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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일 주일예배
✦ 믿음 40 ✦
오해와 갈등을 극복하는 공동체
(여호수아 22장 10~20절)
[들어가는 말]
우리가 살다 보면 서로 오해해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우가 있지 않으십니까? 아주 사소한 오해 때문에 큰 갈등을 낳기도 합니다. 오해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그중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집에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던 며느리가 시집왔는데, 시집와서도 열심히 교회를 나가니까 믿지 않는 시어머니가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야단치고 구박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는 교회에 가지 못하고 혼자 방에 들어가 찬송하고 기도하며 어려움을 이겨내려 애썼습니다. 하루는 며느리가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그것을 밖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교회 사람들이 찾아와서 시어머니에게 간곡히 말씀드렸습니다. “며느님이 교회에 아주 열심히 다니는데, 어머님도 이제 그만 마음을 푸시고 같이 나오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시어머니가 대답합니다. “나도 이제 좀 그래볼까 했는데, 며느리가 괘씸해서 나가기가 싫어요.” “아, 그러세요? 무엇 때문에 그러신 데요?” “아니, 며칠 전에 며느리가 방에서 노래를 부르기에 뭘 부르나 가만히 들어보니까, 자기가 이 시어미를 이기겠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제가 교회를 나가겠습니까?”
그날 며느리가 부른 찬송가는 342장 “너 시험을 당해”였습니다. “너 시험을 당해 죄짓지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치라. 너 시험을 이겨 새 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시어머니가 구박하니까 이 시험을 이기게 해달라는 마음으로 부른 겁니다.
그런데 귀가 좀 어두운 시어머니가 그 가사를 잘못 들은 것입니다. “너 시어밀 당해 죄짓지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치라. 너 시어밀 이겨 새 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교회에서는 주 예수를 믿어 시어미를 이기라고 가르치며 그렇게 노래까지 부르게 하는데, 자기가 어떻게 교회를 나가겠느냐고 따졌습니다. 가사를 잘못 듣고 기분 나빠서 안 나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오해는 얼마든지 웃고 넘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오해는 상당히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큰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1. 요단 동편 지파들이 단을 세운 이유
저번에 살펴보았듯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는 성공적으로 전쟁을 끝내고 여호수아의 축복을 받으며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가족들이 기다리는 요단강 동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갑자기 요단 강가에 큰 제단을 하나 세웁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제단을 쌓았는데 보기에 큰 제단이었더라” (10절)
이들이 여기서 왜 이 단을 쌓았는지가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뒷부분을 보면 이들이 왜 이렇게 했는지가 설명됩니다.
“23 우리는 주님을 따르지 않고 등을 돌리려고 이 단을 쌓은 것이 아닙니다. 또 드리는 이 단을 번제와 곡식제사와 화목제사를 드리는 제단으로 사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 단을 제단으로 쓸 목적으로 쌓았다면 주님께서 벌써 우리를 벌하셨을 것입니다. 24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단을 쌓은 것은, 훗날 당신들의 자손이 우리의 자손에게 '너희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25 너희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아! 주님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 강을 경계선으로 삼으셨으니, 너희는 주님에게서 받을 몫이 없다' 하고 말하면서, 당신들의 자손이 우리의 자손을 막아서, 주님을 경외하지 못하게 할까 염려가 되어서, 26 우리가 이 단을 쌓은 것입니다. 이것은 번제물을 드리거나 다른 어떤 제물을 드리려고 쌓은 것이 아닙니다.” (23~26절, 새번역)
요단 동편 지파들이 전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한 가지 마음에 의심이 생겼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 요단강 계곡이 너무 깊고 또 우기 때는 물이 넘치기에 동쪽과 서쪽이 서로 교류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 전쟁을 마치고 돌아가는 요단강 동편 지파들은 장차 이 요단강을 기준으로 하여 동이스라엘과 서이스라엘로 나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라도 동편에 사는 자기들을 아예 이스라엘로 인정하지 않고 그 근처에 있는 모압이나 암몬처럼 이방인으로 여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든 것입니다.
