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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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QtNgNkQ12tc?si=ISwvS0nLfO726NY4&t=168
2025년 10월 19일 주일예배
✦ 믿음 39 ✦
요단강 동편 지파들을 축복하여 보내다
(여호수아 22장 1~9절)
[들어가는 말]
제가 어렸을 때 집에서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보면 책이 많았습니다. 신앙 서적도 있었고, 제 아버지가 어린 시절 일본에 가서 학교를 다니셨기 때문에 일본 책들이 꽤 있었습니다. 또 군인 출신이셨기 때문에 일본 책들은 주로 군대나 전쟁과 관련된 책들이었습니다.
또 사진첩도 많아서 아버지 방에 들어가 이 책, 저 책 꺼내보는 걸 좋아했는데, 특히 제가 가장 좋아하던 책이 미국 <Life> 지에서 발행한 화보였습니다. 영어보다 사진이 많아서 좋아했습니다. 여러 중요한 사건의 사진들이 있었고, 특이한 사진들도 많았습니다. 그때 어린 나이에 신기했고, 세계 다른 나라들에 대해 아주 궁금히 여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중 한 미국 해군이 한 간호사 여성과 키스하는 사진이 있었습니다. 그 사진은 독일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한 미군 수병이 너무 기뻐서 지나가던 간호사 아가씨를 그냥 끌어안고 키스한 장면을 기자가 포착하여 찍은 사진이었는데, 그것이 <Life> 지에 실려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미군은 당시 많은 병력을 유럽에 파병해서 전쟁을 치렀습니다. 동시에 태평양 전쟁까지 치렀습니다. 마침내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미국 군인들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꼭 군인이 아니더라도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고 싶었을 것이 당연합니다.
2001년 9.11 테러 사태 이후 2003년 3월에 이라크전이 시작되었고, 그 후 수많은 미군이 참전했습니다. 그 후 7년 5개월 만인 2010년 8월에 미군 전투 병력이 이라크에서 완전 철수를 마쳤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9.11 테러 사태 직후 시작된 전쟁이 2021년 8월 30일에 미군이 완전히 철수함으로 공식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때 아프가니스탄에 계셨던 선교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당시 아프가니스탄 밖으로 나갈 때의 어려웠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분쟁 지역에 군대를 파병하는 것도 큰일이지만, 병력을 철수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이라크 주둔 군인들은 다들 기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미군 철수에 대해 20년간의 희생이 허무하다고 느끼며 상실감과 좌절감과 분노를 느끼는 군인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물론 기나긴 전쟁이 끝났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는 군인들과 가족들도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군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1. 요단 동편의 지파들에 대한 여호수아의 칭찬 (1~3절)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요단 동편에서 이미 땅을 분배받은 지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 중 절반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군대 중에서도 가장 전투력이 강한 전사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광야 생활을 하던 시절에 미디안 광야의 여러 사나운 부족들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는데, 그때 이들은 가장 앞에 서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승리한 이스라엘 군대는 전과에 따라 빼앗은 적의 가축을 나누어주었는데, 이들은 전쟁에서 공이 아주 컸기 때문에 많은 가축을 상으로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곧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이 많은 가축을 데리고 이동하거나 충분히 먹일 수 있는 목초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너기 전, 넓게 펼쳐진 요단강 동쪽 땅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가서 이 요단강 동쪽 땅을 자기들에게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모세는 처음에 그들을 향해 크게 화를 냈습니다. 지금 모든 백성이 함께 힘을 모아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정복 전쟁을 벌이려고 하는 이 중요한 때에 자기들만 쏙 빠지겠다는 것은 이기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가장 싸움을 잘하는 이 지파들이 요단강 동편에서 기업을 달라고 했을 때 다른 지파들도 그것을 들으며 주춤거리고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세 지파(정확하게는 2.5 지파)의 지도자들은 말하기를, 여자들과 아이들은 가축과 함께 이 땅에 정착하게 두고, 남자들은 다른 지파들과 함께 가서 싸울 것이며 전쟁이 다 끝난 후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결국 모세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세 지파의 용사들은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를 이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이들에게 모세와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가장 앞장서 나아가 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스라엘에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던 이들 2.5 지파는 군소리 없이 순종했습니다. 오히려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제 7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이 지파들은 가장 앞장서 나아가 싸움으로써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들은 과거의 약속을 지킨 의리의 사나이들이었고 또 용사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이들에게 여호수아는 뭐라고 합니까?
