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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v4jwJVD_13w?si=zXHTAMIe8F3pWwr3&t=247

 

 

20251214일 주일예배

사명을 따라 사는 인생 2

최고의 사후 대책

(사사기 625~40)

 

[들어가는 말]

 

지금까지 역사상 가장 운 좋게 구원받은 사람을 뽑으라면 여러분은 누구를 뽑으시겠습니까? 아마도 많은 분들이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를 뽑으실 것 같습니다. 그는 악하게 살다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너무나 운이 좋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옆에서 자기도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안 믿는 분들 중에서 성경을 조금 아는 분들은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하면, ‘나도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달린 그 강도처럼 마지막 죽기 직전에 믿겠다.’라고 말합니다. 실컷 인생을 즐기며 살다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믿고 천국에 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아니 둘이 아니라 셋은 모르는 생각입니다. 둘은 뭐냐 하면, 사람은 자기가 언제 어디서 죽을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안다고 해도 그때 자기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지 없을지, 그렇게 할 힘이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셋이 더 중요한데, 예수님 옆에는 그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두 명의 강도가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렸는데, 한 명은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다른 한 명은 끝까지 거부하고 저주하다가 그냥 죽었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예수님 옆에 있었습니다. 두 사람에게 인생의 마지막 순간 똑같은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각자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지고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은 그 강도가 단순히 운이 좋은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믿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선택을 한 것입니다.

 

저번 주일 김인기 목사님의 말씀 중에 가장 제 마음에 와닿았던 것이 모든 책임은 교인에게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은혜가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인에는 저도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책임은 각자에게 있다. 남의 탓을 할 것 없고, 핑계 댈 수 없다.’라는 겁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결단을 내렸고, 즉 그런 선택을 했고, 다른 사람은 안 믿는 선택을 했습니다. 구원으로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인 사람이 있었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 구원받은 강도는 그리스도인 중에 가장 불행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구원으로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그는 사명자의 삶을 전혀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원을 받자마자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한 것이 아무것도 없이, 그냥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곧장 간 겁니다. 사명자로서 살 때 누릴 수 있는 기쁨과 감격과 행복과 영광을 알지도 못하고 맛보지도 못한 채 죽었습니다. 그러니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물론 그가 한 가지 잘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일은 했습니다. 예수님을 비방하고 모독하고 저주하는 다른 강도를 꾸짖었습니다. 아마도 그에게는 악한 자를 꾸짖는 사명이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구원으로의 부르심이 있고, 또 사명자 또는 사역자로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부르심이 한자어로 소명’(calling)이고 사명mission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두 가지 부르심 중 하나만 받는 것이 아니라 둘을 동시에 받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 없이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구원으로의 부르심만 알고, 사명자로서의 부르심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니, 대다수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으로만 불러주시고 사명을 주지 않으셔서 그런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실 때, 동시에 사명자(사역자)로도 부르셨습니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크리스천이 구원은 받았지만 자기가 이 땅에서 어떤 목적과 사명을 따라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지 알지 못한 채, 아니 거기에는 별 관심도 가지지 않은 채, 그냥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가 편한 대로, 자기 뜻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좀 바꿔보자.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보자.’라고 해서 제공하는 삶 공부가 바로 <새로운 삶>입니다. <생명의 삶>예수 믿는 사람이 무엇을 믿는가’, 즉 무엇을 믿는 건지를 배우고, <새로운 삶>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를 배웁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제가 이제 떠나면서 이번에 <새로운 삶> 18기까지 마쳤는데, 아직도 <새로운 삶>을 듣지 않으신 분들이 우리 가운데 많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게 뭔지,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정확히 잘 아십니까? 모르신다면 <새로운 삶>을 들으셔야 하는데, 더 이상 저에게서는 들으실 수 없으니까 다음에 오시는 목사님에게 꼭 들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게 사실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일부 특별한 사람들만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 중 대다수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고 나서 즉시 죽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강도처럼 믿자마자 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 여기 우리도 다 살아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도 아직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 하기를 원하시는 일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나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그 목적이 무엇인지 그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자의 인생이고, 사실은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생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러한 사명자로서 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을지는 몰라도, 죽을 때까지 평생 염려와 근심과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명자의 삶이며,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대신 평안과 행복과 기쁨 속에 세상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짐을 지우시려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하신 게 아니라, 우리가 정말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그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받았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진짜 시작입니다. 그 사명을 붙들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명자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사명을 받을 때 한 가지가 끝까지 고정되는 경우는 드물고, 주신 사명에 순종해서 나아가다 보면 또 다른 사명을 맡겨주십니다. 작은 것에 순종하다 보면 더 큰 것을 맡겨주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명자들 중에 기드온이 있는데, 그가 사명을 받고 살아 나가는 모습이 좀 특이합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이어서 오늘도 그의 삶을 잠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자기 안의 바알과 아세라를 깨뜨리라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소명을 주신 하나님은, 그 전에 기드온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미디안을 대적하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시키신 일은, 자기 동네에 있는 바알 제단을 허물고 그 곁에 있는 아세라 신상을 찍어버린 후, 그것으로 불살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25 그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26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25~26)

