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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12일 주일예배
✦ 믿음 38 ✦
도피성을 주신 목적
(여호수아 20장 1~9절)
[들어가는 말]
오래전 흥미롭게 봤던 영화 중 해리슨 포드(Harrison Ford) 주연의 <The Fugitive(도망자)>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은 시카고 지역의 저명한 의사로 고급 주택가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괴한의 공격으로 격투를 벌이다 아내가 죽고 범인은 도망칩니다. 그러나 경찰은 주인공을 범인으로 지목하여 체포하고 그는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교도소로 호송되던 버스에서 몇몇 죄수들이 탈주를 시도하고 그 와중에 버스가 전복되어 열차와 충돌하게 되면서 주인공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그곳에서 도망치게 됩니다. 그때부터 수사관과 주인공이 쫓고 쫓기며 숨 막히는 추격전을 벌이게 됩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진범을 찾아 헤매고, 수사관은 탈주한 주인공을 잡으려고 집요하게 쫓아오고...
그 영화를 아주 흥미진진하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은 그보다 더 오래전인 제가 어릴 때 한국에서 살고 있을 때 흑백 티브이 시절 <도망자> 드라마를 티브이에서 매주 방영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 별로 재미가 없어서 안 봤지만, 한 사람은 계속 도망가고 한 사람은 계속 쫓아가기에, ‘왜 맨날 쫓아가고 도망가는 것밖에 없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도망자가 되었지만, 그렇게 억울할 때 이 세상에서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도피처는 없습니다. 또 혹시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때 고의가 아니었더라도 그런 경우 안전하게 피해서 도망갈 곳은 없습니다. 완전범죄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완벽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편안하게 두 다리 뻗고 쉬지도 못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자기를 잡으러 올지 모르기 때문에 늘 불안에 떨며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여섯 개의 성들을 지정하게 하십니다. 그 성들은 놀랍게도 고의가 아니게 사람을 죽이게 된 사람이 도망쳐서 살 수 있는 도시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들의 이름을 ‘도피성’(Cities of Refuge)이라고 부릅니다.
고대사회에서도 사람이 살다 보면 <도망자> 영화처럼 자기는 전혀 범인이 아닌데도 살인 누명을 뒤집어쓰거나, 아니면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럴 때는 아무리 변명하거나 고의가 아니었다고 주장해도 믿어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도피성으로 도망치면, 신분을 감추거나 이름을 속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그 안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러한 제도를 두라고 하신 것입니다.
1. 땅에 피를 흘린 자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 3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1~3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사는 땅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사는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땅을 더럽히게 되는 대표적인 경우가 살인해서 피를 흘리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땅이 더럽혀지기에, 결국 흉년이 들거나 전쟁이 나서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피를 흘리게 한 사람을 제거해야 그 땅이 깨끗하게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만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지, 사람들은 자기들의 사회에서 죄의 정도가 아주 심하게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죄가 가득하고 무법천지가 되면 거기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런데 가끔 보면 종종 어떤 나라가 정말 무법천지이고 죄로 가득하여 치안이 너무 없을 때 사람들이 정말 힘들어합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신 동시에 또한 자유의 한계를 정해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각자 이 땅에서 얼마든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해치며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밉다고 해서 상대방을 죽이면 결국 자기 자신도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의 생명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아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나를 위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함께 도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십계명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와 있고 또 세상 법으로도 살인하면 안 되기 때문에 단순히 ‘살인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괜찮다.’라고 하지 말고, 아무리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나와 성향이 다른 사람이라도, 또 내게 굉장히 불편한 사람이나 내가 별로 꼴 보기 싫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생명과 인격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잘못을 저지르고 뭔가 해를 끼쳤다면, 그 잘못한 행동에 대해서는 우리가 분개할 수 있지만 그 사람에 대해서는 미움과 증오로 나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문제는 누구든지 마음속에 분노의 불씨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분노가 없는 분이 있습니까? “나는 전혀 분노가 없습니다.”라고 하는 분이 있다면, 그 옆에 가서 조금만 귀찮게 해주면 바로 분노가 나옵니다. 분노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미워질 때 우리가 실제로 살인하지 않을 뿐이지, 사실은 마음속에 굉장한 증오와 미움, 그리고 심지어 죽이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21 옛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마태복음 5:21-22, 새번역)
예수님이 여기서 과장법을 사용하긴 하셨지만, 그러나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이냐는 겁니다. 미움이 발전하면 폭력적인 언어가 입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언어가 더 발전하면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또 그게 심해지면 살인으로 발전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화를 내면 그것이 살인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부부이신 분들은 부부싸움을 한 번도 안 해 보셨죠?!? 부부싸움을 혹시라도 하게 되면 그 옆에 누가 혹시 있을 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부부만 아니라 누군가와 다툼을 벌이는 경우 옆에서 사진을 찍어 달라고 미리 부탁을 해놓으십시오. 그리고 나중에 그 사진을 보면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 눈에서 불이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놀랍게도 부부싸움을 할 때 그것이 심해지면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옵니다. 그것을 알아야겠습니다.
