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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5일 수요예배
✦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 22 ✦
1세기 유대 사회에서 부활의 의미
(고린도후서 5장 16~21절)
1. 어떤 그리스도를 믿는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던 사도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히브리어로는 메시아,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했던 마태복음 16장입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
이 장면에는 신구약 중간사에 관련되어 많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대화하는 곳은 빌립보 가이사랴입니다. 마태는 왜 이 장소의 이름을 굳이 언급한 겁니까?
이 장소는 당시 유대 사회의 최북단 경계에 해당하는 곳이었고, 분봉왕 해롯 빌립(헤롯 대왕의 다섯 번째 부인의 아들)이 통치하는 곳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따지면 압록강 같은 지리적인 위치에 해당합니다. 왜 예수님은 굳이 제자들을 데리고 이곳에 오셔서 그런 대화를 나누신 걸까요?
주전 200년까지 유대 사회를 놓고 프톨레미와 셀레우코스가 다섯 번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주전 200년에 셀레우코스가 바로 이곳에서 승리하면서 유대 땅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주전 200년까지 유대 사회는 친 프톨레미파와 친 셀레우코스파 사이에 내분이 있었고, 결국 셀레우코스가 임명한 대제사장이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땅에서 권력을 놓고 벌어진 슬픈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 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로마는 이곳의 통치자로 분봉왕 헤롯 빌립을 임명했습니다. 그는 이 땅을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바치는 도시라는 의미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자기 이름도 들어가면서 황제 칭호도 들어가는 이름으로 지음으로써, 로마 황제를 주인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런 장소까지 제자들을 데리고 오신 겁니까? 마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리고 유대 사회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례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선지자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유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그렇게 고백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당해야 하며 또 사흘째 되는 날 살아날 것을 말씀하시자, 그는 예수님을 붙잡고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고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렇게 주장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며 꾸짖으십니다. 베드로가 사탄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베드로의 생각을 사탄의 생각이라고 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생각한 그리스도는 어떤 그리스도였습니까?
그리스도는 헬라어이고, 이것이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이었던 왕, 제사장,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붓는 의식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에는 실제로 기름을 부었던 것이 아니라, 상징적이고 관용적인 의미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왕, 제사장, 선지자 모두에게 기름을 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메시아’라고 하면 그냥 ‘하나님의 일꾼’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주전 539년 바벨론을 물리치고 패권을 잡은 후 바벨론에게 잡혀 왔던 유대 포로들을 자기 땅으로 돌려보냈던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가리켜 이사야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표현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사 45:1)
그러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상황에서 고레스는 메시아라고 불린 것입니다. 그런데 고레스는 실제로 기름 부음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볼 때 그냥 ‘아, 고레스 왕이 하나님의 도구이구나.’ 하는 정도의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주전 200년이 지나고 셀레우코스 왕조가 유대 사회를 지배하면서 특히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극심한 박해를 가하자, 대제사장은 셀레우코스 왕조 권력의 꼭두각시가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곳이 아니라 권력자들이 탐욕을 부리고 이득을 챙기는 중심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신약 시대까지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아주 중요한 두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나는 마카비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 종교가 변질한 것을 지적하며 무리가 광야로 나간 사건입니다. 셀레우코스가 유대 사회를 지배하고 박해했을 때 마카비 가문이 전쟁을 일으켰고, 주전 164년 12월에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합니다.
그러나 마카비 가문은 성직 매매로 얼룩진 대제사장 제도를 바로 세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 가문에서 대제사장직을 독점해 버립니다. 사독 계열로 내려오던 것을 끊고 자기들이 직접 대제사장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리고 주전 142년 마카비 가문의 시몬은 셀레우코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합니다. 유대인들은 대제사장과 성전이 변질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주전 586년 이후로부터 444년 동안 단 한 번도 정치적인 독립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시몬에게 열광합니다. 그래서 시몬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호했습니다.
그렇게 주전 142년에 유대는 잠깐 독립을 쟁취했지만, 주전 63년에 다시 나라를 로마 제국에게 빼앗기고 로마의 속주가 됩니다. 그러니까 강력했던 셀레우코스를 무너뜨리고 독립을 쟁취했던 때를 기억하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란 다윗의 자손으로서 마카비 전쟁 때처럼 로마로부터 승리와 번영과 독립과 자유를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도구이어야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되는 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바로 이 점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유대인들의 마음이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승리와 번영과 독립과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받고 죽임당한다고 하셨을 때 아주 강력하게 반대하며 예수님을 야단쳤던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면 자기는 예수님의 오른팔이나 왼팔 격인 핵심 지도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사람들이 만들어낸 그리스도가 아니라 참된 의미의 그리스도가 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로마나 셀레우코스나 프톨레미 사람들도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유대인들만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인이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에, 하나님은 그들 속에 함께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정치적 그리스도가 아니라, 죄라는 막힌 담을 없애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진짜 그리스도가 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상징입니다. 이방인들의 신전이 그들에게 그런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두 세기 동안 대제사장과 예루살렘 성전의 의미가 변질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의 도구가 된 현실을 책망하시며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고, 그 성전이 무너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세우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대 사회 GDP의 80%나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경제 지분을 차지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실권을 쥐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성전이 무너져야 한다고 한 예수의 말은 망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가 로마와 전쟁을 벌인다면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재앙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로부터 얻은 권력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독립하게 된다면 자기들의 모든 기득권을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 독립해도 문제이고, 예수가 너무 백성의 인기를 끌고 난리를 침으로 로마가 와서 진압해도 문제입니다. 두 경우 모두 자기들의 기득권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예 예수를 죽여야 했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를 돌로 쳐 죽였다가는 예수를 자칫 순교자로 만들 수 있고, 예수에게 열광하던 백성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거나 심지어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더러운 거래를 성사시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종교 지도자들은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의 횡령, 뇌물 수수, 직권남용 같은 항목을 로마 황제에게 고발하지 않는 조건으로 반란자만 당하는 십자가형으로 예수를 처형하라고 요구합니다.