지금 요단 동편 지파들은 무려 7년 이상의 긴 기간 동안 다른 지파 사람들을 위해 함께 싸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속에는 나중에 본토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경계는 요단강이고 그 건너편은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하면서 자기들을 이스라엘에서 소외시킬 것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이스라엘 소속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해놓기 위해 이 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의미로 생각하면 굉장히 귀한 일입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자기들이 이스라엘 안에서 소외나 차별을 받지 않고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강력히 표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단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기 때문에, 그만큼 동편 지파들은 영적으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그것 때문에 모세가 명령한 약속을 잘 지켰고 7년 이상 전쟁에 참여했으며, 다 끝난 다음에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든 생각은, 앞으로 요단 동편에 사는 자기들이 차별이나 무시를 당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요단 동편은 그만큼 가나안 땅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의도는 아주 좋았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사실 이것은 아주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축복하여 보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한 것처럼 그들은 그대로 살면 되는 겁니다.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을 왜 배척하며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1) 단을 쌓은 첫 번째 이유: 지역적 열등감
이것은 어떻게 보면 비교 의식에서 나온 잘못된 염려입니다. 남과 비교하면 항상 결과가 나쁩니다. 가나안 본토에 사는 지파들과 자기들을 비교하니까 걱정이 생긴 겁니다. 자기들은 요단강 서편의 본토에 비하면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그러다 보니 자기들이 2류 백성처럼 열등하다고 생각된 겁니다. 자기들과 본토를 비교해 보니까 지역적 열등감이 느껴졌습니다.
요단강 동편 지파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상징인 성막이 본토 사람들과 함께 있고,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여건 아래 산다는 것이 부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막과 멀리 떨어져 아무 때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나올 수 없는 자기들의 환경 때문에 열등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서쪽 본토 사람들이 ‘너희들은 저희 가서 살아라.’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자기들이 요청해서 그쪽에 가서 살기로 허락받고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런데 정작 그쪽에서 살려고 하다 보니까 ‘우리는 너무 외지다. 우리는 1류가 안 되고 2류인 것 같다.’라는 식으로 괜히 열등감을 느끼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불리하다고 느낄 수 있는 조건이 오히려 하나님의 복을 받는 데에 최선의 조건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자기들이 요단강 동편에 있기 때문에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지파 간의 갈등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고, 또 본토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순수하게 믿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미국의 수도는 워싱턴 디시(Washington DC)인데, 워싱턴 DC가 수도라고 해서 모든 면에서 다른 도시들보다 더 뛰어난 게 아닌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워싱턴 DC는 행정의 수도이지, 사실 경제적으로 보면 다른 도시들, 특히 뉴욕 같은 곳이 훨씬 더 큽니다.
미국은 도시마다 독특한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고 볼거리가 있습니다. 물론 뉴욕이나 LA같이 화려하고 문화적으로 앞서간다고 하는 도시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 콜럼버스에 산다고 해서 반드시 뒤처진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컬럼버스가 지금 굉장히 발전했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살고 싶어 하는 도시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자주 교류하는 클리블랜드 교회에 있는 분들은 콜럼버스에 성지(?) 순례를 옵니다. 여기 음식을 먹겠다고 오고, 또 이것저것 사러 옵니다. 콜럼버스가 오하이오에서 다른 한인들에게는 상당히 선망의 대상이 되는 도시라는 걸 알고 계십니까?