분노는 정말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이 곧 살인의 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을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인생도 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행위라고 보십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감히 어느 누가 거두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살인은 정말로 악한 죄입니다. 그냥 세상 법으로 범죄(crime)인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무거운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해도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는 것이지, 사적으로 보복해서 분을 풀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다른 사람을 죽게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살인은 땅을 더럽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고의가 아닌 실수로 다른 사람을 죽게 한 경우 그 사람을 죽이는 것도 땅을 더럽히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누명을 쓰고 죽거나 실수로 다른 사람을 죽인 사람이 죽임을 당해서 땅이 더럽혀지면 안 되기 때문에 세우신 제도가 바로 이 도피성 제도입니다.
도피성 제도는 여호수아서에 처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고의적 살인과 우발적 살인은 다르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도피성의 기초가 되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민수기 35장에 보면, 도피성에 관한 규정이 가장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피성이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함이라는 도피성의 근본적인 취지가 나옵니다. 또 신명기 4장에서는 모세가 요단강 동쪽에서 세 곳의 도피성을 구별하여 세웁니다. 그리고 신명기 19장에서는 도피성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과 함께, 도피성은 쉽게 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지시합니다.
여호수아는 이 말씀을 받들어, 이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땅을 열두 지파에게 나누어준 다음에 여섯 개의 도피성을 지정합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실수로 남을 죽게 한 사람이 피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해주도록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일하면서 도끼로 나무를 패는데, 도끼를 내리치다 날이 헐겁게 끼어 있어서 그것이 빠지면서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옆에 있던 사람의 머리에 맞아 죽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하는 경우 그것은 고의적 살인이 아니니까 도피성으로 피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또 밭을 갈아야 하는데 큰 바위가 있으니까 그 바위를 거기 있는 언덕 밑으로 굴려서 내려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에 사람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사람이 거기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가 굴러떨어지면서 그 바위에 깔려서 죽는 경우도 성경에 나옵니다. 그런 경우에는 고의로 죽인 게 아니기 때문에 도피성으로 피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이 정하신 도피성으로 피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
3절에 ‘피의 보복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히브리어로 ‘고엘’이라는 단어입니다. 가장 가까운 친척 중에서 이 집에 대해 책임이 있는 사람, 즉 ‘가문의 보호자’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집이 망하게 되었을 때 그 집안과 가장 가까운 친척이 책임지고 돌보아주는 경우 그 사람을 ‘고엘’이라고 부릅니다.
