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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19일 수요예배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11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열왕기상 1820~40)

 

1.   결단을 촉구하는 질문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올려 드릴 때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로 응답해주십니다. ‘나는 그런 적이 없다. 은혜를 맛본 적이 없다.’라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내가 예배를 올려드리고 내 삶을 올려드렸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며, 지금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사명자인 우리에게 오늘 또 다른 영적 질문으로 도전하십니다.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 하려느냐?”

 

이 질문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이 갈멜산 사건이 있기 전까지 한참 동안 인내하며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나만 섬겨라.’ 하고 선포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상 영적으로 가장 어둡고 혼란한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때는 BC 9세기경인데, 그때는 북 이스라엘의 7대 왕인 아합 왕 시절입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들을 선택함으로 나라 전체를 영적인 위기에 빠뜨린 아주 악한 사람입니다.

 

아합의 아버지의 이름이 오므리인데, 그는 수도를 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옮기고 나라를 튼튼하게 세우는 등, 정치적으로는 꽤 훌륭한 치적을 남긴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아주 악한 왕이었을 뿐입니다.

 

오므리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는데, 그 일의 악한 정도는 그의 이전에 있던 왕들보다 더 심하였다. 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걸은 모든 길을 그대로 따랐다. 오므리는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고, 또 우상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게 하였다.” (왕상 16:25-26, )

 

남 유다의 왕들은 항상 다윗의 길을 가지 않았다라거나 다윗의 길로 갔다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북 이스라엘의 왕들은 항상 첫 번째 왕이었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므리는 악한 정도가 이전의 왕들보다 심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아합은 여로보암보다도 더 크게 죄를 짓는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그 이전에 있던 왕들보다 더 심하게,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 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가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더 앞질렀다. 그는 시돈 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았으며, 더 나아가서 바알을 섬기고 예배하였다. 또 그는 사마리아에 세운 바알의 신전에다가 바알을 섬기는 제단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도 만들어 세웠다. 그래서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 왕들보다 더 심하게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였다.” (왕상 16:30-33, )

 

아합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시돈 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과 결혼한 것입니다. 그 이세벨을 통해 남성 신인 바알과 여성 신인 아세라가 이스라엘에 들어왔습니다. 이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은 음란한 제사를 드리는 것은 물론, 매우 폭력적이어서 심지어 사람을 산 채로 죽여 피를 흘리기까지 했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어떻게 하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아합 왕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지 못하고 오히려 악을 행하니까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전 왕들을 통해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을 당했는데, 북 이스라엘은 계속 쿠데타로 왕권이 바뀌었습니다. 아주 불행한 역사였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악한 길을 가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자들이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뜻을 이루시도록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대통령들, 그들을 보좌하는 사람들, 그리고 국회의원들이 하는 짓을 보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것을 보며 화가 날 때가 많으실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 그들을 욕하고 비난합니다. 인터넷 신문 밑에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보면, 노골적인 욕설이 난무합니다.

 

지도자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 정당한 비판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욕하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럴수록 조금이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마련해야겠습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정치인을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 쉬운데,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라면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은 거의 없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욕할 시간의 1/10만 할애해서 기도해도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겁니다.

 

그렇다고 악한 짓을 하고 있는데 무조건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정당한 비판도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참으로 사랑하는 지도자를 세워주시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이며 제자인 디모데에게 이것과 관련하여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와 기도와 중보 기도와 감사 기도를 드리라고 그대에게 권합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딤전 2:1-2, )

 

지도자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바로 서 있을 때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백성이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를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주신 자리에서 리더십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는 반드시 기도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기도를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라는 차원은 아니지만,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기도는 나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 사역을 한다면 나는 하나님이 필요없다.’라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하나님의 보호막이 내려옵니다.

 

저와 같은 목회자는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처음에 가정교회 세미나 갔을 때 최영기 목사님께서 하루에 3시간씩 기도한다고 하셔서 많은 목사님들이 다 3시간씩 기도하겠다고 결단했습니다. 그런데 휴스턴은 교인이 천 명이니까 3시간씩 기도할 것이 있지만, 30명 정도 교회에서 어떻게 3시간을 기도하겠습니까? 그래도 했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굉장한 분들입니다. 그래도 최소한 2시간을 하라고 하셨고, 요즘은 4시간 할 수 있는 사람은 4시간을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어쨌든 최소한 2시간은 하라고 하십니다.

