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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9일 수요예배
✦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 20 ✦
유대 전쟁과 예루살렘 멸망
(누가복음 19장 41~44절)
[들어가는 말]
프랑스 파리에 가면 유명한 장소가 많은데 그중 여행자들이 빠지지 않고 방문하는 곳 중 하나가 개선문입니다.
# <파리 개선문 (Arc de Triomphe in Paris)>
이 파리 개선문은 사람들이 많이 아는데, 사실 로마에도 개선문이 있고 그것이 원조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가 콜로세움(Colosseum)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바로 옆 포로 로마노(Foro Romano: Roman Forum)로 가는 입구에 티투스 개선문(The Arch of Titus)이 서 있습니다.
# <포로 로마노, 티투스 개선문, 콜로세움 전경>
# 로마 티투스 개선문(The Arch of Titus)
티투스 개선문 내부를 보면 이렇게 유대 전쟁의 장면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로마 병사들이 성전을 약탈하는 장면입니다. 이처럼 유대 전쟁은 유대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인데, 유대 땅에 살던 사람들이 추방당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대교와 기독교 역시 이 사건을 통해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전쟁의 중요성을 예언하셨고, 초대교회도 유대 전쟁과 큰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유대 전쟁을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유대 전쟁
엄밀히 말해서 유대 전쟁은 두 번이었는데, 1차는 주후 66~70년에, 2차는 주후 132~135년에 일어났습니다. 보통은 1차 유대 전쟁을 그냥 ‘유대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마카비 전쟁으로부터 예수님 시대의 가치관이 형성되었고, 유대 전쟁 전후로 복음서가 기록되었습니다. 복음서는 종말을 미리 보여 주는 내용이 나오며, 유대 전쟁을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아주 분명한 시대의 전환점이기 때문인 동시에, 예수님 시대의 무장 단체들이 한 세대가 지나면서 유대 전쟁에 직접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전쟁을 이해하면 예수님 시대의 항전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의 이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 이 시대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준 마카비 전쟁과 유대 전쟁을 연결해서 살펴본다면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고, 성경을 보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역사가 요세푸스의 저작들은 유대 사회의 구조와 갈등, 그리고 유대 전쟁의 과정을 생생하게 제공해 주는 유일무이한 자료입니다. 원래 유대인이었던 그가 장군으로 싸우다 로마에게 잡혔다가 귀화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이 되었는데, 그 후 유대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만큼 교회 역사에서 요세푸스의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큽니다. 성경 외에는 유일무이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은 주후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27권이 정경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요세푸스의 저작들은 주후 1세기에 기록되어 성경 시대의 배경을 제공해 주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이나 교부들에게 요세푸스의 책들은 중요한 문서가 되었습니다. 주후 70년에 유대 전쟁이 끝난 뒤인 주후 77년에 출판된 <유대 전쟁사>는 요세푸스가 전쟁에 참전한 목격자로서 기록한 작품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율리오-클라우디오 가문은 주후 68년 네로 황제의 죽음과 함께 끝났습니다. 그 후 1년여 동안에 갈바(Galba), 오토(Otho), 비텔리우스(Vitellius) 같은 장군들이 차례로 황제가 되며 혼란이 극심해졌습니다. 1년 사이에 황제가 4명이 바뀐 겁니다. 이를 지켜보던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로마로 진격하여 유대 전쟁이 한창이던 주후 69년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렇지만 베스파시아누스의 플라비우스 가문은 평민 출신이라는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그런 배경으로 인해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후 돌아오면서 엄청나게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기 가문을 위해서라도 크게 개선식을 거행했고, 나중에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 티투스 개선문을 세웠습니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는 마카비 전쟁은 물론, 주후 6년에 파견된 총독 코포니우스부터 주후 64~66년에 마지막으로 파견된 플로루스(Florus)에 이르기까지 유대 통치자들이 어떻게 율법을 침해했는지 자세히 기록합니다. 다시 말해서 전쟁 기록 대부분을 율법이 침해받았다는 내용에 할애합니다.
유대 전쟁을 조사한 또 다른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도 자신의 책 <역사>에서 이 사실을 기록합니다. 첫 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주전 27~14년)가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내전에서 승리한 후 헤롯 대왕을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해줌으로 그의 권세가 더 커졌습니다.
그 후 헤롯 대왕이 죽자 시리아 총독으로 온 퀸틸리우스 바루스(Quintilius Varus)는 왕국을 셋으로 나누어 헤롯의 세 아들이 분봉왕으로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아켈라오, 헤롯 안디바, 헤롯 빌립니다.
