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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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2일 주일예배
✦ 믿음 28 ✦
아이 성 전투의 패배에서 얻는 교훈
(여호수아 7장 1~12절)
[들어가는 말]
스포츠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잘 아실 텐데, 어느 스포츠이든지 소위 ‘2년생 징크스’라는 게 있습니다. 프로 팀에 들어온 첫 번째 해에는 아주 잘하던 선수가 2년 차가 되어 침체에 빠지는 경우를 말합니다. 특히 야구에 그런 것이 심한 것 같습니다.
미국 프로야구에도, 한국 프로야구에도 신인상이 있는데, 이 상을 탄 선수들이 대부분 그다음 시즌에는 슬럼프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평생 단 한 번만 탈 수 있는 상이 아닙니까? 신인은 딱 한해만이니까 신인상은 평생 한 번만 탈 수 있습니다. MVP는 여러 번 탈 수 있지만 신인상은 딱 한 번인데, 그렇게 귀한 상을 타 놓고는 그다음 해에 슬럼프에 빠집니다.
여기에 대해 여러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첫 해 신인상을 받은 선수에 대해 다른 팀들이 새 시즌 시작 전에 철저히 분석하고 연구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경험 많은 감독들과 타자들 또는 투수들이 그 선수에 대해 자세히 연구해서, 약점을 집중적으로 파고들기 때문에 2년째에도 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둘째, 신인상을 받은 선수의 마음이 아무래도 교만해지고 해이해지기 때문입니다. 잘해서 유명해지니까 여기저기서 부르니까 각종 행사에 참여합니다. 또 여러 광고가 들어오고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출연 요청이 쇄도합니다. 정신없이 그런 데에 가다 보니까 바빠지면서 이전만큼 훈련을 철저히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훈련에 게을리하게 되고, 그것이 결과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성공한 뒤에 뜻밖의 실패를 경험하는 때가 있습니다. 성공했을 때 아무래도 방심하게 되고 마음이 해이해지며 교만해져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반면, 실패한 경우는 오히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분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실패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님을 발견합니다. 오히려 실패를 통해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배우고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패배의 원인 (1절)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이스라엘 군대는 기세를 몰아 곧바로 아이 성으로 쳐들어갑니다. 아이 성은 여리고 성에서 북서쪽으로 약 10마일 떨어져 있었고, 당시 인구는 대략 12,000명 정도였습니다. 이름이 ‘아이’ 성인데, 우리말로 아이처럼 작은 성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아이’는 ‘폐허, 무너진 곳’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 이름을 지어도 왜 그것을 폐허라고 했을지 의아합니다. 폐허에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가 사는 동네 이름을 ‘쓰레기동’이라고 짓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자기 성 이름을 ‘아이’(폐허)라고 지을 경우는 없을 텐데, 그러니까 아마도 후대에 이 이름을 붙인 게 아닌가 추정됩니다.
가나안에서 가장 견고한 요새였던 여리고 성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약한 성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아이 성과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은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줍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1절)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건너고 또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것도 그렇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도 그렇고, 모두 이스라엘이 한 것이 아니라 전부 다 하나님이 해주신 것이고, 그들은 그저 따라간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따라가며 순종한 것이 귀합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리고 성의 물건을 전부 다 하나님께 돌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도 손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취하지 말고 자기 것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여리고 성과 그 안의 좋은 물건들을 다 불에 태우거나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리고 성의 그 아까운 물건들을 다 포기했습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얼마나 탐스러운지 모릅니다. ‘야, 저걸 가지면 좋겠다. 너무 좋다.’ 하며 그렇게 좋아 보이는 것들을 모두 단호하게 포기하고 하나님께 다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모두가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백성 중에서 단 한 명, 아간이라는 사람이 여리고 성의 물건들을 탐내어 훔쳐다가 자기 장막에 숨겨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고, 그래서 그들은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여리고 성의 물건을 훔친 것은 아간이라는 개인입니다. 그런데 1절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범죄했다고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이 범죄했는데 왜 전체가 다 범죄했다고 하십니까? 이게 무슨 연좌제입니까?
