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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9일 (수요예배)
✦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 18 ✦
유대 사회와 산헤드린 공회
(요한복음 2장 13~16절)
[들어가는 말: 유대 사회의 통치 기구였던 산헤드린 공회]
오늘은 산헤드린 공회의 기원과 역할, 그리고 신약 시대 때 유대 사회에서 공회의 위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대 사회는 페르시아 시대부터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사제들이 권력을 가졌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 도시 국가의 원로회(Gerousia) 형태처럼 종교 엘리트들이 권력을 가지고 나라를 좌지우지했습니다(주전 333~165년).
물론 주전 3세기에 토비아스 가문이 경제적인 실세로 부상하기도 했지만, 유대 사회는 여전히 종교적인 사회였기에 종교인들이 차지한 기득권은 상당했습니다. 마카비 시대를 거치면서 대제사장의 정통성이 변질되었지만, 그래도 권력자들이 대제사장 직분을 장악하려고 했던 이유는 성전을 통해 엄청난 이득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주전 63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그리스 도시 국가 원로회 형태와 비슷했던 종교 엘리트들의 모임은 산헤드린이라는 기구가 되었고, 이것은 신약 시대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종교와 사법(재판)을 모두 관할하는 기구였고, 그것의 의장은 대제사장이 담당했습니다.
1. 산헤드린의 기원
역사가 요세푸스는 주전 57년 무렵 시리아 총독 가비니우스(Gabinius)가 시리아 속주 산하에 있던 유대 지역을 재편한 것을 기록하는데, 그것을 통해 산헤드린 공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보여 줍니다.
“그 후에 가비니우스는 히르카누스를 예루살렘으로 데려와 성전을 돌보도록 하며, 귀족에 의한 통치 방식으로 시민들을 다스리게 했다. 또한 모든 백성을 다섯 개의 관할 관청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1.8.5.)
가비니우스 시리아 총독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통치하도록 권한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 엘리트들이 성전을 중심으로 큰 이익을 누렸지만, 반면에 정치권력자의 영향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종교적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웠고 점차 변질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가비니우스 총독은 5개의 ‘의회(council)’를 구성한 다음, 유대를 다섯 지역으로 구분하여 다스리게 했는데, 결국 이 의회가 백성들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제1의회는 예루살렘을, 제2의회는 가다라를, 제3의회는 아마투스를, 제4의회는 여리고를, 제5의회는 갈릴리의 세포리스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은 왕정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귀족 정치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4.5.4.). 『유대 전쟁사』와 달리 『유대 고대사』는 공회에 관해 훨씬 더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이렇게 종교 엘리트 집단은 유대 사회에서 산헤드린(공회)이라는 형태로 자리 잡게 됩니다.
2. 산헤드린의 구성과 기능
유대인 문헌인 <미쉬나>의 ‘산헤드린’ 부분을 보면, 공회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나와 있습니다. 인원이 70명으로 제한된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이 의장이 되고, 다수의 사두개인과 소수의 바리새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전에도 본 것처럼, 로마와 속주(식민지)의 관계는 충성과 특권을 토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지도자 계층이 로마 제국에 충성하게 만들고, 그러한 엘리트들에게 특권을 주는 식이었습니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하면, 충성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특권을 빼앗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엘리트들은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로마에 전적으로 충성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전 63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폼페이우스 이후부터 대제사장은 당연히 친로마 성향으로 세웠습니다. 대제사장 밑에 있던 엘리트 그룹은 권력을 부여받은 대가로 속주의 질서를 유지하고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주된 역할이었습니다.
로마는 유대 엘리트들의 토지나 재산 정도에 따라 차이를 두면서 권력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땅과 재산이 많은 엘리트에게는 권력을 많이 주고, 그보다 땅과 재산이 적은 사람에게는 조금 덜 주고, 땅과 재산이 더 적은 사람에게는 더 적게 권력을 주었습니다. 당시 유대 엘리트들은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싶어 안달했는데, 그러한 유대 지도자들이 땅과 재산을 늘리기 위해 백성을 얼마나 가혹하게 수탈했겠습니까?
