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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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4일 주일예배
✦ 사명을 따라 사는 인생 5 ✦
사명과 비전을 따라 나아가는 공동체
(사도행전 1장 6~8절)
[들어가는 말 – 무엇에 잡혀 살고 있는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중 상당수가 분명히 현재를 살면서도 여전히 과거에 잡힌 채 살고 있습니다. 지금 느끼는 감정들도 그들은 전부 다 과거에서 온 것들입니다. 분노, 두려움, 미움, 허무, 우울함, 열등감, 죄책감, 씁쓸함 등 지금이 아닌 과거의 것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엇을 결정할 때 그 결정하는 이유가 다 과거입니다. 어떤 일을 꼭 해야만 한다고 주장할 때, 그 일을 통해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심지어 자기에게까지 해를 끼치면서도 계속하는 것을 보면, 이전에 이루지 못한 어떤 한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그것을 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주저하는 것 역시도 과거에 실패했던 경험이 자기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런 분들을 제가 봤습니다. 이전에 어떤 목사님이 30대 여성을 목회 상담했는데 그 아버지를 너무나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무덤에 묻힌 지 한참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폭력적인 아버지가 자기의 마음속에 남아서 그 인생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또 어떤 분이 있었는데, 남들은 다 쉽게 결정하고 갈 수 있는 길인데도 결정을 못 합니다. 앞으로 가지 못합니다. 더 어떻게 나아가지를 못하고 그냥 주저하며 그 자리에서 그냥 머뭇거리는 그런 분도 봤는데, 참 안타까웠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생활 습관도 과거의 것을 버리지 못한 채 매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경향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 ‘상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가 자기를 지배하는 겁니다. 삶 속의 모든 것이 과거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과거라고 할지라도, 과거의 지배를 받는 삶에는 아무런 기쁨도 감격도 가치도 목적도 없습니다. 과거가 아무리 좋았어도 “왕년에 내가 이랬는데...”라고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반면에 미래를 향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래의 소망 때문에 오늘을 힘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미래를 향한 약속 때문에, 지금 어떤 고난이 와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갑니다.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주변 사람들이 이제는 그만 포기하라고 말할 때조차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그 이유는, 이미 주어진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소망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사명과 비전의 사람
무엇에 이끌려 사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 이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인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뭔가에 이끌려 사는데, 크게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상처를 따라 사는 인생이고, 다른 하나는 사명을 따라 사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사명을 따라 살지 않으면 상처에 따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상처의 지배를 받은 채 사는 사람은 생명력이 없고,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생명력이 있고 삶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생명력을 다른 말로 하면 건강한 삶의 의욕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면 뭔지 모르게 활기가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저분은 굉장히 활기가 넘치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치 시든 꽃같이 힘이 없고 별 의욕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모든 크리스천이 다 사명자라는 사실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크리스천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을 받고 이 땅에서 선한 일을 하며 살라고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이 영어로 mission인데, 이것을 또 다른 말로 하면 ‘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인데 사명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것,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약속을 이미 받은 사람으로서 그 약속을 붙들고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성경에서 가르쳐줍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사명이 없는 사람은 크리스천은 없습니다. 만약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크리스천(그리스도인)인데 나에게 사명이 없다고 한다면, 사실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사실은 크리스천이 아닌 겁니다. 그런 사람은 모양만 있고 내용이 없는 사람입니다.
모든 크리스천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의 영광입니다. 즉,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살아가는 이유는 주님을 이용해서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닙니다. 내 삶을 드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이유이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사실은 참 기쁨을 누리고 행복해집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남들을 이용하고 주님을 이용하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살 때 행복해집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것이 바로 사명이고 비전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는 삶을 살 때 그것이 주님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님들도 똑같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야, 너 이것 좀 해라.”라고 했을 때 자녀가 그것을 하면 부모의 마음이 기쁩니다. 하지만 “너 이것 좀 해라.”라고 말했는데 안 하면 참 안타깝고 어떨 때는 화도 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얘야, 너 이것 좀 하면서 살아라.” 하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얘가 내 말을 참 잘 듣네. 참 좋다.’라고 하실 겁니다. 그러나 하라고 하셨는데 안 하게 되면, 하나님이 막 화를 내는 분은 아니시지만 안타까워하시고 슬퍼하십니다.
