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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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2일 수요예배
✦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 23/최종 ✦
주후 66년 예루살렘과 초대 교회
(베드로전서 1장 1~2절)
1.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
예수님이 활동하신 것이 주후 30년 무렵이었습니다. 그 정도에 돌아가셨다고 봅니다. 원래는 연도에 원년이 있든지 아니면 AD 1년에 태어나셨어야 하는데, BC 4년 정도에 태어나셨습니다. BC와 AD로 나누는 것을 잘못 계산해서 그렇게 한 4~5년 정도 차이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활동하신 것은 주후 27년에서 30년 정도라고 봅니다.
네로 황제에 의해서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가 처형당한 시기를 주후 64년 정도로 봅니다. 오늘 우리가 그 당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면, 그 속에 감춰진 아주 중요한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에게 성경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1세기 유대 사회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사회였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세에게 지배받는 속주(식민지)에는 언제나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배 국가에 부역하는 ‘콜라보(Collaborate)’ 계층이 있고, 그 세력에게 저항하는 ‘레지스탕스(Resistance)’ 계층이 있으며, 그 둘 사이에 일반 백성이 있습니다.
콜라보, 즉 지배 계층은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종교 지도자들, 귀족들, 지주들 같은 사람들입니다. 로마에 부역하는 사람들, 우리로 하면 친일파 같은 사람들입니다. 반면 레지스탕스(Resistance)라는 단어의 어원이 헬라어 ‘레스테스(restes)’인데,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강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약 성경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강도’라는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듯 강도질하는 범죄자에게 해당하는 단어가 아니라, 저항자들을 로마의 시각에서 부르는 정치적인 용어인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유대 사회는 세 부류의 사람들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5~7장에서 설교하신 ‘산상수훈’ 또는 ‘산상설교’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또 ‘오병이어’ 사건 때 예수님 주변에 몰려든 수만 명의 무리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그들은 콜라보(지배) 계층의 착취와 수탈로 인해서 생존의 방편을 잃어버리고 사회 속에서 하루하루를 가난과 고통으로 신음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며칠 동안 가르치시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구름 떼 같이 예수님을 따라다녔겠습니까? 직업이 없으니까 따라다닌 겁니다. 할 일이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실업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시니 너무나 간절한 마음으로 좇아다닌 겁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일해서 나온 생산물 대부분을 종교인들과 지주들과 로마 정부에 갖다 바치고, 그 후에는 남는 것이 없어서 굶주리며 살아가던 소작농들과 농노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합니다. 그런 불쌍한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자기의 노동력을 팔아야 했던 사람들, 건설 현장의 품꾼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포도원 일꾼들의 비유에 나오는 일꾼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인이 “왜 여기서 놀고 있느냐?”라고 하니까 “써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실 때 자기들 이야기를 하시니까 얼마나 마음에 와닿았겠습니까?
혹시라도 일하던 가장이 뜻밖의 사고로 죽게 되면 생계 수단을 전혀 보장받지 못하는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병든 자들과 구걸하는 자들, 즉 사회의 약자들이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었습니다. 과부의 신분으로서 어떻게 해서든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몸을 팔아야 했던 생계형 창기들도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왜 창기들을 가까이 하셨겠습니까? 그런 사연이 있는 여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몰려와서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기약 없이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오늘의 생존을 위해서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었던, 마치 하루살이 같은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나아갔던 동기는 바로 자신들의 무력함을 의지하려는 처절하고도 절박한 생존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런 민중들에게 온갖 세금과 율법과 규례와 십일조와 헌금으로 억압하고 옭아매는 유대 사회 지도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들은 떵떵거리며 배를 채우고 돈이 많아서 좋다고 흥청망청하는 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백성들에게는 세금, 즉 성전세 같은 것을 강요하고, 안 내면 죄인이라고 하니까 어떻게든 내야 하고, 그 가운데 엄청난 괴로움을 당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토록 예수님이 지도자들을 향해 분노하셨는지, 왜 그렇게 성전에서 상을 엎으며 분노하셨는지, 그 거룩한 분노가 그냥 이해됩니다. 이런 배경을 알면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원래 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 막 뒤엎고 그러신 게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병든 자들, 가난한 자들, 그리고 사회의 콜라보 지배 계층이 소위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사람들과 늘 함께하셨습니다. 