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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2일 수요예배
✦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 17 ✦
악한 헤롯 가문에서 나온 귀한 보배
(로마서 16장 10절)
지난주에 이어 계속해서 헤롯 가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지난주에는 헤롯대왕의 아버지 안티파테르를 비롯해서 헤롯대왕과 그의 아들들인 아켈라오와 안디바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헤롯 아그립바 1세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 헤롯 아그립바 1세
<그림 1: 헤롯 안디바>
헤롯 대왕에게는 아홉 명 또는 열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그중 둘째와 넷째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헤로디아와 결혼함으로 세례 요한의 질책을 받고 그를 죽인 헤롯 안디바는 결국 분봉왕 자리에서 추방되어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그것도 자신의 정욕과 권력욕 때문에 불법적으로 결혼한 헤로디아와 남매지간으로서 하스몬 혈통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모함에 의해 그렇게 되었으니 참 역설적입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헤로디아와 결혼하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헤롯 아그립바와 엮일 일이 별로 없어서 괜찮았을 텐데, 권력욕 때문에 하스몬 혈통의 딸인 헤로디아와 불법적으로 결혼했다가 헤로디아의 형제인 아그립바 1세의 모함으로 로마 황제에 의해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할아버지 헤롯 대왕에 이어서 로마 황제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받았지만, 그의 죽음은 비참했습니다. 어떻게 죽었습니까?
“21 지정된 날에, 헤롯이 용포를 걸쳐 입고, 왕좌에 좌정하여 그들에게 연설하였다. 22 그 때에 군중이 ‘신의 소리다.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 하고 외쳤다. 23 그러자 즉시로 주님의 천사가 헤롯을 내리쳤다.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벌레에게 먹혀서 죽고 말았다.” (행 12:21-23, 새번역)
여기 보면 이 ‘헤롯’은 바로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헤롯 대왕이 둘째 부인인 하스몬 왕가 출신 마리암네 1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중 아리스도불로가 있습니다. 그의 아들딸 중 하나가 이 헤롯(아그립바 1세)이고 그의 누이가 헤로디아입니다.
그런데 아그립바 1세는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 문헌을 연구하는 어떤 학자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사인이 그의 위에 구멍이 뚫린 천공으로 인한 위궤양이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구멍이 뚦린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바로 헬리코박터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도행전의 기록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헬리코박터균은 인류가 발견한 지 몇백 년 안 됩니다. 그렇게 발견한 지 몇백 년 안 되는 그 세균을 2천 년 전에 ‘벌레’라고 표현했기 때문에 놀랍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의사였기에, 아그립바 1세의 죽음이 위병임을 파악하고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림 2: 헤롯 아그립바 1세>
이 가계도를 보면, 헤롯 대왕이 둘째 부인을 처형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알렉산더와 아리스도불로도 모두 처형했습니다. 모함으로 인하여 헤롯 대왕이 자기 아들들인데도 다 죽여버렸습니다.
그중 아리스도불로의 자녀로 칼키스의 헤롯이 있는데 그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사도행전에서 벌레 먹혀 죽은 헤롯이고, 아리스도불로가 그 옆에 있으며, 바로 옆에 헤로디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그립바 1세와 아리스도불로와 헤로디아는 서로 형제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와 <유대 전쟁사>를 보면 헤롯 아그립바 1세에 대한 여러 기록이 나옵니다.
먼저, 아그립바는 천성적으로 남에게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성격에다가 사치스럽기까지 했는데, 자기 어머니 생전에는 사치스럽다고 야단맞을까 봐 조심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자, 아그립바는 일상생활 중에 사치스러운 낭비를 일삼았을 뿐 아니라, 남에게 지나치게 선물을 많이 주며 살았습니다. 마음이 좋아서 선물을 많이 한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선심을 사기 위해서 뇌물처럼 준 겁니다.