“1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2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3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1~3절)
전쟁이 끝나고 땅 분배가 끝나자, 여호수아는 약속을 지킨 이 2.5 지파를 불러서 칭찬하고 상을 주며,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요단강 동편 땅으로 그들을 돌려보냅니다. 먼저 여호수아는 이들이 약속을 충실하게 지켰다는 점을 칭찬합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어떻게 보면 신앙보다는 먹고사는 문제를 우선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목축 때문에 요단강 동편의 땅을 먼저 차지하고 서쪽 본토를 포기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모세는 그들에게 본토를 정복하는 전쟁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그냥 보면 모세가 그들에게 억지로 전쟁에 참여하도록 강요한 것 같고, 그래서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들이 ‘우리는 요단강 동편 이쪽 땅이 좋은데, 저쪽에 꼭 가서 싸워야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모세가 그들에게 안 싸우면 안 된다고 강요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싸우기 싫은데 와서 싸운 것이 아니라는 걸 우리가 기억해야겠습니다. 오히려 모세는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이스라엘의 일원으로 계속해서 속하게 되는 기회, 하나님의 언약을 나누는 공동체 안에 계속해서 소속되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요단강 동편에 그냥 머물고 정복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나머지 지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 ‘우리는 이스라엘이 아니다.’라고 하며 이스라엘에서 떨어져 나가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 됩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는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고, 우리가 알아서 살겠다.’라고 했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그 복의 약속을 함께 나누는 데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때 요단강 동편 지파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실하게 잘 감당했습니다. 나중에 다 이긴 후 수많은 전리품도 받아서 집으로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들도 이스라엘의 일원으로서 이스라엘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엄청난 축복의 언약 안에 계속 포함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요단강 동편 지파들은 자칫 잘못하면 목초지만 차지하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놓칠 뻔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고 자기들만 떨어져 나갈 뻔했는데, 다른 지파들과 함께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그 복을 계속해서 함께 누리는 언약 공동체 안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끝까지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것은 다른 지파들을 위해서 싸운 것이라기보다는, 결국 자기들을 위해서 싸운 것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교회에 오실 때 어떠셨습니까? ‘아이고, 주일인데 하필 왜 오늘 이렇게 비가 많이 오냐? 비도 오는데 좀 쉬자. 귀찮다. 오늘은 그냥 넘기고 다음에 가지.’ 혹시라도 이렇게 느끼셨습니까? 아니면 ‘교회에 가는 게 왜 이렇게 귀찮나? 왜 이렇게 주일이 빨리 돌아오나?’ 혹시 그렇게 느끼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지금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게 귀찮은 일입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완전히 오해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귀찮은 일이 아니고 오히려 나를 살리는 일입니다. ‘이 믿음의 공동체 안에 나도 속한 사람이다.’ 하는 것을 선포하는 일임을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이렇게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내가 머물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다.’라는 것을 선포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꼭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주일 아침에 올 때 혹시라도 좀 귀찮은 마음이 들 때마다 ‘아니지. 내가 이 공동체 안에 속하지 못하게 되면 안 되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 가서 같이 예배드려야지.’라는 마음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의 전도를 통해 많은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정말 바울은 너무나 위대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의 전도 때문에 이방인 지역에 여러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유대 땅에 큰 흉년이 들었고, 특히 물질적으로 가난했던 예루살렘 교회가 굉장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구제 헌금을 걷어서 예루살렘 교회로 직접 찾아가 전달했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과 로마서에 나옵니다.
