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1FC6rSS9-1U?t=3027



2020410일 성금요일예배

성금요일 메시지

성경의 예언을 이룬 예수님의 죽음

(요한복음 1923~30)

 

[들어가는 말]

 

신약성경에는 복음서가 네 개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입니다. 그 중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소위 공관복음’(관점을 공유함; 영어로 Synoptic Gospels)이라고 하며, 서로 비슷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앞의 세 복음서들이 나온 때로부터 한참 지난 AD 90년대에 쓰였습니다. 그리고 내용도 다른 세 복음서들과는 90%가 다른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앞에 세 개의 복음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더욱 강조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신성(하나님의 아들이신 것,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강조하는 부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뿐 아니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유대 지역에서의 사역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해줍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절기(특히 유월절)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주는, 아주 귀한 역사적 자료도 됩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9:23-30은 예수님의 고난 중에서 절정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나서 돌아가실 때까지의 여섯 시간 동안 있었던 일들 중 중요한 세 가지 사건들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23-24).

둘째, 예수님이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25-27).

셋째,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하시고 나서 그 영혼이 떠나간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28-30).

 

이 중 두 번째 사건(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기신 사건)은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사건과 세 번째 사건은 단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건 자체를 기록한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이루어지게 하려 함을 보여주기 위해 요한이 기록한 것입니다(24, 28).

 

 

1.   예수님의 옷을 나누는 군인들 (23~24)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시간은 오전 9시경이었습니다(15:25). 요한은 예수님이 빌라도의 재판정에 선 시각을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19:14a)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럼 이것이 맞지가 않습니다. 유대인의 시간으로 제 6시는 낮 12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때가 6시라고 되어 있으면, 예수님은 이미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에 돌아가셨는데, 12시에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말하는 제6시라는 것은 유대인의 시간인 낮 12시를 말하는 게 아니라, 로마의 시간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로마의 시간도 우리의 시간과 같이 오전 6시입니다.

 

그러니까 이때는 새벽으로서,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무리들은 예수님을 끌고 빌라도의 법정으로 와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며 사형 언도를 내려달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열심을 좀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18:28a)

 

밤새 예수님을 체포하고 가야바 대제사장의 집에서 공회로 모여 사형 선고를 내리고, 자기들이 직접 사형을 할 수 없으니까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끌고 왔습니다. 그 시간이 아침 6시가 되기도 전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판결을 내리는 때가 6시 정도였기 때문에 그 전부터 벌써 끌고 왔다는 것을 여기서 봅니다. 얼마나 큰 열심을 가졌습니까? 새벽부터 이렇게 악한 일을 하는 데에도 이런 열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데 어떤 열심을 보이고 있습니까? 보통 하는 말 중에 새벽을 깨우자”,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새벽에 기도하자고 하면 많은 분들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새벽형이 아니라서 잘 안 된다. 나는 올빼미 형이다.’ 이런 악한 일을 하는 데에도 이렇게 새벽부터 열심을 다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좋은 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을 하는 데에도 온갖 핑계를 대면서 하지 않고 있으니 참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빌라도의 재판을 받으신 후 예수님은 오전 9시경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오후 3시경(27:46; 15:34)에 돌아가십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3)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과 강도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예수님의 옷을 나눕니다. 이것은 당시의 관습이었는데, 사형수를 형장까지 끌고 오느라 수고한 군인들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네 몫으로 나누어서 각각 한 몫씩 취합니다. 이것을 보면 군인들이 네 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강도 두 명을 각각 한 명씩 맡아서 십자가에 못 박고, 나머지 한 명이 그곳을 지키며 보초를 섰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이 겉옷에 대해 제비를 뽑았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주사위 같은 것을 던져서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 없는 내용 한 가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군인들이 예수님의 겉옷뿐 아니라 속옷도 취했으며 그것은 나누지 않고 한 사람이 제비뽑아 다 가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 속옷은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서 군인들은 이것을 찢지 않고 제비 뽑아 한 사람이 그것을 다 가져가게 됩니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24)

 

평범해 보이는 이 사건에 대해서도 요한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즉 구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말하는 성경구절은 시편 2218절입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나의 겉옷을 원수들이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도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가집니다.” (22:18, )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자기들이 제비뽑고 옷을 나누는 시간에, 바로 옆에는 온갖 고통을 다 당하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비참하고 처절한 모습으로 달려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서 이들은 저 놈이 죽게 되어서 우리가 이 겉옷을 가지게 되었으니 웬 횡재냐!’ 하며 좋아하며 웃고 있습니다. 얼마나 잔인합니까?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예수님을 채찍질하는 군인들이 웃으면서 때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사람이 죽도록 때리면서도 웃고 있으니 얼마나 잔인합니까?

