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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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lT30FSjZ5RQ?feature=share&t=2195

 

 

202328일 수요예배

누가 나의 왕인가 5

아합: 하나님 앞에서 머리 굴리지 말라

(열왕기상 2117~29)

 

[들어가는 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가 하나님을 몰라서 대적할까요, 아니면 알면서도 대적할까요? 하나님을 알아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버릴 때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대적은 막 싸우고 반항하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도 대적입니다.

 

또한 하나님 때문에 거룩하게 살고 싶다.’라는 마음이 사라질 때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아합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합이 하나님을 대적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대형 교회들이 많은데, 특히 몇 년 전부터 대형 교회로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이 심해져서 교회 성장학자들이 조사해 보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서라는 겁니다. 물론 아이들 교육 프로그램도 잘되어 있고 여러 영적인 프로그램이 잘되어 있어서 그러는 이유도 있지만, 그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냥 편하게 다니고 싶어서 그런 이유가 가장 큽니다.

 

대형 교회는 예배만 드려도, 아니 축도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사라져도 아무도 모릅니다. 굳이 점심을 먹고 가라고 붙잡는 사람도 없습니다. 같이 교제를 나누자고 귀찮게 구는 사람도 없습니다. 교회학교나 성가대 등에서 봉사하지 않아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잘 다니다가도 대형 교회로 옮겨서 편안하게 왔다 갔다하는 경우가 요즘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영적으로 훈련받고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배우며 함께 힘을 모아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다하기 위함인데, 영적 목적이 아니라 그렇게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기가 싫어서 대형 교회를 나간다면 그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태도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한국에서 어떤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교회 이름을 아주 기발하게 지었다고 합니다. 교회 이름을 집에서 가까운 교회로 지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어느 교회 다니세요?” 하고 물으면, 대형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으스대며 대답하는데, 작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냥 집에서 가까운 교회 다닙니다.”라고 부끄러워하며 대답하니까, 개척하면서 교회 이름을 아예 집에서 가까운 교회로 지었다고 합니다. 기발하기는 하지만, 굉장히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이집트는 전 국민의 90% 이상이 이슬람교도입니다. 오래전엔 크리스천이 많았지만, 지금은 소수만이 남은 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크리스천들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출세하기 어렵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안 되고, 정부 기관에는 더더욱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이집트의 크리스천들은 신앙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언젠가 이집트의 이슬람 정부가 크리스천 리더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겠다. 대신에 너희는 모카탐이라는 곳에 가서 살아라.” 이슬람 정부가 제안한 모카탐 지역은 이집트의 수도에서 버리는 모든 쓰레기가 모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며 살면 거기서는 예배드리게 허락해 준다고 한 것입니다.

 

그때 이집트 크리스천들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쓰레기를 손으로 분리수거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동네에는 곳곳에 십자가가 있는데, 예배 때마다 그들은 몸을 깨끗이 씻고 깨끗한 옷을 입고서 2만 명가량 수용할 수 있는 동굴 교회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습니까?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1.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 아합

 

아합은 북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손 꼽힐 정도로 부강한 나라를 만든, 능력 있는 왕입니다. 고대 근동의 초강대국 앗시리아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중에도 그는 국제 정세에 발 빠르게 대처하며 북이스라엘을 강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아합은 정치, 외교, 경제 분야에서 아주 유능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똑똑하고 유능한 아합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께는 매우 둔감했고, 돌이킬 수 없는 죄의 길로 나아가고 말았습니다.

 

