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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CJ1M5M_8bYA?t=2000

 

 

2022216일 수요예배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9

목적이 있는 은혜

(빌립보서 127~30)

 

1.   그리스도를 위한 은혜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계획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와 소명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은 은혜를 나에게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나에게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참과 거짓을 분별하게 하셨습니까? 소망 없이 절망할 때 위로와 희망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고 예수님의 넓은 사랑을 알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그 은혜가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29)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살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면, 그것이 어떻게 은혜가 될 수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은혜를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 어떤 대가를 바라고 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 안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계획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을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진정한 행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은혜가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그분의 몸인 교회에 전해지고 그 교회에 우리가 속하여 있기 때문에, 신부와 몸이 누리는 그 은혜를 우리도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며, 그분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들 중에 은혜가 목적을 가지고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 나를 이제 구원해주셨으니, 하나님이 내 인생을 향해 갖고 계신 목적대로 살겠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소수라는 겁니다. 이것이 의외인 것 같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곧 잃어버리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목적과 계획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목적과 계획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고, 그러니까 받은 은혜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의도하셨던 그 계획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면 은혜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주셨고 내 안에 있는데 경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은혜를 받고 그 은혜의 계획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더욱 풍성해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깊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더 하는 사람은 더 받고, 안 하는 사람은 안 받다가 나중에는 못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는 영적 전투와 같은 삶의 현장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는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부흥회 때, 삶 공부하면서, 성경 읽으면서, 큐티 하면서 은혜 받았다고 하는데, 진짜 은혜를 받았으면 삶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끝나면 진짜 은혜를 받은 게 아니라 그냥 감정적으로 감동을 받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행할 수 없는 일들을 순종하며 살게 하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께 순종하게 살면서 행복해지라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격과 섬김을 본받아 그분이 가셨던 그 길을 지금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가도록 하시는 겁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떠나시고 안 계시니까, 그분이 하시던 일을 우리가 이어가도록 하십니다.

 

 

2.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의 의미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고난을 받는 것입니까? 크게 교회를 위해서 받는 고난이 있고, 세상을 위해서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1)  교회를 위한 고난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영원히, 단번에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더 보탤 것도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의 은혜에 추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 고난은 오직 예수님 혼자 담당하셔야 했던 것이고, 또 예수님 밖에 담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에 오래 다녔으면서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이라도 세상을 떠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혼자 담당하셔야 했고 혼자 밖에 담당하실 수 없는 구원의 은혜에 있어서 내가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한 게 부족하니까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그러나 구원의 은혜는 우리가 추가할 것이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다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또 다른 예수님의 고난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당신의 몸인 교회 안에 남겨두신 고난입니다. 떠나시고 남겨두신 교회 안에 고난을 남겨두셨다는 겁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1:24)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지신 고난이 당신의 육신의 몸으로 짊어지신 것인 반면, 예수님이 이 땅에 남겨두신 고난은 영적인 몸인 교회가 예수님과 함께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겪게 되는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상태에서 이 고난에 참여합니다.

 

이 고난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교회의 불완전한 것들을 다 떨쳐버리고 완성하실 그날까지 누군가는 당해야 하는 고난입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고난혹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아픈 것을 나의 아픈 것으로 여기고, 교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고, 교회의 부족한 것을 나의 부족한 것으로 여기며, 나를 희생하고 바쳐서 교회를 온전하게 만들라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지역교회인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뿐만 아니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가 어려움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유, 잘됐다. 그 사람들 건방지게 나가더니 잘됐다.’라고 해서는 안 되고 안타깝게 여기며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교만하게 나가다 그랬더라도 같은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주님이 보실 때는 한 교회이기 때문에, 그 고난과 아픔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 동네에서 다른 교회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같이 아파하며 기도해주어야 하지만, 선교지에 있는 교회가 박해 가운데 있을 때, 북한, 중국,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에서 교회가 박해를 당할 때,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게 아니라 그 아픔과 고난에 기도로 참여해야 합니다.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라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다른 지역들을 볼 때 어떤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면 옆에 있는 다른 교회들이 은근히 좋아합니다. 어려움을 당하니까 그 교회를 떠나 자기 교회로 올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여기나 저기나 다 같은 교회가 아닙니까? 마음 아픈 일인데 그것을 좋아한다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마음 아파하며 기도해준다고 우리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 은혜를 따라 그렇게 나아갈 때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은혜 가운데 거하며 나아가면 더 은혜를 받습니다.

 

역사를 보아도 놀라운 은혜를 누리며 살던 사람들은 모두 교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디에서든지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을 드려 희생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 모든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하늘로부터 부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은혜 가운데 살면 우리에게 고난이 올 때 이겨낼 힘이 주어집니다.

