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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1일 수요예배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 13

광야와 에세네파, 그리고 예수

(마태복음 1613~18)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에세네파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에세네파와 신약 성경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분명히 유대 종파 중에서 에세네파가 가장 모범적으로 보이는데, 왜 성경에는 그들이 언급되지 않습니까? 여러 학자들이 이것에 대해 각자 답을 제시했습니다.

 

먼저, 어떤 학자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예수님과 충돌을 빚었지만 에세네파는 모범적이었으므로, 굳이 그들을 신약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고 해석합니다. 또 성경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구분해서 기록한 것을 주목하면서, 독자적인 무리로 등장하는 서기관이 에세네파였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또한 에세네파가 광야에 은둔한 종파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무리와 접촉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정확한 답이 뭔지를 알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에세네파가 신약 성경과 밀접하게 관련된 종파라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에세네파의 교리는 세례 요한을 떠올리게 합니다. 묵시와 경고, 심판의 메시지, 그리고 그가 베푼 죄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는 에세네파와 상당히 비슷합니다. 더구나 세례 요한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종교를 비판하며 광야에 있었는데, 당시 유대인들이라면 이런 세례 요한을 에세네파로 여겼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에세네파는 선지자와 율법에 정통했고, 지난번 살펴보았듯 확실한 종말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기에 빨리 죄에서 돌아서라고 선포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3:8-10)

 

복음서들의 기록을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과 비교해 보아도 거의 비슷한 내용을 확인하게 됩니다.

 

요한은 의로운 인물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서로 정의를 행하고 살 것과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 것을 강조하면서, 그렇게 하고 와서 세례를 받으라고 주장하였다. 의를 행하지도 않은 채 그저 죄만을 씻기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미 의로 인해 영혼은 완전히 정결하게 되었음을 믿고 이제는 몸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물로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태도였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8.5.2.)

 

유대인들에게 광야는 정통성이 보존되고 유지된 공간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복음서는 세례 요한을 광야와 연결시켰고(1:23), 예수님이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기록도 넣었습니다(4:1).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1:23)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4:1)

 

또한 사도 바울이 회심한 후에 나바테아 왕국에 갔던 것을 굳이 광야로 대표되는 아라비아라고 한 이유 역시 자신의 영적 정통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17)

 

이제 신약 시대의 광야와 관련하여 다른 측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카비 전쟁이 벌어졌을 때, 많은 하시딤이 가담했습니다. 그 후 광야로 나갔던 무리는 종교의 정통성을 갈망했습니다. 주전 63년에 로마가 유대를 점령한 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 광야로 나간 사람들을 모두 에세네파로 볼 수 있겠습니까?

 

이제 유대 땅은 온통 강도들로 들끓게 되었다. 강도떼들은 저마다 두목을 왕으로 세우고 백성들에게 온갖 못된 짓을 다 하였다. 이 강도 떼들은 어느 정도 로마군에게도 타격을 주었으나 주로 동족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들의 강도 짓은 오랜 기간 동안 백성들을 괴롭혔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7.10.8.)

 

광야에 머물던 에세네파는 경건한 종교 집단이었지만, 모든 광야의 무리가 다 에세네파였던 것은 아닙니다. 광야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이루는 것이 회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세푸스는 그런 자들을 강도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진짜 강도질도 했지만, 로마군을 공격하며 독립을 위해 싸우던 집단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좋게 말하면 검열에 걸리니까 그들을 강도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갈릴리 사람 유다, 시몬, 아트롱게스 등이 이끄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로마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그들이 한번은 여리고에서 식량과 무기를 운반하는 로마군 1개 수송 부대를 공격한 일이 있었다. 그들은 부대를 인솔하는 백인대장 아리우스(Arius)를 공격하는 한편, 정예 보병 40명을 쓰러뜨렸다. 이에 나머지 병사들은 놀란 나머지 동료들의 시체를 버려두고 도망을 치다가 왕의 군대를 이끌고 도와주러 온 그라투스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도 있었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7.10.7.)

 

그들 중 갈릴리 유다는 성경에도 등장합니다.