아합의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그 유명한 이세벨과 결혼한 것입니다. 이세벨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인데, 아합은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서쪽으로 지중해를 끼고 있고 동쪽으로 사막을 접하고 있어서 북쪽 지역만 잘 방어하면 적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역사에 나오는 페니키아)이 바로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에 위치한 나라였고 북쪽의 강자였으므로, 이스라엘은 이들과 동맹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합은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한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한 것은 큰 실수가 아니라 오히려 아주 현명한 외교 정책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나라 간의 외교에서는 옳고 그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국익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문학가였던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오해>라는 희곡을 썼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느 시골에 홀어머니와 남매가 살았는데, 그들은 너무 가난했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을 참다못한 아들은 돈을 벌어 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떠났습니다. 시골에 남아 있는 모녀는 그 아들을 다시 찾아오겠다는 결심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딸은 작은 여관을 차렸는데, 시골에서 여관 운영으로 돈을 버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녀는 한 가지 꾀를 냈는데, 여관을 찾아온 손님 가운데 돈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죽인 다음 돈을 빼앗기로 한 것입니다. 그 후 그들은 여관에 묵는 사람 중 돈깨나 있어 보이는 사람에겐 수면제를 먹여 죽인 후 여관 뒤에 있는 강물에 던져 버리고 손님의 짐 꾸러미에서 돈이나 보석 같은 것을 챙기는 방법으로 돈을 모았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지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잘 차려입은 한 신사가 그 여관에 들어왔습니다. 어머니와 딸은 그 신사를 다음 범행 대상으로 결정하고, 그날 저녁 그에게 수면제를 먹여 죽이고는 강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범행을 저지른 뒤 그 손님의 방으로 가서 짐 꾸러미를 풀어 헤쳤는데, 돈을 꺼내려 지갑을 여는 순간 모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방금 자기들이 죽여 강물에 던져 버린 그 신사가 바로 20년 이상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자기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두 모녀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면서 아들을 던져 버린 그 강물에 투신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카뮈는 이 작품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죄는 아무리 행운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항상 불행할 뿐이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하며 부와 명예를 가지게 되더라도, 하나님을 대적한 죄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했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이룬 것이라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합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성공을 거두었지만,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하나님은 여자를 지으실 때 남자를 돕는 배필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자기를 돕는 배필이 아니라, 자기가 이용하기 좋은 배필로 이세벨을 선택한 것입니다. 결혼하는 근본적인 이유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도 결혼을 순수한 사랑으로만 하지 않고 상대방이 자기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를 따져서 결혼합니다. 그러니 결혼해서 막상 도움이 되지 않으면 싸우기 바쁩니다. 이기적인 동기로 만나서 그 때문에 갈등하고 싸우다가, 견디지 못하면 갈라서고 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배우자가 자기에게 좋은 배필이 되기를 원하기 전에 자기가 배우자에게 좋은 배필이 되기를 힘써야겠습니다.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도 내 자녀가 좋은 배필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 내 자녀가 자기 배우자에게 좋은 배필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결혼은 상대의 부족함을 서로 채워주며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합의 결혼은 출발부터가 잘못되었습니다.

 

 

2.   죄의 근원인 탐욕을 조심하라

 

열왕기상 21장 앞부분을 보면, 아합이 왕궁에서 보니 아주 탐나는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포도원의 주인인 나봇을 불렀습니다.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포도원이 나의 궁 가까이에 있으니, 나에게 넘기도록 하시오. 나는 그것을 정원으로 만들려고 하오. 내가 그것 대신에 더 좋은 포도원을 하나 주겠소. 그대가 원하면, 그 값을 돈으로 계산하여 줄 수도 있소.’” (2, 새번역)

 

여기서 아합은 왕이고 권력을 가졌지만 아주 신사적이고 합리적으로 흥정을 벌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도대체 한 나라의 왕인 아합에게 포도원이 왜 또 필요합니까? 분명히 자기가 더 좋은 포도원을 하나 주겠소.”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봇의 포도원보다 더 좋은 포도원을 갖고 있는데 왜 이 포도원이 또 필요합니까? 혹시 나봇의 포도원이 아합의 것보다 더 좋았더라도 왕으로서 왜 백성의 것을 탐합니까?

 

이것은 탐심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살면 이렇게 인정받고 훌륭하고 유능하고 똑똑하고 성공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다 좋은데, 그렇게 했어도 채워지지가 않는 겁니다. 왕이면 재산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도 계속 허전한 겁니다. ‘조금 더 가졌으면...’ 나봇보다 더 좋은 포도원을 갖고 있음에도 더 안 좋은 포도원을 갖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탐심입니다. 자기도 좋은 것이 있지만, 또 다른 좋은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소유하려고 하는 탐심입니다. 이때 아합이 간절히 원했음에도 나봇은 아합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합니다.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였다. ‘제가 조상의 유산을 임금님께 드리는 일은, 주님께서 금하시는 불경한 일입니다.’” (3, 새번역)

 

나봇이라는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집안의 기업으로 받은 땅을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대로 해야 한다고 하며 그렇게 말한 겁니다.

 

신명기 17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 만일 왕을 세우게 된다면, 왕은 이래야 한다는 지침을 알려줍니다. 첫째, 왕은 병마를 많이 두지 말아야 합니다(16). 둘째, 왕은 아내를 많이 두거나 은금을 많이 쌓아서는 안 됩니다(17). 셋째, 왕은 율법서를 제사장이 보는 앞에서 기록해야 합니다(18). 넷째, 왕은 말씀을 평생 옆에 두고 읽어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며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19).

