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x-e5ghGiGrU?si=RiWcu3woPU59E5_k&t=163
2025년 10월 5일 주일예배
✦ 믿음 37 ✦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여호수아 17장 14절~18장 4절)
[들어가는 말]
해마다 1월 초가 되면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Las Vegas, NV)에서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국제전자제품박람회)가 열립니다. 거기에는 온갖 최신, 미래형 전자제품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한국 기업들도 많이 참여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곳에서 1월 7~10일에 열렸습니다. 이번 2025년 CES에서의 핵심은 “모든 기술이 AI 중심으로 재편되는 AI 융합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이었습니다.
AI가 단순 기능이 아니라, 로봇, 스마트홈, 헬스케어, 자율주행 자동차 등 거의 모든 기술 분야에 깊숙이 통합되며 중심축이 되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사용자 맞춤화와 자동화가 함께 강조되는 것이 이번 CES의 특징이었습니다. 즉, AI가 기술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가운데, 그것을 연결하고 자동화하고 개인화하는 것이 이번 CES의 주요 대세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집 소파에 앉아서 한 기기에 명령하면 다른 기기들이 다 연결되어 있어서 같이 움직입니다. 티브이나 냉장고부터 해서 집 현관문과 감시 카메라 등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명령 하나에 다 움직일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것은 미래에 관한 영화에도 이미 많이 나왔던 것들인데, 실제로 점점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학기술의 발전이 굉장히 눈부신 시대인데,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최신형 노트북 파워컴퓨터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컴퓨터는 AI가 탑재되어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의 엄청난 성능을 가졌습니다.
예를 들어, 이 컴퓨터에서 척 누르면 집 현관문도 열었다 닫았다 하고, 냉장고도 열었다 닫았다 합니다. 심지어 로봇에게 “야, 냉장고에 가서 과일 가져와.” 하고 명령을 내리면, 로봇이 가서 과일을 꺼내어 가져와 전달합니다. 이런 식으로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컴퓨터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최첨단의 일들을 다 처리할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컴퓨터를 받은 사람이 그런 여러 가지 복잡한 기능들을 잘 모르겠고 배우기도 귀찮고 힘들어서, 그냥 이전에 하던 것처럼 이메일을 체크하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야, 컴퓨터가 아주 빨라서 너무 좋다.”라고 하며 그 정도에 만족합니다. 그러다 가끔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정도를 위해서 사용합니다.
수치로 환산해서 100을 할 수 있는 컴퓨터를 가지고 1이나 2 정도만 사용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선물로 준 사람이나 주변 사람들이 볼 때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아니, 저런 슈퍼컴퓨터를 가지고 왜 저 정도밖에 안 하나?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요만큼만 쓰나? 그보다 훨씬 못한 컴퓨터로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저것을 가지고 하고 있나?’ 하며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넘어서 굉장히 한심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그들은 당시 그 지역에서 가장 기름진 땅인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감사하며 일어나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축복의 땅이라도 그것은 스스로 일어나서 개척하는 자의 것입니다. 아무리 다음 세대에게 좋은 유산을 물려주어도 그것을 일궈낼 능력이 없다면 오히려 그것은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엄청나게 좋은 것을 줘도 그것을 사용할 줄 모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특히 돈이 그렇습니다. 많이 물려주었지만 정말 잘되었다는 사람은 굉장히 드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광활한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분배한 여호수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 좋은 땅을 분배받고도 그것을 개척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삶의 교훈을 배웁니다.
1. 유다 지파
지난주에 살펴본 14장부터 오늘 본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가장 큰 유다 지파를 먼저 보겠습니다.
