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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8일 주일예배
✦ 사명을 따라 사는 인생 3 ✦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라
(사무엘하 5장 1~5절)
[들어가는 말 – 사명의 중요성]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 가장 감동적인 것을 하나 뽑으라고 한다면, 저는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시리즈를 뽑겠습니다. 3부작으로 된 이 영화는 첫 편이 2001년에 나왔고 2003년에 나온 <왕의 귀환(The Return of the King)> 편으로 끝났습니다. 그 후 <The Hobbit>이라는 속편 영화가 또 나와서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 영화가 감동적이었던 것은, 인간 세계를 없애려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악의 우두머리인 사우론(Sauron)이 만든 절대 반지를 없애려고 일반 사람보다 작은 호빗족의 프로도 배긴스(Frodo Baggins)라는 청년과 그의 세 친구가 그 임무를 맡아서 길을 떠나 마침내 그 사명을 완수했기 때문입니다.
중간에 수많은 위험을 만나고 죽을 뻔한 위기를 수없이 넘깁니다. 또 반지 때문에 골룸이라는 괴물도 만나 같이 길을 가다가 배신당해서 죽기 직전에 친구의 도움으로 살아나는 등, 온갖 어려움을 다 극복하고 마침내 악의 세력의 중심부로 들어가서 용암 불길 속에 반지를 떨어뜨려 없앰으로 사명을 다합니다. 그에게는 반지를 없애는 것이 사명이었습니다.
이렇듯 사명은 평범한 사람의 인생을 감동적으로 만들어줍니다. 사실 인생 가운데 사명이 들어가지 않으면 별 감동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서 부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냥 잘 먹고 그냥 잘 살았다. 그리고 그냥 죽었다.’라고 하면, 여기에 무슨 감동이 있습니까?
어떤 사명을 받아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 가는데, 그 길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 사명 때문에 멈추지 않고 가다가 마침내 그것을 이루었다는 이야기에 감동이 있습니다. 사명이 있어야 감동이 있습니다. 또 사명이 있을 때 그 인생이 남들에게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 인생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의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고, 또 그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의 삶이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크리스천이라면 사명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사명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고 계십니까? 나에게 지금 무슨 사명이 주어져 있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사명을 주셨는가,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사명도 함께 주셨습니다.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것,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냥 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사명도 주셨습니다. 너는 이것을 하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정확히 구분해서 말하자면, ‘소명’은 부르심(calling)이고, ‘사명’은 임무(mission)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사명을 함께 주셔서 그것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사명이라는 단어는 우리 인생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사명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 인생은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사명대로 살지 않으면 우리 삶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사명을 주셨는데 그것을 따라 살지 않으면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사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알려줍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엄청나게 빨리 달리는데 아무리 빨리 달려도 죽음의 낭떠러지를 향해 빨리 가는 것이라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은 멸망의 길입니다. 그런데 사명은 꼭 필요한 삶의 방향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나가면서 어려움을 만날 때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사명이 중요합니다. 사명을 받는 순간부터 그 사람에겐 삶의 방향이 생깁니다. 조금 전 언급한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 배긴스처럼, 중간에 수많은 어려움을 만날 수 있지만,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그것이 사명입니다. ‘나는 이것을 이루어야만 한다.’라는 사명 때문에 역경을 만나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울 때면 더욱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삶이 어려우면 불평하고 원망하기 쉬운데,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지금 나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어렵다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넘어지는 것이 왜 그렇습니까? 사명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알면 그냥 불평하고 절망하는 데 머물 수 없습니다. 사명을 알 때 일어나서 나아갑니다.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뚫고 나갈 수가 있습니다.
1. 사명을 따라 산 사람들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을 얼마 전까지 죽 살펴보았는데, 성경을 보면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사명이 있었고, 즉 그들이 사명을 발견했고, 또 그 사명대로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는 ‘나는 이것을 위해 내 인생을 산다.’라고 하며 자기 인생을 정의할 수 있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나는 이것을 위해 지금 내 인생을 살고 있다.’라고 하며 내 인생을 정의할 수 있는 사명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까?
