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BQvaEFLdk5s?si=ut67QdxKyBO7mrRm&t=73
2025년 2월 26일 수요예배
✦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 21 ✦
예수에 대한 재판과 유대인들의 진심
(요한복음 18장 28~32절)
1. 예수님이 받으신 정치 재판
오늘은 예수님이 받으신 재판을 통해 당시 유대 사회의 상황과 십자가의 의미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먼저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며 시작하려 합니다. ‘예수님은 왜 돌아가셨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의 신앙고백에 대한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실제로 예수님의 재판 과정이 어땠는지, 명목상의 죄목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의 과정은 어땠는지를 이해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로마 제국이 죄수를 처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로마는 반란을 일으킨 정치범은 직접 처벌했지만, 종교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속주(식민지)의 통치자에게 일임했습니다. 유대 사회는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산헤드린 공회가 그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유대인들은 요한복음에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고 했고,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실제로 스데반을 로마의 허락 없이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도 돌로 쳐서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왜 예수님을 돌로 치지 않고 정치범으로 재판에 넘겼던 것입니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잘못을 하셨기에 죽이려고 한 것입니까? 유대교 문헌인 <미쉬나>의 “산헤드린” 항목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유월절 전날에, 유대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거짓 선지자로서 나무에 매달았다.” (Sanhedrin, 43a.)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종교적인 이유입니다. 그것도 유대인들이 나무에 매달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장면들은 예수님이 신성 모독을 했다거나 율법을 어겼다고 고발하는 종교적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셨을 때나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을 때 돌로 치려 했지만 예수님이 피하셨다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께서는 정치범을 달아서 죽이는 십자가형을 당하셨습니까?
2. 주후 1세기와 유대인들의 근현대사
예수님의 재판 사건 하나만 따로 보게 되면 단편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지만, 유대인들의 근현대사를 이해하면 재판을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21세기에 근현대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 정도를 말하지만, 1세기 당시에는 주전 1~2세기 정도가 근현대사입니다. 복음서가 기록된 것이 유대 전쟁(주후 66~70년) 무렵이고, 복음서를 받아서 읽은 성도들 역시 그 시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시대를 이해하면 우리도 이해가 더 쉬워집니다.
복음서는 예수님 당시 일기처럼 그날의 사건을 기록해놓은 것이 아닙니다. 각 복음서는 사건이 일어난 지 수십 년 후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기록되었고, 그 속에서 사용된 용어나 개념도 그 시대 것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단어들을 보십시오.
* 갈릴리 사람, 강도, 바요나, 시카리
이 단어들은 예수님의 재판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들입니다.
1) 갈릴리 사람
주후 6년은 유대 사회에 굉장히 중요한 해였습니다. 로마에서 세금 징수를 위해 호구조사를 실시했기 때문입니다. 세금이라는 것은 ‘주인’에게 바치는 의미이고 유대인들에게 유일한 주(主)님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호구조사에 대해 로마에 저항했습니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갈릴리 사람 유다였고, 그는 유대인들에게 백성들이 힘을 합쳐 큰일을 이루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도우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로마에 대항하여 반역을 일으키게 되었지만, 그러한 일로 인해 오히려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8.1.1.).
갈릴리 유다가 주후 6년 로마의 호구조사 시행에 반발해서 저항을 시작할 때 그가 연설한 내용은 오래전 유다 마카베오가 연설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외경인 마카베오상을 보면, 마카베오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셔서 여러 차례 승리를 얻었던 것처럼 자기들도 승리할 수 있다고 연설했고, 결국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이처럼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이나 독립은 유대인들이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 ‘갈릴리 사람’이란 표현은 단순히 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도 포함하는 말이었습니다.
2) 강도
<표: 유대 전쟁 무렵의 예루살렘 구도>
주후 66년부터 로마를 대항해서 싸운 무리는 ‘열심당(zealots)’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마카비 형제들과 같은 이름인 엘르아살, 시몬, 요한, 또 그 외에 므나헴 같은 사람들이 다양한 분파를 이루면서 로마에 대항하다가, 로마의 진압이 멈추면 서로 다투는 일들이 반복해서 벌어졌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분파들 중에 유독 엘르아살파를 콕 집어서 ‘열심당’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들은 제사장 계급이었고, 성전을 거점으로 삼았으며, 숫자가 가장 적었던 무리입니다. 이들 때문에 므나헴이 이끄는 ‘시카리’ 무리가 마사다로 이동한 이후에도 남은 세 분파는 끊임없이 분쟁했습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도 자신의 <역사>에서 비슷한 내용을 기록했는데, 그는 반란을 일으킨 무리를 가리켜 ‘강도’라고 표현했습니다. 반면, 유대인 출신인 요세푸스는 유대인들을 파멸로 이끈 지도자들을 가리켜 ‘강도’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기 전후로 기록된 복음서에서 ‘강도’라고 묘사하는 사람들이 진짜로는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 바요나
‘바요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만 통용된 은어였습니다. 이전에 바요나의 두 가지 해석을 살펴보았는데, 두 음절로 읽으면 ‘바(아들)+요나(이름)’로서 ‘요나의 아들’ 또는 ‘요한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한 음절로 읽으면 욕설과 같은 은어로서 유대인들이 항전주의자를 가리키는 명칭이었습니다.