 

여기서 우리가 첫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왜 미디안 사람들을 치기 전에 자기들에게 있는 바알 제단과 아세라 상을 먼저 부수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디안을 통한 징계를 불러온 것이 바로 이 바알과 아세라 우상 숭배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신 것은 그분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자기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지면 저쪽 신이 우리 신보다 강하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한 분만 믿지 못하고 다른 신들을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400년 넘게 살다가 조상들이 살던 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산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새 시대와 새 땅에서는 새 사고방식과 새 신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그동안 섬기던 여호와 하나님은 너무 오래된 신이어서 이 복잡한 가나안의 삶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가나안의 신들도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지역 신의 개념이 있어서 지역이 바뀌면 신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기를 중단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우상들을 섬긴 게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섬기며 많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바알도 섬기고 아세라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결국 미디안을 통한 징계를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데, 진짜 신도 아니고 그냥 인간이 만들어낸 잘못된 우상을 섬기겠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드온을 부르신 후에 처음 하라고 하신 일은 무슨 엄청난 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미디안의 대군을 맞이하여 나가 무조건 싸우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먼저 자기 눈앞에 있는, 자기 안에 있는 바알 제단과 아세라 상을 깨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만한 일,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은 것을 먼저 없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떠나게 만드는 원인부터 제거하라고 하십니다. ‘밖에 있는 적을 상대하기 전에 네 안에 있는 잘못된 것을 먼저 제거하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요구하시는 것은 무슨 엄청난 일을 이루라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내 안에 있는 바알과 아세라를 제거하라고 하십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만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것부터 없애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는 바알과 아세라라고 해서 무슨 엄청난 것을 만들어 놓고 우상 숭배를 하며 비나이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모습으로 얼마든지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분명히 섬기고 있으면서도 바알과 아세라 같이 잘못된 가나안의 우상들을 섬겼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지금 우리도 분명히 하나님을 섬기며 이렇게 예배하고 있는데, 우리 삶 속에 바알과 아세라 같은 어떤 잘못된 가치관, 세속적 생각이 들어와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젯밤에 눈이 많이 와서 오늘은 20~30명쯤 오시려나 했습니다. 그래도 그것보다 훨씬 많이 오셨습니다. 오늘 오실 때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여기저기 미끄러운데 그나마 가까이 사시는 분들은 오기가 그래도 좀 낫지만, 멀리 계신 분들은 이렇게 오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바알과 아세라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럴 때 드러납니다. 무슨 말입니까? 폭설이 오든지, 허리케인이 오든지, 주일에는 무조건 교회에 와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이렇게 눈이 오게 되면 아이고, 눈이 많이 오네. 그러면 교회에 못 가겠네. 예배를 못 드리겠네. 오늘은 쉬어야지.”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까지는 괜찮습니다.

 

눈이 많이 오고 위험하니까 오늘은 그냥 집에서 가정 예배로 해야겠다. 나중에 예배 영상을 봐야겠다.”라고 하는 건 괜찮은데, 가서 하나님께 예배하지는 못하겠다면서도 앞에 있는 그로서리에 가고, 다른 볼일을 보러 가고, 또 가족 일정이 원래 잡혀 있었는데 거기에는 가고 그런다면,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눈이 와도 다른 것은 다 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러 교회에 못 가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바알과 아세라라는 겁니다.

 

그런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까? ‘다음 주에 가서 예배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며 다음 주에 와서 해도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것은 하면서 교회 예배만은 위험해서 못 가겠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바알과 아세라의 잘못된 가치관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바알 제단과 아세라 신상이 누구의 것이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25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아버지에게 있는.” 그러니까 바알과 아세라 우상 숭배를 주도하던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주동자였습니다.