유다 지파는 요단강 서편에서 가장 처음으로 기업을 분배받을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리더 역할을 한 중심 지파입니다. 나중에 다윗도 유다 지파이고,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도 유다 지파이십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 중남부 일대의 아주 좋은 땅을 거의 다 차지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평야, 산지, 해안을 두루 포함한 아주 넓은 땅이기 때문에, 목축, 농사, 사냥, 무역 등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15장에 보면, 이렇게 엄청난 복을 받은 유다 지파는 자기들에게 분배된 땅의 중심부에 있는 견고한 성 예루살렘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 성에 살던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과 유다 자손이 오늘날까지 예루살렘 성에 함께 살고 있다.” (수 15:63, 새번역)
이 여호수아서가 기록될 당시까지도 여부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자손과 같이 계속 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15장에 여러 지명이 나오다가 유독 이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여부스 족속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쫓아내라고 명령하신 가나안 7대 부족 중 하나입니다. 강력한 유다 지파에 비하면 상당히 수가 적은 소수 민족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으로써 계속 같은 땅에 함께 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훗날에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옆구리의 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서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게 되고, 또한 자기들의 음란하고 폭력적인 문화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퍼뜨려서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병들게 만드는 족속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너는 이렇게 하라” 하셨는데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벌을 받습니까? 놀랍게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번 해 보십시오. 아니 해 보시라고 말을 안 해도 이미 다 하고 계실 겁니다.
불순종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지만, ‘나는 사랑할 이웃도 없고, 시간도 없고, 돈도 없으니, 그냥 적당히 나 혼자 살겠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갑자기 벼락이 쳐서 맞아 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고 죄를 지어도, 사실 대부분 별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로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건강에 뭔가 문제가 생겨서 의사에게 갔다고 해 보십시오. 혈압이 높고 당수치가 높으면 의사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운동해야 하고 음식을 조절해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실제로 콜레스테롤이 높으면 음식을 조절해야 하고 운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약을 먹어야 하고, 심한 경우 수술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말한 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도 나는 디저트를 좋아하고 단 것을 좋아하니,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를 다 먹겠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오늘 갑자기 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별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보면 별일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됩니까?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지면서 심각한 단계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것을 안 해도 별일 없습니다. 당장 죽는 것도 아니고 벌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쌓이고 쌓이고 쌓일 때, 나중에 결국 엄청난 부메랑으로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2. 요셉(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유다 지파 이상으로 안타까운 사람들이 요셉의 자손인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입니다. 요셉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요셉의 후손들은 훌륭한 믿음의 조상인 요셉 덕분에 두 몫의 기업을 분배받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야곱 집안에 크게 공헌한 요셉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갑절로 받은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실제로 장자는 르우벤이었지만, 실질적인 장자의 역할을 한 것은 요셉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기의 아들이라고 하며 양자로 들이면서 두 몫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분배받은 땅은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할 때 말한 그대로 가나안의 비옥한 중앙 지역이었습니다. 유다 지파가 중앙에서 약간 남쪽에 있고,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는 바로 그 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믿음의 씨앗을 잘 뿌려 놓으면 그 복이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에게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겠습니다. 요셉 덕분에 그 후손들이 얼마나 복을 받았습니까?
1) 에브라임
에브라임 지파도 자기들의 땅에 살고 있던 게셀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에게 조공을 받으며 종으로 부리게 되었다고 성경에서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게셀에 사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않았으므로, 가나안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지파와 함께 살며 종노릇을 하고 있다.” (수 16:10, 새번역)
유다 지파의 경우 예루살렘에 살던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했다(could not)’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브라임은 게셀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았다(did not)’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브라임이 게셀의 가나안 사람들을 종으로 삼은 사실을 보아도, 에브라임은 그들을 쫓아낼 힘이 충분했는데도 일부러 쫓아내지 않고 종으로 삼아 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쫓아내라고 하신 가나안 민족을 쫓아내지 않았을까요? 그들을 종으로 삼아서 편하게 지내며 유익을 얻겠다는 인간적인 계산을 한 겁니다. 그러나 게셀 사람들은 이때 살아남아서 나중에 사사 시대를 거치며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를 타락시키고 끊임없이 괴로움을 주는 악한 영적 세력이 됩니다.