두 번째 황제 티베리우스(주전 14~주후 37년) 때는 모든 것이 평온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황제 가이우스 칼리굴라(주후 37~41년)는 잔인한 사람이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자신의 상을 세우라고 명령하자 유대인들은 무기를 들고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가이우스가 죽자 반란이 멈추었습니다.
그 후 네 번째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주후 41~54년)는 유대를 속주로 만들고, 그 관리를 로마의 기사와 해방 노예에게 맡겼습니다. 대표적인 해방 노예였던 안토니우스 펠릭스는 노예근성으로 왕의 권한을 행사하면서, 온갖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짓을 일삼았던 사람입니다. 주후 52~59년에 파견된 안토니우스 펠릭스는 사도행전에 ‘벨릭스’로 나오는 바로 그 총독입니다.
전쟁의 주요 원인이 율법을 로마가 침해했기 때문이라는 시각은 요세푸스와 타키투스가 똑같습니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주후 64~66년에 파견된 플로루스 총독 때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66년에 유대 전쟁이 시작되는데, 그때 발행된 동전들이 있습니다.
# <유대 전쟁 기간에 발행한 유대 동전>
당시 발행한 동전의 문구를 보면 유대 전쟁의 진행 상황이 대략적으로 보입니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로마의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패배했을 때, 유대인들은 마카비 전쟁의 승리를 떠올리면서 ‘거룩한 예루살렘(Jerusalem the Holy)’이라고 새겨진 동전을 발행했습니다(66년).
마카비 전쟁과 유대 전쟁은 2백 년이라는 시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는 율법을 통해서 연결된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발행된 동전에는 “시온의 자유”라고 써 있고, 특히 주후 69년에 발행된 동전에는 “시온의 구속”이라고 서서 메시아 대망의 흔적이 담겨 있는 것을 봅니다. 유대인들은 68년 이후 로마군의 진압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메시아사상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가 진압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내부적으로 혼란할 뿐이었습니다. 68년 6월 9일 네로 황제가 사망하자 그의 장군이었던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차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1년 사이에 4명의 황제가 바뀌는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원래 유대 전쟁을 진압하라고 파견되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의 추이를 지켜보며 진압을 중단하고 있었습니다.
주후 66년에 시작된 유대 전쟁이 70년이 되어서야 끝난 이유가 있습니다. 그냥 금방 끝낼 수도 있었지만 4년이나 걸렸던 것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에 왔을 때 로마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영 말이 아니어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서로 황제가 되겠다고 계속 싸우며 황제가 바뀌는 상황 속에서 유대에 주둔하며 로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반란 진압을 중단한 채 로마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결국 주후 69년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에서 로마로 돌아옵니다.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서 당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비텔리우스를 제거하고 로마의 황제 자리에 오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진압은 자기 아들 티투스에게 맡겼습니다. 티투스는 70년 봄부터 예루살렘 포위전을 시작했고, 5개월간의 포위 끝에 70년 9월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원래 예루살렘은 북쪽과 서쪽 성벽을 세 겹으로 쌓았기 때문에 쉽게 들어갈 수가 없고, 또 동쪽과 남쪽으로는 골짜기가 있어서 제대로 공격을 못 하는 구조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시온산이라고 할 정도로 높은 곳에 있고 그 옆에는 골짜기가 있는데, 거기에 흙을 쌓고 올려서 공격하여 함락한 것입니다.
8만의 로마 군대가 5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해서 아무 물자도 못 들어가게 하고 왕래를 못 하게 막은 후 5개월 후에 토성을 쌓고 들어가 점령하고 보니까, 너무나 놀랍게도 아이들이 없는 겁니다. 어른만 있었습니다. 애들을 다 잡아먹었습니다. 이토록 끔찍한 일이 성경에 나온 그대로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때 예루살렘 함락하고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그 후 주후 71년 여름에 로마로 돌아가 개선식을 화려하게 거행했습니다. 그때 유대 전쟁에 가담해서 격렬하게 싸웠던 유대인들 상당수를 잡아서 로마로 끌고 온 다음 이집트 광산으로 팔아버리고, 검투사가 되게 하거나 노예로 팔았습니다.
티투스는 유대인들이 마지막으로 항전하던 마사다 요새를 공격하다가 당시 로마의 유대 총독이었던 실바(Silva)에게 맡기고 떠났고, 실바는 74년에 마사다 요새를 함락하며 모든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마사다에서는 960명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두 명의 여성과 다섯 명의 아이들만 생존해서 목격자가 되었습니다(『유대 전쟁사』, 7.9.1.). 그 이야기가 전해져서 지금까지 남게 된 것입니다.