1) 아브라함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데, 그는 복의 근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창세기 12:2-3, 새번역)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 말씀으로 그의 삶이 정의됩니다. 그는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 살아간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해 살아간 사람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나 때문에 주변 모든 사람이 화를 당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깝고 비참한 인생입니까? 그런데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이 나 때문에 복을 받는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아브라함은 바로 그런 아름다운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또 거기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그 긴 여정을 거치면서 시행착오도 있었고 실수도 저질렀지만, 완전히 빗나가거나 도망가거나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복(의 근원)이 되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과 사명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토록 험한 세상에서도 믿음으로 버티고 견디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자기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어주는 사람이다.’라는 사명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사명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2) 세례 요한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사람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세례 요한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3:3)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라는 이 사명 때문에 세례 요한은 삶 가운데 자칫 잘못하면 완전히 빗나가고 타락할 수 있었던 때에도 옳은 길을 지켰습니다. 세례 요한의 삶 가운데 가장 위기가 언제였습니까?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서 핍박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언제입니까? 그에게 닥친 진짜 위기는 그가 한창 성공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가 메시아인가 아닌가 주목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몰려올 때가 바로 그에게 최대의 위기였습니다.
그때는 심지어 군인들, 세리들, 제사장들까지 다 그에게 나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다 나와서 자기에게 나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겠다고 왔을 때, 그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었을 때, 사실은 바로 그때가 그에게 최대 위기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등장하시는데, 그때 요한의 제자들이 그에게 말합니다(요 3:26). “선생님, 요단강 건너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이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다 그분에게로 몰려갑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세례 요한이 얼마나 갈등이 일어났겠습니까? ‘아니, 나에게 나오던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간다고?’ 이때 자칫 잘못하면 넘어가고 타락하고 무너지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라고 자기 세력을 늘리고 싶은 욕망이 없었겠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좋아해 주는구나. 아, 너무 좋다.’ 이렇게 이 상황을 누리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자기에게 오던 사람들이 다 저 예수에게로 간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세례 요한의 반응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27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8 너희야말로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한 말을 증언할 사람들이다. 29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30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요한복음 3:27-30, 새번역)
정말 기가 막힌 말 아닙니까?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까? 자기에게 오던 사람들이 다 저리로 가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교인들을 다 빼앗겼는데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어떻게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까?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것을 알릴 사람이 바로 내 제자인 너희다. 그러니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정확하게 전해라. 나는 신랑 친구의 기쁨으로 가득하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는 그 사명이 세례 요한을 붙들어주었습니다. 자기 사명은 뭔가가 되고 메시아처럼 행세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것이 자기 사명이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철저했습니다. 그 이상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타락하지 않고 끝까지 제대로 된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라도 그가 그 사명을 알면서도 지키지 않았다면, 그는 타락해서 이단의 괴수가 되었을 겁니다. 요즘 이단들이 많은데, 유명한 이단들도 있고 군소 이단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이단들의 우두머리들이 원래는 다 제대로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대부분 원래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 교만해지고 타락하면서 변질된 겁니다. 그래서 이단이 됐고, 자기가 그리스도(메시아)라고 주장하게 된 겁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기가 받은 사명 때문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이런 것이 사명이며, 이런 사명자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비록 그는 나중에 헤롯 안티파스에 의하여 처형당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여인이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다.”라고 극찬하셨습니다.
3) 사도 바울
또 한 명 살펴볼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 특히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수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갈등하고 싸우면서, 몸이 조금 아픈 게 아니라 정말 아파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도 많았고, 생명의 위협을 당한 적도 많았고 심지어 진짜 거의 죽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까지 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절대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도와주든 떠나든, 한결같이 그 길을 걸어간 이유는 바로 사명 때문입니다. 그가 한 고백들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내게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이방 사람에게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방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실 제물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롬 15:16, 새번역)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0:24, 새번역)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라는 곳으로 불러 거기서 한 설교 중에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만 하면 자기는 죽어도 괜찮다고 합니다. ‘내가 사는 이유는 사명 때문이다.’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한 가지만 더 보면, 바울이 이제는 참수형을 당하기 직전에 쓴 디모데후서에서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딤후 4:7-8, 새번역)
지금 자기는 사명을 다했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 곁으로 갈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멈추지 않고 어디든지 달려가던 사도 바울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지지 않습니까?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 특히 이방인들, 모든 민족에게 전하라는 그 사명 때문에 그는 멈추지 않고 달렸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힘 있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가 받은 사명 때문입니다.