 

기도를 하다 보면 잡생각도 들고 졸리기도 하고 다리도 아픕니다. 어쨌든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두 시간을 그러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 내용보다도 그 자체를 귀하게 봐주신다는 것입니다. ‘, 얘가 나를 이렇게 의지하려고 애를 쓰는구나...’ 그런데 리더에게 그것이 없으면 내가 섬기는 사람들에게 보호막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우리 자녀들, 목장식구들, 교인들을 위해 리더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보호막이 거기에 없습니다. 그런데 리더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보호막이 막아주십니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는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합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도 섬기는 동시에 바알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상과 하나님, 둘 중에서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고 하시고 하나님만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선택해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기면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결국은 삶이 망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이 자신들의 삶이 망가지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일 선택의 연속입니다. 항상 이거냐 저거냐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매일 많이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방향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확실한 길이 있고,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것이 너무나 확실한 길도 있습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만한 길을 선택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제대로 된 선택을 하라고 도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24:14-15)

 

예수님도 분명하게 이 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6:24, )

 

잘 보십시오. 예수님이 여기서 너희는 두 주인을 섬기면 안 된다.’라고 하신 게 아니라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둘을 섬길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만 섬기게 창조되었지, 동시에 둘을 섬길 능력이 없습니다.

 

요즘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이라고 해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거기에도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멀티태스킹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는 것을 순간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차례로 하는 것이지, 사실 동시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뇌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주인을 섬기는 것도 동시에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능력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한 가지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합은 처음에 자기 아내가 하는 일에 대해 다 묵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세벨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동시에 바알을 섬겨도 된다.’라고 했을 것이지만, 나중에는 바알만을 섬기라고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학살했습니다(4). 그러자 남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다 도망하는데, 그때 왕궁 맡은 자(궁내대신)인 오바댜라는 사람이 예언자 100명을 두 패로 나누어 동굴에 숨기고 먹을 것과 물을 대주었습니다.

 

엘리야가 여호와의 선지자는 오직 자기만 남았다고 느낄 정도로 그때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22). 실제로는 더 많이 남아 있었지만, 자기밖에 안 남았다고 느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최악의 영적 암흑기에 빠져 있을 때, 영적으로 가장 악하고 전혀 소망이 없는 상황에서, 놀랍게도 하나님은 위대한 선지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불러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최악의 상황에도 우리가 하나님은 선한 일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남의 탓이나 상황 탓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떤 일이 생겨 내 마음이 불편한 것이 정말 다른 사람 탓입니까? 내가 제대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정말 교회 탓입니까? 아니면 어떤 영적 지도자 탓입니까? 내 삶이 잘 안 풀리는 것이 정말 주변 상황 때문입니까?

 

우리는 정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럴 때 남의 탓, 환경 탓을 할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일이 잘 안 될 때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런데 일이 잘 안 될 때 다른 사람 탓을 하고, 교회 탓을 하고, 환경 탓, 집안 탓, 조상 탓, 나라 탓을 하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무슨 일이 생기면 저 사람 때문에...’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의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일이 잘 풀리면 꼭 자기가 잘해서 되었다고 자랑하고 우쭐하며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의 사람은, 잘 안 풀릴 때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일이 잘될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공을 돌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일이 잘 안 될 때, 최악의 상황을 만날 때, 역사상 최악의 시기였던 아합 시대에 활동한 엘리야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엘리야는 아합을 만나 모든 이스라엘 백성과 바알 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아달라고 요청합니다(19). 그러자 아합은 그렇게 합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과 바알 선지자들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들 400명이 모입니다(20).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21)

 

참 신이 누군지 가려내자고 엘리야가 말합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한다는 것은, 이들이 하나님도 섬기고 바알도 섬기고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섬기면 부족한 것 같아서 바알도 섬기고, 바알만 섬기면 괜히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을 것 같으니까, 하나님도 조금 섬기고 바알도 섬기며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신이 누구인지 그 신을 섬기라는 겁니다. 그런데 백성이 한마디도 대답을 안 합니다. 누가 진짜 신인지 확신이 없는 겁니다.

 

이때 엘리야는 850 1로 영적 전쟁을 치릅니다. 숫자상으로 보면 대결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85명이 와도 힘든데, 어떻게 850명과 혼자 싸우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야는 이때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23-24)

 

이제 두 진영은 불로 응답하는 신이 진짜 하나님이다라는 데 동의했습니다.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6)

 

그들은 축제를 벌이면서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하고 외쳤습니다. 바알은 농경 신이자 풍요의 신인데다, 태양신 또는 불과 번개를 보내 주는 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바알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작은 제단 하나쯤 태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며 놀립니다(27). 그러자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몸을 자해하고 피를 내면서까지 외칩니다(28). 그러나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29).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알은 참 신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낸 죽은 신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바알이라는 신은 애초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잘못된 종교적 열심이 이처럼 자신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것은 단지 죽음으로 가는 허망한 삶일 뿐입니다.