왜 그들과 함께하셨는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독설을 퍼부으셨는데 괜히 욕하신 게 아닙니다. 그들이 악랄하게 하는 것에 대해 정확히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에 따라 당시 백성들의 비상한 관심은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저 예수가 누구냐? 예수는 어느 진영에 속한 사람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요즘도 누군가가 탁 나타나면 ‘저 사람은 어느 편이냐? 어느 진영이냐? 이쪽이냐 저쪽이냐? 좌파냐 우파냐?’ 지금도 그렇듯이 옛날에도 똑같았습니다. 예수님이 나오시니까 ‘저 사람은 누구 편이냐? 어느 진영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불편하게 생각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빌라도의 손을 통해서 예수님을 처형했고, 예수님은 백성들의 기대와는 달리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체포해서 빌라도 법정까지 왔을 때까지도 백성들은 기대하고 있었을 겁니다. ‘뭔가가 일어날 것이다. 분명히 여기서 뭔가를 일으킬 거다. 엄청난 기적들을 그동안 많이 일으킨 저 예수라면 여기서 빌라도 총독과 로마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뭔가 일으키실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무기력하게 그냥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런 유대 사회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주후 6년부터 로마 총독이 파견되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본디오 빌라도(주후 26~36년)가 10년이나 총독으로 유대 지역을 관할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벨릭스(51~59년)와 베스도(59~62년) 같은 사람들이 주후 50년대에서 60년대 초반까지 유대에 파견된 로마 총독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알비누스(62-64)와 플로루스(64-66)라는 총독들이 파견되면서 유대 백성들에 대한 착취와 수탈과 압제가 극에 달했습니다.
2. 주후 66년의 유대 상황
그러면서 마침내 주후 66년에 일어났던 사건이 바로 유대 반란 사건입니다. 이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했던 유대인 출신 로마 역사가 요세푸스가 유대 반란을 기록하면서 남겼던 책이 <유대 전쟁사>입니다. 그 사건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 로마 황제 제사 중단
(2) 로마 수비대 습격
(3) 부채 문서 소각
(4) 부자들의 재산 강탈
(5) 하나님 나라 선포
먼저, 유대 반란을 통해 백성들은 예루살렘에서 늘 거행되던 로마 황제를 향한 제사를 거부합니다. 둘째로, 예루살렘에 주둔하던 로마 수비대를 공격해서 다 죽입니다. 이것으로 본격적인 반란이 시작된 겁니다. 셋째로, 부채 문서 저장고를 습격해서, 모든 채무 문서들을 다 태워버립니다. 누가 얼마의 빚을 졌는지가 다 없어진 겁니다. 넷째로, 부자들의 집을 습격해서 재산을 빼앗아 공동 경비로 만듭니다. 그리고 다섯째로, 이 사회가 바로 메시아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주후 66년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유대 반란 사건입니다. 그런데 유대 반란이 유대 전쟁으로 확산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그다음에 일어납니다. 유대 반란이 시작되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총괄하고 있던 시리아 총독이 안디옥에 있던 로마 제12군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의 유대 반란을 진압하러 내려온 겁니다.
그런데 그때 유대 게릴라 항전으로 인해서 로마 12군단이 전멸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 그때로부터 약 200년 전에 있었던 마카비 전쟁의 승리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적은 군대라도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시면 이길 수 있다고 외치며 전쟁을 이끌었던 유다 마카비의 말대로, 유대가 셀레우코스를 물리쳤습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이전에 다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주후 66년 로마 제12군단이 패배한 것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셔서 이겼다고 믿게 했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30년 전 예수님 시대에도 바로 이런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후 66년, 즉 예수님 시대로부터 약 30년 후에 예루살렘에서 또다시 이런 사상을 가지면서 유대 전쟁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숫자가 적고 로마가 강해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이길 수 있다고 하는 사상으로 싸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로마 제12군단을 물리치니까 그 믿음이 증명된 것 같았습니다.
그 후 그들은 예루살렘에 새로운 정부를 세우고 독립을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부채 문서를 태워버립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전에 억압받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빚을 탕감해 주는 정책을 취한 겁니다. 그러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당연히 빚을 지고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돈을 빌려주고 빚을 갚으라고 하던 부자들은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민중들을 압제하던 부자들의 재산을 강탈해서 공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메시아 왕국이며 하나님 나라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12군단이 전멸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로마가 그것을 보고 ‘아유 무서워’ 하고 물러갔겠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로마 군대들이 결집해서 유대 땅으로 몰려오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유대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주둔하고 있던 로마 군단들을 베스파시아누스와 그 아들 티투스가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합니다.