그가 왜 그렇게 했습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어머니와도 같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방인 교회들도 예루살렘 교회와 같이 주님 안에서 하나이며, 똑같은 주님의 교회라는 것을 더욱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아직도 유대 중심주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바울이 돌아다니면서 우리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저렇게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우는데, 저 사람들은 이류 크리스천들이다. 우리는 일류 크리스천이고, 저들은 이류나 삼류다. 우리보다 떨어지는 사람들이지, 우리와 동등할 수가 없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물론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지만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예루살렘 교회 내에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런 구제 헌금을 전달함으로써 “저들이 우리보다 하류가 아니라 우리와 동등한 형제자매다. 정말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다.”라는 것을 인정받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사실은 이방인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보다 더 크게 쓰임 받는 특권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일, 중요한 일이 생길 때 우리가 물질과 몸으로 동참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지금도 계속 동참하고 있지만, 어떤 자연재해(지진, 쓰나미, 허리케인, 산불 등등)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을 때, 또 전쟁이 일어나 어려움을 당하는 백성들을 볼 때, 재난이 닥친 그 지역들과 그 사람들을 위해 우리 교회도 여러 차례 특별헌금을 걷어서 보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려움을 당한 이웃의 삶에 동참하게 되었고, 특히 같은 지구촌 시민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특히 어려움을 당한 지역의 크리스천들에게 보냄으로써 같은 믿음의 형제자매임을 확인했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우리가 돈이 많아서 보내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은 모자라니까 못 하고, 나중에 풍족해지면 보내겠습니다.”라고 한다면, 평생 못 보냅니다. 왜냐하면 풍족하다고 느낄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엄청난 부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풍족하게 느끼십니까?”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쓸 데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가 이전보다 돈을 많이 벌고 있다면 이전보다 풍족하십니까? 물론 어느 정도 풍족하겠지만, 아마 그렇지 않다고 느끼실 겁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씀씀이가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풍족할 때가 없습니다. 그냥 그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함께 사랑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와 특히 우리 자손들에게 복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미성년 자녀를 두신 분들은 생각해 보십시오. 성인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빠 엄마가 어떻게 하나?’ 하며 자녀가 부모를 지켜봅니다.
자녀들은 결코 듣고 배우지 않습니다. 보고 배웁니다. 우리 부모님이 무엇을 하시나 보니까, 우리도 지금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데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같이 마음을 모으자고 하며 구제 헌금을 합니다. 그걸 볼 때 자녀들이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나한테는 필요한 것을 사 주지도 않으면서 무슨 교회 헌금을 하나?’ 그러나 그들도 속으로 다 압니다. ‘지금 우리 아빠 엄마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라고 느끼며 그것을 보고 배웁니다.
그것이 우리 자녀들에게 복이 되는 겁니다. 오직 내 것만 알고, 우리 가족만 챙기고, 내가 쓸 것만 알고, 나의 만족을 위해서 쓰고, 내가 재미있는 데에만 다니고, 좋은 데로 여행 다니고, 좋은 것을 먹고, 그래서 자녀들이 잘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할 때, 특히 어려운 중에도 그렇게 할 때, 그것을 자녀들이 보고 배웁니다. 받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베풀 줄 아는 복된 사람들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주님도 말씀하셨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인용했습니다(행 20:35).