룻기에서는 이 ‘고엘’을 ‘기업 무를 자’라고 번역했습니다. 룻의 경우에는 남편이 죽었으니까 그 집안과 가장 가까운 친척이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서 대를 잇게 할 때 그렇게 하는 사람이 ‘기업 무를 자’입니다. 그때 촌수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기업 무르는 것을 포기해서 그다음 순위에 있던 보아스라는 사람에게 그 권리가 갔습니다. 그래서 보아스와 룻이 결혼하여 바로 그 후손 가운데 다윗 왕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것이 바로 이 기업 무를 자라는 것인데, 여기서는 같은 단어가 ‘피의 보복자’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집안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렇게 죽었을 때 이 피의 보복자(고엘)가 그 집안을 위해서 죽인 사람을 쫓아가는 것이 피의 보복자인데, 어떤 의미에서 이 ‘피의 보복자’는 요즘의 형사와 비슷합니다. 형사는 살인 사건이 발생할 때 범인을 잡기 위해 끝까지 추격합니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그런 형사가 없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가족 중 한 사람(고엘)이 끝까지 자기 가족을 죽인 사람을 추적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언젠가 그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임을 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악한 의도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살인이며 무서운 범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을 함부로 해치는 것은 중대한 죄입니다. 살인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해치고 해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고의가 아닌데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한 경우에는 피할 길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2. 도피성 제도의 중요한 원칙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도피성 제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실수인데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하며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달아나야 합니다. 그것도 아무 데나 도망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도피성으로 가야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에 들어가는 문에서 그 성의 장로들에게 자기가 한 일을 말해야 합니다.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4절)
실수로 사람을 죽게 만든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산속이나 동굴 속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신 도피성으로 가야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 하며 시치미 뚝 떼고 가만히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일단 사고가 터졌으면 하던 일을 중단하고, 피의 보복자가 따라오기 전에 자기가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도피성으로 도망가야 합니다.
둘째, 무조건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문에서 장로들에게 어떻게 해서 사람을 죽게 했다는 경위를 설명해야 합니다. 아무리 도피성이라고 해도 근처를 여행하다 그곳에 들른 사람도 있을 것이고, 친척을 방문하러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물건을 팔러 온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진짜 살인을 저지르고도 고의가 아니었다고 속이며 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보호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는 이러한 도피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당연히 이와 같은 도피성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에게도 도피성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도피성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살인죄를 저지르지는 않더라도, 실수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억울하게 누명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피해야 합니다.
특히 억울하게 몰릴 때, 내가 고의로 한 일이 아니라 단순 실수로 남에게 피해를 끼쳤을 때 피해야 하는데, 어디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어디로 피할 수 있습니까? 다른 데로 가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서 하소연할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피난처와 도피성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전부 다 말씀드려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정말 별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것이 엄청난 사건으로 확대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는 더 커지기 전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터뜨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호해 주십니다. 오늘처럼 이렇게 교회당에 함께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거나, 다급한 상황에서 새벽기도를 나오거나, 혼자 있을 때라도 조용한 시간과 장소를 찾아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그냥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고 예배에 참석했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 그분께 모든 것을 말씀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와서 가만히 있으면 다 되는 게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나의 사정을 주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럴 때 보호해 주십니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기도로 모든 것을 아뢰어야 하나님께서 그제야 아시고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내가 보호해 줄게.’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또 기도하지 않으면 ‘너, 기도 안 했지? 나도 널 보호해 주지 않겠어.’라고 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 우리가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께 간절히 아뢰어야 하는가?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는 손길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지금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은 ‘아,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고 계시는구나.’라고 알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시니까 알려 드리기 위해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알지 못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의 손길을 생생히 느낄 수가 있게 됩니다.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 (5절)
살인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을 여기서 하나님이 이야기해 주시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미워함’입니다. 꼭 살인이 아니더라도, 이것이 죄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은 내가 저 사람에 대해서 어떤 일을 했는데 그 안에 미워함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입니다. 하나님은 이걸 보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는 겉으로 똑같은 행동처럼 보여도, 그 안에 미워함이 있는가 없는가는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일단 정상적인 절차를 밟고 도피성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아무리 피의 보복자나 다른 사람들이 와서 그 사람을 잡아가려고 해도 잡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사히 피해서 온 사람은 도피성 안에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자기 발로 그 성 밖에 나가지 않는 이상 그는 안전합니다.
