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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5일 수요예배
✦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 16 ✦
헤롯 가문 족보를 이해하기
(마태복음 14장 3~12절)
1. 로마와 유대의 관계
유대 사회는 종교와 정치 두 축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먼저, 종교적으로는 유대 최고의 사법 기구인 산헤드린 공회가 있었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헤롯 가문과 파견된 총독이 있었습니다. 이 두 축에 의해 유대 사회는 유지되었습니다.
## <그림 1: 주요 사건 연대>
주전 63년에 로마의 제1차 삼두 정치의 한 명인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유대 사회는 로마의 속주로 전락합니다. 주전 55년에 로마의 시리아 총독 가비니우스는 시리아의 한 부분이었던 유대 속주의 자치를 위해서 산헤드린 공회를 설립합니다.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해서 다수의 사두개인과 일부 바리새인으로 구성된 70인 의회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 사회의 최고 사법 기관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유대 사회의 종교와 사회의 구심점이었던 반면, 주전 47년부터 정치적인 권력을 장악했던 가문이 바로 해롯 가문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대제사장을 임명하고 폐할 수 있었던 해롯 가문은 유대 사회의 실세 중의 실세가 되었습니다.
2. 헤롯 가문 족보
## <그림 2: 헤롯 가문의 가계도>
이것은 헤롯 가문의 가계도인데, 이것을 잘 이해하면 신약 성경이 더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1) 안티파테르 (Antipater the Idumaean)
안티파테르는 헤롯 가문의 시초인데, 혈통적으로 이두매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헤롯 가문은 모두 이두매 혈통인데, 헬라어 ‘이두매’는 히브리어로 ‘에돔’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예인 에돔 족속이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야곱의 후예인 유대인들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이두매 사람 안티파테르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탁월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주전 59년 1차 삼두 정치를 이루고 있을 때, 안티파테르는 폼페이우스에게 붙어서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주전 63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전 49년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너 폼페이우스와 내전을 벌였고, 주전 48년 내전 당시 안티파테르는 재빠른 태세 전환으로 더 강력하게 보이는 카이사르를 도왔으며, 폼페이우스는 암살당했습니다. 그래서 주전 47년에 카이사르는 유대의 통치권을 안티파테르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안티파테르는 죽기 전 큰 아들 파사엘에게 예루살렘을 맡겼고, 아직 젊었던 둘째 아들 헤롯에게도 같은 지위를 주어 갈릴리로 파견했습니다. 그 후 헤롯은 형을 물리치고 유대인의 왕이 됩니다.
2) 헤롯 대왕 (Herod the Great)
다른 헤롯들과 구분하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영아들을 학살한 인물을 ‘헤롯 대왕’ 또는 ‘대 헤롯’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알렉산더 대왕’처럼 존경의 표현이 아니라 다른 헤롯들과 구별하기 위한 용어입니다. 그의 아들들도 성경에서 ‘헤롯’으로 표기되는데, 왕이 아니라 분봉왕이었습니다. 분봉왕은 왕이 아니라 영주에 해당하는 지위였으니까 그들 모두 자기가 유대인의 왕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으니 얼마나 사회적인 파장이 컸겠습니까?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 동방의 천문학자들은 별을 보며 유대인의 왕을 쫓아서 유대 땅으로 왔습니다.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마 2:1-3)
이 헤롯 왕이 바로 헤롯 대왕이며, 로마 황제로부터 승인받은 실제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서 ‘다른’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그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때 그는 죽기 얼마 전이었고 아직 그의 아들 아켈라오에게 왕위를 승계하지도 않았는데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고 하니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그즈음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영아들을 학살합니다. 두 살 밑으로 남자아이들을 다 죽인 것입니다.
로마의 1차 삼두 정치 때 안티파테르가 줄을 잘 서서 실세의 자리에 올랐던 반면, 그의 아들인 헤롯 대왕은 2차 삼두 정치 때 불리한 운명을 잘 극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줄리우스 카이사르가 주전 44년 3월 15일에 암살되자 주전 43년에 제2차 삼두 정치(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결성되었습니다.