 

“36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5:36-37)

 

광야는 참된 회복을 갈망하던 에세네파와 민족의 독립을 열망하던 무리들이 공존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 광야가 언급될 때는 문맥을 잘 봐야 합니다. 회개와 세례나 시험과 관련되었다면 영적인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맥락 없이 단순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광야에서 따르는 장면이라면 정치적인 관점으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벌어진 오병이어 기적 때 사람들이 하려던 것과 예수님의 반응을 보십시오.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6:14-15)

 

왜 예수님은 자기를 왕으로 모시려는 무리를 떠나서 혼자 산으로 가셨습니까? 그들의 요구에 휩쓸리셨다면, 방금 언급했던 갈릴리 사람 유다나 시몬이나 아트롱게스 같은 경우처럼 로마군이 출동해서 진압했을 겁니다.

 

이렇듯 광야는 다른 의미를 추구하는 집단들이 공존하는 곳이었기에, 광야에 모인 사람들의 의도를 잘 읽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래야 예수님 주변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의 의도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바요나의 이중적 의미

 

에세네파는 신약 성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에 세례 요한은 에세네파로 보였을 겁니다. 실제로 에세네파에 의하여 양육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했겠습니까? 광야에 모였던 사람마다 각기 의도가 달랐듯이, 예수님은 사람마다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다 달랐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3)

 

마태복음은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마태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쓴 복음서인데, 오늘 본문의 문맥 속에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근현대사가 포함된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해 제자들은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을 말한다고 대답합니다.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4)

 

그 당시 세례 요한이라는 인물이 분명히 얼마 전까지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가리켜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진짜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했다는 게 아니라, 그 시대가 가진 상징성을 나타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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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빌립보 가이사랴 지도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곳은 헤롯 대왕의 아들 중 하나였던 분봉왕 헤롯 빌립이 통치하던 곳인데, 이스라엘의 최북단 경계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정서로는 압록강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 가이사랴또는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이름은 유대인들에게 대단한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이었습니다.

 

제가 만일 독도를 가리켜 다케시마라고 부른다면 여러분은 어떤 감정을 느끼시겠습니까? 우리 민족을 굉장히 생각하는 사람이 그것을 듣는다면 아마 저를 욕하거나, 아주 심한 민족주의자의 경우에는 저에게 테러를 가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과 비슷한 정서가 바로 이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이름에 들어 있습니다. 주전 200년에 셀레우코스가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그동안 유대 땅을 다스리던 프톨레미를 몰아내고 유대 사회를 차지하여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유대인들은 주전 63년에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분봉왕 헤롯 빌립은 이곳을 로마 황제 카이사르(시저)와 자기 이름 빌립을 합쳐서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도시 이름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이름은 상당히 정치적인 의미가 포함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했다면,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정치적인 독립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한 면도 있고, 에세네파와 세례 요한처럼 경건을 열망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다른 선지자 중 하나라고 한 사람들도 마찬가지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한 가지 질문을 하시고,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께 아주 유명한 신앙 고백을 말씀드립니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5~16)

 

이것은 그냥 보면 아주 위대한 신앙 고백이지만, 사실 시몬이 애초부터 예수님을 정말 믿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더 나은 현실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지금까지 온 것입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이 질문하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자기 민족을 구원하실 그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 자기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보다 앞서 나서서 재빨리 대답한 겁니다. 그가 기대한 대로, 자기 대답에 대해 예수님이 칭찬해 주십니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7~18)

 

여기서 예수님이 시몬의 신앙 고백을 칭찬해 주시는데, 그냥 시몬이라고 하셔도 되지만 굳이 바요나라는 단어를 붙이면서 칭찬하십니다. 왜냐하면 바요나라고 불리는 사람에게서는 절대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요나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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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 로마 지하 무덤 카타콤베(Catacombe)

 

로마에 가면 지하 무덤인 카타콤베들이 있는데,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몰래 숨어서 예배를 드렸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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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 물고기 모양

 