우리의 경우도 솔직히 생각해 보십시오. 뭔가를 하자고 하면 “못 하겠습니다.”라고 할 때가 있는데, 솔직히 우리도 못 하는 것이 있고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분명히 다릅니다. 자기 자신이 알지 않습니까? 사실은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못 하는 것인지, 자기는 압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더라도 자기가 알고, 또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도 아십니다. 사탄도 압니다. 무엇인가를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할 수 있으면서도 꾀를 부리며 일부러 안 하는 것은 더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들과 선한 일들이 있는데, 선한 일을 정말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안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세상적인 유익과 편리를 위해 죄와 타협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 유익이 되고 편리하게 될 것 같아도, 결국은 그런 것을 누리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영적인 능력도 잃어버리는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아도 나중에 분명히 문제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선택해서 안 하는 것 같아도, 점점 갈수록 나중에 해 보려고 해도 그때는 정말로 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를 하라고 하실 때 하나님이 정말 음성을 들려주시면서 “너는 이것을 하라.”라고 하시는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대개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옵니다. “우리 이것을 같이 좀 해 보면 어떻습니까?”라고 할 때 내가 진짜로 못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할 수 있는데 귀찮아서 안 한다고 하는 것인지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 므낫세
요셉의 또 다른 후손인 므낫세 지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자기 땅 안에 있는 가나안 민족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합니다.
“12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13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수 17:12-13)
므낫세 지파가 약간 느슨하게 나오니까 그것을 본 가나안 사람들은 아주 결심하고 버텼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배 째라’ 하는 식으로 버티니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성읍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므낫세가 강해진 다음에는 그들에게 노역을 시키면서 이제는 ‘쫓아내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처음엔 쫓아내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쫓아낼 수 있게 되었지만, 쫓아내지 않고 또 종으로 삼아서 부렸다는 말입니다.
어떤 운동경기든 전쟁이든, 싸움은 물리적인 힘과 실력 이전에 먼저 정신력의 대결입니다. 므낫세 지파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정신력에서 먼저 밀렸습니다. 처음부터 포기하고 들어간 것은 아니었겠지만, 자꾸 저항에 부딪히다 보니까 결국 그들의 저항에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힘이 세졌어도 쫓아내지 않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혹시 주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다가 조금 힘들다고 타협하거나 중단한 일이 있으십니까? 꼭 해야 하는 일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 줄 알면서도 조금 어려워지니까 그만둔 것은 없습니까? 하나님이 그만두라고 하셔서 그만두는 게 아니라 자기가 그냥 그만두는 것은 없는지 한 번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만약에라도 그런 것이 있다면 다시 일어나서 그 일을 끝내는 것이 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3) 요셉 자손의 문제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에게는 사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가나안 민족들을 쫓아내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분배된 땅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17장 14절)
그들은 여호수아 앞에 나와서, 자기들은 큰 민족인데 땅을 너무 적게 주었다고 불평합니다. 요셉 자손인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지파를 합치면 인구가 가장 많은데 주어진 땅은 너무 좁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두 지파를 합친 사람 수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가장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쏙 빼놓고 말합니다. 므낫세 지파 중에서 절반은 이미 요단강 동쪽의 넓은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은 상태였습니다. 르우벤 지파, 갓 지파와 함께 므낫세 지파 중 절반이 동쪽 땅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부터 자기들의 기업인 땅을 받은 겁니다. 그 므낫세 반 지파를 빼면 나머지 숫자는 다른 지파들보다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요단강 서쪽에서 분배된 땅은 그들에게 충분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 말을 잘 보십시오. 이들이 한 일을 우리도 잘하지 않습니까? 사실을 말하기는 하는데,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살짝 빼놓고 말하는 겁니다. “지금 이 땅이 좁다. 우리는 많은데 이 땅은 좁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므낫세 지파 중 절반은 이미 저 동쪽에서 땅을 받았기 때문에 사실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쏙 빼놓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일이 요즘 너무 많습니다. 사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분명히 사실을 말하고 진리를 언급하는데, 전체적인 사실이 아니라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말하고 불리한 것은 슬쩍 빼놓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것을 요즘 가리켜서 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선택적 정의’ 또는 ‘선택적 진리’입니다. 특히 정치인들이나 정당 지지자들에게서 이런 모습이 굉장히 많이 보입니다.