1차 때 크라수스와 2차 때 레피두스는 약했고, 각각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중요합니다. 특히 옥타비아누스는 성경에 나오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헤롯은 안토니우스 편에 가담했는데, 주전 31년 9월 2일 안토니우스와 그 유명한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연합 군대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안토니우스는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장군이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아주 젋은 신예였는데 더욱 강력했던 안토니우스가 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안토니우스에게 줄을 섰던 사람들은 패배의 막중한 책임을 져야 했는데, 그때 헤롯이 엄청난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해서 오히려 옥타비아누스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받습니다. 이 사람이 전쟁 후에 옥타비아누스를 찾아가 담판을 짓습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안토니우스를 위해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전세가 불리해졌을 때 많은 사람이 안토니우스를 배반하고 떠났지만 저는 끝까지 함께 싸웠습니다. 제가 할 말은 없지만, 제가 누구 편에 섰는지를 보지 마시고 오직 한 사람만 섬겼다는 충성심을 봐주십시오.”
이 말에 옥타비아누스가 감동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변절하지 않는 사람이다. 전세가 나빠졌는데도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충성했다. 나에게도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충성할 사람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합니다. 이 옥타비아누스가 바로 로마의 첫 번째 황에 아우구스투스입니다. 성경에 ‘가이사 아구스도’라고 나오는 사람입니다.
헤롯에게는 아내가 아홉 명이었다는 말도 있고 열 명이었다는 말도 있고 더 되었다는 말도 있는데, 이 헤롯 가계도에는 그중 주목해야 할 다섯 명의 부인이 있습니다. 여기서 부인들의 이름보다는 ‘몇 번째’ 부인인지 순서를 알면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첫째 부인은 예루살렘의 도리스라는 여인이었는데 별로 볼 것은 없고, 두 번째 부인이 중요합니다. 헤롯 대왕은 혈통이 큰 약점이었습니다. 이두매, 즉 에돔 족속으로서 유대인들을 통치해야 했으니 유대인들이 얼마나 싫어했겠습니까?
그래서 둘째 부인으로 하스몬 왕가의 혈통인 마리암네 1세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왕위 계승에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하스몬 혈통의 두 번째 부인은 다른 부인들로부터 견제를 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도적으로 견제한 사람이 네 번째 부인(말타스/말다케)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둘째 부인을 심하게 견제합니다.
넷째 부인의 모함으로 헤롯은 두 번째 부인을 주전 29년에 처형해 버립니다. 모함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부인이 낳은 아들들인 알렉산더와 아리스도불로 역시 주전 7년에 처형해 버립니다. 이들은 하스몬 왕가의 후손들이기에, 하스몬과 로마가 가까워서 로마에 유학을 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로마에서 이상한 짓을 했다고 모함해서 아버지인 헤롯 대왕이 아들들을 죽인 것입니다.
이때 처형된 둘째 아들 아리스도불로가 중요한데, 그가 바로 사도행전에서 벌레 먹어 죽은 헤롯(아그립바 1세)의 아버지입니다. 그의 형제는 칼키스의 헤롯, 아리스도불로, 그리고 헤로디아였습니다. 헤로디아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헤롯(아그립바 1세)은 남매였습니다.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의하면, 헤롯 대왕은 곳곳에 신전을 지은 후에 황제를 위한 것임을 선언했고, 많은 도시에 황제를 위한 기념물도 세웠습니다. 그러나 유대 땅에 그리스식 건물들이 들어서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한 행위였습니다. 기념비에 새겨진 형상들은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짐승같이 잔인한 인간이었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합니다. 그는 의(義)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누구보다 운이 좋은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일개 평민이자 이두매 출신으로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지위까지 올라갔을 뿐 아니라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위험을 당했어도 다 극복하고 오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살긴 했지만 말년이 비참했습니다. 정신 분열이 와서 부인을 죽였는데, 나중에 두 번째 부인이 모함에 의해 죽은 것을 알고 굉장히 슬퍼했습니다. 가장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정과 자식들을 놓고 보면 그는 아주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헤롯 대왕이 죽은 이후에 아들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3) 헤롯 아켈라오
헤롯 대왕에게는 부인이 여럿이었기에 아들들 간에 상당히 갈등이 많았고, 권력을 위해 서로 암투를 벌였습니다. 헤롯을 이을 유력한 인물은 네 번째 부인의 아들이었던 헤롯 아켈라오였습니다. 네 번째 부인(말타스)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헤롯 안디바와 헤롯 아켈라오입니다.