2. 다윗이 받은 사명
지난주 목요일이 크리스마스였는데, 크리스마스이브 때 올해도 참 좋았습니다. 우리가 함께 어린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께 경배하는 아주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당일에 여러분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저는 모처럼 오랜만에 가족들과 깥이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한 편 봤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은 바로 <David>인데, 다윗에 관한 애니메이션 영화입니다. 그 다윗의 사명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다윗의 사명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1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2 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1~3절)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사명을 자기들도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주권자인 왕이 되는 것이 다윗에게 주신 사명이라는 것을 다윗 자신도 알았고, 이스라엘 백성도 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의문이 드는 것은, 그것을 다 알았으면서 왜 다윗을 왕으로 삼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울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울이 죽은 후에 모든 백성이 다윗을 왕으로 삼겠다고 온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본문 내용입니다.
바로 그 사명, 즉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사명이 다윗의 삶에서 어떻게 작용했습니까?
1) 삶의 방향을 잡아준 사명
첫째, 그 사명은 그의 삶의 방향을 잡아주었습니다. 다윗이 받은 사명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나침반처럼 삶의 방향을 잡아주었습니다. 지금은 GPS를 보고 길을 찾아가지만, 오래전에는 나침반을 보며 방향을 알았습니다. 그 나침반처럼 그의 사명이 삶의 방향을 잡아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합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에 다윗에 대해 다룰 때 살펴보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사울이 자기의 장인이자 또 나라의 왕으로서 사위이자 장군인 자기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면서 죽이겠다고 그렇게 쫓아다니는 게 정상입니까?
그렇게 자기를 죽이겠다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다윗에게 두 번 있었습니다. 한 번은 엔게디 동굴에서, 또 한 번은 십 광야에서 죽일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본 영화에도 약간 성경과 다르긴 해도 그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분명히 인간적으로는 자기를 괴롭히는 사울을 죽이고 싶었을 텐데, 다윗은 사울을 쉽게 죽일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어떻게 죽이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까? 바로 그것이 그의 사명, 즉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사명 때문입니다.
나중에 아들 압살롬이 반역해서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할 때, 시므이라고 하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 와서 다윗을 마구 저주합니다. 다윗이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저주하고 가짜 뉴스를 선포하며, 모욕과 막말 대잔치를 벌입니다.
제일 못 된 게 뭔가 하면,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와서 위로는 못 해줄망정 힘들 때 오히려 이렇게 짓밟고 욕하는 겁니다. 그것은 아주 나쁜 짓입니다. 시므이가 다윗에게 그렇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다스릴 때는 나와서 찍소리도 못하더니, 이제 피신하는 처지가 되어서 쫓겨가니까 그때 나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모욕하고 저주합니다.
그때 다윗은 그것을 처리할 힘이 있었고 그저 장군 하나만 보내면 그를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다윗은 그를 죽이지 않습니다. 나중에 일이 잘 풀려서 다시 왕좌로 돌아온 다음에도 시므이를 죽이지 않습니다. 다윗이 시므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루야의 아들들은 들어라. 나의 일에 왜 너희가 나서서, 오늘 나의 대적이 되느냐? 내가 오늘에서야,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 같은데, 이런 날에, 이스라엘에서 사람이 처형을 받아서야 되겠느냐?” (삼하 19:22, 새번역)
스루야의 아들들은 다윗의 장군들인 요압과 아비새를 말하는데, 사실 그들은 다윗의 조카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를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며 자기가 죽이겠다고 했지만, 다윗은 그들에게 시므이를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만약 그때 시므이를 죽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전체에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특히 시므이의 출신 지파인 베냐민과 사울 집안은 다윗을 대적하게 되고 절대 돌아오지 않게 됩니다.
솔직히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 내 말을 잘 듣고 따르는 사람, 내 편인 사람,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과 함께하며 함께 일하고 싶지, 나를 대적하는 사람이나 껄끄러운 사람이나 틱틱거리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를 잘 따르는 사람들만의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백성 가운데 있더라도 나는 그들의 왕이기도 하다.’라는 사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명입니다. 이 사명이 다윗에게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게 붙잡아주었습니다.