 

그런데 지금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지금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파서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고,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는 사람들도 있고, 바이러스 때문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 또 그렇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가족들이 얼마나 슬퍼합니까?

 

그런데 이번에 그 덕분에 떼돈을 벌게 됐다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겁니다. 마스크가 날개돋힌 듯 팔리니까 엄청나게 값을 올려 팔아서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 손 세정제로 이득을 얻는 사람들, 또 여러 의료 장비들을 통해 이득을 얻는 사람들... 지금 남의 불행이 나의 기쁨이 된다고 좋아한다면, 이 로마 군인들 같이 악하고 잔인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옆에서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어도 당장 나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이게 얼마나 악하고 잔인한 일입니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그렇게 사람들이 악하고 잔인하게 하는 중에서도 하나님은 악함을 선으로 바꾸신다는 사실입니다. 악한 인간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성경 말씀과 그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악을 조장하거나 악하게 행동하라고 조종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결정과 선택에 의해 악하고 잔인한 일을 저지르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2.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 (25~27)

 

이어서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관련된 일을 간단히 기록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 자신과 직접 관련돼 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5)

 

십자가 곁에 있던 여자들의 이름이 죽 나오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들은 요한 외에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여자들은 곁에 서서 모든 것을 지켜봤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머니와 제자 요한을 보시고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십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6-27)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마디의 말씀(가상칠언) 중 제3언입니다. 먼저 어머니를 보시며 말씀하시는데,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여자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내, 부인, (성인)여자등으로 번역됩니다.

 

한국말로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처럼 비하나 경멸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 아내나 다른 사람의 아내 또는 어머니나 누구든지 어른인 여자에 대해 두루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의 경우 아들이 자기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면 버릇없다고 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한국 성경에 더 좋은 번역은 어머니여일 것입니다.

 

어쨌든 장남인 예수님이 떠나고 나면 어머니 마리아가 혼자 남는데 누가 이 어머니를 부양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물론 예수님에게는 육신의 남동생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그의 동생들 이름이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고 그 외에 여동생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 탄생 후에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요한복음을 보면 당시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이런 시골에서 썩지 말고 저 수도인 예루살렘에 가서 자신을 드러내라.’ 하며 조롱조로 이야기했습니다(7:3-5).

 

그리고 예수님이 사역을 하면서 자꾸 돌아다니니까 미쳤다는 말을 듣고 잡으러 온 사람들도 어머니와 동생들입니다(3:21). 왜냐하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맏형으로서 어머니를 돌보지 않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으며 계속 돌아다니기만 하니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동생들에게 지금 이 순간에는 아직 어머니를 부탁하실 수 없었습니다. 물론 이 동생들도 예수님의 부활 후에 변화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이 오순절에 모여 기도할 때 같이 기도하다 성령을 받고 변화되어, 그 중 바로 밑의 동생 야고보는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담임목사 격인 최고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동생인 유다도 유다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이때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까지도 동생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메시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약 예수님이 이때 그런 동생들에게 어머니를 부탁했다면, 평생 예수님에 대해 불평하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단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특히 이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제 5계명을 소중히 여기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어머니를 돌보신 예수님입니다.

 

여기는 예수님의 이모가 있었다고 하는데, 마가복음에는 이모 대신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나옵니다. 세배대의 아들들은 열두 제자들 중 야고보와 요한인데, 그들의 어머니로 나오지 않고 이모라고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살로메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요한의 이모가 됩니다. 직접적 이모가 아닐지라도 친척관계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모와 조카는 대체로 좋은 관계니까 부탁하는 것이 전혀 무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물론 오늘의 기준으로는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 는 2천 년 전의 유대 상황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항이 있는데, 사도 요한은 자기 자신을 요한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합니다. 특히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라고 하셨을 때, 그는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서 식사하던 제자였습니다(13:23).

