 통해 네가 변해야 한다. 남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전에 먼저 네가 내게 영향을 받아야 한다. 세상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바삐 뛰어다니기 전에 먼저 네가 나를 통해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를 섬기고 먹이려면 먼저 내가 너를 섬기고 먹이게 해야 한다.” (스캇 솔즈, <예수님처럼 친구가 되어주라>, 두란노)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쁜 몸’이 아니라 ‘섬김의 마음’입니다. 힘든 노동을 통해 인정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르다를 인정하시고 받아 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먼저 세워가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마리아도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겠지만, 예수님이 들어오시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예수님은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애쓴 것을 질책하거나 깎아내리는 뜻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악하다거나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것, 바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일은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그 계명을 주신 분이 우리에게 계명을 지킬 힘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칭찬받은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일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욱 귀하다는 사실을 알고 우선순위를 거기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계속 놀기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난 후 가서 열심히 돕고 섬겼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과 교제했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스스로 힘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지키려고 애쓰다가 버거워하면서 탈진하고 쓰러지게 될 뿐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명을 지키도록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들어가야 합니다. 계명은 그것을 지키는 노력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노력할 때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3. 주님은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셨다
우리가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지 교리가 아닌 것은 맞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라는 것이 교리와 법을 무시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반드시 삶에서 행동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깨닫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던 마리아가 훨씬 더 충성되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마리아는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는데, 성경은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이런 힘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발아래에서 들었던 말씀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겠다고 결정한 마리아에게 주님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르침이라는 게 바로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안다는 것은 교리와 상관없이 살 수 있는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가 무엇인지를 알아 간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 죽은 교리에 머물지 않는 방법은 교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분의 마음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 없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목적으로만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려 하셨다면,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무섭고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능히 십자가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내 마음에서 느껴집니까? 나 때문에 지신 그 십자가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결코 다른 신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우상을 만들겠습니까? 사랑하는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며 예배하지 않겠습니까? 안식일에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그렇게 죽도록 노력해야만 지킬 수 있는 게 될까요? 무거운 짐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율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지켜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사랑하시는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게 되고,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육체적 순결을 지키는 것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그 사랑을 해하려고 거짓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사랑을 덧입은 계명이 우리에게 주는 풍성함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는 율법은 우리를 바리새인처럼 만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 비로소 율법이 완성됩니다.
십계명은 성경에서 두 번 언급됩니다.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입니다. 십계명은 주전 1450년경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땅에서 지켜야 할 것을 율법으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알듯 1~4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다룹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그리고 5~10계명은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것,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앞으로 십계명을 다루면서 순서를 바꾸어, 제10계명부터 시작하여 제1계명을 향해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각 계명이 다루는 죄가 무엇인지를 살피고, 문제의 핵심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계명을 지킬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마치 주변에서 시작해 핵심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심장부를 향해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아홉 가지 계명은 제1계명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1계명만 제대로 지켜도 나머지 아홉 계명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두지 않고,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있다면 어떤 죄도 지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늘 우상입니다. 팀 켈러(Timothy J. Keller)는 우상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내 마음속에서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우상이다!”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두란노)
혹시 지금 하나님 외에 마음속에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어떤 것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꿈을 꾸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게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꿈이 하나님보다 앞서기 시작할 때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앞서기 시작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무서운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사업하는 사람에게 성공하겠다는 욕망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욕망이 하나님을 앞서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기 시작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것이 방해할 때, 하나님께 나오지 못하게 할 때,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말씀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상숭배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최고의 신앙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숭배를 하면서 하나님도 섬겼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철저하게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시험하신 것은 그의 삶을 비참하고 힘들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나가면 이삭이 우상이 되는데, 그러면 우상을 찍어쪼개셔야 하고 우상숭배자도 벌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따르며 순종하는 것은 의지적인 결단에 관한 문제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로서 우리가 결단하고 살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쉬운 길로 가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길이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라도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쉬운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올바른 길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 이삭을 향한 사랑이 우상숭배였음을 깨닫게 하셨던 것처럼, 십계명을 통해 우리 인생의 잘못된 방향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바른길로 가도록 도와주십니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십계명의 핵심이고 성경 전체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한 단어로 사랑입니다. 십계명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에 담겨 있고,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가기를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니까 지켜지는 율법을 보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삶>에서도 그것을 다루지만,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며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 중에 피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믿기는 믿으니까 안 믿을 수는 없고, 그런데 제대로 하기에는 너무 피곤하고 힘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무나 부담이 되고 짐스러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더 많아졌습니다. 목사도 대충 편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들고, 대충 하고 싶습니까? 왜 ‘적당히 믿어’라는 말이 나옵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으니까 적당히, 대충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도 하기 싫은데 안 지키면 벌 받을까 봐 억지로 나와서 주일을 지키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니까 하는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니까 그냥 지켜지는 삶,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래서 그 하나님과 언제 어디서든 동행하며 풍성한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