또한 가정도 그렇습니다. 모든 크리스천 가정은 사명의 가정이어야 합니다. 가정마다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정예배를 매일 드리면 크리스천 가정이고, 가정예배를 안 드리면 크리스천이 아닙니까? 또 성경 구절이 든 액자를 붙여 놓으면 크리스천 가정이고, 안 붙이면 아닙니까?
물론 가정예배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대로 한다면 참 소중한 일입니다. 성경 구절 액자를 벽에 붙여 놓고 늘 그 말씀을 묵상하며 저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면서 삶의 지침으로 삼으며 살아간다면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 가정이 그리스도의 가정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가정에게 주신 사명대로 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어쩌다 우연히 만나서 어찌어찌하다 보니 결혼해서 같이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리스천 가정의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뭔가 뜻이 있으시고 이루실 일이 있으셔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신 겁니다. 이러한 사명과 비전 때문에 어려운 갈등 속에서도 가정을 포기하고 깰 수 없는 겁니다. 그런 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입니다.
우리 중 자녀가 100% 부모의 뜻대로 다 되는 경우가 있습니까? 만약 그런 가정이 있다면 심각하게 문제가 있는 가정입니다. 어떻게 부모의 뜻이 100% 자녀에게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까? 자녀에게는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내 자녀가 조금 빗나가 있고 삶이 어렵고 인생이 잘 풀리지 않고 있더라도, 그 사명과 비전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기도를 포기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 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입니다.
일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직장 또는 사업을 통해서 하나님이 과연 어떤 일을 이루길 원하시는지, 내가 무엇을 하길 원하시는지, 그 사명과 비전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일해서 돈을 번 다음 그것을 어떻게 쓸 계획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사명과 비전이 있는 일터가 크리스천의 일터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이 땅에 수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그냥 사람들이 모인다고 다 교회가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보면 유명한 목사님들 중 실망을 주는 분들이 종종 나오는데, 제가 그걸 보면서 안타까우면서도 감사했습니다. ‘나는 무명이라 감사하다. 유명했으면 나도 저렇게 타락할지 누가 아는가?’
주님이 주신 사명과 비전이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힘을 모아 최선을 다해 나가는 공동체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그냥 우리끼리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 모인다면, 향우회나 동창회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사실 호남 향우회, 영남 향우회, 무슨 무슨 동창회의 유대관계가 훨씬 더 끈끈합니다.
교회가 정말로 교회 되기 위해서는 이 시대, 이 사회, 이 장소에서 이 교회가 존재해야 할, 주님이 주신 사명과 비전이 확실해야 합니다. 그냥 교회가 많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 더 있는 교회여서는 곤란합니다. “왜 하나님이 지금 이 시대 이 자리에 우리 교회를 두셨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확실한 답을 가진 교회가 올바른 교회입니다. 그것이 사명이고 비전입니다.
사명과 비전은 생명력과 연결됩니다. 이것은 에스겔의 환상 가운데 나오는 생기와 같습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가득합니다. 뼈에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뼈는 그냥 죽은 시체도 아니고, 그것은 다 썩어서 뼈만 남은 것들인데 거기에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니까 뼈들이 살아날 뿐 아니라 엄청나게 큰 군대를 이룹니다. 바로 이런 것이 사명이고 비전입니다.
저는 이민 때문에 군대를 안 갔는데, 여기 군대에 다녀오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우리가 다 군대는 안 갔어도 전부 다 군중 안에는 있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군대(軍隊)와 군중(群衆)은 말이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같은 ‘군’ 자로 시작하지만 서로 다른 ‘군’ 자입니다.
군중은 아무리 많은 수가 모여도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쓰레기밖에 남지 않습니다. 만일 교회 안에 우리가 아무 사명이나 비전 없이 그냥 모였다 간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군대가 아니라 군중일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극장과 뭐가 다릅니까?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끝나서 사람들이 나올 때 입구에서 청소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그 사람들이 거기서 기다리겠습니까? 청소할 게 있으니까 기다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있다 떠난 자리 밑에 팝콘이나 휴지나 온갖 쓰레기가 다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직원들이 청소합니다.