그 결과 그는 얼마 못 가서 가난하게 되었고, 빚을 많이 지게 되어 빚쟁이들의 독촉을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에 아그립바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자살하기로 결심했는데, 그의 누이 헤로디아와 남편인 헤롯 안디바는 아그립바의 자살을 막기 위해 티베리우스(디베랴) 시에 살 곳을 마련해주고 생활비에 쓸 수 있도록 월급을 받는 행정 장관으로 임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헤롯 안디바와 아그립바의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파티가 열렸을 때, 헤롯 안디바는 아그립바가 자기 덕분에 입에 풀칠하는 가난뱅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해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저놈은 별것도 아닌 거렁뱅이야.’라며 조롱한 겁니다. 아그립바는 이런 모욕을 참을 수 없어서 로마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으며 이때는 시리아 총독으로 와 있던 플라쿠스에게로 갔습니다.
그 후 아그립바는 로마로 가는데, 원래도 친했던 가이우스와 더 친해지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었습니다. 아그립바가 만찬에 참석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기를, 지금의 티베리우스 황제가 빨리 죽고 가이우스가 세상의 지배자가 되는 날이 오기를 빈다고 한 것입니다.
그때 시중들던 자 중 한 사람이 이 사실을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알렸고, 그는 크게 분노하며 아그립바를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6개월 후 정말로 티베리우스 황제가 죽고 가이우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아그립바도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대 하스몬 혈통이었던 헤롯 아그립바는 로마의 3대 황제 가이우스 칼리굴라(Gaius Caligula)와의 친분 덕분에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되어 유대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헤롯들 중에서 할아버지 헤롯 대왕과 이 헤롯 아그립바 1세만이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2. 헤롯 아그립바 1세와 신약 성경
헤롯 아그립바 1세와 그의 아들인 2세는 둘 다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1세는 조금 전 본 것처럼 벌레 멱혀 죽었는데 ‘헤롯’이라고 표기하고 2세는 ‘아그립바’로 표기하기 때문에 잘 구분해야 합니다. 특히 이들은 사도들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기 때문에 신약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잘 살펴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모친의 이름은 베레니스인데, 그 딸의 이름도 베레니스이며 그녀가 바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버니게’입니다. 그 버니게와 드루실라가 나오는데 아그립바 2세와 남매 관계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 2세인데 사도행전에는 아그립바라고 나오고, 그의 누이들이 버니게와 드루실라였습니다. 드루실라는 총독 벨릭스와 결혼한 여자입니다.
아그립바(2세)와 버니게(베르니스)가 사도 바울의 심문 때 오는데, 바울이 “아그립바 왕이여, 당신은 유대인의 풍습을 잘 아십니다. 선지자를 믿으십니까? 믿으시는 줄 압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니까 자기를 설득하려 한다고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아그립바는 버니게와 같이 왔는데, 자기 누이였지만 둘이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집안은 어떤 집안입니까? 드루실라도 어린 나이에 원래 다른 나이 많은 왕에게 시집갔는데, 벨릭스가 보고 서로 눈이 맞아서 그가 강제로 빼앗아 결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헤롯 집안은 탐욕과 음란과 권력욕으로 가득한 집안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모친 이름도 베르니스였는데, 그녀는 하스몬 혈통답게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모친과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하스몬 혈통의 자녀들은 유대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로마에서 유학하며 로마의 권력자들과 인맥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버지인 아리스도불로와 그의 형제 알렉산더는 물론이고, 아그립바 자신도 어릴 때 로마에서 유학했습니다.
아그립바 1세의 로마 사회에서의 정식 명칭은 ‘마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립바(Marcus Julius Agrippa)’였는데, 이것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자기가 로마에서 공부했다는 것과, 로마의 권력자들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지은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이전에 외국에서 활동하며 인맥을 쌓기 위해 자기 이름을 외국식으로 John, David, Peter 등으로 바꾸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유대 고대사>를 통해 요세푸스는 아그립바 1세가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가까운 사이였고, 특히 주후 17년 로마 집정관을 지낸 플라쿠스와 절친한 관계였다고 밝힙니다. 조금 전에 언급한 것처럼, 플라쿠스가 집정관에서 물러난 다음 시리아 총독으로 왔을 때, 아그립바 1세는 어려운 중에 그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또 요세푸스는 아그립바 1세와 플라쿠스의 관계를 아그립바의 동생 아리스도불로가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사실도 알려줍니다(<유대 고대사>, 18.6.3.). 그러니까 친형제였던 헤롯 아그립바 1세와 아리스도불로는 서로 인생의 가치관이 상당히 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로마 황실로부터 권력을 얻은 아그립바 1세는 주후 37년 헤롯 대왕의 다섯 번째 부인의 아들인 분봉왕 헤롯 빌립의 영토를 받았습니다. 주후 39년에는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를 유대에서 추방하는 데 역할을 담당했고, 그의 영토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주후 41년부터 44년까지 유대인의 왕으로서 전 유대를 통치했습니다. 사실 3년밖에 다스리지 못한 겁니다. 그러나 주후 44년 어이없게도 벌레에 먹혀 죽고 맙니다(행 12:23).