 

이처럼 성경이 가르쳐주는 리더십은 군림하는 리더십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과 백성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리더십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탐욕으로 성경적 원리를 벗어나 악한 리더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았고, 그러니까 백성을 섬기지도 않았습니다. 엄청나게 많이 가졌으면서도 하나밖에 없는 사람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가지려고 자기 백성을 회유합니다.

 

이때 이세벨이 좋은 배필이라면 남편의 탐욕을 제어하려고 했겠지만, 이세벨은 오히려 무서운 계략을 꾸며 나봇을 돌로 쳐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습니다.

 

“7 그러자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현재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임금님이 아니십니까? 일어나셔서 음식을 드시고, 마음을 좋게 가지십시오.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임금님의 것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8 그런 다음에, 이세벨은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옥쇄로 인봉하고, 그 편지를 나봇이 살고 있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냈다. 9 그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게 하시오. 10 그리고 건달 두 사람을 그와 마주 앉게 하고, 나봇이 하나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고 증언하게 한 뒤에,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서 죽이시오.’” (7-10, 새번역).

 

정말 무섭고 악한 계획입니다. 이세벨의 편지를 받은 성읍 원로들과 귀족들은 그녀의 지시대로 하여 나봇을 돌로 쳐 죽입니다. 그리고 이세벨에게 그 사실을 알립니다. 그러자 어떻게 됩니까?

 

“15 이세벨은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아합에게 말하였다. ‘일어나십시오. 돈을 주어도 당신에게 넘기지 않겠다고 하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십시오. 나봇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죽었습니다.’ 16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일어나서, 이스르엘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내려갔다.” (15-16, 새번역)

 

정말 악하고 무서운 여인입니다. 불량배를 동원해서 있지도 않은 죄를 나봇에게 뒤집어씌워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고는 태연하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합은 곧바로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가는데, 이것은 그의 탐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줍니다. 성경은 이런 아합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한 자라고 평가합니다. 심지어 여로보암보다 더 악한 자라고 평가합니다.

 

“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26 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25-26)

 

성경은 이세벨이 아합을 충동했다고 합니다. 아합의 악에는 이세벨이 있습니다. 출발부터 잘못된 결혼이 온 나라에 악을 전염시키고 비극으로 치닫게 한 것입니다.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20)

 

우리 마음속에 탐욕이 일어나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탐욕은 하나님의 법대로 살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욕하고 비방하며 하나님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 같은 나쁜 짓을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특히 탐욕은 죄의 근원입니다. 아합처럼 자기가 가진 것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탐욕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탐욕의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것과 누리는 것으로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살고, 또한 그런 것이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가 탐욕스러운 인간이 되어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주신 제도가 바로 헌금입니다.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무슨 우리 적은 돈이 왜 필요해서 헌금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탐욕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기 위해서 그러시는 겁니다. 그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3:5, 새번역)

 

혹시 나는 돈에 대한 욕심이 없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돈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다른 어떤 것에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돈에는 관심이 없지만 다른 것에는 탐욕을 부릴 수 있습니다. 탐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고 우리 인생을 망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15)

 

 

3.   하나님의 사랑을 이용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징계하시는데, 이 징계는 우리를 심판해서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아합의 죄에 대해 징계를 결심하시고 엘리야를 통해 선포하십니다.

 

“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22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21-22)

 

엘리야는 아합이 죄에 빠지게 만든 이세벨에 대한 심판도 선포합니다.

 

“23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24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 (23-24)

 

죽어서 장사를 지내지도 못하고 개들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징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들은 아합이 참으로 놀라운 행동을 합니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27)

 

아합은 하나님의 징계의 선언을 듣고 풀이 죽어서 옷을 찢으며 회개했습니다. 그토록 탐욕스럽고 이기적이었으며,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향하여 내 대적자여”(20)라고 적대시하던 아합이 갑자기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29)

 

