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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AnWc3t9tySg?t=1562

 

2020422일 수요예배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5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다

(시편 11965~75)

 

1.   고난이 올 때 어떻게 할 것인가

 

1)  대비의 중요성

 

바람이 불 때 돛을 바로 올리면 배는 바람을 타고서 안전하게 또 빠르게 항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돛의 방향을 잘못 잡으면 바람이 배를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만들어 버립니다. 인생의 어려움을 당할 때 믿음을 통해 그것을 잘 활용하면 앞으로 더 잘 나아가며 더 큰 축복을 경험할 수 있지만, 어려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잘못될 때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그것이 우리를 몰고 가버립니다.

 

고난을 당할 때 사실은 고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태도가 믿음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인지에 따라, 그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닥쳐오는 인생의 고난을 가리켜 위장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우리를 힘들게 하려고 몰려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축복을 안고 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어려움을 올바로 대처하는 태도는 어려움을 당하는 그 순간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의 평안할 때, 잘 지내고 있을 때 이미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어려움이 없을 때 미리 고난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거기에 대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고난이 없고 평탄하다고 흥청망청 살게 되면, 갑자기 어려움이 닥쳐올 때 망가지고 무너지게 됩니다.

 

자기 앞날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일 일도, 아니 불과 몇 시간 후의 일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이 평안할 때 미리 고난에 대한 태도를 잘 잡아놓으면, 어떤 어려움이 몰려와도 거기에 맞게 적절히 대처할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자세가 바로 되어 있지 않을 때 갑자기 어려움이 닥치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됩니까?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1:20)

 

미리 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이 나오미처럼 모든 인생의 어려움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게 됩니다. 전능자 즉 하나님이 자기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평소에 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이번 바이러스 사태 같은 일이 갑자기 일어날 때 왜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시는가?’ 하면서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아니면 도피주의적인 태도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삶에 고통스런 일이 찾아올 때 그것을 극복하고 부딪치며 나아가려는 마음보다는, 그것을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시키는 태도나 또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태도는 둘 다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2)  고난의 신비

 

사실 인생에서 고난의 문제처럼 신비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고난과 고통에 대해 수많은 책들을 썼는데, 아무도 그 고통의 깊이를 자세히 파헤치지 못했습니다. 특히 고대시대 때부터 계속 하는 질문 중 공통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가? 별로 죄를 짓지도 않고 의롭게 사는 사람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 바르게 살아보려 애쓰는 사람들이 왜 실패하는가? 왜 그토록 주님의 복음을 전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거나 죽임을 당하는가? 간신히 죽임을 면해도 왜 어둡고 우울한 인생을 살아가는가?’ 이런 질문입니다. 고난의 신비는 도무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도 같습니다.

 

이런 심정을 깊이 느낀 사람들 중 하나가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부르셔서 예언자로 삼으시고 가서 내 말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이 주로 이 나라가 곧 망한다. 유다는 곧 망한다.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바벨론이 와서 멸망할 것이다.’라고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괴로운 겁니다. 사람들이 계속 욕하고 비난하며 왜 너는 예언자가 그런 것밖에 말을 하지 않느냐? 좀 잘된다고 해야지 왜 망한다고만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잡혀 감옥에 갇히고 고문도 당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제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이 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공정성 문제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되기만 합니까?” (12:1, )

 

시편을 읽어보아도 이런 심정을 노래하는 데가 많습니다. ‘왜 악인은 잘되고 의인은 안 되는가?’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고통의 문제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안 주십니다. 답을 우리에게 일일이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물론 힌트를 주시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렇게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그 사람 자신의 죄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인지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9:3, )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생기면 저 사람이 뭔가 죄를 지어서 그런 가보다.’라고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은 분명히 밝히십니다.

 

태어나면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살다가 갑작스런 사건이나 사고로 인하여 신체 일부분이 다쳐서 장애를 얻게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사고가 나서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고통스런 일이 벌어질 때 뭔가 저 사람이 죄를 지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쉽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런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이 고통을 통해 그의 삶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의 또 다른 곳들을 보면 헷갈리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어려움과 고통은 사탄이 주는 것이라고도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또 조상의 죄로 인하여 뿌려진 죄악의 씨앗의 열매를 후손들이 거두는 예도 성경에 나옵니다.