극장은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도, 끝나고 사람들이 다 나간 다음에 남는 것은 그저 팝콘이나 음료수 쓰레기와 휴지뿐입니다. 아무리 감동적인 영화를 봤더라도 거기에서 무슨 역사가 일어납니까? 무슨 변화가 일어납니까? 아무것도 안 일어납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으니까 ‘오늘은 무슨 설교를 하려나? 설교나 들으러 가볼까?’라고 하며 교회에 간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극장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주님이 주셔서 우리가 함께 이룰 사명과 비전이 가슴속에서부터 타오르며 나누어지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때 진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를 통해 우리가 함께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그것을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사용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우리에게서 드려질 때, 우리는 군중이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이런 것이 사명이고 비전이며, 마른 뼈를 군대로 만드는 생명력입니다.
2. 사명과 비전의 특징
그렇다면 사명과 비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 사명과 비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시작된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은 사명과 비전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은 사명과 비전이 아닙니다. 내가 세운 계획은 사명이나 비전이 아니라 야망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6절)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후 이 땅에서 40일을 지내시고서 이제 하늘로 올라가시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때도 제자들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실 것인가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왜 그렇게 따라왔습니까? 물론 예수님이 좋아서 따른 것도 있고 부르셔서 따른 것도 있지만, 그들은 뭔가를 바라고 따랐습니다. ‘우리가 보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메시아다. 이분이 우리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틀림없다. 저 능력과 저 말씀의 권위를 봐라. 이분이 틀림없다. 그래서 이분의 제자로 잘 따라다니면, 이분이 이제 로마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실 때 우리도 뭔가 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겠냐?’
이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온 겁니다. 예루살렘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서로 치열한 눈치작전을 벌이면서 “누가 크냐?” 하고 자기들끼리 싸운 겁니다. 2인자와 3인자는 누가 될 거냐를 따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너무나 무기력하게 돌아가시자 다들 도망갔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다들 깜짝 놀랐고, 이제 40일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다시 예루살렘 옆 감람산(올리브 산)에 같이 모였는데, 그때도 “이스라엘 나라를 지금 회복시키시는 겁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말이 뭐냐 하면 “이제 드디어 왕이 되시는 겁니까? 이제 드디어 우리가 한 자리 차지할 수 있는 겁니까?”라는 겁니다. 지금 이것을 물어보고 있습니다.
‘유대인인 우리를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으로 회복시켜 주시고, 또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서 제자들인 우리가 이제 드디어 장관을 할 그때가 온 겁니까?’라고 묻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인 자기들을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인가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7절)
그런 데에 관심을 두지 말고,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라고 하십니다. 자기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과 비전을 붙들라고 하시는 겁니다. 야망은 사명과 비전과 비슷해 보일 수는 있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야망은 내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고, 굳이 욕심까지는 안 가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며, 사명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교회에서 사역하더라도, 내가 막 하고 싶어서 ‘내가 저걸 해야지. 남들이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해야지.’라는 마음으로 하면 사실은 야망으로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가만히 기도하면서 보니까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이것을 하라고 하시는 것 같다. 내가 여기에 순종해야겠다.’ 하고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가서 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8절)
여러분, 바로 이것이 교회를 향해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고 비전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교회가 하기를 원하시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28:19-20의 <대 사명>과도 일맥상통합니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19-20)
내가 만들어서 추구하며 나아가는 것은 야망이거나 과거의 한일 뿐입니다. 한은 사명과 비슷해 보이고 거기에 굉장한 에너지가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자기도 망가뜨리고 다른 사람도 망가뜨립니다. 그러나 사명과 비전을 따라 사람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 사람과 같이 있으면 절로 기쁨이 느껴집니다.