아합의 이 같은 모습을 보고 징계를 연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사랑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종종 나오는데, 그럼에도 하나님은 심판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어떻게 해서든 재앙을 면하게 해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애초에 하나님은 심판이 아니라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용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바로 다음 장을 보면 그의 진심이 드러납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연합하여 아람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리에서 아합은 선지자들이 자기가 원하는 말을 할 때까지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합은 거짓 예언자들에게서 전쟁에서 승리하리라는 말을 받아 내고 전쟁터에 나갔지만, 선지자 미가야는 아합이 전쟁에 나간 후 다시 왕궁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을 하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합은 마가야의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한 가지 꾀를 냈습니다. 자기가 일반 병사인 것처럼 변장하고 자기 옷을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입힌 것입니다. 얼마나 영악한 꾀입니까? 그런데 아람 왕은 32명의 장수에게 오직 이스라엘 왕을 죽이는 데에만 집중하라고 명령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그때 아합이 여호사밧에게는 왕복을 입혔으니 정말 영악합니다. 아람 군사들이 착각하고 여호사밧을 죽이면 아합으로서는 목숨도 구하고 신경 쓰이는 유다까지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던 것입니다.

 

실제 전쟁에 나가면 화살을 정조준해서 쏘지 못합니다. 총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확히 조준하는 것은 영화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얘기입니다. 실제 전장에서는 아무렇게나 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화살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합은 아람 군사가 아무렇게나 쏜 화살에 맞아 죽어 버립니다.

 

“34 그런데 군인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긴 것이 이스라엘 왕에게 명중하였다. 화살이 갑옷 가슴막이 이음새 사이를 뚫고 들어간 것이다. 왕은 자기의 병거를 모는 부하에게 말하였다. ‘병거를 돌려서, 이 싸움터에서 빠져나가자. 내가 부상을 입었다.’ 35 그러나 특히 그 날은 싸움이 격렬하였으므로, 왕은 병거 가운데 붙들려 서서, 시리아 군대를 막다가 저녁 때가 되어 죽었는데, 그의 병거 안에는 왕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었다.” (왕상 22:34-35, 새번역)

 

아합에게 화살을 쏘아 죽인 병사는 자기 화살이 명중한 사람이 아합인 줄도 몰랐을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합을 죽게 한 화살이 박힌 자리가 갑옷 솔기’, 갑옷 가슴막이 이음새 사이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갑옷은 철로 되어 있어 웬만해선 화살이 뚫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필 갑옷의 철과 철 사이를 잇는 솔기(이음새)에 화살이 박혔습니다. 이게 우연이겠습니까?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더 신기한 것은, 여호사밧이 아합의 왕복을 입은 것을 보고 아람 지휘관들이 달려들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니까 바로 아합이 아닌 것을 알아보았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여호사밧을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긴 자라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은 아합이 어떤 계략을 써도 하나님의 사람 여호사밧을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면 지금 당장은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비참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머리 굴리지 말고, 하나님의 법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머리 굴리지 말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그만두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을 중단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며 우리와 함께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아무리 많은 업적을 남기고 성공을 거두었어도, 실제 역사에서도 유능한 왕이었다고 해도, 성경은 아합을 최악의 왕,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결국 인생에서는 업적이나 결과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느냐에는 별 관심이 없으십니다. ‘어떻게 내 말대로 살았느냐?’ 그것을 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잘 따라 살아서 정말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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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요아스: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지 말라 (대하 24:14-27) - 누가 나의 왕인가 7 (2/22/23) admin_p 2023.02.23 247
364 예후: 위선적인 신앙을 버리라 (왕하 10:28-31) - 누가 나의 왕인가 6 (2/15/23) admin_p 2023.02.16 297
» 아합: 하나님 앞에서 머리 굴리지 말라 (왕상 21:17-29) admin_p 2023.02.09 202
362 아사: 하나님을 놓고 대신 붙잡을 것은 없다 (대하 16:1-14) - 누가 나의 왕인가 4 (2/1/23) admin_p 2023.02.02 234
361 여로보암: 자기 마음대로 하는 열심ㅁ을 버리라 (왕상 12:25-33) - 누가 나의 왕인가 3 (1/25/23) admin_p 2023.01.26 202
360 솔로몬: 세상에 보험 들지 말라 (왕상 11:1-11) - <누가 나의 왕인가> 2 (1/11/23) admin_p 2023.01.12 382
359 사울: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무너뜨려라 (삼상 15:7-23) - 누가 나의 왕인가? 1 (1/4/23) admin_p 2023.01.05 544
358 어린양의 혼인 잔치 (계 19:1-10) - 송년 메시지/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7 (12/31/22) admin_p 2023.01.01 249
357 거짓 교사를 분별하라 (유 1:1-10)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6 (12/14/22) admin_p 2022.12.15 149
356 축복의 정석 (요삼 1:1-8)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5 (12/7/22) admin_p 2022.12.08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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