아켈라오는 로마에 가서 유대인의 왕으로 승인받으려 했는데, 그의 친형제인 헤롯 안디바가 로마로 뒤따라가서 아켈라오는 절대로 왕이 되면 안 된다고 반대했습니다. 또 아켈라오와 안디바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유대 엘리트들도 사신으로 로마에 도착해서 아켈라오가 성전에서 동족 3,000명을 학살했다며 황제에게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왕의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유대를 왕정이나 그와 유사한 정치 체제 속에 묶지 말고 시리아에 병합시켜 로마가 파견한 시리아 총독의 관할을 받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황제는 유대 사신들을 돌려보내고, 그로부터 며칠 후 아켈라오에게 유대 전 왕국이 아니라 헤롯이 다스렸던 영토의 반 정도를 다스리는 분봉왕으로 임명하면서, 안디바에게는 북쪽 갈릴리와 동쪽 베레아 분봉왕으로, 다섯 번째 부인의 아들 헤롯 빌립은 북서쪽 땅을 주며 분봉왕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아켈라오는 유대를 다스리기에 그가 선정을 베풀면 나중에 유대인의 왕으로 격상시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아켈라오 통치 제10년에 아켈라오의 형제들 및 유대 장로들은 백성을 학대하는 그의 야만적 독재 행위를 견디다 못해 황제에게 그를 고소했고, 결국 아켈라오는 주후 6년에 폐위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더 이상 분봉왕이 세워지지 않고 로마에서 총독이 파견됩니다.
4) 헤롯 안디바
헤롯 안디바는 아켈라오와 친형제인 동시에 권력을 놓고 다투던 사이였습니다. 성경에 헤롯 아켈라오는 ‘아켈라오’라고 나오고 헤롯 안디바는 ‘헤롯’이라고 나옵니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가 참수한 인물이고, 예수님이 재판받으실 때 만났던 그 헤롯입니다.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에서 헤롯 안디바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헤롯 안디바는 원래 아레타스 왕의 딸과 결혼하여 오랫동안 무리 없이 살았는데, 그가 로마를 방문하는 길에 이복형제의 아내 헤로디아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헤로디아는 하스몬 왕가의 혈통인 둘째 부인 마리암네 1세의 아들 아리스도불로의 딸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헤롯(아그립바 1세)의 누이였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로마를 가는 길에 헤로디아를 만나 결혼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서로 마음이 통해서 헤로디아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며 한 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그것은 안디바가 아레타스의 딸과 이혼하는 조건이었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그렇게 약속한 후에 로마에서의 일을 마치고 귀국했지만, 이 결혼 문제로 인해 안디바와 아레타스 왕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레타스는 사도행전에서 ‘아레다’라고 나옵니다. 아레타스가 안디바를 공격해서 안다비가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안디바는 이 사실을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알렸고, 황제는 아레타스의 행동에 크게 분노하면서 시리아 총독에게 아레타스를 공격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헤롯 안디바가 아레타스 왕에게 패배한 것이 그가 의로운 세례 요한을 살해한 죄에 대해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헤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보면서 그가 혹시 반역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그를 처형해서 후환을 없애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5절)
티베리우스 황제의 총애를 받은 헤롯 안디바는 도시를 건설하고 티베리우스(Tiberias, 티베리우스 황제의 도시) 시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곳이 바로 디베랴입니다. 지금도 티베리우스가 있습니다. 그러나 디베랴 시는 원래 묘지를 파내고 건설한 도시였기 때문에, 그런 곳을 주거지로 이용하는 것은 유대의 율법을 범하는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했을 정도로 그는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황제에게 아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는 동생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로마에 갔다가 유대인의 왕의 지위를 얻어서 돌아오자, 자기 남편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한 것을 보고 시기심이 생겼습니다. 사실 이전에 아그립바는 선물하기를 좋아하고 사치하던 사람이라 빚을 많이 졌는데, 도망칠 때 빚도 제대로 갚지 못할 줄 알고 매형 안디바가 거두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쓸모없는 놈이라고 조롱했는데, 그가 로마에 가서 높은 지위와 큰 재산을 가지고 게다가 왕이 되어 로마에서 금의환향하자 배가 아팠습니다.