야망이나 한으로 충만한 사람을 보셨습니까? 굉장히 무섭습니다. 눈빛이 날카롭고 말도 날카롭습니다. 같이 있으면 굉장히 정확하고 일도 잘하는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피곤하고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그 사람과 같이 있으면 피곤합니다. 그런 게 야망이고 한입니다. 그런 것은 상처에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려는 일과 우리가 세운 계획은 대부분 야망 아니면 사실 한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사명과 비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깨닫는 것입니다. 음성이라고 하니까 자꾸 귀로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오셔서 ‘얘야’라고 부르시면 하나님의 음성인 줄 알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도 오래전 우리 교회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특히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2008년 가을 개스 폭발 사고가 났을 때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부임한 지 3년 반 정도밖에 안 됐을 때니까, 아주 젊은 목회자로 경험도 별로 없는데 그런 큰 사고가 교회에서 나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미국 교회 건물을 빌려서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도 미국 교회에 가서 했는데, 기도하면서 제가 그랬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지금 우리 교회에 이런 가스 폭발 사고도 나고,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좀 빨리 해결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언제 우리가 우리 교회당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우리 교회를... 이 교회를’이라고 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저에게 누가 말을 진짜 해 주시는 것 같은 음성이 제 귀에 들렸다기보다는 쾅 하고 머리에 들어왔습니다. “이 교회가 네 교회냐?” 그래서 제가 ‘아, 가만있어. 내 교회가 아닌데 왜 내가 걱정하지?’ 그러면서도 “그래도 제가 뭔가 해야 하지 않습니까?” 했더니, “네가 하냐? 내가 한다.” 그러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귀에 들린 건 아닐 텐데, 그러나 마음속에 그런 음성을 탁 주셨습니다. 실제로 이런 음성을 주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귀로 자꾸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불완전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귀로 주시는 것보다 머리에 바로 주시는 게 더 좋은 겁니다. 왜냐하면 귀로 들리는 소리가 우리 뇌에 들어가서 돌고 돌아 우리가 아는 건데, 우리 마음에 곧바로 주시면 더 빠르지 않습니까?
또 그보다도 성경을 통해, 기도를 통해, 예배를 통해, 환경을 통해, 마음에 주시는 생각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에서도 서로 나눔을 하며 자기 삶을 나누는데, 거기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겁니다.
환경을 있는 그대로만 보거나 겉모습만 보는 사람은 사명과 비전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상황이 잘 돌아가면 신나고 잘 안 풀리면 원망하는 사람은 사명의 사람이 아닌 겁니다. 주님의 사명과 비전을 받은 사람은 상황을 통해 주님이 보내시는 메시지를 깨닫습니다. 모든 상황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가 있고 섭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콜럼버스가 좋아지고 있는데 혹시라도 그런 생각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어쩌다 보니 이 콜럼버스 구석까지 와서 이러고 있냐?’라는 마음을 품은 적이 있으십니까?
제가 사실은 이사 가는 쪽에서 살 집을 구해야 하니까 두 주 전에 갔다 왔습니다. 거기 가서 알아보고 이리로 돌아오며 고속도로에서 우리 집으로 들어오려고 Polaris Pkwy로 들어오는데 ‘야, 이렇게 좋은 데를 내가 떠나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갑자기 탁 들었습니다. 이곳이 너무 좋은 겁니다. 이렇게 콜럼버스가 너무 발전하고 있는데도 ‘이 콜럼버스 구석에서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며 혹시라도 그런 마음을 품으셨으면 빨리 회개(?)하시길 바랍니다.
그게 아닙니다. 분명한 계획과 뜻이 있으시기 때문에 나를 여기로 보내신 겁니다. 여기서 주님이 내게 하기를 원하시는 뭔가가 있습니다. 오래전에 오신 분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있는 것이고, 또한 이제 막 오신 분들은 그냥 온 게 아닙니다. 뭔가가 있어서 하나님이 이리로 부르신 겁니다. 그것을 보고 들을 수 있을 때 사명과 비전이 시작됩니다.