이렇게 볼 때 신앙생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입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을 하고 말을 잘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좋은 말을 했다고 반드시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정의를 외친다고 반드시 정의로운 사람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정의를 외치는 사람이 알고 보니 정의롭지 못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바른 생각을 하고 말을 은혜롭게 하는 것이 일단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 공부 중 <생명 언어의 삶>도 있지 않습니까? 언어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에 합당한 생각과 말을 하는 동시에 물질을 사용하고 몸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 참된 그리스도인은 말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묵묵히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조금 생각해 보면, 요단 동편 지파들이 전쟁에 동참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이 전쟁에서 싸우는 동안 요단 동편에 있는 가족들을 누가 와서 공격하면 어떻게 합니까? 가족들은 무방비 상태인데, 자기들이 나가서 싸우다 적들이 와서 치면 큰일 아닙니까? 또는 가나안 땅의 전쟁이 아주 길어질 경우 그들은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됩니다. 언제 돌아갈지도 모르고 싸워야 하는데, 그러면 걱정이 되어서 어떻게 전쟁에 나서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사실이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하여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와서 우리 가족들을 치면 어떻게 하나?’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안 일어났습니까? 아직 안 일어났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미리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걱정하는 대신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며 맡기는 겁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대비한다고 해서 안 좋은 일이 안 일어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또 걱정한다고 일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십니다.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선한 방향으로 반드시 인도해 주십니다.
특히 부모라면 자녀에 대해 염려가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내 자녀가 어떻게 될까?’ 그래서 되도록 좋은 학교를 갈 수 있게 초중고도 좋은 학군에서 다니게 합니다. 그래서 좋은 학군이 집값도 비싸지 않습니까? 또 대학도 좋은 데로 보내려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다 끝나는 겁니까?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면 끝납니까? 대학에 가서 또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또 그다음에 우리 애가 좋은 직장을 잡거나 좋은 대학원을 가야 한다고 걱정합니다. 걱정은 끊임이 없습니다.
또 연로하신 부모님에 대해서도 얼마나 걱정이 많습니까? 저도 부모님이 이제는 다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는 어떻게 해드려야 하나, 어머니는 어떻게 해드려야 하나, 걱정이 많았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혼자 사시게 되었을 때부터 ‘어머니가 몸도 안 좋으신데 어떻게 해야 하나? 요양 병원으로 모셔야 하나? 양로 병원으로 해야 하나? 어떻게 알아봐야 하나?’
그런 걱정을 아주 많이 했지만, 어쩔 수가 없어서 그냥 기도만 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아프셔서 ‘이제는 정말 요양 병원으로 모셔야겠구나’ 했는데 전혀 예상 밖으로 빨리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깨끗하게 다 정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맡기고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걱정한다고 뭐가 됩니까? 맡기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냥 맡기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나에게 지금 여기서 주어진 사명을 다하며 사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6장 33장에서 말씀하신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뭔가 되는 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지금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첫걸음을 탁 내디딜 때, 하나님은 요단강 동편에 우리가 두고 온 가족들도 지켜주실 것이고 전쟁도 정확한 때에 끝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할 일입니다.
요단강 동편 지파들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떨어져 8년 가까운 시간 동안 긴 전쟁을 훌륭히 치러 냈고, 결코 중간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몸도 마음도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지만, 특히 두고온 가족들에 대해 굉장히 걱정되었겠지만, 그래도 자기 동족을 버리지 않고 약속을 잊지 않았으며 오히려 끝까지 앞장서서 전쟁을 치러 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금방 될 때도 있지만 때로 오랜 시간이 걸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들다고 중간에 그만두고 포기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승리하는 사람의 특징은 끝까지 인내하며 버티는 것입니다. 오래 참지 못하는 사람,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까지 인내해야 합니까? 책임을 완수할 때까지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됐다.”라고 하실 때까지입니다.