이런 구조로부터 유대 사회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유대 사회는 율법을 기초로 하며 율법을 받드는 종교 엘리트가 장악한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러한 종교 엘리트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는 신앙을 지키고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기관이 아니라, 로마 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보다 로마를 더 섬기는 자들이 이끄는 곳이 공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백성들에게서 로마에 바치는 세금을 더 효율적으로 걷을 수 있을지를 연구하며 실제로는 악랄하게 빼앗는 기능을 주로 했던 것이 산헤드린의 현실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가장 종교적이라고 자부하는 엘리트들이 모여서 한 짓이 로마의 권력에 붙어서 유대 사회를 통치하는 권력을 누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로서 백성이 하나님을 잘 섬기며 잘살 수 있게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푼이라도 더 백성에게서 뜯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3. 대제사장들의 변화
헤롯 가문의 기초를 놓은 안티파테르는 주전 47년부터 유대 사회의 실권을 잡았습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아버지로, 이두매 사람입니다. 구약의 에돔이 신약 시대에 와서 이두매가 되었는데, 그러니까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권력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했던 기구가 다름 아닌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유대 최고 통치 기관이 이두매 사람이 다스리는 것을 뒷받침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로마 시대에는 종교가 권력의 지배를 받는 것이 심각할 정도였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결탁이 너무 심했기 때문입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 최초의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으로부터 주후 70년에 제2성전(스룹바벨 성전/헤롯 대왕 증축)이 파괴될 때까지 대제사장직에 올랐던 사람은 모두 83명이라고 합니다.
# 그림 1: (표) 요세푸스가 제시한 역대 대제사장 현황
이 표를 보면 모세 때부터 솔로몬 때까지 612년 동안 13명의 대제사장이 있었고, 평균 임기는 47년이었습니다. 솔로몬 때부터 바벨론 침공까지 466년 동안 대제사장으로 18명이 있었고, 평균 임기는 25.8년이었습니다. 포로 귀환 때부터 마카비 시대까지 414년 동안 15명이 대제사장직에 올랐고, 평균 임기는 27.6년이었습니다.
이때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헤롯 대왕부터 유대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단 107년 동안 대제사장직에 올랐던 인물이 무려 28명이나 됩니다. 이전의 훨씬 길었던 기간들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평균 임기는 4년이 채 안 됩니다(『유대 고대사』, 20.10.1.).
그러니까 이 수치만 봐도 로마 시대의 유대 사회, 즉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1세기 초반을 포함한 그 기간에 유대가 얼마나 영적으로 혼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산헤드린 공회 의장인 대제사장이 더 이상 유대 사회의 종교적, 영적 구심점이 아니라, 그저 권력자에 의해 임명되고 폐위되는 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 시대에 대제사장은 유대 사회의 영적 지도자가 아니라, 그저 귀족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유지하는 최종 권한자였던 것입니다. 경건이나 거룩과는 거리가 먼 직분이 되었고, 완전히 타락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재판에 등장하는 대제사장들을 보십시오. 원래 대제사장은 한 명인데 성경에는 대제사장‘들’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대제사장이 수시로 바뀌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가 있었는데, 가야바가 대제사장일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시간이 지나 사도 바울이 활동할 때는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안나스, 가야바, 아나니아 같은 사람들이 성경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 이런 사람이 무슨 대제사장인가 하고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배경을 알고 그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저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그들은 하나도 신앙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대제사장인데도 하나님을 정말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식으로 비유하자면, 목사인데 예수를 안 믿는 겁니다. 예수를 안 믿는 목사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것보다도 더 심한 상황이었습니다. 마카비 전쟁이 일어날 때만 해도 경건을 위해서 전 유대 사회가 고민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로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4. 산헤드린의 역할
로마는 자기들에게 충성하는 속주의 엘리트들에게 특권을 주며 속주를 통치했습니다. 로마의 그런 통치 방식은 속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 효율적으로 세금을 확보하면서도 속주와 관련된 골치 아픈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으려는 의도였습니다.