복음서 중에서 ‘바요나’라는 명칭이 유대인들을 위해 기록된 마태복음에만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 직후 그를 ‘바요나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니까 그의 원래 이름은 시몬인데, ‘바요나 시몬’이라고 하시며 ‘베드로’로 바꿔 주셨습니다(마 16:17). 요한복음에서는 부활 후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이 아니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시며 그를 회복시켜주십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떤 이상을 품었던 사람이었는지 대략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였지만, 바요나였다는 것입니다. 즉, 항전주의자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일으킨 반란 이후 유대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로마에게 벗어나 독립된 나라를 세우기를 원했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까지 베드로는 바로 그런 꿈을 가지고 제자들과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드디어 왕이 되시면 누가 2인자가 될지를 놓고 싸웠습니다.
당시 베드로와 같은 이상을 품었던 사람들이 바로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우레의 아들’(막 3:17)이라 부르셨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을 때 하늘에서 불을 내려 다 태워버리자고 할 정도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비롯해서 이방인들을 혐오하던 사람들입니다(눅 9:54).
예수님은 이 세 사람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따로 데리고 다니셨다는 구절이 복음서 곳곳에 나옵니다. 그것은 세 사람이 다른 아홉 명의 제자들보다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셔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들의 꿈이 정치적이고 권력욕이 아주 강한 사람들이었기에, 다른 제자들도 한 자리를 하려고 따라다녔지만 특히 그들이 요주의인물이어서 그러셨던 것입니다.
4) 시카리
라틴어 시카리(sicarii)는 로마 사람들이 쓰던 단어입니다. ‘단도(短刀)’를 뜻하는 ‘시카(sica)’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벨릭스 총독이 주후 50년대에 유대로 파견되었을 때, 몸에 단도를 지니고 다니면서 암살을 시도하는 유대인 그룹을 가리켜 ‘시카리’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유대에서 그리스로 간 유대인 그룹이 바로 이 시카리였다고 추정됩니다.
그들은 유대 전쟁이 시작된 주후 66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다가 마사다로 이동해서 집단으로 자결하는데, 흥미롭게도 요세푸스는 이 명칭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마사다 요새 유적을 조사했던 이스라엘 고고학자 이갈 야딘(Yigal Yadin)은 라틴어 ‘시카리’가 유대인들에게는 ‘열심당’으로 불렸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유대 전쟁 전후로 기록된 복음서에서는 시카리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십시오.
i(정관사) + sicarii(시카리) + ot(어미) = Iscariot
언어를 다른 언어로 표기할 때 번역(translation)이라는 방법도 있지만, 소리 나는 그대로 표기하는 음역(transliteration)이라는 방법도 있습니다. 라틴어 ‘시카리’를 히브리어로 음역할 때, ‘시카리’ 앞에 히브리어 정관사 ‘이(i)’와 뒤에 어미 ‘오트(ot)’를 붙이면 ‘이스카리오트’, 즉 ‘가룟’이라는 명칭이 됩니다.
물론 이것이 정설이라기보다는 유력한 학설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보지 않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스카리오트’가 ‘시카리’에서 왔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분명 시카리는 유대 전쟁과 관련해서 영향력이 있던 분파였지만, 그 분파의 한 인물이 예수님을 팔았다는 사실은 초대교회에 불편한 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는 ‘가룟 유다’라고 많이 표현하지 않고 ‘배신자’ 또는 ‘주를 판 자’라고 표현하는 것을 봅니다.
3. 예수를 둘러싼 은밀한 협상
주전 142년 마카비 집안의 시몬이 셀레우코스와의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사람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에게 열광했습니다(마카베오상 13:51). 그때 사독 계열 대제사장의 명맥이 끊기고 종교의 정통성이 상실되자 광야로 나간 하시딤 그룹도 있었지만,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와 <유대 고대사>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시몬을 대제사장으로 인정하고 은인으로 여기면서 존경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던 유대인들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스가랴에 예언된 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슥 9:9). 독립을 쟁취하려는 전쟁 영웅처럼 말을 타고 입성하신 게 아니라,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환호하며 정치적인 기대를 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던 로마 주둔군이 이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안토니오 망대에서 성내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총독 빌라도는 유대 백성에게서는 정치적인 기대 심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스파이들을 보내서 예수 본인을 조사해 보았을 때 정치 선동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재판할 때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겠다.”라고 한 것은 대충 한 말이 아니라 이미 다 조사해 보고 알아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예수가 인기를 끌며 구름떼같이 많은 사람을 몰고 다니는데 위협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가만히 두었겠습니까? 이미 그 가운데 스파이를 보내서 다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별로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재판을 하면서 몇 대 때려서 풀어 주겠다고 말한 겁니다(눅 23:22).