 

이것은 가나안의 사고방식이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바알을 어느 구석에 숨겨 놓고 섬긴 것이 아니라 아예 드러내 놓고 섬기고 있었고, 또 요아스 같은 마을의 지도자부터가 솔선수범해서 우상 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특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우상 숭배자의 집안에서 그 아들을 부르시는 것이 정상입니까? 이왕이면 열심히 믿는 집안과 신실한 집안에서 선택하시지, 무슨 우상 숭배 주동자의 아들을 부르셔서 사명을 주십니까? 이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만 봐도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나 부르십니다. 우리가 솔직히 인간적으로 얘기해서, 어떤 사람이 미우면 그 자녀도 별로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우상 숭배 주동자였지만, 그의 아들을 차별없이 부르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아버지의 둘째 수소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필 둘째 수소입니까? 이왕이면 첫째 수소가 더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쩌면 첫째 수소는 이미 바알에게 바쳐졌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수소에게 무슨 흠이 있어서 제물로 부적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25절에 보면 이 둘째 수소는 7년 된 수소라는 점입니다. 7년이라는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 때문에 고생한 햇수와 같습니다(1). 그러니까 이 둘째 수소는 미디안이 공격하기 시작할 때쯤 태어나서 미디안에게 고통당하는 기간 내내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살아온 소였던 것입니다. 특히 기드온의 집안에서 함께 있었던 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수소를 바치게 하심으로써 이제 미디안으로부터의 고통은 끝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아세라 상을 찍은 나무로 이 둘째 수소를 바치게 하심으로써, 이제 바알과 아세라는 죽었고 미디안에게서 받던 고난도 끝났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바로 이런 선포와 같습니다. 이전에 나를 부끄럽게 하던 죄악 된 생활은 이제 끝났다. 지난 주 동안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기억들은 이 수소(예배)와 함께 끝났다.’라는 선포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바로 그런 죄들을 태워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27)

 

기드온은 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합니다. 그런데 그가 하기는 하지만, 대낮에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하지는 못합니다. 낮에는 도저히 자기 가족들이나 친척들이나 성읍 사람들을 대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감히 낮에는 하지 못하고 밤에 어두울 때 몰래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밤에 일을 처리했다고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28 그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었으며 그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제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29 서로 물어 이르되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가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이르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28~29)

 

기드온은 미디안의 압제에 대한 고통 중에 분노를 느끼며 고민하고 있었지만,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몰래 숨어서, 그것도 포도즙을 짜는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겁이 많은 사람이었고, 소극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가 와서 큰 용사여라고 인사했지만, 그는 절대 원래부터 큰 용사였던 것이 아닙니다. 큰 용사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졸장부였습니다. 여기서도 바알 제단과 아세라 신상을 낮에 깨뜨리지 못하고 사람들이 두려워서 밤에 실행합니다. 물론 비록 밤에 했더라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분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부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가장 무서운 적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사실 주적은 미디안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 집 안에 있는 우상이 가장 큰 대적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이때까지도 부수지 못한 채 계속 살아온 겁니까? 그것은 아버지가 싫어하시고 어머니가 서운해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영적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할 때 아버지나 어머니가, 또는 자녀가 싫어하고 서운해하니까 못하는 것들이 사실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기드온은 더 이상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더러운 우상들을 깨뜨릴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명자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고통스럽게 만든 주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물론 그들은 미디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먼 데 있는 적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우상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원인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사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잘 적응해야 쫓겨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나안의 악하고 세속적인 방법을 자기들의 삶 속에 끌어들였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잘먹고 잘살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열심히 농사지은 양식과 가축을 다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그것도 7년 동안이나 계속 와서 빼앗았습니다.

 

지금 우리 삶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내 삶에 미디안 같은 존재가 있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미디안을 대적하는 게 먼저가 아니라,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일이 어렵게 된 원인은 밖에서 온 게 아니라 바로 나 자신 안에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멀리 있는 저 미디안이 문제라고 하기 전에,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시느냐고 원망하기 전에, 나 자신이 혹시 하나님 앞에서 지금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혹시라도 바알과 아세라 같이 잘못된 것을 내 삶 속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것을 먼저 돌아봐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바알과 아세라는 무엇입니까? 우상이란, 내 안에 있는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데, 우상은 내가 섬기는 대상이 아니라 나를 섬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상입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내 안에 그런 바알과 아세라가 있다면, 그것을 찍어 쪼개야 합니다. 그것으로 불을 살라 하나님께 바치는 처절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머릿속에는 세상의 가치관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보면 이게 성경적인 생각인가? 이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인가?’라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이 잘못된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대부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려면 이 세상의 가치관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다 하는 방식대로 나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길로 갑니다. ‘남들도 다 하는데 어때?’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말씀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이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며 또 듣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것을 발견하고 또 그것을 부수어야만 합니다. 지금 내 안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니면서 마치 하나님처럼 내 안에서 군림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삶에 하나님이 싫어하실 만한 것들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그런 것들을 섬기는 게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도 섬기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그것이 돈입니까? 자녀입니까? 취미생활입니까? 운동입니까? 어떤 잘못된 관계입니까? 우리 안에 세상의 가치관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계속 잘못된 것들에 물들기 때문에 매일 예배를 드립니다. 함께 모일 때 이렇게 예배드리고, 또 각자 집에서 개인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부끄러운 것들이 성령의 불로 태워지는 예배를 드려야만 합니다.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하니” (30)