로마가 관용 정책을 취했던 이유는 로마 자체가 관대한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 사회의 경우에는 그 피 묻히는 역할을 산헤드린 공회에서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판 때 불법적으로 밤에 모인 그 사람들이 바로 산헤드린 공회였고, 사도들이 잡혔을 때 모인 사람들도 공회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후에 예루살렘에서 잡혀 왔는데 그때 모인 사람들도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산헤드린이 더러운 피를 묻히는 일을 다 한 겁니다.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를 생각하면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고 다스렸더라면 백성이 똘똘 뭉쳐 대항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일본은 친일파에게 권한을 주어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악랄한 사람들은 대부분 친일파였습니다.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그들이 대신하게 하고 일본 사람들은 뒤에 있었던 겁니다. 특권과 충성으로 엮인 로마의 정책과 비슷하게 했던 것입니다. 로마에게 배웠을지도 모릅니다.
로마는 반란과 관련된 정치적인 문제를 제외하고 나머지 일들은 모두 유대 엘리트들에게 위임해서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산헤드린 공회는 결국 세금을 효과적으로 걷기 위해서 사회 제도를 정비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주전 63년 로마가 유대를 점령하여 속주로 만든 후 주전 47년에 25%의 토지 생산세를 부과했습니다. 농사를 지어 곡식을 얻으면 그것의 25%나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추가로 인두세, 간접세, 항만세 등 여러 세금을 내도록 요구했습니다. 더 확실한 세수를 파악하기 위해서 주후 6년에 실행한 정책이 바로 호구조사였습니다.
사실 유대 사회는 종교 사회였기에, 모든 유대인은 로마에 내야 하는 세금 외에도 1%의 성전세, 그리고 십일조로 알려진 10%의 종교세를 바쳐야 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절기마다 예루살렘에 가서 속죄 제사를 드리는 비용도 추가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정 물품이 원산지에서 유대 사회로 오는 동안 원가의 100배로 뛰었으니까, 그 시대 세금 징수의 가혹함이 어땠을지, 또 악랄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세리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혐오감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괜히 세리를 미워했던 게 아닙니다. 세금이 엄청나게 많은데, 와서 악랄하게 다 거두어가니까 얼마나 죽이고 싶었겠습니까? 그래서 독사와 세리를 길에서 만나면 누구를 먼저 죽이겠는가는 질문에 모든 유대인이 다 세리라고 답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세금을 내야 했기에 징수를 위한 회계 장치가 필요했고, 세금을 내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해서 만든 것이 대출업이었습니다. 또 고리대금 같은 금융 제도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땅인 유대에서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다른 속주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무거웠으니,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이런 유대 사회로부터 사람들은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안식일이나 정결 규례와 같은 율법은 유대인들이 다른 사회에서 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개종 외에는 유대 사회를 벗어나는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남자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면서 받았던 할례가 다른 사회에서는 ‘주홍 글씨’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유대교에서 출교당하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기에, 유대인들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 사회에서 그냥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유대인들의 경제 현실은 어땠을까요? 유대 문헌 <미쉬나>에서는 헤롯 가문이 등장한 이후부터 빚을 갚지 못한 사람에 대해 산헤드린에서 실시한 금융 제재를 언급합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정해진 기간 내에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 원금의 20%에 해당하는 벌금을 내야 했고, 이마저도 갚지 못하면 빚쟁이(채권자)에게 토지를 빼앗기거나 그의 노예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 유대 사회가 율법과는 완전히 반대로 갔다는 것을 봅니다. 그들이 그토록 중요시했던 모세오경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1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2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신 15:1-2, 9)
율법에는 분명히 7년(안식년)마다 동족의 빚을 탕감해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8 안식년을 일곱 번 세어라. 칠 년이 일곱 번이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사십구 년이 끝난다. 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뿔나팔을 크게 불어라. 나팔을 불어, 너희가 사는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여라. 10 너희는 오십 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누릴 해이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이다.” (레 25:8-10, 새번역)
율법에는 분명히 안식년이 일곱 번 반복된 이듬해 50년째인 ‘희년’에 모든 채무자의 채무를 탕감하도록 명령합니다(레 25:1~17, 신 15:1~12, 31:10~13). 바로 이런 것이 약자들을 대하는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희년이 가까이 올수록 돈을 빌려주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이 만들어낸 제도가 있는데 그것을 ‘프로스불(Prosbul)’ 제도라고 합니다. 이것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하는 맹세로서, 희년 후에도 빚을 갚겠다는 서약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뭡니까? 완전히 율법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까? 탕감해주라고 했는데 맹세하게 해서 희년이 지나면 갚게 만든 겁니다. 희년이면 빚이 다 없어져야 하는데, 잠깐 보류했다가 희년이 지나면 갚도록 맹세를 시킨 겁니다. 이런 제도를 만들었으니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게다가 이런 짓을 앞장서서 행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로마나 이방인이 아닙니다. 율법을 떠받들며 지킨다고 하는 종교 엘리트들이 이끄는 산헤드린 공회였으니, 그 사회가 얼마나 타락했던 사회였겠습니까? 예수님 시대에도 이런 고리대금업과 프로스불 제도가 관행처럼 남아 있었던 겁니다.