사실 미국은 도시의 크기가 달라도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누리고 경험하는 것은 비슷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수도인 서울을 비롯해서 수도권과 지방 도시 사이에 문화적, 경제적 차이가 큽니다. 그래서 이번에 한국 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낼 때도 서울과 수도권 일부를 대상으로 했지, 전국을 대상으로 하지 않은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기업들은 대부분 서울에 집중되어 있고, 출세하려면 서울로 진출해야 하기 때문에 지방에 있는 젊은이들은 자기 미래를 위해 서울로 올라가려고 애씁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콜럼버스가 너무 시골이라 작아서 뉴욕이나 엘에이 같은 대도시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사실 그런 곳은 물가만 비쌉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공하려면 대도시로 진출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지키고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것입니다. 큰 도시에 있느냐 작은 도시에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지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쳐 줍니다. 여호수아는 요단 동편 지파들을 집으로 보내며 그렇게 당부한 바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5절)
‘너희는 저쪽 변두리로 가니까 2류지만, 그래도 주님의 말씀을 잘 지켜라.’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마음과 성품을 다해 섬기라. 그럼 된다.”라고 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또 복을 받고 누리며 사는 비결은 최고 일류 학교를 나온다거나 엘리트 그룹에 속한다거나 대도시로 진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다 이루고도 타락하거나 잘못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정말로 복을 받고 누리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그렇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어디에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사느냐를 보시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를 보십니다. 어떤 환경에 있느냐를 보시는 게 아니라, 그 환경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 신실하게 살고 있느냐, 거기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어디인가를 따진다면 자꾸 위로만 갈 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처럼 낮은 곳으로 향해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과 반대 방향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세상의 좋은 것을 차지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대도시의 대기업에 진출한다거나, 일류대학을 나온다거나, 엘리트 그룹에 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런 것들이 나쁘니까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면 하면 좋습니다. 다만 그런 것들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일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아무리 대도시, 최고 학교, 최고 직장, 가장 높은 사회적 위치에 올라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공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우리가 뒤처지지 않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어떤 곳에서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며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열심히 기도하는 데 뒤처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만일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시원치 않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마저 없어서 신앙생활을 대충 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뒤처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텐데, 그것을 믿으시죠? ‘나는 반드시 죽는다.’라는 것을 믿으시죠? 이 땅에서 우리는 다 죽습니다. 죽으면 예수님을 주와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거하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죠? 아멘? ‘아멘’이 영 약하네요. 별로 확신이 없으신 것 같은데,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천국에 거하게 된다는 것을.
그러니까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서 몇 년, 몇십 년, 몇백 년도 아니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가 계산할 수도 없는 긴 세월 동안 살게 되는데, 그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뒤처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어떤 면으로 볼 때 세상 기준으로 조금 부족한 것이 오히려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나가면 좋겠지만, 사실 너무 잘나가면 머리가 복잡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틈이 전혀 없을 때가 많습니다. 너무 성공하니까 하나님을 만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기준으로 보면 조금 부족한 면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런 예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 위대한 왕인 다윗입니다. 다윗은 처음부터 금수저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베들레헴은 당시 아주 작은 시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시골 촌놈’이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그는 형제 중 막내로 형들에 비해 인정받지도 못했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다음 이스라엘 왕이 될 자가 누군지 보겠다고 할 때 다윗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들에서 그냥 양을 치게 놓아둔 채 다른 형들만 사무엘 앞에 나오게 하고 다윗은 부르지도 않을 정도로 집안의 천덕꾸러기였습니다. 완전히 무시당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조건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밖에서 양들을 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랑할 수 있었고, 더 순수하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주 괴로운 환경이었고 무시당하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그 어린 나이에 들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시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시를 지을 수 있었는지 놀랍습니다.