선거철이 오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저렇게 하겠습니다.” 하며 후보들이 많은 공약을 내세우는데, 선거 전에 했던 공약을 100% 다 지키는 정치인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거의 없습니다. 일단 약속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실제로 그것을 지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악의로 잘못된 공약을 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했더라도, 실제로 자기가 당선되어 들어가 보면 이전에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 하려고 했던 것과 달라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원래 하려는 마음이 없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게 하려고 해도 여건이나 능력이 안 되어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2.5 지파 사람들은 어렵고 힘든 중에도 자기들에게 주어진 책임을 완수했습니다. 끝까지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보이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끝내는 사람이고, 더 재미있게 표현하면 ‘끝내주는 사람’입니다. 끝까지 약속을 지키고 책임을 완수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약속한 것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인가? 나는 끝내주는 사람인가?’ 우리가 다 그렇게 끝내주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여호수아의 축복과 믿음의 권면 (4~9절)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 약속을 성실하게 지킨 요단강 동편 지파 사람들을 칭찬한 여호수아는, 이제 전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들을 또한 축복합니다. 그들을 축복해서 돌려보내는 동시에 여호수아는 그들을 향한 믿음의 권면을 잊지 않습니다.
“4 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5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6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 (4~6절)
여호수아는 이들에게 ‘평화로운 안식을 위하여 힘써 땅을 경작하라. 성읍을 더 튼튼하게 쌓고 살라. 주변을 정복해서 땅을 더 넓히라.’라는 권면을 한 게 아닙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니까 어떻게 해서든 정보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최신 정보를 습득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뉴스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문화생활이 중요하니까 인기 드라마는 놓치지 말고 보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그들에게 말해줍니다.
1)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먼저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5). 이것은 참 놀라운 말입니다. 예수님도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는데, 여호수아도 ‘너희들은 하나님을 잘 믿어라.’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사랑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에는 ‘좋아하다, 기뻐하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부담스럽고 짜증이 납니다. 남녀가 서로 사귈 때 사랑하는 연인을, 또 결혼한 부부는 사랑하는 배우자를 기쁘게 해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싫은 사람이 물 한 컵 떠 달라고 하면 바로 옆에 물이 있고 컵이 있어도 떠주기가 귀찮은 게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딱딱한 종교의식과 지루한 의무감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것은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을 하시는 게 짐스럽게 느껴지십니까? 그것은 너무 슬픈 일입니다. 그렇게 느껴지신다면 ‘아, 내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사랑은 그저 순간의 감정이 아닙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연애는 불꽃과 같지만, 결혼은 난로와 같다.” 계속 땔감을 넣어주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 불을 지펴주지 않으면 언제 꺼질지 모르는 것, 그런 것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함께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가장 귀한 시간을 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합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난로에 땔감을 넣고 불을 계속 지피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냥 남는 시간을 드리거나 귀찮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재능이나 물질이나 시간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을 위해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2) 하나님의 모든 길로 행하라
우리 눈에는 안 보여도, 물속이나 공중에도 길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고기들도 다니는 길이 있고 새들도 길을 따라 이동합니다. 비행기도 다 길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게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 동편 지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길로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행한다’라는 말은 ‘걸어간다’라는 뜻이고, 그것은 ‘살아간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길을 존중하고 오직 그 길로만 걸어가는 것,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방향으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중요한 일들을 결정할 때 당회에서 결정하거나 공동의회에서 투표로 정하곤 하지만, 사실 민주주의에서 하는 다수결 원칙이 항상 옳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래도 좋은 방법이기에 교회에서도 사용하지만,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사실 다수가 틀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가는 길이라고 해서 그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다수가 가는 길이라도 그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면 가지 말아야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이며 고난입니다. 남들은 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니 그러면 안 되지.’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외롭습니다. 힘듭니다. 남들이 뭐라고 합니다.
그런 외로움과 고난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고, 또한 매주 함께 목장으로 모여 서로 삶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격려해 주고 함께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하나님의 길을 함께 가는 형제자매라는 것을 우리가 그런 것들을 통해 확인하는 것입니다.
불확실하거나 모르는 길을 갈 때는 어디로 갈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걸으라는 것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방향으로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방향을 어떻게 압니까?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결정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나님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럴 때 그 길에서 경험하는 외로움과 고난을 뛰어넘는 기쁨과 풍성함을 맛보게 됩니다.