 

이렇게 볼 때, 고난의 문제는 아주 시원하게 풀리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고통의 문제로 신학자들이 씨름했지만 정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일단 보류시켜 놓으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이 고난의 문제에 대해 이거다 저거다 함부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각 종교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 많이 있어 왔습니다. 힌두교에서는 갈마리라고 하는 교리를 사용하여 전생의 죄 값 대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다.’라는 인과응보의 교리로 사람들을 비참하게 구속합니다. 비참하게 사는 사람은 뭔가 전생에서 죄를 지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열반의 교리를 가르치는데, 열반은 촛불을 끄듯이 꺼진다.’라는 뜻으로, 욕망을 완전히 없애면 인간의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철학적이고 좋은 설명이긴 하지만,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욕망이 없습니까? 욕망이 없다면 죽은 사람입니다. 마치 머리가 너무 아픈데 그 두통을 없애기 위해서 아예 목을 잘라버리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이슬람교는 고난을 가리켜 알라신이 정해주었으니 그냥 받아들이라는 운명론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무슬림들끼리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바로 인샬라’(알라신의 뜻대로)라는 말입니다. “한번 네가 고난을 당하면 빠져 나오지 못하니까 그냥 굴복하는 것이 너의 의무다. 알라신이 너를 그렇게 만들어주셨으니 불평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렇게 살아라.” 이것은 운명론입니다.

 

또 쾌락주의자들은 술을 마시든지, 쾌락에 빠지든지, 성에 빠지든지, 마약을 하든지, 그런 것들로 고통을 잊어버리고 넘기게 되면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살아보십시오. 인생이 망가지고 깨집니다. 만약 결혼한 사람이 그렇게 살면 가정이 깨어집니다. 결국 사람들이 아무리 고통의 문제를 풀어보려 애쓰고 열심히 연구를 해도,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줍니다. 고난의 문제는 이게 왜 그런가? 이것이 어떤 고난인가?’ 하는 식으로 이유나 고난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역경을 통해 그 가운데서도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의 문제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됩니다. 어려움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허락하시고 그 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핵심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75)

 

고난의 문제의 핵심은 우리를 괴롭히는 그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성실하신 하나님이 분명 뭔가 뜻이 있으셔서 지금 이런 상황을 허락하신 것이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할 때는 어려움 자체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의 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지금 이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려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답답한 일들이 많고 큰일 났다고 할 일들이 많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이 그렇습니다. 이번에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비즈니스들이 셧다운 하는 바람에 실업자들이 너무 많이 생겨서 다들 근심에 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돈도 주겠다고 하면서 경제를 활성화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또 진로의 문제가 있습니다. 학교에 진학해야 할 때 내가 가고 싶은 학교가 있는데 안 풀릴 때, 또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아야 하는데 잘 안 풀릴 때, 얼마나 답답하고 괴롭습니까? 건강에 갑자기 문제가 생겼을 때 얼마나 힘듭니까? 가정에 불화가 생겼을 때 정말 지옥 같이 느껴집니다.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길이 막혀서 막막할 때, 참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나 자신이 그런 상황을 당해도 힘든데, 주변에 그런 어려움을 당하는 지체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고난을 당한 욥에게 찾아와 옳은 말로 그를 괴롭히던 그의 친구들처럼 되기가 쉽다는 겁니다.

 

욥의 친구들이 악한 말을 한 게 아닙니다. 틀린 말을 한 게 아닙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는 욥에게 맞지가 않았습니다. 다 옳은 말인데도 전혀 위로가 안 되고 욥에게 괴로움만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형편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일반화하여 이 문제는 이런 거다.’ 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극히 조심해야겠습니다. 사실 어려움을 당하는 당사자만큼 괴로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 마음을 100% 알아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만이 그 마음을 다 알아주시지, 사람은 그 마음을 100%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부부끼리도 1005 다 이해해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끔 위로해준다고 하는 말 중에 그 마음을 내가 다 알지.”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다 아는 게 아닙니다. 다 아는 게 아닌데 어떻게 다 안다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물론 그 의도는 좋지만 조심해야겠습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고통을 어떻게 100%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사실 비슷한 종류의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가장 잘 도와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100% 다 이해하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난이라는 것은 정말 case by case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것이라도 조금씩 다 다릅니다. 그래서 100% 다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고난을 당하는 본인 외에는 아무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고난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로한답시고 와서 함부로 판단하는 세 친구들에게 욥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말은 전부터 많이 들었다. 나를 위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너희는 하나같이 나를 괴롭힐 뿐이다. 너희는 이런 헛된 소리를 끝도 없이 계속할 테냐? 무엇에 홀려서, 그렇게 말끝마다 나를 괴롭히느냐?” (16:2-3, )

 