왜 다윗이라고 자기를 모욕하고 저주한 시므이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를 베어버릴 때 더 이상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스라엘에 분열이 온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런 본능을 누르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계속 나아갔던 것입니다.
2) 인내로 기다리며 위기를 돌파하는 능력이 되는 사명
“4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5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4~5절)
다윗은 유다 지파 출신이기 때문에 먼저 유다 지파의 우두머리가 됐는데, 그때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그에게 나와서 왕으로 삼는 장면이 바로 오늘 5장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도망자로 살았던 기간이 10년 정도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30세에 왕이 되었다면 계산이 어떻게 됩니까? 20세부터 도망자로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20대라는 황금기 내내 죽음의 위기를 겪으며 쫓겨 다녔습니다. 20세부터 10년 동안 도망자로 지내며 20대를 다 날려 버렸다는 말이 됩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20대가 얼마나 인생의 황금기입니까? 그런데 그 20대에 도망만 다니다가 그냥 끝났습니다. 그리고 30세에 왕이 된 겁니다.
우리에게 “10년만 기다리세요.”라고 하면, 그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10년이라는 기간이 정해져 있으니까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면서 기다리는 것은 다릅니다. “기다리세요.”라고 할 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하니까 “그냥 기다리세요.”라고 한다면, 마냥 기다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기약이 없는 10년 동안을 견딜 수 있었습니까? ‘10년만 버티면 사울이 죽고 내가 왕이 될 수 있다.’라는 약속이 주어진 게 아닙니다. 10년만 참으면 된다는 것을 알고 10년을 기다린 게 아니라, 그냥 견뎠습니다. 사울이 언제 죽을지 알고 10년을 기다리겠습니까? 그것도 20대라는 인생의 황금기를 도망자로 살면서 견뎌낸 것이니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 도망자 기간에 여기로 도망 다니고 저기로 도망 다니면서 그는 하나님과 늘 교제하고 하나님께 기도했고, 많은 시편들이 거기서 나왔습니다. 구약성경의 시편에 기록된 많은 그의 시들이 바로 그런 고난의 시기에 나왔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들이 가능했습니까?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명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은 다윗에게 인내로 기다리며 위기를 돌파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3) 상황을 이해하는 지혜를 주는 사명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방향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왜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예배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안 해도 상관없습니다. 인생에 별 지장이 없습니다. 살면서 기도 안 하고 말씀 안 보고 예배 좀 안 드린다고 해서 갑자기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무슨 저주가 떨어집니까? 내가 갑자기 벼락을 맞아 죽습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금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전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또한 예배드리고 나아갈 때, 삶 속에서 돌아가는 일들과 상황을 보면 ‘아, 하나님이 지금 이렇게 역사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이 그러한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상황을 제대로 보고 해석할 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사명을 모르는 사람은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모르니까 그냥 환경탓만 하고, 부모 탓, 조상 탓만 하게 되는 겁니다.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지혜로워서 나아갈 방향을 알며, 그래서 받은 사명을 통해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찾습니다. 결국 사명이 다윗을 올바르게 세웠고 그 험한 세월을 견디게 해주었습니다.
3. 사명을 발견하는 방법
이렇게 사명이 중요하고 우리가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사명을 발견하겠습니까? 사명대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명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끔 마음이 공허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했는데도 그때는 좋았지만 조금 지나면 또 채워지지 않고 그래서 또 하고 또 하다가 피곤하고 지치는 것을 경험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아마 다들 경험하셨을 겁니다.
왜 그렇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살라고 하신 사명대로 사는 게 아니라, 내 마음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주인으로서 내 마음대로 사니까 채워지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따라오는 게 무엇입니까? 불안과 두려움과 걱정과 염려입니다. 그래서 항상 공허하고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한 인생, 불안해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나에게 사명을 주신 것도 알겠고 사명대로 살아야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겠는데, 나에게 주신 사명을 도대체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크게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거룩한 부담이 느껴지는 것을 살피라
내가 뭔가를 생각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자꾸 마음이 가는 것, 거룩한 부담을 느끼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지금 나에게 주시는 사명일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시는 겁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지금 어린이 교사가 부족합니다. 어린이 교사로 자원하실 분은 말씀해 주십시오.”라는 광고를 들었다고 해 보십시오. 나는 어린이 교사를 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고, 어린이를 좋아하지도 않고, 가르치는 것도 못 해서 전혀 생각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그 말을 듣는 순간 ‘저걸 누군가가 해야 하는데...’라며 부담이 조금 생깁니다.