 

간절한 기도와 참된 헌신과 충성스러운 봉사는 모두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불같은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를 위해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남은 고난을 우리가 겪는 가운데 교회를 온전하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특히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 보면 박해까지는 아닐지라도 거부를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며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기뻐할 일입니다.

 

 

2)  세상을 위한 고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이 세상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단지 교회의 구주로만 아니라 결국 세상의 구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만의 구주가 아니라 온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실 때 병든 자를 고치시고, 굶주린 자를 먹이시며, 방황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들이 먼저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을 돌보며 섬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의 그런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 (10:16, 새번역)

 

또한 예수님은 목자 잃은 양같이 방황하는 영혼들을 바라보시며 70명을 두 명씩 한 조로 묶어 내보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10:2)

 

이 말씀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섬깁니다. 우리의 자원과 노력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살핍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지난번에 토네이도 피해자들을 위한 재난지원헌금과 같이 그런 데 동참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실 미국장로교가 신학적으로 진보적이라고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 약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정말 잘합니다. 이 지역에서도 하지만, 세계에서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을 잘합니다. 미국장로교 총회에서 사실 온갖 종류의 헌금들을 하라고 오는데 동참하라는 종류가 너무 많습니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 가난한 자들, 억눌린 자들, 은퇴해서 어렵게 사는 목회자들을 위한 헌금 등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어떻게 살아가셨을까 하는 그 섬김과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고, 우리는 예수님이 지금 이곳에 계셨으면 행하셨을 만한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 (29, 새번역)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닌 것처럼, 믿음이라는 모든 것이 진정한 믿음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네 종류의 토양이 등장합니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입니다.

 

첫째로, 길가에 씨가 뿌려지지만, 사탄이 말씀을 빼앗아 가버림으로 아무 영향이 없습니다.

 

둘째로, 돌밭에 씨가 뿌려졌는데, 즉시 반응하여 기쁨으로 그 말씀을 받습니다. 거기에 뿌리가 나고 싹이 납니다. 그러나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자 더 이상 뿌리는 뻗어 갈 수 없었고 말라 버립니다.

 

셋째로, 어떤 씨앗은 가시떨기(덤불) 위에 뿌려집니다. 그곳에는 습기도 있고 양분도 있어서 뿌리가 내려지고, 잎과 가지와 줄기도 나옵니다. 그러나 가시나무 떨기에 막혀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 재물의 유혹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이 되고 맙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일시적인 믿음이며,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기를 원하셨던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은 삶으로 살아내는 믿음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알기에 나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라도 부당한 것이라면 거절하는 사람, 내게 주신 은혜가 너무 놀라워서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고난의 길을 걷기로 선택하는 사람, 내게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수많은 유익과 명예가 기다리는 길이 아니라 고난과 무명의 길을 기꺼이 택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소유한 믿음을 가리켜 사랑하기에 고난 받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3.   사랑하기에 고난 받는 믿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27절 상)

 

여기서 생활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폴리튜오입니다. 그리스가 아직 작은 나라들로 나뉘어져 있을 때 각각의 나라는 폴리스(Polis) 즉 도시 국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데, 각 폴리스마다 지형적으로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각자 독립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폴리스는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몇 십만까지의 인구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공동체를 이루어서 살고 있었고 관습법으로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친족들로 이루어진 인간관계를 기초로 하는 소단위 공동체였기 때문에, 그들은 눈에 보이는 법률보다는 실제로 사람들의 생각에서 통용되는 관습과 규범을 따라 생활했던 것입니다. 한 공동체에서 태어나 그 가운데 있는 관습과 규범을 삶으로 보여주며 살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가 바로 폴리튜오입니다.

 

빌립보는 로마가 어떤 나라인지를 전시장처럼 보여주는 도시였습니다. 은퇴한 군인들에게 집을 주어 살게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은 원래 다른 식민지 출신으로 로마 군대에 들어가 근무하다 은퇴하게 되면 빌립보에 집을 주어 살게 해주었습니다. 빌립보는 그리스 북부인 마케도니아에 있었지만 마케도니아 주에 속한 도시가 아니라 로마가 직접 통치하는 직할시였습니다.