욥의 친구들의 핵심은 네가 뭔가 죄를 지어서 이렇게 된 거다. 빨리 회개해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자기들보다 욥이 더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와서 네가 이렇게 망한 걸 보니까 네가 틀림없이 죄를 지었다.’ 하고 옳은 말로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위로한다고 와서는 더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 앞에서 먼저 가져야 할 우리의 태도는 바로 겸손입니다. 그 사람보다 나를 낮추는 것, 그 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고통을 다 이해한다. 내가 다 안다.’라는 태도를 일단 접어야 합니다. 고통은 아주 신비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당하는 본인만 압니다.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여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2:15)

 

이렇다 저렇다 붙이지 말라는 겁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사실 그것이 제가 아주 잘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고통을 당해서 괴로워할 때, 어떤 위로의 말보다 그저 말없이 함께 옆에서 울어주는 사람에게 더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아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안아주며 함께 우는 것이 낫습니다.

 

물론 우리가 말을 하기는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에게 말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말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당한 일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중보기도 아닙니까? 이 어려움을 통해 이 형제가 이 자매가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며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는 골방에서 기도해주면서, 또 도울 부분이 있으면 보고 도와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고난과 역경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데도 왜 우리 삶에 고난을 허락하십니까? 주님은 고난을 없앨 능력이 있으십니다. 아니, 아예 고난이 생기지도 않게 처음부터 막을 능력이 있으십니다. 한마디로 전능하신 하나님 아니십니까? 그런데도 왜 그 능력을 이럴 때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고통과 질병과 자연재해와 비극들이 여전히 일어나도록 남겨 두신 그 신비를 우리는 사실 우리의 머리로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가장 좋은 답은,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하는 것보다, 슬프고 우울하고 답답한 상황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하나님께는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와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가 모를 뿐이지, 하나님은 분명히 이유가 있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질 때 고난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왜 우리에게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을 허락하시는가? 왜 이상한 바이러스를 허락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어 고통을 당하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성경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고난도 어떤 재난도 성도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의 문제를 어떤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십니까?

 

 

1)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71)

 

고난이 유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닫고 돌아오지 않던 사람이 고난을 통해 돌아오고, 죄악 가운데 살던 사람이 고난을 통해 회개하고, 영적으로 잠자던 사람이 고난을 통해 깨어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고난을 안 당했으면 그렇게 안 했을 텐데, 어려움이 왔기 때문에 마음을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어려움이 와도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습니까?

 

당신을 섬기라고 내게 건강을 주셨건만 나는 세상을 위해서 전부 다 써버렸습니다. 이제 나를 일깨워주시려고 나에게 병을 주셨습니다.” - 파스칼

 

혹시 우리도 갑자기 어떤 질병이 온다면 그것이 꼭 죄 때문은 아닙니다. 그러나 남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병이나 문제가 생길 때 내가 혹시 하나님 앞에서 돌이켜야 할 것은 없는가?’ 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번에 갑자기 전 세계에 몰아닥친 이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이렇게 될지 어떻게 알았습니까? 불과 3월 초까지만 해도 우리는 한국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척들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반대입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미국에 있는 우리를 걱정합니다. 미국이 감염자와 사망자가 세계에서 가장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우리를 깨우시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미국도 취약한 부분을 몰랐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생길 때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을 때 큰 유익이 됩니다. 그리고 빨리 깨어나야 할 부분이 있으면 깨어나야 합니다.

 

영국의 지성인이자 변증가였던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는 자신의 책 <고통의 문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무서운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하나님께 귀 기울이지 않는 습성들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고통이란 것은 귀가 막힌 사람이 알아듣게 하시는 하나님의 확성기다.”

 

하나님을 떠나서 마음대로 사는 사람에게 잔잔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니까 못 듣습니다. 그래서 고난이라는 확성기를 통해서 정신 차리게 하고, 잠자는 자를 깨워주고, 죄악에 묻혀 사는 자를 돌이켜 회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닥친 어려움을 통하여 주님께 돌아온 사람들의 예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과 고통의 문제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밝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고통을 안고 통곡이 아니라 찬송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고통이 없어져서 감사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도 고통 중에 있지만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인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 속에서 견디게 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다운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목적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행복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성품입니다. 성품이 바로 되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품과 인격이 단순히 윤리 도덕적으로 좋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원하십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때 행복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하며 자기중심으로 살면 행복하게 될 줄 알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지지 못하고 불행해집니다.