2. 예루살렘 함락과 신약 성경의 기록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된 과정을 살펴보면 신약 성경의 몇몇 기록들이 생각납니다. 먼저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강도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자신들을 위한 요새와 피난처로 삼았다. 그래서 성전은 그들에게 작전 본부로 이용되었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4.3.7.)
요세푸스는 유대 항전주의자들이 성전을 중심으로 저항했다고 하면서, 그들을 가리켜 ‘강도’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야 로마의 검열에 통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를 대항해서 싸운 사람들을 훌륭하다고 하면 걸리니까, ‘강도’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강도 둘이 달려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정말 돈을 갈취하고 폭력을 쓰고 백성을 괴롭힌 사람들이었다기보다는, 이런 항전주의자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도 자기 책 <역사>에서 예루살렘의 함락 과정을 비슷하게 묘사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티투스가 보기에도 정복하기 어려운 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완전히 폐허로 변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군은 공성 장비를 이용해서 성벽들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그는 “찬란했던 도시로 만인에게 명성을 날렸던 이 예루살렘은 어리석은 반란자들의 광기 때문에 이렇게 최후를 맞이했다.”라고 기록합니다(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7.1.1.). ‘어리석은 자들의 광기’라고 써야 검열을 통과할 것 아닙니까? 자기도 로마를 상대로 싸웠던 사람이지만, 이렇게 자세히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타협한 겁니다.
예루살렘의 멸망 사건은 누가복음 19장에 나온 예수님의 예언과 그대로 겹칩니다.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를 주후 77년에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이 그보다 먼저 기록되었는지 또는 나중에 기록되었는지, 예루살렘 멸망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신약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요세푸스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누가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참고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신약학자들 중 또 만만치 않은 수가 그 반대를 주장합니다. 만일 누가가 요세푸스보다 먼저 기록했다면 더욱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후 30년 무렵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이렇게 자세히 예언하신 것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41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42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43 그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44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눅 19:41-44, 새번역)
누가복음뿐 아니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도 모두 예루살렘의 멸망을 언급합니다. 특히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구절은 마태, 마가, 누가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가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할 때 보통 신전의 터는 남겨 두었는데, 그것과는 달리 예루살렘은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물론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인데, 왜 로마가 이렇게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는지 그 이유가 참 놀라우면서도 허무합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엄청난 재물 중 일부가 폐허 더미 속에서 계속 발견되었다는 겁니다. 다 함락하여 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무너졌는데, 이상하게 땅에서 계속 보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직접 땅을 파헤쳐 가면서 재물을 찾아내느라 돌 하나도 돌 위에 있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전쟁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몰라 불안해하면서 자기들이 소유한 금과 은과 온갖 귀중품들을 땅속에 묻어 놓았고(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7.5.2.), 바로 그 때문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못하게 되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얼마나 허망합니까? 자기들이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보물 때문에 성전을 비롯하여 예루살렘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3.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무너진 의미
신약 성경에서 예루살렘이 멸망한 사건은 종말의 상징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예루살렘의 함락을 기록하면서 종말의 관점으로 이렇게 제시합니다.
“20 예루살렘이 군대에게 포위당하는 것을 보거든, 그 도성의 파멸이 가까이 온 줄 알아라. 21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고, 그 도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고, 산골에 있는 사람들은 그 성 안으로 들어가지 말아라. 22 그 때가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질 징벌의 날들이기 때문이다. 23 그 날에는, 아이 밴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화가 있다. 땅에는 큰 재난이 닥치겠고, 이 백성에게는 무서운 진노가 내릴 것이다. 24 그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뭇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요, 예루살렘은 이방 사람들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 사람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눅 21:20-24, 새번역)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지금 예언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누가가 예루살렘 멸망의 기록 뒤에 같은 단락으로 연결하는 또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가 진짜 전하고 싶었던 것은 25절부터 나옵니다.
“25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서 징조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 때문에 어쩔 줄을 몰라서 괴로워할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일들을 예상하고, 무서워서 기절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눅 21:25-26, 새번역)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이후 바로 이것을 기록합니다. 해와 달과 별들, 그러니까 천체가 흔들리고, 또한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를 사람들이 들으며 괴로워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20년 동안만 생각해봐도,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해서 괴로움을 당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또한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린다’라는 게 무엇입니까? 천체를 이루는 법칙들이 흔들리며, 이상한 현상들과 이상 기후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요즘 일기도 그렇지만, 비행기가 떨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때에 사람들은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을 띠고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눅 21:27, 새번역)
지금 누가가 뭐라고 여기서 외치는 겁니까? 누가뿐 아니라 마가도 마태도 다 비슷한 내용을 기록했는데, 우리도 이제 심판의 징조를 본다면 눈을 열어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기가 어떤 시대인지 보면서 분별하라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멸망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온 인류의 멸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겁니다.