물론 아무리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그것이 죄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히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의 실수를 보시고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미워함이 없이 실수로 그런 것을 참작하셔서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의 삶을 포기하고 도피성 안에서 새 삶을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에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도피성 밖으로 나가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이전과 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이전처럼 자기 집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피성으로 들어온다는 것이 곧 한번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에 자유롭던 삶으로부터는 죽고, 도피성 안에서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바로 이 도피성의 원리대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물론 우리가 누구를 죽이거나 죄를 짓고 피해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사실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있습니까? 실제로 살인하지 않았어도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지적하신 것처럼,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있습니까?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은 간음과 탐욕과 욕심과 여러 가지 죄를 짓고 있습니까? 단지 그러한 죄들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지, 마음속으로 너무나 많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교회에 처음 오면 제일 먼저 듣는 말 중 하나가 “우리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은 아마도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말을 들으면서 ‘당신들이나 죄인이지 나는 죄인이 아닌데, 왜 자꾸 죄인이라고 그러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왜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할까? 나라에서 정한 법에 따라 살인하면 안 되고, 도둑질하면 안 되고, 사기 치면 안 되는데, 이런 것을 안 했으니까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은 그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많지만, 하라고 하신 것도 많습니다.
하라고 하신 것을 다 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한 게 얼마나 많습니까? 일반 도덕법에 의해서도 “부모에게 효도하라.”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 한국 전통 유교에도 다 있는 얘기이고 어디나 있는 얘기입니다. 부모에게 효도를 다 하라고 했는데, 그러면 효도를 다 하고 있습니까? “나는 100% 잘하고 있습니다.” 하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것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 해야 하는 것을 안 하는 것, 또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죄를 지을 환경이 제공되기만 하면 우리도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연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가끔 극악무도한 살인범이나 테러리스트나 사기 치는 사람들을 볼 때 분노합니다. 또 이전에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이상한 짓을 했을 때 얼마나 많이 비난했습니까? 또 유명한 골프 선수도 알고 보니까 뒤로 온갖 불륜을 다 저지르고 다닌 것이 밝혀져서 굉장히 비난을 많이 한 경우가 있는데, 우리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전에 또 유명한 영화 중 하나로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에서 한 독일군 장교가 나오는데, 실제 인물을 기반으로 영화 속에도 등장시킨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유대인 수용소에서 높은 집을 짓고 삽니다. 아침에 그 높은 자기 집의 발코니에 총을 가지고 나와서 유대인 포로들이 지나갈 때 그냥 총을 쏴서 죽입니다. 그냥 여기 팡 쏴서 죽이고, 저쪽에 또 팡 쏴서 죽입니다.
실제로도 그는 아주 극악무도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젊을 때부터 나치에 가입해서 활동했던 그런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극악무도한 짓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겠습니까? 총으로 팡 쏴 죽여도 자기에게 아무 해가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포로들이 지나다닐 때 총으로 쏴 죽여도 자기에게 아무 해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살인죄로 구속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이고,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만약 그렇게 해서 포로들을 죽이는 경우 당장 사형 선고받고 사형당하게 된다면 그 사람이 총을 함부로 마구 쏘았겠습니까? 자기에게 전혀 해가 되지 않으니까 그냥 막 쏴 죽인 겁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악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전쟁 전에는 그가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전쟁 중에 자기가 그렇게 막 포로들을 죽여도 자기에게 아무 해가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냥 막 죽이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만약 내가 죄를 저지르며 누군가를 죽여도 나는 전혀 잡히지도 않고 살인죄로 구속되지도 않고 사형을 선고받지도 않고 감옥에 들어가지도 않는다면, 지금 내가 계속 착하게 살 것 같으십니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도 저 사람을 죽이면 내가 살인죄로 구속돼서 내 인생이 끝나니까 못 죽이는 것이지, 만약에 내가 그 사람을 죽여도 나에게 아무 해가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상을 받는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좀 생각해 볼 얘기입니다. 과연 우리가 법이 없어도 착하게 살까요?