저는 설교 때 정치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에도 공화당 지지자가 있고 또 민주당 지지자가 있습니다. 아니면 둘 다 지지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을 지지하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당 지지자와 야당 지지자가 여기 다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니라 정의와 진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SNS 중에서 유일하게 하는 게 페이스북(Facebook)인데, 거기 보면 정말 올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의를 이야기하고 진리를 이야기하며, 그래서 굉장히 객관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며 글을 굉장히 잘 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정의와 진리를 이야기하지만, 자기 쪽은 무조건 옳고 상대방은 무조건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내용을 보면 굉장히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 쪽에는 괜찮고 상대방은 안 된다는 겁니다.
정의와 진리의 문제가 있어서도 자기 쪽에서 뭔가 잘못한 게 있으면 굉장히 감싸 주고, 상대방이 그와 비슷하게 잘못한 게 있으면 엄청나게 공격합니다. 선택적 진리, 선택적 정의입니다. 그래서 정의나 진리와 같은 것을 너무 자주 말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조금 경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선택적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단지 정치 영역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들어보면 굉장히 맞는 말 같은데, 전체적으로 맞는 말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맞는 말을 합니다.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살짝 빼놓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들을 잘 보면, 대부분 뭔가를 많이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받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미국에 와서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전 세계적으로 보면 엄청나게 부자입니다. 굉장히 상위권입니다. 그걸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게 없어서 불평하고 있습니까? 사실은 받은 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불평하고 불만을 터뜨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받은 것에 감사나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고 만족하는 사람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받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더 받기만 바라는 사람은 결국 그 인생이 아주 불행해집니다.
사실 하나님은 내 능력과 처지에 비해 항상 넘치는 은혜, 과분한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도 항상 불만이 가득 차서 ‘나는 더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데’, ‘나는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하는 사람인데’, ‘내가 지금 이런 일이나 할 사람이 아닌데’ 하면서 불평하며 사는 경우가 많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여러분, 지금 하시는 일이나 위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직장 생활을 하는 분들은 ‘내가 이런 회사에 다닐 사람이 아닌데’라고 합니까? 아니면 회사는 좋은데 자기의 위치가 마음에 안 들면 ‘내가 이 위치에 있을 사람이 아닌데’라고 하며 지금 원망하고 계십니까? 학생이라면 ‘내가 이 학교를 다닐 학생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지금 혹시 있으십니까?
여러분. 혹시라도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사람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산다면, 그렇게 사는 한 절대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절대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늘 불행합니다. 가진 게 적어서 불행한게 아닙니다. 가진 건 사실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 때 그 생각이 자기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사람이 아닌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자리를 나에게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할 때, 이런 사람은 위치가 얼마나 높든지 낮든지 상관없이 정말 행복하고 감사한 삶을 살게 됩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은혜가 나에게 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할 때 기쁨이 있습니다. 행복합니다. 진정한 평안과 행복은 감사하고 만족할 때 주어집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더 많은 것을 부어 주십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자기에게 나아와 불평하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향해 간단히 대답합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17장 15절)
‘너희가 받은 땅이 좁다고 생각되면, 너희 스스로 가나안 족속들의 산으로 올라가서 개척하여 땅을 넓혀라.’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미 주어진 광활한 땅도 자기들끼리 싸우고 노력해서 차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목숨을 걸고 싸워서 얻은 땅 가운데 거저 분배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셨고 또 전체가 열심히 싸워서 얻은 땅 가운데서 분배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감사할 줄 모르고 땅이 좁다고 불평하는 그들에게 여호수아는 ‘가만히 앉아서 주는 떡을 받아먹으니 고마운 줄 모르는 모양인데, 그러면 가서 너희가 스스로 땀 흘려 싸워서 땅을 쟁취해 봐라.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요셉 자손은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또다시 불평합니다. 이들이 하는 말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17장 16절)
자기들에게 분배된 땅이 부족할뿐 아니라 그 안에는 철 병거를 가진 강력한 가나안 군대가 있어서 그들을 물리치고 땅을 차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당시 청동기 무기를 사용하던 이스라엘에 비해 철갑으로 두른 무시무시한 철 병거는 아주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운 무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무기가 더 많거나 군사력이 더 강해서 승리했습니까? 아닙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덕분에 수많은 위기를 넘기며 강한 적들을 계속해서 물리쳐 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내가 너무 힘이 강해서, 내가 너무 똑똑해서, 내가 너무 잘 나서 다 잘되고 지금 이렇게 된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셔서 지금 여기까지 우리가 와서 잘 살고 있는 겁니다.