오히려 백성들의 정치적 기대가 부담스러웠던 자들은 놀랍게도 빌라도가 아니라 산헤드린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 권력을 받은 친로마 엘리트 집단이었기 때문에, 만약에라도 백성들의 반란이 일어나서 혹시 독립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최악의 시나리오가 되는 겁니다.
사실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유대 사회의 최고 엘리트이며 종교 지도자들인데 오히려 독립을 원하지 않습니다. 친일파와 너무 비슷합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독립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립을 부담스러워하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매국노였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종교범으로 몰아 돌을 던져 죽이자고 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예수를 향해 환호하는 백성들을 볼 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환호와 함께 입성하시는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이 다 틀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효과적으로 예수를 처리할 방안을 찾습니다.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서 로마 총독이 대신 처형하도록 모의한 것입니다(요 11:47~53).
분명히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정치적인 의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의 입장에서는 예수가 정치범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바로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인 가룟 유다가 와서 자기가 예수를 넘겨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결국 시카리 출신의 가룟 유다로부터 처형할 명분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실 가룟 유다가 시카리였다고 하더라도, 진짜 열성적인 시카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진짜 열성적인 시카리였다면 예수님을 따라다니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데서 자기들끼리 모여 항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짜였고 도둑이었다는 평가가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정치범으로 처형하려면 반드시 로마 총독의 승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를 설득해야 했는데, 이 점에 대해 유대 역사가 필로(Philo)가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은밀한 협상을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를 당황하게 했다. 만일 그들이 사절단을 보내어 빌라도 자신이 총독으로 지내는 동안 행했던 일, 즉 뇌물 수수, 성전 금고 강탈, 유대 종교 모독, 의도된 폭행, 재판 없는 처형, 지속적인 잔인한 행위들 등을 로마에서 폭로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빌라도는 두려움에 떨었다.” (필로, Gaium, 1.30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요 19:12)
앞에서 사람들이 소리치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도 소리쳤겠지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빌라도에게 ‘똑바로 안 하면 로마에 찌르겠다.’라고 위협하는 장면입니다.
당시 속주로 파견된 로마인 총독의 첫 번째 임무는 속주의 치안을 담당하고 안정시키는 것이었는데, 그와 동시에 총독이라는 자리는 속주 엘리트들부터 뇌물을 받아 부정하게 축재하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유대는 아주 짭짤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총독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가혹하게 다루었고, 예루살렘 성전 금고를 탈취하거나 뇌물을 받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필로의 글은 유대 엘리트들과 빌라도 사이에 정치적인 긴장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이전에 헤롯 대왕의 아들로 유대를 다스렸던 헤롯 아켈라오의 사례에서도 살펴봤듯이, 속주의 엘리트들은 로마 중앙 정부에 속주의 상황을 고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아켈라오는 바로 그 유대인들의 고발로 인해 폐위되고 유배를 갔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총독인 빌라도의 부정도 얼마든지 고발할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와 산헤드린이 서로 계산기를 두드리던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부정 축재와 비리를 덮고 총독의 임기를 연장하기를 원했습니다. 실제로 다른 총독들보다 오랜 기간인 10년 동안 했습니다.
반면 산헤드린은 유대에서 반란의 싹을 제거하고 자기들의 권력을 로마로부터 계속 인정받아 유지하기를 원했습니다. 자기들이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이면서도 유대가 독립하기를 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유대가 독립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 자기들이 기득권을 계속 쥐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밀한 협상을 통해 예수님의 재판을 진행하게 된 것입니다(요 11:52).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의 은밀한 협상은 예수님을 반란자로 몰아갔습니다.
"12 로마 군대 병정들과 그 부대장과 유대 사람들의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를 잡아 묶어서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인데, 14 가야바는 ‘한 사람이 온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유대 사람에게 조언한 사람이다." (요 18:12-14, 새번역)
결국 종교범인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서 체포하기 위한 협상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총독 빌라도 사이에 이루어졌고, 로마 군대가 겟세마네로 출동합니다.