결국 예루살렘 반란 4년 만인 주후 70년에 티투스 장군 휘하에 있던 로마 군대 8만 명을 동원해서 예루살렘을 5개월간 포위하여 공성전을 벌입니다. 마침내 성이 무너지고 로마에 대항했던 모든 유대인들을 그 자리에서 다 죽여버립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회고록을 보면, 그 자리에서 엄청난 유대인들을 죽여서 그 피가 무릎까지 넘쳤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입니다. 물론 그것은 과장법이었겠지만 그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겁니다.
그 후 티투스는 9만 7천 명의 유대인 노예들을 로마 개선식에 데리고 와서 전 세계에 노예로 팔아 버립니다. 콜로세움 옆에 티투스 개선문을 만들어서 그 안에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한 장면을 새겨놓습니다. 그때 무너진 성전 돌들을 가져와 콜로세움의 기초석으로 삼음으로써 지난 2천 년 동안 그 돌들이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이것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로마가 그때 남겨 놓은 성전의 일부 벽이 있는데, 그게 바로 그 유명한 ‘통곡의 벽’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있습니다. 영어로는 Wailing Wall입니다. 그 통곡의 벽을 왜 남겨 놓았는가 하면, ‘이렇게 높은 데에 성전을 지어놓아서 함락하기 힘든 곳인데 우리 로마 군대가 함락했다.’라고 자랑하기 위해서 거기만 딱 남겨 놓은 겁니다.
주후 66년에 로마 제12군단이 패배했을 때, 예루살렘에서는 로마에 부역하던 콜라보 계층인 대제사장들, 지주들, 귀족들이 모두 예루살렘에서 빠져나가 로마 진영에 투항합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마치 침몰하는 배를 빠져나오듯이 이런 사람들이 빠져나와서 로마 진영에 가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를 지배하던 계층이었습니다. 지배 계층이 다 빠져나갔으니 그 사회가 어땠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정말로 누구를 위한 사람들이었던 겁니까? 하나님도 백성도 아닌, 오직 자기들의 이득만을 위해서만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 제12군단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에 유대 정부가 들어섰던 66년 예루살렘에는 빨리 로마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끝까지 결사 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두 진영의 갈등과 대립이 4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남의 얘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을 때 나오는 아그립바가 있는데, 그는 벌레에 먹혀 죽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그는 당시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분봉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유대인의 왕이었는데, 그 아들은 갈릴리만 다스리는 분봉왕이 되었습니다.
주후 66년 유대 반란이 일어나자 아그립바는 곧바로 빠져나가서 로마군에게 투항합니다. 아버지가 유대인의 왕이었고 자기도 갈릴리 분봉왕인데, 아무 고민도 없이 그렇게 도망가 버립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연설을 했는데 기가 막힙니다.
“나는 여러분이 싸우는 상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로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다. 그렇게 광대한 로마제국이 형성된 것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가 전쟁을 일으키려는 동기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자세히 생각해 보라.” (유대전쟁사 2권 16장)
그와는 반대로, 그렇게 나라가 무너지는데도 마카비 전쟁에서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믿고 있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라 자체가 아예 없어집니다.
3. 진정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
로마 12군단을 무찌르고 독립했던 것은 누가 그토록 바라던 현실입니까? 그런 나라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싶었던 것은 누구의 소원이었습니까?
“주님의 나라가 임하면 주님의 왼편이나 오른편에 앉고 싶습니다.”라고 했던 제자들의 소원이 아니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던 베드로의 고백이 아니었습니까?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했던 도마의 고백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주후 66년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주장했던 제자들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로부터 2년 전에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자기 동생과 같이 어머니까지 데려다가 한 명은 오른편에 한 명은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던 야고보는 이미 30년 전에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의심 많던 도마는 인도에 가서 창에 맞아 죽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어떻게 됐습니까? 추방당하다가 나중에는 뱀들이 우글거리는 섬에 유배됩니다.
이것이 주후 66년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들의 시각으로 볼 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의 보기에는, 예수를 따르던 자들은 철저하게 무기력하고 불행하고 비참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완전한 실패자였습니다.
그렇게 실패자라고 여겨지던 사람 중 한 명인 베드로가 썼던 본문이 바로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베드로전서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주후 66년 유대 반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64년에 로마에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는 베드로가 죽기 1~2년 전에 기록된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누구에게 쓴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1절)
이 장소들은 모두 지금의 터키 지역입니다. 그렇다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들이 누구입니까? 그리고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흩어져 사는 것입니까?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행 2:9-10)
이 사람들은 로마제국 각처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인데, 유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왔다가 오순절 때 성령을 받은 성도들을 통해 복음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헬라파(해외파) 유대인들입니다. 바대, 메대, 엘람, 메소보다미아,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로마 등에 사는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 아니면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다 유대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러 왔다가 계속 오순절(칠칠절)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방언을 하는데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아니라 언어 방언을 하니까, 자기네 언어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을 듣고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때 이제 언어가 다르지만 다 이해가 된 겁니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이들을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등이라고 기록했는데, 베드로는 이런 사람들 중 여기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부르기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베드로전서를 쓴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열흘쯤 후에, 즉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50일이 되는 날 성도들이 성령을 받고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믿었으니까, 이때는 주후 30년 정도입니다.