“33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해서, 방탕과 술 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고, 또한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게 하여라. 35 그 날은 온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닥칠 것이다. 36 그러니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또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눅 21:33-36, 새번역)
이것이 정말로 누가가 전하고 싶었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종말의 심판은 모든 사람에게 닥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심판처럼 예수님이 장차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이 명백한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혹시 누가가 기록한 것처럼, 방탕과 술 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마음이 짓눌려서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둔감해 있거나 무감각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가만히 보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다 그런 겁니다. 살 만하니까 방탕하고 술에 취하고 또 세상살이를 걱정합니다. 즉, 뭘 먹고 살까, 뭘 할까, 돈을 어떻게 하면 더 벌까, 전부 그런 걱정을 하며 살지 않습니까?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런 징조를 보면 고개를 들고 눈을 열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기가 어떤 시대인지 분별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내용을 보십시오.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눅 19:39-40)
지금 이게 어떤 상황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막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라고 외치니까,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선생님, 저 사람들 좀 조용히 시켜주십시오. 되게 시끄럽네. 조용히 시켜주십시오.”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유월절이 되어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어쩌면 이 예수가 로마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샬롬(평화)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 바로 그 메시아가 아닐까?’라는 기대감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소리를 칩니다. 그때 바리새인이 예수님에게 저 사람들을 책망하라고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그러겠습니까? 단순히 예수님에게 시비를 거는 게 아닙니다. 이들은 걱정하는 겁니다. 뭘 걱정합니까? 지금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입성하시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 같이 모여들어서 호산나 외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열광하고 있습니다. 길에 자기 겉옷도 깔고 열광하는 대단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막 열광하는 이것을 또 누가 보고 있습니까? 로마 주둔군이 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은 실시간으로 로마 총독에게 보고되고 있습니다. 총독도 유월절이라 예루살렘에 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보는 바리새인들은 로마군이 진압에 나설까 봐 걱정하며 제발 저 사람들을 좀 진정시켜달라고 하는 겁니다. 걱정해서 한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여기서 소리 지른다는 말은 ‘으악~’ 하며 아주 절규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정말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냥 읽고 넘어갈 수 있지만 너무나 놀라운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예루살렘이 멸망 당할 때 진짜로 사람들이 절규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면서 죽어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무너졌습니다. 성전 벽면에 붙어 있는 금붙이 하나라도 더 찾아내기 위해서 로마 병사들이 폐허가 된 성전의 돌들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땅에 있는 보물들을 파냈을 뿐 아니라, 성전에서 무너진 돌에 붙어 있는 금붙이를 뜯어가려고 했고, 그래서 돌 하나도 돌에 남지 않고 성전과 성벽도 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일들이 유대 전쟁 때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그때 소리 질렀던 사람들이 티투스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 와서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들의 흔적이 로마 티투스 개선문 안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들이 잡혀가는 모습이 로마 콜로세움 옆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 안에 새겨져 있습니다.
# <티투스 개선문 내부>
그러면 예루살렘 성전을 지탱하던 석재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놀랍게도 그 돌들이 로마로 옮겨져서 지금 로마에 가면 누구나 찾아가는 콜로세움의 주춧돌로 활용된 것입니다.
# <로마 콜로세움>
예수님에게 사람들을 조용히 시켜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 사람들이 침묵한다면 돌들이 소리 지를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을 때 돌들은 침묵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 이 돌들은 침묵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난 후에 그 돌들은 이렇게 콜로세움의 기초가 되어서 2천 년 동안 우리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이 아이러니를 보십니까?
[나가는 말]
성전을 지탱했고 콜로세움을 구성하고 있었던 돌들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심판을 앞두고 있다면 그 심판 앞에서 우리는 유대인들과 달리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분별하고 준비하라고 돌들이 소리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로마에 갔을 때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걸 알았더라면 콜로세움에 갔을 때 ‘아,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그 돌들이 지금 여기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땐 몰랐습니다. 여러분 중에 나중에 로마에 가시게 되면 콜로세움에 꼭 가셔서 그 앞이나 안을 보시면서 ‘아,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그 돌들이 지금 이렇게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구나.’라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아주 명소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유대인들, 특히 크리스천들을 막 죽이던 그 콜로세움이 지금은 놀랍게도 명소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런 것들을 보면서 분별하며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준비해야겠습니까? 무슨 특별한 준비가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리고 존경하고 예배하며,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삶,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삶,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갈 때, 우리 모두 어떤 상황이 닥쳐도 아무 염려가 없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