결국 빌라도는 자기의 총독직을 연장하는 대신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세 명의 반란자를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기대했던 백성들의 바람과는 달리, 예수는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잡혀서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그대로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자칭 메시아(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유대인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지도자들이 잡혀서 죽임을 당하고 나면, 그들을 추종하던 무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돌아가시고 3일째 되는 날에 부활하셨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사건입니까? 예수님은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 먼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담대히 나가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조건을 충족시키시기 위하여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셨고, 마태가 제시한 족보는 바로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었던 죄라는 형벌을 십자가에서 받으신 것입니다.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3-14)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를 막고 있던 장벽이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바로 우리에게 임하신 것을 의미하기 위해서 신약 성경은 로마 황제의 통치를 선포한다는 의미의 단어인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했습니다. 그것이 신약 성경에 바로 ‘복음’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비록 육신은 로마 황제의 통치를 받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통치자가 생겼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셨고,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유앙겔리온을 믿고 고백했던 성도들은 로마 정부의 입장에서는 뭐가 되겠습니까? 그들은 반란자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그런 박해와 압제의 시대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던 신앙고백을 암호로 표시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고백을 ‘익투스’(물고기)라는 단어의 다섯 글자를 따서 만들어, 자기들의 신앙을 비밀리에 알리는 암호로 사용했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는 그 당시에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독립, 경제적인 번영, 육신의 만족을 주는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께 열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임당하셨을 때, 그들은 정작 그리스도로부터 등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다른 그리스도, 자기들이 만들어낸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렇게 십자가에서 죽는 그리스도는 자기가 기다리던 그리스도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미리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마 24:23)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시대에도 자기가 만들어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혹시라도 그 옛날 유대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그런 의미의 그리스도는 아닌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16절, 새번역)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17절, 새번역)
어떻게 새것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19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8~21절, 새번역)
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고, 죄 사함을 받은 것이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고기 모양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지하에 숨어 살면서도 기뻐하고 소망을 가지며 살아갈 수 있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비결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바로 부활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2.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믿음의 눈
# 그림 1: 카라바조, <엠마오의 저녁식사>
이 그림은 영국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ellery)에 있는 카라바조의 그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에서 나타나신 장면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실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 순간을 바로크 미술의 거장 카라바조가 이렇게 그림으로 그린 겁니다.
이 그림을 보시면, 왼쪽에 있는 제자는 깜짝 놀라며 그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합니다. 오른쪽에 있는 제자는 너무 놀란 나머지 두 팔을 펴고 이 그림을 보는 우리를 예수님이 계시는 이 식탁으로 오라고 초대합니다. 그를 잘 보면 가슴에는 조개껍데기를 달고 있습니다.
그 당시 조개껍데기는 순례자를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종교인들은 성지로 와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 그림 2: 로마 순례자
# 그림 3: 조개껍데기
당시 조개껍데기는 순례자들을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로마 순례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을 그림에서 이렇게 표현하며 고백합니다.
육신의 만족, 정치적 독립,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주는 가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과일의 바구니가 식탁에서 떨어지려는 것처럼 아주 위태로운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과일 바구니 그림자를 잘 보십시오. 뚜렷하게 물고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임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의 소망을 가질 것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난 제자는 카라바조가 3년 뒤(1604)에 그린 <성 바울의 회심>이라는 그림에도 등장합니다.
# 그림 4: 카라바조, <성 바울의 회심(The Conversion of Saint Paul)>
이 그림은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굴복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그 옆에 있는 사람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면 우리 인생이 그 앞에 굴복하지만, 믿음이 없다면 우리도 이렇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곳에 은혜의 빛이 비치며, 이 사람의 얼굴이 여기 이렇게 등장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지 않았다면, 은혜의 빛이 우리에게 비치지 않았다면, 우리도 이렇게 소망 없이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있으면서도 여관주인은 여전히 믿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 2:12-13)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빛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부활하셨습니까? 주후 1세기에 활동하던 유대 출신 로마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가 직접 들은 내용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한편 바로 이때 예수라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선생이었다. 그는 수많은 유대인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그의 곁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였다. 빌라도가 유대의 유력 인사들의 요청에 의해 그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으나 그를 처음부터 사랑하던 자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에 관해 예언한 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이뿐 아니라 그에 관해서 수많은 놀라운 일들을 예언했었다. 그의 이름을 본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요세푸스 자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들은 소식을 이렇게 남겼습니다.
“자칭 메시아 자칭 그리스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잡혀 죽었을 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오늘까지 남아 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분명히 일어난 사건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기에 우리의 삶을 지금 하나님이 통치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고 부활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로서 당당하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