그때 이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들도 성령을 받은 겁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니까 그들도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고서 다시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남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흩어진 겁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예수 믿고 성령 받은 때로부터 30여 년 지나서, 그 30여 년 동안 어떻게 살아온 겁니까? 사도행전과 베드로전서 사이에는 30년 이상 차이가 있는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성령을 받고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가는 곳곳마다 박해당하고 흩어지며 자기가 살았던 곳으로 밀려나서 ‘흩어진 나그네’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때 이들도 믿고 성령을 받았다면,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셨던 약속도 전해 들었을 겁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의 구체적인 표현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8장 1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일어나서 사도를 제외하고 온 교회가 사마리아와 유대로 흩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는 헤롯(아그립바 1세)이 교회를 박해하면서 야고보를 칼로 쳐서 죽입니다. 18장에서는 글라우디오(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합니다. 그래서 그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고린도로 가서 사도 바울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꾸 밀려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로마에 가게 됐습니까? 죄수라는 신분으로 감금된 채 호송되어 갑니다.
그렇다면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실 때, 그것은 꽃길만 걸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현실에서는 끊임없는 박해와 압제와 위협과 인생의 여러 무게들이 그들을 밀쳐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정신을 차려보니까, 어느덧 자기들은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살면서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약속을 듣고 그대로 살았던 그들의 30년 인생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흩어져서 나그네처럼 살던 이들이 직면한 현실은 절대 꽃길이 아니었습니다. 핍박과 곤고함과 학대와 가난과 배척과 미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전서 1장 1절에 나오는 이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계속 교회 공동체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계속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박해와 고난을 당하면서도 교회 공동체에 붙어 있다는 이것이 바로 진정한 성령의 능력이 아닙니까?
우리는 보통 성령의 능력을 받는다고 하면 어떠한 상황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상태,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성도들에게 주신 성령의 권능의 구체적인 방식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고난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계속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는 것, 그렇게 박해와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기도의 자리로 나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 믿음의 공동체로 계속 함께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령의 권능인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베드로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는데 베드로가 자기들에게 편지를 쓴 겁니다. 그런데 주후 64년에 어떤 일이 있습니까? 이 편지를 썼던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죽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66년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유대가 로마 군대를 물리치고 독립했다는 겁니다. 이 성도들 중에는 이방인 중에서 들어온 사람도 있겠지만, 예루살렘에 갔던 사람들 중에 지금 30여 년 후에 계속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있는데, 자기들이 사모하는 예루살렘, 모든 유대인이 사모하는 그 예루살렘에 독립 정부가 섰다는 말, 하나님 나라가 섰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겁니다.
그때 이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와, 만세!’가 아니라, 대단한 상실감과 갈등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건 뭐지? 그러면 지금까지 나는 잘못된 선택을 한 건가? 나는 30년 전에 성령을 받고 지금도 여전히 이렇게 흩어진 나그네로 힘들게 살고 있는데, 저 예루살렘에서는 메시아 왕국을 건립했다고 하는데 이게 뭐지?’ 정말 혼란스럽지 않았겠습니까? 어쩌면 주후 64년에 베드로가 죽었을 때나 그 이전보다 이 66년이 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을지 모릅니다.
우리도 이런 좌절을 느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힘들고 가난할 때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치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하는 소식이 더 힘들 수 있는 겁니다.
여기는 다 열심히 봉사하시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분들인데, ‘나는 목자로, 장로로, 집사로, 권사로 열심히 섬기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녀 문제로 고민하고, 진로나 건강 문제로 걱정합니다.
그런데 보니까 별로 신앙생활도 잘 안 하는 사람들은 일이 너무 잘되고, 자녀도 좋은 데 가고, 돈도 잘 벌고, 그러면서 기도해 달라고 해서 기도해 줬더니 기도해 줘서 고맙다고 하며 다 잘됐다고 그럽니다. 그들은 건강하기까지 합니다. 그때 마음이 어떻습니까? 우리 가정은 한 달 살기도 벅찬데, 이번에 해외여행 잘 다녀오도록 기도 제목을 냅니다. 그럴 때 마음이 어떻습니까?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삶에서 나타나는 결과를 세상의 성공이라는 잣대로 평가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나오는 얘기가 뭡니까? “저렇게 열심히 믿어 봐야 소용없어. 저렇게 열심히 기도해 봤자 소용없어. 그냥 대충 해도 돼. 그냥 세상에서 열심히 하면 돼.”