 

 

2.   여호와는 과연 하나님이시다

 

이제 엘리야가 나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엘리야가 먼저 무엇을 합니까?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30-32)

 

엘리야는 지파의 수를 따라 돌 12개를 취하고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쌓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북 이스라엘에 10지파, 남 유다에 2지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12개의 돌을 취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입니다.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33-35)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수축한 후에 제단 둘레에 곡식 종자 두 세아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넓이의 도랑을 팝니다. 그 다음에 나뭇단을 쌓고, 그 위에 송아지의 각을 떠서 그 나뭇단 위에 올려놓고, 물통 네 개에 물을 가득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뭇단 위에 부으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합니다.

 

그 당시는 3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아주 극심한 가뭄이 든 상태입니다. 그러면 물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도 물을 막 부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곧 비를 주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물을 부어서 정결의식을 행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한마디로 엘리야는 여기서 유일하게 참된 예배를 드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엘리야처럼 간절하고 갈급한 마음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엘리야는 제단 주변에 도랑을 파고 물까지 다 부었습니다. 제단과 제물이 흠뻑 젖은 상황에 무슨 속임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립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6-37)

 

하나님께 기도하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이 즉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응답해주십니다. 몇 초 걸리지도 않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38-39)

 

엘리야가 기도하자마자 즉시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엘리야는 단지 불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불이 내림으로 말미암아 주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온 백성이 주님께서 과연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불은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상징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단에 내려주신 불은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다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불이 너무 세서 핥는 것처럼 물을 다 말려버렸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의 단단해진 가슴이 깨어지고, 식었던 가슴이 뜨거워지고, 차가워졌던 기도가 회복되고, 말랐던 눈에 눈물이 회복됩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하나님의 뜻이 다시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단순히 불을 주십시오.’가 아니라, 하나님의 불이 임함으로써 내가 회복되고 변화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3.   머뭇거리며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는 삶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도 섬기고, 동시에 세상과 돈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불가능하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둘 중 오직 하나만 섬길 수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고, 축복의 길이며, 행복의 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간을 보며 어느 쪽에 붙는 것이 유리한가, 머뭇머뭇하는 모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도 예배하지만 또 다른 쪽으로도 붙어서 어디가 더 유리한지 보며, 괜히 하나를 버렸다 잘못될까 봐 버리지는 못하고 그 사이에서 헤매는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만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엘리야가 기도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이라면 과감하게 버리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40)

 

선택과 결단은 철저히 해야 합니다. 여지를 남겨두면 안 됩니다. 바알 선지자들 중 하나를 슬쩍 빼돌려서 숨겨놓고 있다가 나중에 잠잠해지면 다시 가서 할 수 있기 때문에 다 해치우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혹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타협하는 부분이 있는지 꼭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다 해결한 것 같고 신앙생활을 잘하면서 삶 공부도 하고 부흥회도 참석하고 은혜를 받아 아주 충만한데, 그 중 하나를 슬쩍 빼서 남겨두고 있다가 다음에 또 가서 슬쩍 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없애야 합니다.

 

만약 타협되는 부분이 있다면 엘리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질문을 들어야 되겠습니다.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그것이 무엇이든지, 타협하는 부분이 있다면 내려놓되, 아주 철저히 내려놓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둘 사이에 어중간하게 걸치고 있으면 결정적인 상황이 올 때 그것 때문에 내가 망가집니다. 헌신한다고 하고서도 계속 미련을 놓지 못하고 살면 나중에 그것 때문에 내 삶이 무너집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헤롯 안디바 같은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을 놓아주어야 하는데, 알면서도 붙잡고 있다가 결정적인 때가 왔을 때 결국 죄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마치 사사시대의 말기와도 비슷합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21:25)

 

나라의 지도자인 왕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한 길로 가니까 나라 전체가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진정한 왕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했어야 하는데, 거기에 실패하여 결국 불행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적인 도전 앞에서 자기 소견(생각)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말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게 무식해 보이고 미련해 보여도, 말씀대로만 가면 틀림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길만을 선택하고 그 길로 갈 때, 지금 내 상황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참된 예배자에게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불을 우리는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은 3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무능력한 바알 신을 섬겼습니다. 바알 신이 비를 주고 태양빛을 비추어주며 풍요롭게 해줄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히 헛된 기대였습니다. 바알은 신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야가 갈멜산에 올라가서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여시고 36개월 동안 오지 않았던 비를 즉시 억수같이 내려주셨습니다. 이처럼 온 우주의 주권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매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국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가 할 일을 해야 하지만,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며 간절히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 혹시 하나님을 향한 나의 예배의 제단이 무너져 있습니까? 기도의 제단이 균열이 가 있습니까? 말씀의 제단이 얇아졌습니까? 이웃 사랑과 섬김의 제단이 깨어져 있습니까? 어떤 부분이든 깨지고 무너져 있는 부분이 있다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이웃 사랑에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고, 다시 선택하고, 다시 결단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 황무한 저의 마음과 삶을 새롭게 해주십시오. 저의 영혼에 하나님의 불을 내려주십시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저의 삶이 되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며 나아갈 때,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 삶 가운데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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