예를 들어, 내가 어느 회사의 재정 담당 직원인데, 하루에 100만 달러씩 들어오는 것을 관리합니다. 그런데 100만 달러의 1% 정도인 1만 달러 정도를 슬쩍해도 아무도 모르고, 또 주변에서도 하루만 있으면 이자로 만 달러가 금방 채워지니까 그냥 그 정도는 슬쩍해도 괜찮다고 한다면, 그래도 내가 정직하게 할까요?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죄를 지어도 전혀 구속되지 않습니다. 전혀 해를 받지 않습니다. 전혀 죄인으로 지적받지 않습니다. 그래도 내가 착하고 정직하게 살까요? 물론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을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겉으로 보기에 비정상이고 남을 해칠 것 같으며 위험해 보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기 전부 다 잘 생기고 아름답고 착하게 보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속으로는 얼마든지 살인자이며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깨끗하다고 주장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내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을 지금 앞에 영상으로 비추면 자신이 있으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피성으로 피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안전해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내 마음속에 있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지금 앞에 영상으로 다 나오고 있는데 그 앞에 예수님이 딱 가리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안 보입니다. “이것은 다 없는 것이다.”라고 해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것들을 싹 지워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진정한 도피성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올 때 죄로 물든 나의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도피성 안으로 피해 들어옴으로써 죄를 지은 과거와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더 이상 사랑하는 가족들과 마음대로 만날 수도 없고 이전의 친구들과 어울릴 수도 없습니다. 누군가가 자기 땅을 다 차지해도 성 밖으로 나가서 도로 찾아올 수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피성 안에 들어옴으로써 과거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 불편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전 방식으로 살지 못하니까 조금 힘든 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힘든 것과 죽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심한 겁니까? 조금 힘들어도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야지, 힘들다고 나갔다가 죽임을 당하면 그게 뭡니까?
그래서 살인자가 도피성 안에서는 안전하지만, 그 성을 벗어나면 죽임을 당합니다. 그 사람은 오직 도피성이라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자비이고 은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이전과 달라야 합니다.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전에 하던 대로 다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한번 죽었던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었다. 구원받았다.’라고 하면서도 이전에 하던 방식과 똑같이 살고 똑같은 죄를 짓는다면, 그게 정말 믿은 것인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답답해져서 못 믿겠다고 하며 나중에 믿겠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도피성이 주어졌고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삽니다. 그러나 그곳을 떠나면 죽습니다.
그러니까 도피성이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떠나면 죽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건지고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예배드리면서 하나님께 쓰임 받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할 제목이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 도피성 제도에서 특이한 것은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도피성을 빠져나올 때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언제입니까?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6절)
그때 재판을 받거나 당시 대제사장이 죽으면,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이것이 이해가 잘 안 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대제사장이 죽었다고 살인자도 해방된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살인한 사람의 생명과 대제사장의 생명을 일치시키셨다는 뜻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 보시고 모든 혐의에서 벗어나게 하신 겁니다. 마치 그가 무죄 판결을 받은 것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모든 죄에서 벗어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죄 용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도록 간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참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자유를 얻었더라도, 그 자유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얻은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값비싼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정욕대로, 욕심대로 살지 않고 가장 아름다운 일에 헌신하며 나아가게 됩니다.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살려고 애쓰며 나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 죄에서 용서해 주시고 영원히 살 수 있도록 구원하신 하나님,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서,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대로 내가 살겠습니다.’ 하면서 그 방향대로 나가기 위해 애쓰며 나아가는 그 삶이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3. 도피성의 위치
아무리 도피성 제도가 좋다고 해도 그 성에 가는 데 1주일이나 한 달이 걸리거나 아주 먼 곳에 있어서 피신하기 어렵다면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 어디에서나 쉽게 도망할 수 있는 곳에 도피성을 세우셨습니다.
“7 이에 그들이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과 8 여리고 동쪽 요단 저쪽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 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구별하였으니 9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7~9절)

<< 도피성 지도 >>
잘 보시면, 여섯 개 성읍이 이렇게 이스라엘 전역에 골고루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어디서 그렇게 되었든지 금방 피할 수 있도록 이곳저곳에 여섯 군데를 도피성으로 세워 두신 것입니다. 동쪽에 3개, 서쪽에 3개를 세워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배려해 주신 겁니까?