이에 헤로디아는 헤롯 안디바에게 로마로 가서 아그립바와 같은 지위를 얻어 오라고 충동질했지만, 안디바는 편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데다 로마에 가서 어떤 위험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헤로디아의 요청을 듣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디아는 그럴수록 그를 더 세게 몰아붙였고, 왕이 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계속 쪼아댔습니다.
결국 그들은 많은 준비를 갖추고 로마를 향했는데, 그것을 본 아그립바는 그들이 무슨 의도로 로마로 가는지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로마로 가서 안디바를 황제에게 모함했습니다. 당시 가이우스(칼리굴라) 황제는 원래 아그립바 1세와 로마에서 같이 자란 사람인데, 헤롯 안디바에게서 그의 분봉국과 헤롯의 재산을 모두 빼앗아 아그립바에게 주고,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를 고올 지방으로 추방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서도 역사에서도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바로 헤롯 안디바와 결혼한 헤로디아가 하스몬 혈통을 가진 여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가계도를 보면 헤로디아는 원래 헤롯 대왕의 셋째 부인의 아들인 헤롯 빌립과 결혼합니다. 다섯째 부인의 아들과 이름이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맥락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헤롯 안디바는 분봉왕으로서 아레타스 왕국의 공주 출신인 아내를 두고 있었지만, 유대인의 왕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인 아내를 두고 유대인의 왕이 될 수는 없었고, 자기도 이두매 혈통이라는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는 하스몬 혈통의 여인이었지만, 그의 남편 헤롯 빌립(셋째 부인의 아들)은 분봉왕조차 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권력에 아무 관심도 없고 권력에서 완전히 밀려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야심가인 헤로디아에게는 성에 안 차는 겁니다.
그래서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는 상대방이 자기의 아쉬운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카드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카드를 얻기 위해서 안디바는 부인과 이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는 불법적인 결혼을 감행했고,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가계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헤롯 대왕의 다섯 번째 부인의 아들이었던 헤롯 빌립이 누구입니까? 헤로디아는 헤롯 대왕의 셋째 부인의 아들 헤롯 빌립과 결혼해서 그와의 사이에 낳은 딸이 살로메입니다. 성경에는 이름이 안 나오지만 오늘 본문에서 춤춘 여자아이가 바로 이 살로메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헤로디아는 자기 위 대인 헤롯 빌립(셋째 부인의 아들)과 결혼했는데, 다섯째 부인의 아들 헤롯 빌립이 보니까 자기와 같은 대인 헤롯 안디바가 하스몬 혈통인 헤로디아와 결혼합니다. 그러니 자기도 뭔가 해야겠다고 하며 보니까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있습니다. 역시 하스몬 혈통입니다. 그러니까 헤롯 빌립은 그 살로매와 결혼합니다.
이들은 도대체 서로 촌수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복잡한 콩가루 집안입니다. 사실은 권력 때문에 미쳐 돌아가는 겁니다.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가 결혼한 것을 보통 음란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맞지만 사실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오히려 권력 때문에 미쳐 돌아가는 광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광기를 지적한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3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3~4절)
단순히 성적으로 음란하다고 지적한 게 아니라 ‘권력 때문에 당신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하고 세례 요한은 담대해 외쳤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는, 세례 요한과 같이 세상의 광기와 탐욕에 대해 분명한 하나님의 기준을 제시해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교회가 광기와 탐욕에 빠져서 거짓, 세습, 횡령, 부정, 음란으로 가득하다면, 교회는 그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모습이 보이기에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데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미쳐 돌아가는 권력욕과 광기를 향해 담대히 외쳤습니다.
세례 요한은 오늘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도전합니다. 그는 너무나 황폐하고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살아서 되겠느냐고 우리를 꾸짖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 있어 당신들도 나처럼 생명을 걸지 않겠느냐?’라고 도전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