홍수가 나 있던 요단강이 갈라져서 이스라엘이 건널 수 있었고, 하나님의 역사로 인하여 무적의 성인 여리고 성을 가볍게 물리쳤고, 또 아이 성도 함락시켰습니다. 게다가 가나안 남부 연합군과 북부의 연합군도 모조리 물리치고 승리했습니다. 그 모든 승리는 상황이 좋았거나 자기들의 군사력이 강력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신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 말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자기들의 힘으로는 강한 적들을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자기들의 힘으로 쫓아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요셉 자손은 믿음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들이 조금 전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까지 말하면서 자기들이 ‘큰 민족’(14)이 되었다고 자랑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큰 민족인데 철 병거가 있어서 우리는 안 된다. 우리는 엄청 크고 좋다. 그런데 안 된다.’라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여호수아도 에브라임 족속 출신인데, 자기 동족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깝고 또 얼마나 한심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다시 말합니다.
“17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18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17장 17~18절)
“너희가 큰 민족이라면 큰 능력이 있을 것 아니냐? 큰 능력이 있는 민족이라면 큰 상대와 붙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 그까짓 철 병거가 대수냐? 방금까지 스스로 큰 민족이라고 하며 자링했으면서, 왜 갑자기 ‘나 지금 떨고 있니?’라고 하느냐? 왜 너희 자신을 그렇게 낮게 평가하면서 두려워하고 있느냐? 저들의 땅끝까지라도 밀고 들어가 그 땅을 개척하라!”
여러분, 얼마나 우리와 비슷합니까? 평소에 큰소리를 뻥뻥 치던 사람이 실제 상황이 되면 비겁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나 특권은 원하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는 회피하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힘든 사역이지만 기꺼이 자원하여 섬기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 참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은 그것이 자기 힘으로 되는 게 아님을 고백하면서 섬깁니다. 얼마나 귀한 믿음의 모습입니까?
우리는 힘이 없지만,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일은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서 승리와 패배는 사람 숫자나 무기나 힘이나 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얼마나 가졌느냐에 결과가 달린 게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냐에 달렸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믿고 나아가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입니다.
3. 땅을 차지하지 못한 일곱 지파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 2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받지 못한 자가 아직도 일곱 지파라” (18장 1~2절)
여호수아 18~19장을 읽어보면 더 안타깝고 한심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때까지도 땅을 얻지 못한 일곱 지파들입니다. 그들은 베냐민, 시므온, 스불론, 잇사갈, 아셀, 납달리, 단 지파입니다. 열두 지파의 반이 넘습니다.
이들도 땅을 분배받기는 했지만, 그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에 대해 게으르고 귀찮아하며 다른 지파들의 땅에 그냥 머물러 있었습니다. 마치 차려다 준 밥도 안 먹는 식이었습니다. 잠언에는 게으른 사람에 대해서 많이 언급합니다.