그런 얘기가 나올 때 그것까지는 괜찮은데 ‘진짜 그런 것 같아’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들어올 때 그게 나를 더 힘들게 하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 해 봐야 진짜 소용없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일이 안 풀리고, 저 사람들은 별로 열심히 하지도 않는데, 아니 교회도 안 다니고 믿지도 않는 사람인데 잘되네. 그럼 이게 어떻게 된 건가?’라고 갈등이 오지 않습니까?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겁니까? 그럴 때 우리가 봐야 할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베드로가,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들인, 택하심을 입은 이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2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미리 아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 주셔서, 여러분은 순종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더욱 가득 차기를 빕니다.” (1~2절, 새번역)
저는 분명히 확신합니다. 이 성도들, 흩어진 나그네들이 이 편지를 베드로로부터 받았을 때 다 울었을 겁니다. 1절, 2절만 읽고도 다 울었을 겁니다. ‘사도가 우리를 알아주신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알아주신다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 얼마나 큰 위로가 됐을까요?
여기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떤 나그네입니까?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셔서 믿음으로 순종하게 하셨고,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죽으셨는데, 이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은 미리 알고 우리를 영원 전부터 택하여 주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어떤 대가가 지불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었습니다. 그 아들의 가치가 나그네 속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권능이 그들 속에 역사하셔서 믿음으로 지금까지 살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 30여 년의 힘든 세월을 견디게 했다는 겁니다. 그 성령의 권능이 그들 속에 역사하셔서 이때까지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한 모든 내용을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미리 아셔서 우리를 택해 주셨다고 한다면, 우리도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사람들과 같습니다. 세상이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때도 보고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들을 돌보실 것이라는 내용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왜 잘 안 되는지, 왜 우리는 힘들게 사는지 스스로 자책하다가 보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일하셔서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놀라운 일들이 우리 속에 일어났다는 것을 베드로가 알려준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창세 전에 하나님의 시선이 우리에게 머물러 있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눈이 머물러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베드로가 이 짧은 두 절에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 어떤 결과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일이 잘되면 복을 받는 것이고, 일이 잘 안 풀리면 저주를 받았거나 믿어 봐야 소용없는 그런 게 아니라는 겁니다. 본문에서 알려주는 대로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게 택하신 귀한 존재라는 데에서 우리의 진짜 정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얼마든지 현실을 이길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주후 66년에 “야,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다!” 하며 좋아하고 그것을 선포하고 의기양양했던 그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됐습니까? 불과 4년 후에 다 죽든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기에 그것은 진짜 하나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열심히 믿어 봐야 소용없고, 그냥 대충해도 되고, 내가 열심히 하면 되고, 내가 똑똑하면 되고, 내가 해서 잘되면 된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몇 년을 가겠습니까? 그게 영원합니까? 절대 영원하지 않습니다.
[나가는 말]
미국의 제임스 블랙(James Black)이라는 찬송가 작곡가가 있었는데, 감리교에 소속된 찬송가 작곡가였고 주일학교 교사이기도 했습니다. 19세기 미국에서 “Jesus is coming!”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때 그도 재림에 대해서 굉장히 소망하면서 찬송가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나팔 소리 천지 진동할 때에 예수 영광 중에 구름 타시고...”(찬 180장).
이 찬송가가 전 미국에 유행되어 제임스 블랙이 누구냐고 하는데, 정작 그는 자기 딸이 갑자기 폐렴으로 10일 동안 고통을 받다가 죽었습니다. 그때 그는 굉장한 회의에 빠졌습니다. “지금 내 딸이 죽었는데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웬 말이냐? 내 딸이 죽었는데 부를 때에 잔치 참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며 회의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찰스 버틀러(Charles Butler)라는 무명의 신인이 쓴 “예수님이 계신 곳, 그곳이 천국이다”라는 시를 받고, 그는 거기에 감동을 받아서 곡을 붙였습니다. 그 곡이 바로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입니다.
절망 속에 있었지만, 상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우리 삶 속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그곳이 천국이라고 믿음을 고백한 것이 바로 그 찬송가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마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이 베드로전서를 받았던 그 초대 교회 성도들, 흩어진 나그네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