지금도 카타콤베에 가보면 벽에서 어렵지 않게 물고기 모양의 그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물고기 흔적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이 듭니까? ‘, 1세기 로마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생선을 아주 좋아했던 사람들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연구 결과들을 통해서 이 물고기라는 뜻의 익투스라는 헬라어 단어가 우리 식으로 하면 5행시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신앙 고백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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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 익투스

 

다시 말해, ‘익투스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단어들의 첫 알파벳 글자를 따서 표현한 것으로, 헬라어로 예수스 크리스토스 떼우 휘오스 소테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고백했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한 것과 똑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물고기라는 것은 그들만의 은어, 즉 비밀 단어였습니다. 왜 이런 은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겠습니까? 이런 고백을 하는 이런 믿음을 가졌던 것에 대해서는 박해와 희생이 왔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던 바요나라는 단어도 익투스라는 단어처럼 그런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유대 문화사 연구 결과를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바요나라는 단어를 두 단어가 합쳐진 단어로 읽으면 라고 하는 단어는 아들이라는 뜻이니까, ‘바요나요나의 아들이 됩니다. ‘바디매오디매오의 아들이고, ‘바나바나바(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인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바요나를 빠르게 한 음절로 사용하면 유대인들에게만 통용되는 은어였습니다. 압제자인 로마를 제거하고 유대 땅에서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무장 항전주의자들을 가리키는 그들만의 은어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은어를 썼던 이유는 저항하는 데에 당연히 박해와 희생이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요나라는 단어가 유대인들을 위해서 기록된 마태복음에만 발견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같은 말이라도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하시는데, 요한복음은 세계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쓰였기 때문에 유대인들만 알며 또한 민족을 위한 항전주의자를 뜻하는 바요나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 문헌에 이런 흔적들이 나오는데, 로마에 무력으로 대항하는 항전주의자들을 지칭하는 은어로 사용된 기록들이 있습니다. 단수형으로는 바요나이고 복수형으로는 바요님이라는 형태가 문헌에 등장하는데, 바로 그것이 로마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유대인들만의 은어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바요나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란 어떤 존재였습니까? 200년 전 마카비 전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은 초자연적으로 그들의 삶 속에 개입하셔서 이방인 세력(로마 제국)을 몰아내시고 자기들에게 독립을 주시는 분이라야 했습니다.

 

그런 배경을 생각하면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읽어보십시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위대한 고백을 했던 순간에 예수님이 바요나라는 명칭을 굳이 사용하신 것은 너의 뜻과 가치관과 이상과 신념으로는 절대로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없지만, 그것을 고백하게 하신 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 그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를 살아가던 바요나들에게서는 절대 이러한 고백이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바요나였던 시몬에게 찾아오셔서 그가 스스로는 절대 고백할 수 없었던 그 불가능한 신앙 고백을 하게 하셨습니다.

 

에세네파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지키기 위해 광야로 나가 그곳에 계속 거했지만, 광야는 그렇게 독립을 열망하는 항전주의자들, 바요나들의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주후 6년에 로마의 세금 정책에 반대해서 반란을 일으켰던 갈릴리 유다는 광야에서 활동했고, 다른 반란의 두목들도 광야에서 자기 무리를 이끌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로마군에 의해 진압당했는데, 유대인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5:37). 이에 대해 요세푸스도 비슷한 기록을 남겼습니다(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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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엄숙한 경고와 교훈을 전해줍니다. 당시 광야에는 여러 무리들이 공존했고, 그곳에 몰려든 유대인들도 각자 의도를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무리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중 어떤 무리는 참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추구했던 반면, 어떤 무리는 유대 전쟁을 일으켜 공동체를 파멸로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정말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기를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해 주님을 이용하기를 원하는 것인지, 확실하게 하며 신앙생활을 해야겠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선택할 길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긴 어둠 속에 죄와 절망의 탄식 소리만 있는 지금 이 땅에서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시며 부르고 계십니다. 그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주님이 찾으시는 종이 되어서 주만 섬기며, 소망을 잃어버린 이 땅 위에 주님의 영광을 비추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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