2) 사명은 나의 헌신을 통해 내 것이 된다
아무리 하나님이 사명을 주셔도 그것을 받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이에게 선물을 주더라도 아이가 안 받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기 것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도 내가 안 들으면 그냥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헌신이 무엇입니까? 내가 막 뭔가를 하겠다고 나서는 게 아닙니다. 헌신이란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예(yes).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피곤한 헌신, 가짜 헌신은 하나님이 부르지도 않으셨는데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면서 난리를 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제풀에 지쳐서 ‘난 안 하겠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헌신자가 많은 교회들은 문제가 많고 아주 피곤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진짜로 듣고 “예” 하며 순종하는 사람은 정말 아름답고, 그 공동체도 아주 아름다워집니다. 그런 게 헌신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나뉘기 시작하고 마음이 복잡해지면, 사명과 비전이 흐려집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명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가다 보면 중간에 없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이 나뉘고 복잡해서 그렇습니다. 자꾸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을 보며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 삶이 심플(simple)해야 한다. 단순해야 한다. Simple한 삶을 살지 않으면 Sinful한 삶을 살게 된다.” 죄악 된 삶을 산다는 겁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과 비전을 이루려는 게 아니라, 자기 야망을 이루거나 한을 풀려고 나아가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자꾸 갈등이 생깁니다. 자꾸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서 분노하며 폭발하거나, 또 요즘 말로 잠수를 타기도 합니다. 상처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르신 것만 따라가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헌신입니다. 누가 알아주든지 안 알아주든지,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가는 게 헌신입니다. 다른 사람이 한 마디 툭 던진 것에 마구 흔들리며 하느냐 마느냐 한다면 진정한 헌신이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헌신은 누가 뭐라고 하든지 주님이 부르셨으니까 하는 겁니다. 또 주님이 가라고 하시면 가고, 그만하라 하시면 그만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3) 사명과 비전의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다
사명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진 착각 중 하나는, 사명을 받기만 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릴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사명을 주셨으니 이대로 살면 만사형통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명자에게는 시험도 오고 고난도 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사명을 받은 날부터 오히려 고난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고, 사명자로 사는 사람이 더 큰 고난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방향을 제시해 주시지, 디테일을 주시는 게 아닙니다. 그냥 ‘이쪽이다.’ 하시면 이리로 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라고 하셨습니다. 어딘지는 몰라도 그냥 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나름대로 기도하고 생각하며 간 곳이 가나안이었고, 바로 그곳이 그 땅이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사실 얼마나 궁금했겠습니까? “이제 내가 지시하는 땅,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러면 하나님, 제가 가긴 가겠는데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냥 가라. 가보면 안다.” 그러십니다.
그런데 가다 보니까 기다려야 하고 또 좌절하기도 합니다. 너무나 힘이 듭니다. 그러다 보면 ‘이 길이 아닌가?’라는 의심도 생길 수 있습니다.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주셨는데도 너무 오래 기다리다 보니까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까? 거기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사명과 비전이 정말로 자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받은 순간 곧바로 자기 것이 되는 게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공짜로 받은 것에 큰 애정이 생기고 거기에 완전히 마음을 주게 됩니까? 오히려 값을 치른 것에 애정이 생기는 법입니다.
가끔 보면, 전자책 같은 경우 어느 사이트에 등록해 놓으면 “Free Book of the Month”(이달의 책)라고 해서 무료로 보내주는 게 있습니다. 이메일이 옵니다. 그러면 저는 무료로 다 받아둡니다. 무료로 받아둔 책 중에 제가 읽은 책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거의 없습니다. 제가 돈 주고 산 책은 읽습니다. 그런데 그냥 받은 책은 잘 안 읽습니다.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한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삶 공부를 등록비 없이 그냥 해도 되는데 왜 받을까요? 그 $10 받아서 교회 재정에 무슨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왜 $10, $15을 받을까요? 자기가 거기에 값을 치르면 이상하게 더 관심이 갑니다. 공짜로 하면 이상하게 관심이 떨어집니다. 그것도 참 이상합니다.
고통의 과정을 겪지 않거나 오래 기다려보지 않고는 거기에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셔서 100세까지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사이 수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게 하시며 그를 훈련하셨습니다.
사명과 비전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좌절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뚫고 나갈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있어야 나갈 수 있고 또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 힘을 뭐라고 부르냐 하면 바로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약속은 주어져 있는데 아직 약속이 안 이루어졌습니다. 그사이에 엄청난 갭(gap)이 있습니다. 그것을 메우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크게 기도하면서 “믿~~슙니다~” 하는 게 믿음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정말 믿으니까 그렇게 할 때는 믿음이지만, 그 말을 한다고 반드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주신 사명과 비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견뎌내며 계속 나아가는 힘입니다. 주신 사명과 비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절망을 뚫고 나가는 힘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명과 비전의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러한 말을 들으시면서 혹시 여러분이 속으로 ‘아, 그렇다면 사명은 나쁜 거네. 아주 힘든 것이구나. 비전은 받으면 안 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명과 비전은 굉장히 좋은 겁니다. 하나님에게서 상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상보다 더 좋은 게 무엇이 있습니까?
사명과 비전은 고통이 아니고 축복입니다. 힘든데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겁니다. 이 비밀을 정확히 깨달은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아주 흥미로운 말을 합니다.