그림: 카라바조, <그리스도의 체포>, 1602년
카라바조는 겟세마네에 출동한 병력이 성전 경비대가 아니라 로마 군대로 그렸습니다. 왜 로마 군대가 출동했습니까? 예수님은 종교범이기도 하지만 정치범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치범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이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더 깊이 들어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일찍이 마카비 전쟁 때 맛다디아 제사장의 다섯 아들인 요한, 시몬, 유다(마카비), 엘르아살, 요나단이 아버지와 함께 마카비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때 겟세마네에서 시몬, 요한, 야고보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이 수제자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요나’의 배경을 가진 제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 사람이 특히 위험했기 때문에 그들을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정치적 반란자로 몰아붙이기에 딱 좋은 장면입니다. 마카비 집안 아들들 이름과 같은 제자들을 데리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의심을 사기 딱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때 십자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판은 인간의 탐욕과 위선이 얼마나 적나라하게 드러나는지 보여 줍니다. 자기들의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유대 백성들에게는 종교적인 명분을 내세우고, 총독 빌라도에게는 정치적인 명분을 들이대는 산헤드린의 이중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들은 유대 사회에서 가장 경건하며 거룩하다고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말입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입니까? 가장 영적이고 거룩하고 경건해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니 말입니다.
“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31~32절)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라고 한 빌라도의 말은 속주 자체 권한인 종교범으로 처형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 지도자들이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라고 말한 것은 정치범이기 때문에 종교범으로 죽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주 간교합니다. 사실은 돌로 쳐서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으니까 정치범으로 몰아서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셨을 때 베드로는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 그는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따라올 수 없다.”라고 하시니까 “왜 못 따라갑니까? 제 목숨을 버려서라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예자기가 장담했던 약속을 깨뜨려 버립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단순히 베드로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랬습니까?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막 14:69-70)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실 때 곁에는 두 강도가 함께 달렸습니다. 그 좌우의 강도들은 단순한 범죄자들이 아니라 갈릴리 유다와 같은 반란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마가복음 말씀에는 ‘그 도당’과 ‘갈릴리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20여 년 전에 있었던 갈릴리 사람 유다의 흔적이 남아 있는 표현입니다. 만일 이때 베드로가 자기도 갈릴리 사람이라고 당당히 말했다면, 골고다의 십자가는 세 개가 아니라 네 개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4. 신구약 중간사가 주는 교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여기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에서 ‘거하다’라는 말의 원문은 ‘장막을 친다’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었고,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 이런 계획을 세우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그 계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참된 이스라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제2성전, 즉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질 때부터 유대인들은 회당과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로 더 이상 성전이나 대제사장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속에 장막을 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구약 중간사를 관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진정한 회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로 향하신 과정을 보면 인간의 추악한 내면을 보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또 분노하게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지금 시대와 닮았습니까? 자기 이익과 기득권을 연장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하려는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시대 정치인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그들에게서 희망을 품기가 힘듭니다.
또 종교인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종교인들보다 지금 목회자들이 더 거룩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없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로 믿고 따르는 제자인가, 아니면 주님이 내가 기대하는 것을 채워주지 않으시는 것 같으면 등을 돌리며 불평하는 팬(fan)에 불과한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회복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까? 지금까지 살펴본 신구약 중간사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정점으로 펼쳐진 하나님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 여정의 오늘 이 부분을 씨에스 루이스(C. S. Lewis)의 <피고석의 하나님>에 나오는 문구로 마무리하려 합니다.
*****************************
"자신의 운명이 부당한 희생자라고 생각해서 슬퍼하거나, 질병, 죽음, 고통 등으로 분노하신다면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에서 말하기를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부’란 경제적인 ‘부’를 포함하지만, 행운, 건강, 명예 등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부’에 포함됩니다.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라고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생에서 이미 행복하고 만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이나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릴 마음이 나지 않아서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덧없는 행복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 모든 ‘부’들을 우리에게서 빼앗기도 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계속 그것들을 의지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혹하게 들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혹한’ 교리들이 어쩌면 가장 친절한 교리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마련된 장소가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기 위한 훈련과 교정의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편한 삶을 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편안함과 행복함을 위해 예수님께 나아오셨다면, 예수님은 그 답이 되지 않습니다."
*****************************
얼마나 큰 도전이 되는 말입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불행하게 되라고 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행복을 원한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처럼 자기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그들이 행복했을까요? 총독 빌라도처럼 자기 권력과 총독 자리를 유지하려고 어떻게든 노력하며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타협하고 그를 끔찍한 십자가에 처형했는데 행복했을까요? 그들은 행복하지 못했을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오히려 순교한 스데반과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하셨고,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스데반도 그랬습니다. 그분들이야말로 참으로 복된 사람,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어떤 상황이 우리 삶 속에 있든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추구함으로써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맛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