굉장히 합리적으로 도피성 위치를 정해주셨습니다. 요단강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어 각각 세 성씩 정하셨고, 그것도 북쪽에 하나, 중간에 하나, 남쪽에 하나, 이렇게 여섯 개의 성을 도피성으로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도피하는 사람 중에 도피성이 너무 멀어서 도망가지 못하거나 가는 도중에 붙들리는 일이 없도록 배려해 주신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소와 양과 장사하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쫓아내며 분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위 그것을 ‘거룩한 분노’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분노와 우리의 분노는 다릅니다. 우리는 그냥 화가 나서 자기 분에 막 분노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분노를 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장면을 보며 나도 화를 내도 괜찮다고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 온유하신 예수님이 마구 채찍을 휘두르고 돈을 쏟고 상을 엎으면서 분노하십니다. 그런데 특히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그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신 이사야 56:7 말씀을 인용하며 말씀하십니다. 즉, 모든 민족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민족이든지,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교회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교회가 곧 성전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독특한 건물이고, 지금은 성전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바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매주 함께 모여서 예배하며 하나님께 나아가고, 또 목장으로 모여 삶을 나누고 감사의 제목을 나누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정말 필요합니다. 매주 모여 이렇게 예배로 나아가는 것, 매주 함께 모여 삶을 나누고 감사의 제목을 나누고 서로 기도해 주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그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지금 제가 말씀을 전하며 설교하고 있지만. 우리가 주일에 함께 모여서 예배하며 설교 말씀을 듣는 것을 비유로 하자면 집에서 엄마가 해준 집밥을 가족들이 함께 모여 먹는 것과 비슷합니다. 요즘은 아빠도 잘하는 사람이 많지만, 어쨌든 집에서 같이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식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서 집밥을 먹는 겁니다.
그런데 혼자서 기도하고 말씀 읽고 큐티하고 묵상하는 것은 혼밥과 비슷합니다. 집밥도 있고 혼밥도 있습니다. 우리가 혼자서 나가 있을 때는 혼자서 밥 먹고, 또 주말이나 가족이 함께 명절에 모였을 때는 가족이 함께 밥을 먹고 하는 것이 다 필요하지 않습니까?
혼밥만 하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합니까? 그렇다고 밖에 나가서 일해야 하는데 계속 집에 와서 먹을 수만도 없습니다. 그래서 정해진 시간에 같이 모여서 영적 가족인 우리가 함께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가고, 또 우리가 각자 흩어져 있을 때는 각자 하나님께 나가고 하는 것이 다 필요한 겁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서 날뛰고 있다고 성경에서 말씀합니다. 믿지 않는 분들의 눈을 가려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구원을 취소할 수는 없으니까 예수님 안에 약속된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할 때 풍성한 삶을 맛볼 수 있는데,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늘 걱정과 불안과 염려 속에 살아가도록 유혹합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지금 그런 전략을 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항상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게 만듭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살도록 해서 늘 인생이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정말 너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풍성한 삶이 주어져 있는데,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갈 때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데, 주님께 맡기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며 사니까 늘 염려와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로 정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사탄은 감히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고 교만하게 나아가고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사탄의 가장 좋은 먹잇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판에 있는 양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수많은 맹수가 숲속에서 그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목자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양들을 보호합니다. 그렇게 목자의 보호를 받는 양들은 안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날개 아래 거하는 사람은 안전합니다. 염려에서 해방되어 기쁨과 평안과 행복이 넘치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마음대로 가다 보면 맹수에게 잡아먹히고 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절대로 안전합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과거의 죄 때문에 심판받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히 죄의 세력에서 풀려나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보호 아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안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좀 지겹고 너무 자기를 옥죈다고 오해하여 ‘그래서 나는 이전처럼 그냥 내 맘대로 살겠다.’ 하고 나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굉장한 위험 앞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도피성 안에 거하여 그 안에서 함께 비슷한 처지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살아감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