 

성읍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깨뜨린 것이 기드온이라는 것을 알고 몰려옵니다. 그러면서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에게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상 숭배자가 당연히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상을 깬 사람을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하며, 지금 완전히 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걸 보십시오. 하나님의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생각을 하나님의 백성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든지 지금 우리에게도 가능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 반대되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열렬한 우상 숭배자였고 주동자였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죽이겠다고 내놓으라 하니까 오히려 자기 아들을 적극 변호하고 나섭니다. 그런데 기드온을 변호하는 그의 말 속에 유머와 기지가 담겨 있습니다.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31)

 

이 말의 뜻은 만일 바알이 진짜 살아 있는 신이라면 기드온이 바알의 신전을 다 때려 부수어버렸으니까 바알이 그를 직접 심판하거나 징계할 일이지 왜 너희들이 설치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심지어 바알을 위해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옳은 말 아닙니까? 우상 숭배자는 죽임을 당해야 하는데, 즉 사형인데, 그렇게 율법에 있는 말을 오히려 우상 숭배 주동자가 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일로 인해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요아스 자신이 지금까지 바알 숭배, 아세라 숭배를 주도하던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도 그게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게 진짜 신도 아닌데 그걸 깨뜨렸다고 뭘 이렇게까지 그러냐?’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니, 가짜인 걸 알면서도, 그러면 왜 우상 숭배를 했습니까?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알면서도 쉽게 그만두지 못하는 겁니다. 잘못된 걸 아는데 그만두지 못합니다.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 (32)

 

여룹바알은 쉽게 말해서 바알 파이터(Baal Fighter)’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거짓된 신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 기드온의 임무였습니다. 우리도 지금 세상에 살면서 거짓된 신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세상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소리치는 신들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정말 좋은 책이 있는데, 몇 년 전 나온 책으로서, 2년 전 돌아가신 팀 켈러(Tim Keller) 목사님이 쓴 <내가 만든 신>이라는 책입니다. 혹시 아직 안 읽어 보셨으면 꼭 읽어 보십시오. 영어 제목은 <Counterfeit Gods>인데, 영어 책으로도 베스트셀러였고 한국 책으로도 베스트셀러였으며, 우리 교회 도서실에도 있습니다. 안 읽어 보신 분들은 꼭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이미 우리 안에는 세속적인 가치관들과 방법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7년의 세월을 끝장낼 제물을 찾아야만 하는 겁니다. 나만의 7년 된 둘째 수소를 찾아서 제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7년 된 둘째 수소를 바쳤습니다. 이것이 쉬웠겠습니까? 그의 집안은 이 귀한 수소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7년 내내 걱정하며 신경 써서 키웠을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은 시간이 왔고, 미디안이 주던 고통은 끝났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해방될 수 있다면 7년 동안 아껴온 수소를 바치는 것이 뭐가 아깝겠습니까?

 

 

2.   믿음 없는 기드온

 

“33 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35 기드온이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 (33~35)

 

사사기 6장은 35절에서 끝나면 아주 은혜롭고 좋습니다. 지금 여호와의 영’(34) 즉 성령께서도 기드온에게 임하신 상태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기드온과 함께 싸우기 위해 속속 모여드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담대하게 나아가 싸우는 기드온 이야기가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계속 머뭇거리며 표징을 구합니다.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6~37)

 

지금 기드온 자신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36)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기드온의 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드온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양털을 가지고 하나님께 요청을 드립니다.

 

우리가 말씀을 아는 것과 진짜로 믿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여기서 기드온이 보여줍니다. 우리도 솔직히 성경을 읽으며 그 내용을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 말씀이 나에게 살아서 역사하지를 않는 겁니다. 말씀 따로 내 삶 따로, 이것이 우리 신앙의 문제입니다.

