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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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i7zojRLnO10

 

 

20221231일 새해맞이감사예배

송년 메시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7)

어린양의 혼인 잔치

(요한계시록 191~10)

 

 

제가 신학교에 입학해서 전도사가 되었을 때, 교육전도사로 Youth Group을 담당했는데, 저를 바로 이어서 한국어권 대학생 담당 전도사님이 왔는데 저와 동갑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기며 즐거운 교제를 나누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그 전도사님은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한국에서 교회를 다닐 때 고등부 시절 수련회를 했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고등부 때 어느 수련회에서 모두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수련회 주제가 세상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이었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가르치면서 세상의 종말이 오면 어떻게 될 것인지 성경적으로 잘 가르쳐주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휴거라는 단어는 안 나오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믿는 사람들이 들려 올라가는 것을 휴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밤에 기도회를 하고 늦게 잔 뒤 마지막 날 아침에 학생들이 일어났는데 선생님들과 리더들이 싹 사라진 겁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자기들만 이 땅에 남고 휴거된 것 아니냐고 하면서 엉엉 울었다는 겁니다. ‘다 어디 갔지? 휴거 되었나? 나만 놔두고 전부 휴거 된 건가? 큰일 났다. 7년 대환난이 드디어 시작되는 건가?’ 하는 무서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며 엉엉 운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리더들이 짠 하고 나타나며 게임이 끝나고 다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합니다. 그 시간이 별것 아닌 것 같았지만, 그런 내용을 배웠기 때문에 굉장히 실감 났고, 아주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다들 잠시나마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했다는 겁니다. 그 전도사님도 굉장히 공포스러웠다고 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이나 종말론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섭게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에서 30년 전인 1992년에 시한부 종말론이 판을 치면서 혼란스럽게 했기 때문에 종말론이나 재림이라고 하면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은 결코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쁜 날입니다.

 

오늘은 2022년의 마지막 날이고 지금은 2022년의 마지막 순간인데, 마침 수요예배 때마다 나누던 신약학자들의 신약 설교시리즈인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을 할 차례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요한계시록의 이런 내용을 새해가 된 다음 나누는 것보다 올해 마지막 순간에 나누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되어 본문에 나오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살펴보려 합니다. 특히 요한계시록 19:7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7)

 

7절은 즐거워하고 크게 기삐한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사실상 본문이 축제를 선포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 말씀은 승전 소식을 알리는 팡파르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이 찬양의 문맥에서 선포되는 말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종말은 비관적인 것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참으로 오랫동안 요한계시록을 오해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이라고 하면 소망과 위로가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전체적인 관점으로 보면 앞부분에 일곱 교회의 이야기가 나오고, 6~16장까지는 여러 심판이 나오는데,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심판에 대해 기록합니다. 17~18장은 음녀 바벨론 심판을 다루고 있는데, 당시에는 이미 고대 바벨론이 망한 지 오래 되었으니까 로마제국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심판에 대한 기록이 끝난 후 이어지는 19장은 할렐루야 찬양으로 시작됩니다. 191~6절에는 네 편의 할렐루야 찬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할렐루야는 히브리어입니다. ‘야훼또는 여호와즉 주님이고, ‘할렐루찬양하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찬양하라가 할렐루야인데, 신약 전체에서 할렐루야라는 말이 사실상 이 본문에만 4회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편의 영광송 중 마지막 영광송이 19:1-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1-6의 찬양에는 요한계시록의 핵심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심판은 무서운 벌을 내리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구원의 과정입니다. 심판은 하나님과 그분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들, 특히 사탄의 세력을 심판하려는 목적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고자 하는 구원의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탄의 세력을 심판하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두 가지 측면이 다 들어 있다는 겁니다. 이 심판은 하나님과 어린양 및 그의 백성이 거둘 최종적인 승리를 보여줍니다.

 

“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1-2)

 

여기 첫 번째 할렐루야가 나옵니다. 그 다음도 보십시오.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3)

 

세 번째 할렐루야도 보십시오.