 

그만큼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제자가 요한이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는데,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는 법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만큼 기쁨으로 보답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하셨을 때 요한은 그때부터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시게 됩니다(27).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결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때 요한은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하거나 아내와 의논하지도 않고, 즉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기꺼이 보답하고자 하는 요한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도행전을 볼 때 여러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사도 요한은 계속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예루살렘에서 살았던 겁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요한의 아내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또 이모(친척관계)니까 이해가 되지만, 그의 아내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는데도 말없이 함께 마리아를 모시고 섬겼습니다. 그 당시 문화로 볼 때, 사실상 마리아를 모신 것은 대부분 요한의 아내 몫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평생 마리아를 모셨다는 것은 정말 귀하고 아름다운 섬김과 희생입니다.

 

자신의 시어머니도 아니고 남편의 이모뻘 되시는 분인데도 그런 섬김과 희생을 보여주었습니다. 전적으로 남편을 사랑했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 희생하는 마음, 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향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요한의 아내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요한은 유대에서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유대 땅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것은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하기 얼마 전인 AD 66년경으로 추정됩니다. 그때는 예수님의 동생이자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가 이미 순교(AD 62)한 다음입니다. 다른 형제들도 대부분 다르지 않은 형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예루살렘을 떠나 에베소로 간 것입니다.

 

당시 마리아는 나이가 매우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16~17세 정도에 낳았다고 하면, 학자들이 계산을 잘못해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해가 AD 1년이 아니라 BC 4년경이었는데,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신 때가 AD 29년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80대 후반의 아주 나이가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평균수명보다 훨씬 오래 산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마리아를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에베소까지 그 먼 길을 모시고 함께 갔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터키의 에베소에 가면 산 쪽에 마리아가 살았다고 하는 집이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그곳을 성지로 생각하며 교황도 세 번이나 빙문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정말로 마리아가 살았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마리아가 말년에 에베소로 와서 살다 죽은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요한은 끝까지 신실함으로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여 주님의 어머니를 끝까지 모시다가, 돌아가신 후부터 에베소에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한 것입니다. 얼마나 신실한 사람입니까? 우리도 이런 신실함이 필요합니다.

 

 

3.   예수님의 죽음 (28~30)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8)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하신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6시간쯤 지났을 때였습니다(오후 3시경). 그 전에 피를 많이 흘리신 예수님은 탈수현상으로 인해 심한 갈증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목마르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느끼셨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은 이 말씀을 하신 것 역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시편 6921(또는 2215)의 말씀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극심한 고통, 죽기 직전의 고통의 순간에도, 숨이 곧 끊어지기 직전의 다급한 상황에도, 성경을 이루는 것에 모든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자신의 어떤 고통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더 중요하게 어기셨고, 그 말씀을 이루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었습니다. 아니, 그분 자신이 곧 말씀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1절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시라고 기록했습니다.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29)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스펀지)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가져다 대주었습니다. 여기서 신 포도주는 로마 군인들이 마시던 음료수인 옥소스’(oxos)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갈증 해소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음료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갈증을 해소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됐을 겁니다. 그러나 본문의 초점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해 끝에 선행을 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 예수님이 얼마나 심한 갈증을 겪으셨으며 우리를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셨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30)

 