다윗은 들판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열심히 물맷돌을 훈련했고, 맹수들이 공격해 올 때마다 그 물맷돌로 맹수들을 때려눕히는 실력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골리앗도 때려눕혔고, 용맹한 장수이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왕이자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도 실수하고 죄를 지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는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혹시 ‘나는 남들보다 조건이 열등하다. 내가 저 친구처럼 돈이 많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지금 이러지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그렇게 내가 조금 부족한 조건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아주 훌륭하게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열등한 면들, 나의 부족한 면들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지난주 한국에서 화제가 되었던 사건이 하나 있는데, 미국에서 최고의 기업이 된 엔비디아(Nvidia)의 젠슨 황(Jensen Huang) CEO가 한국에 가서 삼성 이재용 회장과 현대자동차 정의선 회장과 더불어 어느 치킨집에서 모임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거기 있던 손님들 음식에 대해 전부 다 돈을 냈다고 합니다. 또 사람들이 젠슨 황의 기를 받겠다고 그 치킨집으로 몰렸다는데, 예수를 믿으라면 안 믿으면서 무슨 기를 받겠다고 가다니, 미신도 그런 미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렇게 어마어마한 돈을 가진 부자인 그 사람들이 부러우십니까? ‘저 사람들은 재벌 3세로 태어나 얼마나 행복할까? 나도 저 재벌들처럼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로 태어나 모든 것이 다 주어졌다면 내가 제대로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삼성이나 현대차보다 엔비디아가 훨씬 더 높게 평가받는 기업이 아닙니까? 젠슨 황 회장은 아홉 살 때 대만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이민자 가정 출신입니다. 그러니까 1.5세인데, 환경이 그렇게 좋지도 않았습니다. 오리건(Oregon)으로 이민 왔고, 최고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냥 오리건 주립대학교를 나왔습니다. 물론 대학원은 좋은 학교를 나왔지만, 그러니까 조건으로 따져서 우리보다 그렇게 나을 조건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 자녀보다 더 낫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두 명이 재벌 3세라고 자동으로 회장의 자리에 오른 게 아닙니다. 능력이 없으면 당장 잘리는 게 요즘 시대입니다.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그 자리에 지금 있는 겁니다. 놀 것 다 놀고 쉴 것 다 쉬며, 그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간은 모든 것이 주어질 때 오히려 타락하기가 더 쉽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않을 때 성공하면 그 성공이 오히려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솔로몬이 세상에서 역대 최고 부자라고 알려져 있고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최고의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인데 그냥 금방 타락해 버렸습니다.
좋은 환경에 있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열왕기나 역대기를 읽어 보면, 최고의 왕인 아버지 밑에서 최악의 아들이 나오고, 또 최악의 아버지 밑에서 최고의 아들이 나오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내가 바로 서 있느냐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렵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로 사랑하고 마음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면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며 거기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철저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자녀들이 세상에서는 성공했는데 하나님 앞에서 실패하면 큰일 아닙니까? 아무리 초일류 학교를 나오고 연봉 백만 달러가 넘는 직장을 다닌다고 해도, 뒤로는 비리를 저지르거나 부끄러운 짓을 하고 돌아다닌다면 그게 정말 성공이겠습니까?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부모도 모르고 이웃도 모르고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 된다면 그것이 성공이겠습니까?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세대뿐 아니라 우리 자녀들이, 또 자녀의 자녀들이 세상에서는 성공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실패하는 인생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성공하면 좋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성공하는 인생이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2) 단을 쌓은 두 번째 이유: 의심
요단 동편 지파들은 지금 7년이 넘는 본토에서의 전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그 사실 자체가 벌써 이스라엘은 하나라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의심하고 믿지 못해서 큰 단을 쌓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쪽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 하는지라” (11절)
아주 자세하게 이 소식이 서쪽에 금방 전해집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 서쪽에 이 단을 쌓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단을 쌓은 것은 그들이 의심하고, 상상하고,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주 쉽게 잘못하는 일이 이렇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한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걱정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일어날 가능성이 얼마나 됩니까?
우리가 미리 준비하고 대비하는 것은 좋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되고, 그러면 불필요한 오해도 많이 생기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며 관계가 나빠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여호수아의 말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은 겁니다. 자기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을 아무리 열심히 섬겨도, 요단 서편의 본토 사람들이 자기들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길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계속 상상한 겁니다. 요즘 말로 소설을 쓴 겁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분명히 이스라엘 사람이고 본토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요단 강가에 큰 단을 쌓은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들 쪽이 아니라 본토인 서쪽에 쌓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여호수아가 한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 겁니다. 여호수아가 한 말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 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의심과 걱정은 이스라엘 전체에 엄청난 오해와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요단 동편 지파들이 나쁜 의도로 단을 쌓은 것은 아닌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이었고 이스라엘 전체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그냥 여호수아의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서 살면 되는 거였습니다.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그들을 누가 감히 무시하며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여호수아의 말을 그대로 믿지 못했고, 그래서 큰 단을 쌓았습니다. 그들이 믿지 못한 것은 미래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과 상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고 염려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의 염려는 엄청난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쭉 읽어 보면, 나중에 이스라엘에게 문제가 된 것은 그들이 멀리에 살아서 이스라엘에서 자기들이 떨어져 나간 게 아닙니다. 이런 것이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우상 숭배로 나가서 문제가 된 것이지, 멀리 떨어져 살아서 문제가 된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미리부터 염려해서 자기도 힘들고 남들에게도 오해를 일으킵니다. 상대방의 말을 의심하니까 걱정이 되고, 걱정이 되니까 엉뚱한 일을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오해를 일으키고, 그것이 큰 갈등으로 발전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너무 상상을 많이 하거나 예민하게 반응하면 좋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섬기는 데는 민감해야 하지만, 괜히 의심하는 데에 민감해서는 곤란합니다.