또한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대상도 역시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하나님은 왜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전체를 다 벌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을 모르고 아간 혼자 살짝 훔쳤습니다. 그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전체에게 책임을 물으십니까?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닙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본문 내용을 계속 살펴보아야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아간의 죄가 이스라엘 전체에 영향을 미친 이유는 이스라엘이 주님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언약은 개인적 차원, 즉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과 맺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공동체 차원이었습니다. 거기에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미리 다 알려주셨습니다. 미리 알려주지 않고 갑자기 규칙을 바꿔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스포츠도 그렇고, 일반 상거래도 그렇고, 또 정치도 그렇습니다. 한 방식으로 하다가 갑자기 이번엔 이렇게 하겠다고 하며 싹 바꿔서 하게 되면 굉장히 불공정하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약속해 놓은 것을 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리 ‘이제 우리가 어느 시점이 되면 바꿉니다.’ 하고 미리 다 약속해 놓고 그때 ‘알겠습니다.’ 하고 다 동의했다면, 그때가 되어서 바꾸는 것은 불공정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약속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 말씀해 주셨고, 이스라엘도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며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니까 각 사람이 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언약에 참여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개인의 잘못은 공동체의 잘못이나 마찬가지이고, 결국 주님과 이스라엘 간의 언약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 본문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열 개의 달걀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상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요리사가 열 개를 섞어서 요리하는데 “아홉 개는 멀쩡한데 하나가 그런 것을 가지고 뭘 그러세요? 괜찮습니다. 그냥 만들어서 드릴 테니 드세요.”라고 하면 드시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가 상했으면 전체가 다 상한 것이 됩니다. 절대 먹을 수 없고 먹어서도 안 됩니다. 그 썩은 한 개를 빨리 찾아내서 버리든지 해야지, 아홉 개는 괜찮으니 한 개가 상했어도 괜찮다고 하며 섞어서 요리하면 안 됩니다.
사람 몸의 암세포도 마찬가지입니다. 암 환자가 죽게 되는 것은 암세포가 몸 전체에 다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가끔은 그러기도 하지만, 사람 몸의 어느 한 부분에만 암세포가 있어도 그것 때문에 죽게 되는 겁니다. 한 부분에 있는지 아니면 전체에 있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암세포가 얼마나 강력한지입니다.
그래서 암은 초기에 찾아 뿌리를 뽑아 버리면 죽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고, 요즘에는 치료 방법도 더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내 몸은 이렇게 큰데 암세포는 눈에도 안 보일 정도로 아주 작고 한 부분에만 머물러 있으니까 괜찮다.’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한 부분에 있는 암세포가 온몸에 점점 퍼져서 고통을 주고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성경은 바로 그렇게 우리 안에 암세포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라고 하는 암세포를 가지고 있는 환자들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엄청난 기적과 승리를 맛보기도 하지만, 또 어이없는 패배를 당하기도 합니다. 언제나 성공만 하고 잘되기만 하면 좋겠지만, 때로는 잘되지 않기도 하고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죄라는 암세포를 치료받아 가면서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간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 진노하신 것은 결코 이스라엘을 미워하셔서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썩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부패한 본성을 심각하게 보셨고, 그래서 그것을 초기에 고쳐야 건강하게 될 수 있기에 그렇게 결심하셨다는 뜻입니다. 초기에 암세포를 잘라내 버리려 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굉장히 유익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증세가 깊어지기 전, 아예 초기에 그들의 죄를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공동체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간은 여리고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주 중대한 죄를 범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먼저, 아간은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자기 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을 과연 하나님이 아시겠느냐고 가볍게 생각한 겁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당연히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본문은 아간의 족보에 대해 자세히 말해줍니다. 유다 지파이고, 세라의 증손자이고, 삽디의 손자이고, 갈미의 아들인 아간입니다(1). 하나님은 너무나 정확히 아간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그를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 아십니다. 또한 각 사람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살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지내는지, 아주 지대한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굉장히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세상에 나에 대해 그렇게 관심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나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렇다고 막 참견하시겠다는 게 아니라 우리를 너무나 관심 있게 보시고 우리가 제일 좋은 길로 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랑하는 자녀가 잘못 가게 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픕니까? 우리가 잘못 가지 않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늘 지켜보시며 최선의 길을 가길 원하십니다. 나 한 사람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인지, 너무나 관심이 많으십니다.