그렇다면 아그립바 1세의 죽음 이후 왕위 계승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인 그의 형제 아리스도불로는 권력을 차지했을까요?
3. 놀라운 인물 아리스도불로
<그림 3: 헤롯 가문과 유대 총독들>
주후 44년에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자, 그가 왕으로 통치하던 3년 동안(주후 41~44년) 중단되었던 총독 파견이 다시 시작됩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그가 벌레에 먹혀 죽은 것이 주후 44년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형제인 칼키스의 헤롯은 이미 주후 43년에 죽었고 원래 유력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주후 44년에 죽었을 때, 로마는 유대 속주를 관할해야 했기 때문에 파두스라는 인물을 유대 총독으로 파견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 2세가 분봉왕으로 임명된 시점은 주후 44년이 아니라 48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아버지가 주후 44년에 죽고, 그 아들 아그립바(2세)는 48년에 전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분봉왕이 되었습니다. 영주처럼 일부를 다스리는 분봉왕이 된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즉시 된 게 아니라 4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는 총독 파두스가 다스리고, 다른 땅을 아그립바 2세가 다스렸기에 사도 바울은 그를 “아그립바 왕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왜 로마는 4년 동안 기다렸다가 아그립바 2세를 분봉왕으로 임명했던 걸까요? 주후 48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바로 아리스도불로가 그 해에 죽었습니다. 이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가계도와 연도를 봤을 때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주후 44년에 죽은 후 로마는 아리스도불로가 로마에서 유대의 통치자로 가기를 기다렸습니다. 혈통이나 서열 면에서 왕위 계승에 가장 가까웠던 인물은 아리스도불로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스몬 혈통이었고, 서열세서 아그립바 1세 바로 다음이었습니다. 게다가 로마 유학파였고, 로마의 인사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리스도불로가 유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로마에 남았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와 필로에 따르면, 평소에 권력을 탐해서 로마의 유력 인사나 시리아 총독 플라쿠스와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로마의 인맥을 의지하고 사치스럽게 지냈던 아그립바 1세와는 달리, 아리스도불로는 그와 크게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아그립바가 형으로 보이는데 동생인 그가 ‘형, 그렇게 살면 안 돼!’ 하고 조언했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로마서를 기록하던 사도 바울은 그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롬 16:10)
대부분의 신약 학자들은 아벨레라는 사람을 로마에서 활동하던 유대 고위층의 한 인물로 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아리스도불로를 아벨레와 나란히 놓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란히 두 사람을 언급한 것으로 볼 때, 여기 나오는 아리스로불로가 바로 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형제인 하스몬 혈통의 왕자 아리스도불로라고 보는 데에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겁니다.
바울은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가족들을 언급합니다. 아리스도불로와 그 가족들의 신앙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때 고린도에서 이 로마서를 쓸 당시 로마교회의 성도로 지내면서 바울이 쓴 편지에 아리스도불로의 가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들이 로마에 머물게 된 배경은, 하스몬 가문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원래 유대의 권력 승계를 위해 로마에서 유학했고, 또 로마의 유력 인사들과 인맥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18.6.3.)에 의하면, 아리스도불로는 자기 형 아그립바 1세가 로마의 유력자들과 어울리며 권력을 추구하는 모습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는 관직이나 권력에서 멀리 떨어져 ‘숨어서 지내며 평범하게’ 살다 죽은 인물로 그려집니다.