 

“4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4-5)

 

네 번째도 보십시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6)

 

특별히 이 6절에서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선포합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이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의 완성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에는 아기로 이 땅에 오셨는데, 그때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겁니다. 태어나신 후 30년 정도 개인적인 삶을 사시다가 30세쯤 되셨을 때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때 처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똑같은 선포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끌고 내려오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 땅에서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제대로 시작되었는데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already) 시작되었지만 아직’(not yet)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사이에 긴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이 시간에 살고 있는데, 악한 세력은 여전히 살아서 펄펄 뛰고 교회를 위협하며 가정과 사회를 무너뜨리려 하고, 심각한 영적 전투가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때는 사람이 어떻게 저 정도로 악한가?’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옛날에도 사람은 다 악했는데, 인터넷이 없어서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인터넷이 발달하다 보니까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악한 일까지도 우리는 실시간으로 다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 악한 게 많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옛날부터 인간은 항상 악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세력이 심판을 받고 멸망할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지금 악한 세력이 성공하는 것 같고 떵떵거리고 권력을 쥔 것 같아도, 언젠가 심판받고 멸망할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는 로마제국 밑에서 교회가 극심한 박해를 받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힘들어할 때 그날은 반드시 온다.’ 하고 소망을 주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무서운 책이 아니라 소망을 주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종말이라는 것, 이 세상이 끝난다는 것은 결코 비관적이거나 무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의 날입니다. 오히려 어린양 예수님과 함께 성도들이 얻게 될 최종적 승리가 바로 종말과 재림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성도는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놀라운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왜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지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말해줍니다. 첫째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 기약이 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가이사랴의 안드레아스라는 교부가 있었는데, 이분이 천국의 축복에 관해 매우 적절한 말을 남겼습니다.

 

영원한 천국의 축복을 표현하는 다양한 용어가 있습니다. 그 축복은 너무나 영광스럽기 때문에 하늘나라로, 때로는 좋은 것들로 이루어진 영원한 잔치라는 이유에서 낙원으로, 때로는 그곳에서 쉬는 사람들이 누리는 안식을 나타내기 위해 아브라함의 품으로, 때로는 하나님과 그의 종들이 누리는 완전하고 표현할 길 없는 합일을 통한 끝없는 기쁨이 되기 때문에 혼인 또는 혼인 잔치로 불립니다. 이 결합은 빛이 어둠과 다르고 향기가 악취와 다른 것처럼 모든 육적이고 신체적인 결합과도 구별되는 초월적인 것입니다.”

 

약간 어려운 말인 것 같아도, 주님과의 하나 됨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종말은 무엇입니까? 역사의 끝이 무엇입니까? 그날은 무서운 말이 아니라 기쁨과 환희의 날입니다. 요한은 이 기쁨을 무엇에 비교합니까? 혼인 잔치, 즉 결혼식 축제에 비유합니다.

 

본문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한국의 결혼식을 보면 이전과도 많이 바뀐 것을 봅니다. 믿는 사람들은 교회당에서 결혼 예배를 드리거나 예식장에서 하는데, 특히 예식장에서 할 때는 번갯불같이 예식을 마친 뒤 급히 식사하고 흩어집니다. 심지어 식장에 들어가지 않고 축의금을 낸 후 식권을 받아 식사만 하고 그냥 가능 경우도 많습니다.

 

결혼식이 길어야 30분 정도인데, 혼인 예식을 거행하고 사진을 찍습니다. 하객들은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식권을 찾아 식사를 하고 식장을 떠납니다. 이미 밥만 먹고 떠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는 마을 전체의 축제였고, 보통 1주일씩 이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결혼하기 전에 정혼 예식을 올렸는데, 정혼(betrothal)은 오늘날의 약혼보다 더 강한 효력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남자는 만 13, 여자는 만 12세가 되면 정혼할 수 있었는데, 정혼하면 실제 부부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같이 살 수는 없었습니다. 부부나 마찬가지이지만 아직 결혼식을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만약 이 정혼 기간에 남자가 전쟁에 나가서 전사하게 되면 여자는 결혼도 안 했지만 과부가 되었습니다.