다른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이 행복하지, 자기만 아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연구 결과로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혼자 고립되어 혼자 사는 사람은 건강도 나빠지고 수명도 짧아진다는 것이 의학계의 연구 결과로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과 교류가 없고, 나도 피해를 안 입히고 저 사람도 나에게 피해를 안 입히고, 서로 ‘We are okay.’라고 하며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나와 내 가족밖에 모르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살면서 스스로는 행복하고 평안하다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진정한 행복과 평안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게 어떻게 행복이 되겠습니까? 자기 세계에 갇혀서 그게 다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마치 물고기를 작은 어항이나 수족관에 가두어 놓았는데 그게 다 인줄 아는, 저 드넓은 바다가 있는데 그것을 모르면서 자기는 여기 편하다고 즐겁게 사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작고 좁은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최고의 것, 가장 중요한 것에 가치를 두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 때문에 종종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지 않으시고,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길로 가지 못하도록 막으시기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저기로 꼭 가고 싶고 저게 꼭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거 아니다라고 하실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너는 탄탄대로가 아니라 가시밭길이다.’ 하시면서 그리로 끌어들이셔서 뺑뺑이 돌리실 때가 있습니다. 힘든 광야 길로 돌리실 때가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까지 가는 데 2주내지 한 달이면 갈 수 있는 짧은 거리입니다. 그런데 40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그들을 뺑뺑이 돌리셨습니다. 훈련을 시키신 겁니다. 그 훈련 없이 들어갔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훈련을 받고 들어갔어도 망했는데, 훈련을 아예 안 받고 들어갔으면 그대로 망했습니다. 그래도 받았으니까 조금 버텼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또 돌이켰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련시키십니다. 종종 보면, 내가 구하는 것은 안 주시시고 엉뚱한 것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볼 때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저 세상에서 돈 잘 벌고 높이 올라가고 성공하고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문제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11:28-30, )

 

이 말씀을 보십시오. 참된 쉼과 행복이 언제 온다고 하십니까?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울 때입니다. 인생의 참된 평안과 행복은 많이 가지고 높이 올라가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고 닮을 때 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렇게 참된 쉼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진정한 행복과 평안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선물을 주시기 전에 우리에게 한 가지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우라는 것입니다. 멍에를 메는 것은 자유를 구속하고 옭아매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멍에를 멘 후에야 비로소 그 아래에서 훈련되고 인격이 형성됩니다.

 

야생마가 아무리 건강하고 힘이 좋고 강력해도, 훈련이 되어 기수가 조종을 해야 훌륭한 말이 되고 가치가 있습니다. 야생마는 가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고삐를 잡고 조종하시도록 내어드릴 때에야 가치가 생깁니다. 그럴 때 참 평안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 멍에를 지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면 줄수록 들나귀 같고 야생마 같이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면 좋을 것 같지만,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보십시오. 어떻게 됩니까? 하고 싶은 대로 다 행동해보십시오. 어떻게 됩니까? 오히려 자유가 없어집니다. 나만 보면 사람들이 피합니다. 함부로 하다 보면 관계가 어려웝니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자유가 점점 적어지고 없어집니다. 자기에게 손해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러한 속성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멍에를 메는 고통을 통해서 편히 쉴 수 있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격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멍에라는 것은 옭아매는 게 아니라 훈련을 시키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닮도록 훈련시키셔서 참 쉼과 행복을 누리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7)

 

고난당하기 전, 실패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통하여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따르는 길을 배웠더니,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인격이 되어 가면서 참 평안과 쉼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오래 전에 인도에 선교사로 갔던 어떤 분이 인도사람 대장장이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이 금을 연단할 때 그것이 순금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러자 대장장이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금 안에 불순물이 섞여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방법은 그 속에 비치는 내 얼굴이 얼마나 정확하게 잘 보이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금 표면에서 내 얼굴을 잘 볼 수 있을 때까지 연단합니다. 그때가 순금이 되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격에 하나님의 형상을 비추어보십니다.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해 찌꺼기를 없애고, 깎을 것을 깎아내고, 버릴 것을 버리도록 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세워주십니다.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즉 우리를 예수님의 인격으로 빚으시기 위해 때로는 병도 허락하시고, 마음의 고통도 겪게 하시고, 또 문제를 통해 괴로움도 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고난은 문제가 아니라 훈련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친 인생의 어려움을 겁낼 필요가 없고, 불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바이러스 사태도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조심하며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불안해서 벌벌 떨 필요가 없습니다.

 

고생할 때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통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내 팔자야.’ 그런데 믿는 사람도 내 팔자야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팔자는 정해진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었습니다. 변화가 되었습니다.

 

혹시 우리가 실수하고 죄를 범하여 고통이 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악함조차 선으로 바꾸어주시고 큰 유익을 얻도록 해주십니다. 그래서 고난은 위장된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닥친 고난 앞에, 또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닥쳐오든지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다!’라고 외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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