주후 44년 형제인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었을 때, 아리스도불로는 누구보다 유대 권력 승계에서 가장 높은 서열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후 48년 그가 죽고 나서야 분봉왕의 임기가 시작된 점을 생각해 보면,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포기했던 것이 확실합니다. 아니, 권력의 자리를 거부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아리스토불로는 평생 부당한 권력에 저항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가 왕이라는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 것을 거부했고, 로마에 남아 평범하게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다가 죽은 것입니다.
그를 기다리던 유대 땅과 유대 사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한 곳이었고, 권력자들이 앞다투어 서로 자기가 유대인의 왕이 되어 군림하겠다고 하며 ‘진정한’ 유대인의 왕을 불의한 재판으로 죽인 곳이었습니다. 말로 그렇게 표현만 안 했다 뿐이지, 바리새인들도, 사두개인들도, 민족주의자들도, 헤롯당도, 또 로마 권력자들도 전부 자기가 유대인의 왕으로 다스리겠다고 나선 곳이 바로 그 땅이었습니다.
혈통으로 보나, 로마에 유학한 배경으로 보나, 로마 인사들과의 관계로 보나,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아리스도불로였지만, 그는 그렇게 피 묻고 더러운 권력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의 사역 말기인 주후 57~58년경 기록했다고 보는 편지입니다. 본문 10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라고 하는데, 이 말은 ‘시험을 받았으나 잘 통과하여 인정받았다’라는 뜻입니다. 아리스도불로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아벨레를 설명한 것과 같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과 로마교회가 기억하는 아벨레와 아리스토불루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험을 받았으나 인정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한번 질문해 봅니다. 왜 하스몬 왕가 혈통의 왕자인 아리스도불로는 유대로 돌아가지 않은 것입니까? 그는 로마 유학 중 언제인지는 몰라도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왕으로, 구주로,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자기 형도, 할아버지도, 친척 아저씨들도 전부 권력 때문에 이상한 결혼도 하고, 빼앗아서 결혼하기도 하고, 그래서 촌수가 이상하게 꼬이기도 한 상황 속에서, 그는 그런 것들을 거부하고 멀리하며 오직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권력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그 탐욕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로마교회 성도로 남아서 살아가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아리스도불로가 죽은 것이 주후 48년이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이 대략 주후 58년경입니다. 그러니까 아리스도불로가 죽고 약 10년 정도 지난 시점에 로마서를 쓴 겁니다. 그때 바울은 이렇게 아리스도불로의 권속, 즉 그의 식구들에게 문안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권력자의 가족이 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로마교회의 성도로서 아리스도불로가 죽은 후에도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10여 년간 살았던 것입니다. 이 아리스도불로의 가족들이 내린 믿음의 결단이 마음에 크게 와닿습니다.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시 84:10, 새번역)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고백합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천 날보다 왕궁처럼 화려한 곳에서 하루만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 아니겠습니까? 그곳이 악인의 장막이라도 그렇게 좋은 데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주님의 집 뜰은 초라하고 뻔하고 지겨우니, 화려하고 권력이 있는 곳이 더 좋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아리스도불로의 가족들은 바로 이 시편 말씀을 그냥 좋은 말씀이라고 하며 마음에 두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말씀을 인생의 가치로 여겼고 또 그대로 실천했던 사람들입니다. 권력의 자리가 바로 눈앞에 있고 손에 쥘 수 있는데도 거부하고 주님의 집을 선택한 아리스도불로였고 또 그의 가족들이었던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우리도 지금 내가 추구하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주여, 제가 유대인의 왕이 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도구로 삼아 이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는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혹시 우리 기도의 내용이 ‘이것 잘되게 해주시고, 저것 잘되게 해주시고, 내가 잘되게 해주시고, 자녀가 잘되게 해주시고...’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뭔가 자기가 잘되기를 원하는 것이 전부는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10여 년간 바울과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기억된 아리스도불로와 그의 가족들이 정말 귀하다 못해 존경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남은 날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더욱더 매일의 삶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잘했다고 칭찬받는 주님의 신실한 종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