 

그러니까 인종적으로도 그렇고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거기 있었겠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의 간수도 그런 은퇴 군인 출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그러한 빌립보 시민인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너희는 빌립보가 로마를 생각나게 하는 도시라고 말하지 않느냐? 이것과 같이 교회는 하늘나라를 생각나게 해주어야 한다. 너희 빌립보 시민들이 로마 시민답게 품위 있게 행동하려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시민답게 복음의 통치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사실 예수님의 말씀 중 한두 가지를 실천하는 것도 어려운데, 성경은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라고 요구합니다. 실제로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은 아주 큰 희생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16:24-25, 새번역)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올 때 우리가 죽기까지 결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치 가시밭길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이 모든 것을 이기도록 도와줍니다. 왜냐하면 승리는 사랑으로 가능하고, 사랑의 원인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베풀어주신 은혜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참고, 그 사랑 때문에 교회를 위해 애쓰고 견디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랑 때문에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인내하고, 고난과 슬픔을 견디면서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은혜는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16:33)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영광은 큰 건물이나 많은 성도의 수나 많은 예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에 어디서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이 가득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오래 전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님이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을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그 전에 쓴 책이 <목적이 이끄는 교회>입니다. 그 책에서 정말 건강한 교회는 seating capacity(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교회 건물 자리에 앉아 있느냐)로 판가름 나는 게 아니라, sending capacity(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세상에 나가서 제자답게, 선교사적인 삶을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훌륭한 교회는 많은 자리가 있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은 제자들을 많이 길러내서 그들이 세상 곳곳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며 살게 하는 것이 교회의 가장 큰 영광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든지 그렇지 않든지 상관없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기 안에 충만하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 사명을 담아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사명과 목적을 따라 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고난을 받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인생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한 마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그는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채로 멀리 있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가 그를 붙들어서 사랑의 편지를 쓴 겁니다.

 

삶이 온전히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는 것, 그분께만 드려지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믿음의 응답입니다. 진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삽니다. 예배하고, 봉사하고, 열심히 주님과 동행하고, 특히 이웃에게 사랑을 베풉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더 큰 은혜를 부어주셔서 선순환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바울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9:4-5), 신령한 세계를 경험했으며(고후 12:1-4), 드로아에서 유두고라는 청년이 떨어져 죽은 것을 살려내는 역사를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20:9-12). 그렇게 놀라운 은혜를 받은 바울에게는 동시에 고난도 넘쳤습니다.

 

그런데도 감옥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쓴 바울의 이 짧은 편지 빌립보서 안에 기쁨이라는 단어가 열여덟 번이나 나옵니다. 바울의 삶에는 고난이 넘쳤지만, 그 고난은 주님께서 주신 은혜의 계획대로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다가 당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욕심대로 살다가 그런 게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다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4)

 

아니, 감옥 밖에서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 이렇게 위로를 해주어야지, 어떻게 감옥에 갇힌 사람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이런 기쁨이 넘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을 따라 사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눈물겨운 인생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 바울을 보았다면 참 안 됐네.’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을 따라 사는 사람은 영광의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삽니다. 불쌍한 게 아닙니다.

 

작년에 선교사님이 돌아가시고 순교하셨지만, 결코 우리가 불쌍히 여겨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분들은 영광의 천국에 들어가셨습니다. 다만 가족들을 위해 안타까움으로 기도하는 것이지, 순교자는 불쌍하지 않습니다. 영광의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을 때 살이 찔리고 찢겨서 피투성이가 되기도 하지만, 얼굴은 거룩한 기쁨으로 가득 차 소망 가운데 그 길을 걸어갑니다. 왜냐하면 이 가시밭길이 영원하지 않고 잠시 후면 끝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 참고,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이 모든 것을 이기도록 도와주시며,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히브리서는 11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 가운데 살았던 여러 믿음의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12장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12:1-3)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지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그 은혜를 주신 목적대로 사명을 다해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잘했다고 칭찬받는 주님의 신실한 종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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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딤후 3:15-4:5)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6 (9/7/22) admin_p 2022.09.08 1202
344 신실한 사역자 디모데 (딤전 1:1-11)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5 (8/31/22) admin_p 2022.09.01 243
343 충성스럽게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삶 (살후 3:6-14)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4 (8/24/22) admin_p 2022.08.25 371
342 예수님의 재림 때 일어날 일들 (살전 4:13-18)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신약 설교) 13 (8/17/22) admin_p 2022.08.18 476
341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 (골 1:24-29)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2 (8/10/22) admin_p 2022.08.11 682
340 사도 바울의 소망 (빌 3:17-21)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1 (8/3/22) admin_p 2022.08.04 390
339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 (엡 4:17-24)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0 (7/27/22) admin_p 2022.07.28 510
338 서로를 살리는 일에 힘쓰는 공동체 (갈 6:1-5)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신약설교) 9 (7/20/22) file admin_p 2022.07.21 645
337 은혜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히 4:14-16) -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10 (2/23/22) admin_p 2022.02.24 1074
» 목적이 있는 은혜 (빌 1:27-30) -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9 (2/16/22) admin_p 2022.02.17 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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