2. 전쟁의 위기와 그 해결책
요단 동편 지파 사람들이 큰 단을 쌓았다는 소문을 들은 서편의 본토 사람들은 동편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벌써 저버렸다고 오해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12절)
의심이 걱정을 일으키고, 걱정이 엉뚱한 짓을 하게 해서, 결국 큰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제 본토 사람들은 동편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반역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는 심각한 사태로까지 일이 발전합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15 그들이 길르앗 땅에 이르러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아가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16 여호와의 온 회중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서 돌아서서 너희를 위하여 제단을 쌓아 너희가 오늘 여호와께 거역하고자 하느냐” (15~16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른 단을 쌓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예배도 한 장소가 아니라 두 개의 장소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히 한 것입니다.
함께 예배하는 것을 거부하려고 다른 단을 쌓았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반역 사건 때문입니다. 모압 평지에서 이방 신인 바알 브올의 제사에 참가했다가 많은 사람들이 재앙으로 죽었고, 아직도 그 죄에서 정결함을 받지 못했다고 그들은 이때까지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17 브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회중에 재앙이 내렸으나 오늘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받지 못하였거늘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하여서 18 오늘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고 하느냐 너희가 오늘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 (17~18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른 단이라고 하면 바로 우상 숭배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바알 브올의 죄에 빠진 후 아직까지도 완전히 깨끗함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급히 그 죄의 불을 끄기는 했지만, 완전히 죄를 지을 가능성까지 없앤 것은 아니라는 말이고, 얼마든지 그런 일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죄를 원천 봉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사소통이 부족해서 같은 이스라엘 민족끼리 큰 전쟁이 일어날 뻔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커뮤니케이션이 문제입니다. 우리 말에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고 여호수아라고 해도, 사람인 이상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오해했고 큰 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잘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무조건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하며 흥분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일단 대표들을 보내서 동편 지파들의 말을 먼저 듣게 한 일입니다.
“13 이스라엘 자손이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를 길르앗 땅으로 보내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를 보게 하되 14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한 지도자씩 열 지도자들을 그와 함께 하게 하니 그들은 각기 그들의 조상들의 가문의 수령으로서 이스라엘 중에서 천부장들이라” (13~14절)
그 소식을 듣고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인 제사장 비느하스를 보냅니다. 그를 대표로 보내는데, 그와 함께 열 지파 대표 열 명을 보낸 겁니다. 그런데 비느하스가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그 민수기 25장 사건 때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 브올에 속아서 음행에 빠졌을 때 이방 여자와 간음을 저지르던 이스라엘 남자를 창으로 찔러 죽인 사람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면서 전염병이 수그러들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했기에 이스라엘에게 임하는 재앙을 막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비느하스를 리더로 하여 대표단을 요단 동편으로 보냈습니다.