3)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이거 좀 해줘” 하면 “오케이” 하고 기꺼이 기뻐서 해줄 겁니다.
여호수아는 오랫동안 충성스럽게 자신을 따른 요단강 동편 2.5 지파에게 ‘앞으로도 계속 나에게 충성하며 나의 말을 들어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자기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을 두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려 하고, 혹시 다른 사람과 친해지는 것 같으면 속상해하거나 질투하고 그럽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2.5 지파에게 자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보도록 해주는 사람입니다. 자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이것을 잘 알았기에 그렇게 권면합니다.
4) 하나님에게 친근히 하라
이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는 것입니다. ‘친근히 한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착 달라붙는다, 꼭 붙잡는다, 있는 힘을 다해 따라간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행동과 같습니다. 착 달라붙고, 꼭 붙잡고, 힘을 다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요단강 동편 지파들에게 “너희는 하나님께 착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 항상 하나님의 손을 꼭 붙잡고 살아야 한다.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을 따라가야 한다.”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본능은 자꾸 자기가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려고 합니다. 인생의 모든 결정을 자기가 내리려고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바로 그것이 죄의 본질이며, 아주 위험한 길의 시초가 됩니다.
아프리카에는 사자도 있고 하이에나도 있습니다. 하이에나는 평소에 감히 사자를 건드릴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끔 새끼 사자를 공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하면, 새끼 사자가 어미 사자에게서 멀리 떨어진 때입니다. 그것을 확인하고 공격합니다. 어미 사자의 간섭이 귀찮다고 자유를 찾아 혼자 나온 새끼 사자는 곧바로 하이에나의 먹잇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 인간은 언제 악한 세력의 밥이 될지 모릅니다. 새끼 사자 때문이 아니라 함께 있는 어미 사자 때문에 하이에나가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강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안전하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강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면 사탄은 감히 우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결국 승리의 열쇠는 하나님께 착 달라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함께 교재하고 또 사역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또 흩어져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5)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
여호수아는 또한 요단강 동편 지파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섬기다’라는 말은 종이 주인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섬겨야 할 수많은 주인들 중의 한 분이 아니십니다. 여기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보, 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런데 미스김도 사랑하고, 미스박도 사랑하고, 미스리도 사랑해.”라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 그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요, 이것도 사랑하고 저것도 사랑하고 딴 것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사랑과 섬김을 받으실 유일한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과도 같습니다.
‘마음’은 사람의 중심을 말하고, ‘성품’은 살아 있는 사람의 생명력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자발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못해서 하거나 위선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또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적당히, 일시적으로, 부분적으로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을 마친 여호수아는 다시금 그들을 축복하며 보냅니다.
“7 므낫세 반 지파에게는 모세가 바산에서 기업을 주었고 그 남은 반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요단 이쪽 서쪽에서 그들의 형제들과 함께 기업을 준지라 여호수아가 그들을 그들의 장막으로 돌려보낼 때에 그들에게 축복하고 8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원수들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 하매 9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실로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받은 땅 곧 그들의 소유지 길르앗으로 가니라” (7~9절)
제가 이 장면을 읽으면서 영화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의 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여러분도 그 영화를 보셨으면 아마 생각나실 겁니다. 어떤 나라의 군대가 오래전 싸우다 죽었는데 완전히 죽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죽었는데 영으로 여전히 살아 있는 그런 군대가 있습니다. 이 군대가 원래 영화 주인공의 나라에 충성하여 같이 싸우기로 언약을 맺었는데, 언약을 깨고 그것을 안 지켰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었으면서도 죽은 영이 가는 곳으로 가지 못하고 그냥 영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겁니다.