 

정혼 예식을 마치면 떨어져 살면서 1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기간에 남자는 거처를 마련하고 여자는 신혼살림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했습니다. 요즘은 혼인 날짜를 양쪽이 의논해서 결정하지만, 고대 유대인 사회에서는 전적으로 신랑의 아버지가 날을 잡았습니다. 모든 준비가 되었다고 확인되면 그제야 신랑 아버지가 신랑에게 신부를 데리고 오라는 허락을 내립니다. 신부 가정에 미리 통보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신부 측에서는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니 오직 그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면 신랑은 보통 밤중에 신부를 찾으러 갑니다. 신랑도 신부도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모든 예식과 잔치를 준비한 후에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데리러 떠납니다. 밤중에 친구들을 대동해서 신부의 집으로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신부가 사는 동네 입구에 도착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과 하객들이 거기서 함께 신부의 도착을 기다리다가 신부가 오면 나팔을 불고 환영합니다.

 

혼인 예식을 올리고 신랑과 신부가 합방하면 드디어 혼인 잔치가 시작되는데, 무려 7일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이때 신부는 방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두 사람의 가족과 친지들을 비롯해 온 마을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축제를 즐겼다고 합니다. 하나 된 신랑과 신부가 잔치와 축제 가운데서 사람들의 축복과 환영을 받는 날입니다. 이날은 신랑 신부에게도 즐겁고 복된 일이지만, 사람들이 어우러져 기뻐하는 날이었습니다.

 

혼인은 애타게 서로를 기다리던 신랑 신부가 하나 되는 날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신부인 하나님의 백성과 신랑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는 온전한 연합을 상징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의 친밀함, 사랑, 기쁨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구원 역사의 완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어린양의 혼인 축제가 이르렀음을 강조하지만,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혼인이 이르렀음을 선포하면서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향해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적 관점입니다. 마지막 때는 어린양의 혼인 축제와 같은 날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어린양 예수님과 친밀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비록 온전한 연합이 완성된 상태는 아니지만, 연합이 완성됨으로써 친밀함을 경험할 수 있는 때가 곧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구원의 완성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누가 이것을 선포합니까? 천상의 셀 수 없는 무리들이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 같고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이 선포는 세미한 가운데 들리는 작은 음성이 아닙니다.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온 우주를 진동하는 엄청난 소리입니다. 일이천도 아니고,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억, 수조 이상의 무리가 내는 음성입니다.

 

드디어 마지막 종말의 때가 왔습니다. 어린양과 하나님의 백성이 온전히 연합할 때가 온 것이고, 구원 역사의 마지막 순간이 온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을 통해 구원의 클라이맥스를 경험합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과의 신비스러운 연합이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말의 날에 어린양 예수님과의 온전한 연합이 완성됩니다.

 

7절에서 그분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두 번째 이유입니다. 이 구절 역시 구원 역사의 절정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이제 다른 시각에서 종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혼인 잔치와 같은 축제와 기쁨의 날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부가 자신을 잘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종종 남편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아내로 등장합니다.

 

“19 그 때에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 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 20 내가 너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너와 결혼하겠다. 그러면 너는 나 주를 바로 알 것이다.” (호세아 2:19-20, 새번역)

 

이런 전통은 신약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으로 표현합니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마가복음 2:19-20)

 

사도 바울도 예수님과 교회를 남편과 아내로 표현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열렬한 관심으로, 여러분을 두고 몹시 마음을 씁니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여러분을 한 분 남편 되실 그리스도와 약혼시켰습니다.” (고린도후서 11:2, 새번역)

 

여기서 약혼이라는 것이 바로 정혼’(betrothal)을 말합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면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이 늘 불성실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한 번도 신부가 제대로 준비된 적이 없습니다. 신부인 이스라엘은 이 남자 저 남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음란한 여인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걸핏하면 우상숭배에 빠져서 하나님 한 분만 온전히 섬기지 못하였습니다. 구약의 역사는 일관된 반역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신약에 와서도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요한계시록 앞부분에 나오는 일곱 교회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교회도 일그러지고 왜곡된 상태로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 어디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늘 반역하고 신랑을 배반하는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너무나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다’(7). 이 말씀 역시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온전한 아내로 준비되지 못했는데도 준비되었다고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부패함으로 인해 탄식하고 고통을 느낍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심한 고통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의 권세 아래 눌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온전한 연합과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종말은 그리스도인에게 전해지는 놀라운 구원의 선포입니다.