“13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빌 3:13-14, 새번역)
사명이란 괴로운데 억지로 죽어라 일만 하며 힘든 게 아닙니다. 내게 주신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상을 받으려면 그리로 달려야 하지 않습니까? 육상 달리기 선수들을 보십시오. 왜 그렇게 열심히 뜁니까? 상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겁니다. 사명과 비전은 내가 뭔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준비해놓으신 것을 내가 받는 것입니다.
사명과 비전을 알고 사명과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참으로 복된 길입니다. 그러나 사명과 비전을 모르고 사는 삶, 그래서 그냥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아니면 과거의 상처를 따라 사는 삶은 절망이고 저주가 됩니다.
사명을 따라 사는 인생은 축복이고, 사명을 모른 채 사는 것은 저주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해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대로 산 것이 아니라면 인생을 헛되이 산 것이 됩니다. 이 말이 너무하다고 생각되십니까?
한국 국가대표 남자 축구팀 주장인 손흥민 선수가 있는데, 그 선수가 지금은 이곳 미국 Major League Soccer의 LAFC로 지난 여름에 이적했지만, 그전까지 세계 최고 리그라고 하는 영국 프리미어리그(Premier League) 토트넘 핫스퍼(Tottenham Hotspurs)에서 주장으로 뛰었습니다.
그전 독일에서 뛸 때도 영상을 보면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 선수가 어렸을 때, 20세쯤 되었을 때 제가 영상을 그때도 봤는데 “와, 진짜 물건이 나왔구나.”라고 할 정도로 너무 잘했습니다. 골을 넣는 게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 후 영국으로 옮겨 지난 10년 동안 뛰면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득점상도 받았고, 엄청난 기록들을 많이 세웠습니다. 가장 멋진 골에 대한 상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승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리그든 컵 대회든, 우승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드디어 지난 5월 유럽 축구연맹 유로파 리그(Europa League)에서 그 팀이 우승했습니다. 그래서 주장으로 우승 트로피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만약 아직 우승을 못 했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이 우승은 못 했어도 많은 기록을 세우고 득점상까지 받았으니 그러면 된 것 아니냐? 돈도 많이 받고 연봉도 많이 받으니, 그러면 된 것 아니냐?”라고 한다면, 그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나는 연봉도 엄청나게 받고, 빌딩도 여러 채 사서 엄청난 수입을 올리니까, 뭐 우승을 좀 못 했어도 나는 축구 선수로 만족한다.”라고 대답했을까요? “축구선수로 우승은 못 했어도 로또에 당첨돼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으니 난 괜찮다.” 이렇게 말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비전대로 살지는 않았지만, 세상에서 열심히 해서 나름 성공적으로 살고 돈도 어느 정도 벌어서 편안하게 살았으니까 나는 만족한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작 해야 할 일을 못 하고도 우리가 정말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특히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우리가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명은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삶 자체입니다. 사명은 신앙의 한 부분이 아니라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신앙인,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사명의 사람, 비전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회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사명 공동체, 비전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그냥 모인다고 참된 교회가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비전을 함께 이루어나가는 모임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는 데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비전을 함께 이루어나가는 모임, 그런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그냥 무익한 모임일 뿐이고, 동창회나 향우회 같은 모임일 뿐이며, 이 땅에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상황 때문에,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명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사명대로 하지 못한다면 없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사명과 비전을 따라 나아갈 때에만 존재할 가치가 있습니다. 원래 그래야 하지만 지금은 형편이 어려우니까 그냥 모여서 예배드리고 밥 먹는 정도로 교회가 되는 게 아닙니다. 모여서 재미있게 지낸다고 교회가 되는 게 아닙니다. 엄청난 행사를 한다고 교회가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명과 비전을 붙들고 그 방향을 향해 전심으로 나아갈 때 주님이 인정하시는 주님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나 자신의 삶에 주어진 사명을 분명히 하시길 바랍니다.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대로, 연로하신 분은 연로하신 분대로 하나님이 지금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사명, 어떤 비전을 갖고 있습니까?
또한 내 가정에 주신 사명을 분명히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가정은 어떤 사명과 비전이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교회에 주신 사명을 어떻게 이루어나갈 것인지 분명히 하며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함께 그러한 방향으로 힘차게 나아갈 때 우리는 함께 사명 공동체가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인정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8절, 새번역)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교회로서 함께 이루기를 원하시는 사명입니다. 앞으로도 바로 이러한 사명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이 마지막 때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우리 콜럼버스 한인장로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