그랬을 때 그 왕의 후손인 주인공이 와서 그들을 불러내어 “우리를 위해 싸워라.” 그랬더니 처음에는 코웃음 치다가 왕의 칼을 보여 주니까 진짜 왕의 후손인 것을 알고 다 그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진짜로 그의 명령에 따라 나가 싸웁니다. 끝까지 다 싸우고 완전히 승리를 거둔 다음에 그들 앞에 주인공이 나와서 “이제 너희들이 언약을 지켰음을 선언한다. 이제 돌아가도 좋다. 이제 가서 안식해라.” 그러니까 그들이 “아~” 하더니 사라집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 <반지의 제왕>의 저자인 J. R. R. 톨킨(Tolkien)이 책을 쓰면서 여호수아의 바로 이 장면을 참조하지 않았을까, 분명히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나가는 말]
아주 오래전 우리가 수요예배 때 함께 본 적이 있는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가 있습니다. 15년쯤 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축복하며 권면하는 내용을 읽다가 갑자기 그 영상이 생각났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개신교가 여러모로 복잡하고 비난받는 경우가 많지만, 그 와중에 천주교에는 귀한 분들이 간혹 나오는데 이태석 신부라는 분이 있어서 정말 아름다운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난 2010년에 불과 만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분은 원래 의대를 졸업한 의사였는데, 나중에 신부가 되어 아프리카 수단으로 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나병환자들을 돌보아주며 의료 사역을 하고 선교를 했습니다. 이전에 한 번 방문했는데 도저히 그곳을 무시할 수 없어서 나중에 신부가 되어 돌아와 의료 사역과 복음 사역을 같이 합니다. 나중에는 그 지역이 남수단으로 됩니다.
자기에게 암이 생긴 것도 모르고 사역하다가 몸에 이상이 생겨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분이 그때 “올해의 의료인 상”을 받았는데,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주 전이었습니다. 상을 받으며 수상 소감을 말하는데 얼굴도 야위고 아주 안 되어 보였습니다. 암 치료를 받고 있어서 그런지 머리에는 수건 같은 것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주 후면 돌아가실 분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거기서 농담까지 해가며 수상 소감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아리랑의 어머니 이름이 뭔지 아세요?” 사람들은 모두 당황해서 아무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아무도 답을 모르시나요? ‘아라리’잖아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라고 하니까요.” 그러면서 사람들을 웃기는 것이었습니다. 참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환자들이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는 시간도 있었는데, 이태석 신부님은 유행가 중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불꽃을 피우리라” 하는 노래를 열창했습니다. 정말 그 노래 가사처럼 그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태우고, 100% 정열을 바쳐 최선을 다해 섬기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얼마나 감동이 되고 도전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보니까, 그 지역 출신으로 그때 어렸던 소년들이 한국으로 유학 와서 두 명인가 세 명인가 의사가
되었습니다. 인터뷰하며 한국말로 하는데 너무 한국말을 잘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 의사가 되었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저도 이태석 신부님의 뒤를 따라가겠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서 우리 신부님이 섬겨 주셨던 우리 고향 사람들을 나도 섬기겠다.”
그것을 보며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여러분, 요즘 우리가 얼마나 재미있는 것을 많이 찾습니까? 재미있는 것, 자극적인 것을 많이 찾는데, 물론 그런 것을 보는 것도 좋지만, 이런 감동적인 영상들을 찾아서 보시길 바랍니다.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 동편 지파들에게 축복하며 믿음의 권면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바로 고 이태석 신부 생각이 났습니다. 여호수아도 자신을 불태워 가면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고 이스라엘 백성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을 떠나보내면서 마지막 믿음의 당부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 번 사는 인생입니다. 여기서 인생을 두 번 사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는 다 한번 사는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자신을 불태우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칭찬해 주고, 축복해 주고, 말씀으로 서로를 위해 격려하며 간절히 기도해 주는 삶, 그런 공동체를 우리가 이루며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흩어져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러한 삶, 하나님과의 교재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러한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인정하시는 우리 모두의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