“13 게으른 사람은 핑계 대기를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한다. 14 문짝이 돌쩌귀에 붙어서 돌아가듯이, 게으른 사람은 침대에만 붙어서 뒹군다.” (잠언 26:13-14, 새번역)
‘이거, 완전 내 이야기인데?’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까? 이처럼 게으른 사람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핑계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몸을 움직이길 싫어합니다. 밖에서 할 일이 있거나 밥을 차려 놓았으니 나가서 먹으라고 해도, 길에 사자가 있으니까 너무 위험해서 못 나간다고 핑계를 대는 겁니다. 그렇게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서 침대에서만 뒹군다는 겁니다.
이것은 오래전 저의 모습을 생각나게 해 주는 구절입니다. 제가 미국에 이민 와서 대학교를 다니는데, 집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도시에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래서 주중에는 자취하고 주말에는 집에 들어왔는데, 일주일 동안 주중에는 공부하면서 일도 했습니다. 그렇게 알바도 뛰었기 때문에 피곤해서 토요일에는 늦게까지 잠을 잤습니다.
하루는 금요일 밤에 집으로 돌아와서 늦게까지 자고 있는데, 아침에 부모님이 뭔가를 해야 한다고 하시며 자꾸 일어나라고 그러시는 겁니다. 부모님이 자꾸 “야, 일어나서 이것 좀 빨리 해.”라고 하시기에, 원래 철학과 출신인 제가 이와 비슷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지금 자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깊은 철학적 성찰을 하고 있으니까 저를 좀 내버려두세요. 이민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깊은 철학적 성찰 중에 있습니다.” 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핑계입니까?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습니까?
“게으른 사람은 밥그릇에 손을 대고서도, 입에 떠 넣기조차 귀찮아한다.” (잠언 26:15, 새번역)
‘이것도 내 얘기인데?’라고 하시는 건 아닙니까? 지금 분명히 밥에 손을 댔는데 입까지 손을 올리는 게 귀찮은 겁니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습니까? 음식에 손을 대고도 입에 넣기를 귀찮아하니 말이 안 됩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요즘 말로 ‘귀차니즘’이라고 하는데, 모든 것이 다 귀찮은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게으른 사람에게는 아주 결정적인 특징이 또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재치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잠언 26:16, 새번역)
그렇게 자기가 게으르고 미련하면서도 지혜로운 사람들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게으른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지혜로운 조언을 해줘도 듣지 않고 자기가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핑계, 저 핑계가 많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그들을 향해 여호수아는 엄하게 꾸짖습니다.
“3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4 너희는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들의 기업에 따라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 (18장 3~4절)
이것을 보면, 여호수아는 정말 탁월한 지도자였고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문제의 원인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해결책까지도 제시합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온갖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치에서부터 스포츠까지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은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 한국의 최대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라고 느낍니다.
뉴스를 보아도,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문제는 많은데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이것은 제 잘못입니다. 제가 책임을 지고 해결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항상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빠져나가기에 급급합니다. 모두 다른 사람 잘못이라고 그 사람 탓을 하고 책임을 회피하려 듭니다.
멀리 다른 데를 생각할 것이 없고, 각자 자기만 봐도, 가정만 봐도 그렇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에게는 책임을 지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 자꾸 변명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 말고 그냥 ‘내가 잘못했다. 내 책임이다. 미안하다.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라고 말할 수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 삶에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일곱 지파의 지도자들을 소집해서 각 지파당 3명씩 대표를 뽑아 21명으로 구성된 소위 토지 탐사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아직 분배되지 않은 가나안 땅을 탐사하여 일곱 지파에 대한 분배를 생각하면서 성읍, 우물, 지형의 특징이나 경계를 그려 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일곱 지파에서 3명씩 골고루 참여하게 함으로써 앞으로 분배될 땅에 대해 불만을 품을 수 있는 요소를 미리 제거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대안 없이 그냥 지적만 하고 비판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찾아낼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주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된다면 정말 엄청난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로 이런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남이 가지 않는 개척지로 나아가서 힘써 싸우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성공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 그런 진정한 지도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문제를 지적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질 줄 알고 해결책을 제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만드는, 그런 놀라운 인생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