우리가 오해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이 바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무조건 비난하고 공격할 것이 아니라, 직접 당사자의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있고 B라는 사람이 있는데, A가 B에게 와서 C라는 사람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합니다. 그러면 대개 어떻게 됩니까? A가 B에게 와서 “C가 너에 대해서 안 좋게 얘기하더라.” 이러면 B는 막 흥분하면서 “C가 뭔데, 자기가 뭔데 나를 욕해?” 이러면서 흥분하고 분개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너무나 어리석은 태도라는 겁니다. 사람은 대개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말하고 불리한 것은 쏙 빼는 습성이 있습니다. 악한 의도로 그러는 게 아니더라도 대개 그렇게 됩니다. 특히 자기에게 불리한 것에 대해서는 뇌가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경우가 발생하면 반드시 당사자에게 반드시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B가 C에게 가서 “당신이 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라고 확인하는 게 필요한 겁니다. C의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요즘엔 그런 경우가 별로 없는데, 저도 이전에 그런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그러면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기 전까지는 결론을 내리지 않고 보류해 둡니다. 그러니까 A의 말도 들어보고 C의 말도 들어보고, 다 들어보고 나서 판단하는 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대개 들어보면 둘 다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의 입장에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들어보면 대충 이래서 이랬구나 하며 상황이 파악되고, 어디서 오해가 생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A는 A대로 자기가 기억하는 것이나 원하는 것만 이야기하고, C는 C대로 또 자기가 기억하거나 원하는 것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종합해서 보면 전체 스토리가 파악되는 겁니다. 그리고 평소에 누가 더 믿을 만한 사람인지도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어떻게 사는 사람인지도 여기서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비느하스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들은 동편 지파들에게 가서 야단부터 치는 것이 아니라 이 이 문제가 대단히 심각하다는 것을 바알 브올의 사건을 언급하며 지적합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더 드는데, 이스라엘 백성 몰래 여리고 성의 물건을 감추었다가 아이 성 싸움에서 패한 사건을 언급합니다.
“세라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에 대하여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의 죄악으로 멸망한 자가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느니라 하니라” (20절)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의 죄는 그 한 사람의 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그 죄를 그냥 두면 이스라엘 전체의 공동 책임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비느하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만약 실제로 살아보니까 요단 동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본토로 넘어와서 좀 좁더라도 같이 지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의 소유지가 만일 깨끗하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지를 나누어 가질 것이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외에 다른 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거역하지 말라” (19절)
지금 이스라엘의 관심은 땅이나 집 문제가 아니라 자기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요단 동편 사람들이 성막에서 멀기 때문에 자기들은 덜 거룩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서, 그 땅이 깨끗하지 않으면 서쪽 본토에 와서 같이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자 요단 동편 지파 사람들은 자기들의 입장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번제나 곡식제사를 아무데서나 함부로 드리는 일이나, 다른 제물을 바칠 불법적인 단을 만듦으로써 주님을 거역하거나 배반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 우리 하나님의 성막 앞에 있는 그 합법적인 단 외에는 어떤 제단도 쌓지 않을 것입니다.” (29절, 새번역)
그러니까 자기들이 쌓은 단 모양을 보라고 하며, 그것은 제사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자기들이 이스라엘의 축복에서 끊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자기들도 이스라엘이라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단을 쌓았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비느하스와 이스라엘 대표로 온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합니다.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동쪽의 므낫세 자손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이번 일로 주님께 반역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을 알았소. 이제 당신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주님의 손에서 건져 내었소.’” (31절, 새번역)
비느하스는 여기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았다.’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오해를 풀어주셔서 전쟁을 막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오해를 받았을 때 다툼이 일어나지 않고 잘 풀린다면, 그것이 내가 화술이 좋고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풀어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느하스가 돌아와서 설명해 주니까, 그것을 들은 서편 지파 사람들은 기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33).
[나가는 말]
주님의 교회가 하나 되고 말씀과 사랑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세상의 어떤 어려움이 와도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분열되고 서로 다투고 시험에 들면 아무리 세상에서 일이 잘되고 가정이 평안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롬 12:1)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몸으로 하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터에 있든지, 가정에 있든지, 길거리에 있든지, 교회에 있든지,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직장이나 사업이 잘되고, 아무리 가정이 평안하고, 아무리 다른 사람과 관계가 좋고, 아무리 모든 것이 잘 풀려도, 교회에 어려움이 있다면 마음에 괴로움이 항상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어떤 무슨 조직이나 건물 같은 게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려울 때 우리가 어려운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모하고 지키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그러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경이나 어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지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과 성품을 다해 섬기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나게 하시며 부흥을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공동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하나 됨의 공동체로서 계속해서 함께 쓰임받으며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