산헤드린이 만든 또 다른 제도는 성전에서 사용하는 화폐 정책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데나리온, 므나, 렙돈 같은 것은 일상에서 통용되던 화폐입니다. 그러나 성전에서는 그런 세속적인 화폐가 아니라 소위 ‘거룩한’ 화폐인 세겔을 쓰도록 정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화폐가 세겔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경건을 위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겠습니까? 성전에서는 거룩한 화폐를 쓰라고 하는 이유였겠습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오히려 탐욕과 이기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정책 때문에 성전 입구와 뜰에는 늘 환전상들이 있었던 겁니다. 이런 배경으로 오늘 본문이나 공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을 보시면 그 의미가 더욱 깊이 마음에 와닿게 됩니다.
“13 유대 사람의 유월절이 가까워져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14 그는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16절, 새번역)
예수님이 왜 이렇게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십니까? 단순히 장사하니까 안 된다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런 배경이 다 있습니다. 탐욕과 이기심과 이득을 취하려는 욕심으로 성전에서는 세겔만 쓰게 하고 그 환율 차액을 통해 이득을 얻으려는 악한 마음 때문에 분노하셨습니다.
단순히 성전에서 장사하면 안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산헤드린이 데나리온과 세겔의 환율 조작을 늘 계산기로 두드리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유대 공동체가 병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것에 분노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하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통렬히 꾸짖으십니다.
페르시아 시대 이후 유대인들은 회복을 열망했습니다. 비록 외세의 침략을 당했고, 정치적인 체제가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여호와(야훼)는 그들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구약 시대의 백성으로부터 계승된 아브라함의 자손들, 참된 이스라엘임을 믿으려고 했던 겁니다.
그들이 이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성전과 율법이라는 두 기둥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착취와 수탈의 장소가 되었고, 율법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율법은 고리대금을 금지하고, 약자들을 보살피라고 명령합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율법을 낭독했던 것도 이런 정신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느헤미야는 고리대금업을 금지했습니다(느 5~6장).
이런 율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잘 아는 종교 엘리트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는 고리대금을 부활시켰습니다. 이것이 사회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깊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자기들은 잘 먹고 잘 사는데 백성은 더 가난해지게 했습니다. 그래도 괜찮다고 했으니, 얼마나 악합니까?
세상을 회복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성전과 율법은 형식만 남은 상태였고, 특히 율법은 종교 지도자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이론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비난하며 죽이려 했습니다. 어쩌면 그 때문에 더욱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토록 종교 지도자들과 대립하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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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런 종교 지도자들이나 산헤드린 공회원들처럼 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나도 언제든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교회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우리는 그분의 몸으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몸은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교회를 몸으로, 예수님을 머리로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내가 머리의 역할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머리가 지시해도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우리가 산헤드린 공회처럼 악하지는 않더라도, 혹시 우리 마음에도 ‘주님의 말씀을 알기는 알지만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지.’라고 하는 건 없는지? 주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냥 대충 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건 없는지 우리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살펴보는 가운데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 모두 오직 주님의 뜻대로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주님의 참된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