집에 돌아왔는데 ‘어린이 교사에 누가 자원했나?’ 하고 자꾸 생각납니다. 기도하는데도 자꾸 ‘어린이 교사를 할 사람이 있나, 없나?’ 하는 생각이 들고, 뭔가 자꾸만 거룩한 부담을 느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명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뭔가 이상한 것, 죄악 된 것이 자꾸 생각나서 ‘내가 그렇게 해야 하지 않나?’라고 느끼는 것은 거룩한 부담이 아닙니다. 그냥 잘못된 부담입니다.
2) 주어진 환경을 살피라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과 하나님이 나를 심어놓으신 그 장소가 바로 사명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운명론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인도하시는 것을 믿는다면,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정, 일터, 교회)가 어쩌다 보니 우연히 있게 된 자리일 수가 있겠습니까? 이 자리는 하나님이 심으신 자리이고, 이 일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이기에 바로 그것이 사명입니다.
3) 나에게 주어진 이름을 확인하라
그래도 사명이 뭔지를 잘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면 나에게 주어진 이름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제 아들이 저를 아빠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제 사명입니다. 제 아내가 저를 남편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제 사명입니다. 아내이신 분은 바로 그것이 자신의 사명입니다. 엄마 또는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지신 분은 바로 그것이 사명입니다. 아들이라는 이름, 딸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은 바로 그것이 사명입니다.
다른 분들이 저를 목사라고 부르는데, 그것이 제 사명입니다. 장로, 권사, 집사라는 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목자, 목녀 역시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아니,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것 자체가 바로 사명입니다. 지금 내게 주어져 있는 그 어떤 이름이라도 바로 그것이 사명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이름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아무 이름도 없는데요.’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각자 이름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이름이든지, 바로 그게 사명입니다. 바로 그것이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 붙잡아야 할 사명입니다. 오늘 중보기도 헌신자와 목자 임명식을 했는데, 바로 그런 것이 사명입니다. 중보기도 헌신자로서 내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나의 주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기대와 시선도 사명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그들의 이목을 끌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며 가지는 기대를 저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이고 목사도 사명인데, 목사로서 제가 어디를 가는데 여러분이 저를 보셨다고 해 보십시오. 제가 차를 타고 가는데 보니까 난폭 운전을 하면서 가는 겁니다. 다른 차 앞으로 확 끼어들고, 과속을 하면서 35마일 지역에서 60마일, 70마일로 막 달리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느끼시겠습니까? ‘와, 우리 목사님은 진짜 목사답다.’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어떻게 목사가 저러냐?’라고 하실 겁니다.
가끔 보면 차 뒤에 물고기 표시를 붙여 놓고서 난폭 운전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걸 붙이지나 말지 왜 붙이고 저렇게 운전하나? 차라리 다윈 사인을 붙이고 저러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실은 바로 그런 것이 사명입니다.
내 가족이나, 친한 사람들이나, 아는 사람들이나, 교회 성도들이나,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면서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 이름과 연결하면서 기대하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인데, ‘저 사람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다.’라는 기대치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명입니다.
잘못된 기대는 상관없지만, 만일 그들에게 우리를 향한 올바른 기대가 있는데 그 기대를 어이없이 깨버리고 빗나가는 행동을 한다면 그들은 실망하며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말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저래?”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저래?” “교회 직분이 있는 사람이 왜 저래?” “목사가 왜 저래?” 이런 말이 다 그런 겁니다. 그것은 사명을 깨는 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각자 따로따로 혼자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라는 것은 우리가 함께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믿는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함께하는 게 힘들어서 개인주의로 나갑니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겁니다. 그런 개인주의는 이 시대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 중 하나입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지 그냥 내 맘대로 살겠다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기대하며 살아가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명입니다.
이런 정도면 우리의 사명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내가 지금 맡은 것이 무엇인가? 내 이름이 무엇인가?’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사명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사명을 분명히 알아야 하고, 또 그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명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주신 사명을 붙들고, 그것을 따라 조금 하다가 그만두는 게 아니라 끝까지 살아냄으로써,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