 

“25 남편 된 이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심 같이 하십시오.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27 티나 주름이나 또 그와 같은 것들이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회를 자기 앞에 내세우시려는 것이며,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5:26-27, 새번역)

 

에베소서 5:25-27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합니다. 우리 주님의 놀라운 계획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드리시고 피 흘려 교회를 사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영광스러운 교회, 티나 주름 잡힌 것 없이 온전하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를 세우시려는 것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을 보면 낙심하게 됩니다.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들을 보면서 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향한 거센 비판의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우리의 연약함과 부패함이 드러날 때마다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영광스러운 미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계시록 21-22장에 등장할 영광스러운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예고합니다. 21:2에는 새 예루살렘이 잘 치장한 신부가 되어 나타납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21:2)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 공동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완성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현재 이 땅의 교회는 많은 흠을 가진 채 다툼과 분열의 장소가 되어 온전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교회의 모습이 21:9-27에 펼쳐집니다. 이것이 성도의 미래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미래 모습입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에는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새 에덴의 계시가 펼쳐집니다. 영원한 나라 천국의 모습이 다양한 모습으로 계시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 예루살렘이 그리스도의 신부로 등장합니다. 천국의 영광과 교회의 영광이 여기서 겹치고 있습니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21:9)

 

요한계시록 21:10-27에는 새 예루살렘의 영광의 계시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어린양의 아내라고 말합니다.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영광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는 찬란함입니다.

 

요한은 열두 보석의 아름다움과 광채를 빌려서 새 예루살렘의 찬란함과 아름다움을 묘사합니다. 잘 준비되고 단장한 신부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서두에서 기록한 일곱 별의 비밀입니다.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은 이러하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심부름꾼이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다.” (1:20, 새번역)

 

요한계시록은 일곱 별의 비밀을 기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일곱별의 비밀이란 바로 교회의 감추어진 비밀을 말합니다. 교회가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이 땅에 존재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이런 교회를 향해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마지막 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온전히 세워주시고 영광 가운데 있게 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일곱 별의 비밀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해 보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즐거워하고 기뻐하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모든 소망이 끝난 것처럼 보여도 우리에게는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종말은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가 완성되는 날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남아 있습니다. 그날은 우리가 신랑 되신 예수님과 연합하는 날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뵘으로써 주님과의 친밀함을 완성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할 환희가 가득한 날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혀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장차 영광스러운 신부로서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2022년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면서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 또는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을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 묵상의 결론은 하나입니다. 이 땅에서 매일 우리는 정결한 신부로서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 살아감으로써 2023년 한 해 동안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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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 예후: 위선적인 신앙을 버리라 (왕하 10:28-31) - 누가 나의 왕인가 6 (2/15/23) admin_p 2023.02.16 271
363 아합: 하나님 앞에서 머리 굴리지 말라 (왕상 21:17-29) admin_p 2023.02.09 191
362 아사: 하나님을 놓고 대신 붙잡을 것은 없다 (대하 16:1-14) - 누가 나의 왕인가 4 (2/1/23) admin_p 2023.02.02 224
361 여로보암: 자기 마음대로 하는 열심ㅁ을 버리라 (왕상 12:25-33) - 누가 나의 왕인가 3 (1/25/23) admin_p 2023.01.26 200
360 솔로몬: 세상에 보험 들지 말라 (왕상 11:1-11) - <누가 나의 왕인가> 2 (1/11/23) admin_p 2023.01.12 368
359 사울: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무너뜨려라 (삼상 15:7-23) - 누가 나의 왕인가? 1 (1/4/23) admin_p 2023.01.05 531
» 어린양의 혼인 잔치 (계 19:1-10) - 송년 메시지/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7 (12/31/22) admin_p 2023.01.01 239
357 거짓 교사를 분별하라 (유 1:1-10)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6 (12/14/22) admin_p 2022.12.15 146
356 축복의 정석 (요삼 1:1-8)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5 (12/7/22) admin_p 2022.12.08 359
355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 (요이 1:1-13)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4 (11/30/22) admin_p 2022.12.01 140
354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다 (요일 4:16-21)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3 (11/23/22) admin_p 2022.11.24 180
353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 (벧후 1:1-11)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1/16/22) admin_p 2022.11.17 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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