다 이루었다는 말의 헬라어 원어가 테텔레스타이’(tetelestai)인데, ‘온전하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 텔레오’(teleo)의 수동태 완료형입니다. ‘빚을 다 갚다라는 사업적 용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완전하게 됐다, 완전히 이루어졌다, 빚을 완전히 다 갚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죄 값을 치르고 구원하기 위한 사역을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의미입니다. 인류의 죄에 대한 형벌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다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는 일을 다 하셨습니다. 남은 것은 인간 각자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그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성령님이 오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열어 회개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십니다(16:14). 따라서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성령의 사역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각자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까지, 예수님이 이루신 모든 구원 사역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셨지만,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는 구원의 효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VIP 분들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섬기고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열심히 섬겨야 하지만, 우리의 섬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반드시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그 마음을 움직여주셔야 합니다. 열어주셔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열심히 섬겨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우리를 사용하시도록, VIP 분의 마음을 만지시고 열어주시도록 힘써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또 최선을 다해 섬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에울루스 하프(Aeolian harp)’가 있었습니다. 이 하프는 바람이 불면 저절로 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이 악기를 창가에 놓아두면 바람이 불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하프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또한 바람이 불더라도 하프가 창가 자리에 있지 않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비록 바람소리는 들릴지라도 음악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섬김이 바로 이 에울루스 하프와도 같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섬김이라고 하는 하프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를 위해 기도하면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도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하고 말씀하신 다음 머리를 숙이시고 그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 이 표현을 보십시오. ‘영혼이 떠나갔다고 합니다. ‘영혼이라고 했지만 spirit, 즉 영이 떠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 영은 죽지 않고 떠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영은 어디로 갔습니까? 육신의 죽음 즉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하늘나라(천국)로 가신 것입니다. 어떻게 압니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하고 강도 중 한 명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낙원(paraside)이라는 것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천국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지옥이 아니라 낙원에 가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육체는 무덤에 머물러서 부활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2:26-27).

 

이로써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완전히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사명을 모두 완수하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 사역으로 인하여 생명을 얻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이고, 우리가 기뻐하며 살 수 있는 것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다 감당하시고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의 불안하고 힘든 상황에도 위로와 소망 가운데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생각하며, 그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은혜의 강물에 우리 자신을 푹 적시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 감격과 소망을 붙들고 지금의 고난을 이겨내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56 우리의 길을 지도하시는 하나님 (잠 3:5-8)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14 (6/24/20) kpccoh 2020.06.25 1464
255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드러나는 참된 믿음 (욥 1:13-22)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13 (6/17/20) kpccoh 2020.06.18 1341
254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고후 12:7-10)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12 (6/10/20) kpccoh 2020.06.11 754
253 절망의 끝에서 소망이 시작된다 ( 룻 1:19-22)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11 (6/03/20) kpccoh 2020.06.04 2325
252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주시는 평강 (사 26:1-4)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9 (5/27/20) kpccoh 2020.05.28 2406
251 고난 받는 자녀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 (습 3:14-17)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9 (5/20/20) kpccoh 2020.05.21 1472
250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 (히 11:5-7)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8 (5/13/20) kpccoh 2020.05.14 1946
249 하나님마저 나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사 40:27-31)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7 (5/06/20) kpccoh 2020.05.07 2583
248 문제로 인하여 앞길이 안 보일 때 기억할 것 (엡 1:15-23)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6 (4/29/20) admin_p 2020.04.30 659
247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다 (시 119:65-75)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5 (4/22/20) admin_p 2020.04.23 4164
246 힘든 상황에도 낙심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는 비결 (고후 4:7-18)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4 (4/15/20) kpccoh 2020.04.16 3398
» 성경의 예언을 이룬 예수님의 죽음 (요 19:23-30) -성금요일예배 (4/10/20) kpccoh 2020.04.11 1415
244 힘든 상황에서도 풍성한 삶을 사는 비결 (신 11:8-17)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3 (4/1/20) admin_p 2020.04.02 1956
243 평안의 비결을 배우라 (빌 4:1-13)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2 (3/25/20) admin_p 2020.03.26 1480
242 불안하고 두려울 때 하나님을 바라보라 (출 15:22-27)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1 (3/18/20) admin_p 2020.03.24 1320
241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행 19:1-7) -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13 (3/4/20) kpccoh 2020.03.05 1083
240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눅 7:24-30) -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12 (2/26/20) kpccoh 2020.02.27 1573
239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왕상 18:20-40) -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11 (2/19/20) kpccoh 2020.02.20 1400
238 "하나님, 거기 계신가요?" (창 8:1-6) (2/12/20) - 조준오 목사 kpccoh 2020.02.13 268
237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사 6:1-8) -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10 (2/05/20) kpccoh 2020.02.06 1317


9480 S. Old State Rd, Lewis Center, OH 43035 / Tel: (614) 433-7155 / E-mail: kpcco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