 

기드온도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양털을 가지고 하나님께 또 요청하는데, 이것을 보며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둘 때 이슬이 양털에만 내리고 주변 땅은 말라 있으면 하나님께서 정말 자기 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으로 알겠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 요청입니까? 하나님이 화를 내실 만한 내용이 아닙니까?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8)

 

놀랍게도 하나님은 아무 소리 없이 기드온이 요청한 그대로 들어주십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이슬이 양털에만 내리고 주변에는 안 내립니까? 그러니 기적이 일어난 게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대로 나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기드온은 또 다시 한 가지를 요청합니다.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39)

 

처음에는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주변은 마른 땅이 되게 해달라고 하더니, 그래도 못 믿어져서 이제는 그 반대로 양털만 마르고 주변 땅에는 이슬이 내리게 해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혹시 어떤 자연 현상으로 여기에만 이슬이 내리고 저기는 안 내릴 수 있지 않겠나?’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것을 거꾸로 하여, 진짜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면 한 번만 더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도 좀 미안한지, 뭐라고 합니까?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자기도 지금 자기가 잘못하는 것을 느끼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 인내가 많으십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40)

 

하나님은 기드온의 말을 그대로 들어 주십니다. 사실 이러한 기드온의 모습은 불신앙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약속을 받았습니다. 양털로 시험한 것도 다 들어 주셨습니다. 그쯤 되면 믿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증거는 주어져 있고 약속을 받았지만, 계속 의심하며 주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정말 제 인생을 책임져 주시나요? 정말입니까? 보니까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저를 인도해 주시나요?”

 

증거가 부족해서 그런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그 정도로 약속이 확실하면 이제는 믿고 가면 좋겠는데, 자꾸 묻고 또 묻고 또 의심합니다. “주님, 맞습니까? 진짜입니까? 정말 해 주실 거예요? 정말이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것이 사명자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사명자라고 해서 믿음이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사명자인데, 하나님이 사명을 주신 사람들인데, 그런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다고 거기서 끝난 게 아닙니다. 사명을 받았다고 완벽해지는 게 아닙니다. 여전히 불완전하고 여전히 의심이 많습니다. “하나님, 진짜입니까? 정말입니까? 정말 이게 됩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내하고 오래 참으시며 계속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 수준에 맞추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그걸 빨리 깨닫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지금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발견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그 사명을 따라 살고 계십니까?

 

일단 믿고 구원은 받았으니까 일주일에 한 번은 그래도 교회에 가주고, 나머지는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과 별로 다를 것 없이 그냥 좋은 음식 먹고, 사람들 만나서 놀고, 술 마시고, 여행가고, 운동하고, 취미생활을 즐기고, 아이들 챙기고... 그렇게만 살고 있습니까? 그게 다입니까? 그게 인생의 전부입니까? 그게 지금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이 사명일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다른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틀 안에서 주신 사명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발견하고 또 그것을 행하고 계십니까?

 

교회도 단순히 우리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즐겁게 지내는 곳이 아닙니다.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들라고 하신 대 사명을 받은 사명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행하고 계십니까? 대 사명을 이루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예배드리고, 교제하고, 사역하고, 섬기고 하는 것이 모두 다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들라라고 하신 대 사명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중에서 안 죽을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다 죽습니다. 그 말은, 우리 모두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100%입니다. 누구는 조금 빨리 가고 누구는 조금 천천히 간다 뿐이지, 전부 다 갑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분들 보면서 아이고, 안 됐다.” “쯧쯧, 참 안 됐다.”라고 하며 슬퍼하지만, 그분들은 그냥 우리보다 먼저 가신 것뿐입니다. 우리도 그 길을 분명히 갑니다. 그렇다면 그날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 하나만 해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떨면서 그 자리에 서는데,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을 어떻게 아무 준비 없이 가겠습니까? 여러분도 나름대로 노후대책(retirement plan)을 세워놓으셨을 것 같습니다. 굉장히 잘 준비해 놓은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일단 나라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Social Security가 있습니다. 노후대책을 사람들이 다 열심히 준비합니다.

 

그런데 사후 대책은 세워놓으셨습니까? ‘사후(死後)’, 즉 죽음 이후에 관한 대책으로 무엇을 세우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주신 그 사명을 따라 사는 삶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사명을 따라 사는 인생이야말로 최고의 사후 대책입니다. 노후대책은 기껏해야 20~30년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후 대책은 영원입니다. 이것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긴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감으로 아름다운 사명자로서의 복을 누리며, 최고의 사후 대책을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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