아간은 ‘뭐, 나 하나쯤이야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범죄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큰 배도 작은 구멍 하나 때문에 침몰할 수 있지 않습니까? 믿음의 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게 살 때,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 전체에 끼칠 수 있는 악영향이 엄청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나 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 여기에 따라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중요하지 않은 게 결코 아닙니다. 우리 각 사람이 다 중요합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스포츠 선수들을 ‘국가대표’라고 부릅니다. 국가대표 선수가 어떻게 행동하느냐를 보면서 사람들은 그 나라에 관해 판단합니다. 특히 국가대표라고 하면 축구 국가대표팀을 많이 생각하는데, 한국 국가대표팀 선수 중에 해외에 진출한 선수들이 있습니다.
대체로 한국 선수들은 스캔들을 일으킨 선수가 없고 굉장히 모범적이며, 동료들과도 잘 어울리고 코치들과도 아주 잘 소통하는 선수들이 많아서 다행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South Korea)이라고 하면 대부분 좋아합니다. 그런데 국가대표인 선수가 이상한 짓을 하고 스캔들을 일으키며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그 선수뿐만 아니라 그 선수의 나라까지 욕을 먹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각자가 ‘교회 대표’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우리 교회만 대표하는 게 아니라 하늘나라를 대표하는 천국 국가대표 선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천국 국가대표 선수입니다. ‘나는 직분이 없으니까 괜찮지. 나는 평신도니까.’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천국을 대표합니다. 믿지 않는 분들이 볼 때는 다 천국을 대표하는 국가대표입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한 사람이 잘못하는데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뭐 저래?’라고 조롱하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잘못해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다 저래.’라고 합니다.
또 우리를 우리 교회 대표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의 대표로까지 확대해서 봅니다. 물론 억울한 점도 있지만, 그게 사실이 아닙니까? 우리가 잘못하면 우리 교회가 욕을 먹을 뿐 아니라 예수님까지 비난을 듣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의 행동과 태도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생각해 보면 실제로 그런 경우가 참 많지 않습니까? 저도 이전에 목회자가 되기 전 대학생 때를 생각해 보면, 미국에 이민 와서 얼마 안 됐을 때 유학생들과 많이 어울리며 지냈습니다. 그때는 학부 유학생들이 아니라 주로 대학원생들이라서,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중에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분들도 있었고, 대학원 박사과정인 30대 초중반 사람들 중에는 교회에서 청장년부 회장을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인 학생회로 모인다고 해서 가보니까 다들 술을 잘 마셨습니다. 저는 그때 어린 마음에 ‘저분이 교회에서 청장년부 회장이신데, 여기서는 너무 주(酒)님을 잘 섬기시네.’ 하고 감탄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주(主)님을 잘 섬겨야 하는데, 주(酒)님을 섬기고 있으니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냥 단순히 ‘야, 저 사람이 참 술을 잘 마시는구나.’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교회를 잘 다니던 저도 ‘저분이 좀 이상하다.’라고 느끼는데,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들은 ‘아이고, 너나 나나 똑같아.’라고 말합니다.
우리 한 사람의 행동과 태도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사회 속에서 우리 교회 대표로, 또 기독교 대표로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나 하나쯤 어때?’ ‘한 번인데 어때?’ ‘나는 별로 중요한 사람도 아닌데 어때?’라는 생각이 교회 전체를 침몰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러나 나 한 사람이 주님 안에서 제대로 서 있으면 교회 전체를 세울 수 있게 됩니다. 또 천국의 명성을 떨칠 수 있게 됩니다.
2. 아이 성 전투에서의 패배 (2~5절)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은 우선적으로 아간의 죄에 있었지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자만과 방심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인간의 방법에만 의존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을 공격할 때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자기들 안에 죄를 지은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향해 진노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2절)
여호수아는 평소와 같이 아이 성을 정탐해 오도록 합니다. 여호수아가 정탐꾼들을 파견한 것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호수아의 실수는, 이때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지혜를 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고 오직 정탐꾼들의 말만 믿었다는 데 있습니다.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3절)
정탐꾼들은 아이 성의 규모나 군사력을 우습게 여기고 그저 2~3천 명의 군사들만 보내도 전쟁에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들의 보고를 듣고 그들의 말대로 합니다.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는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나아갔고 하나님의 지시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이 성을 공격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여리고 성을 이긴 자신감에 가득했던 여호수아가 인간적인 준비에 바빠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틈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여리고보다 훨씬 작고 약해 보이는 아이 성을 얕잡아 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은 것입니다. 구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이 정도는 기도하지 않아도 되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런 게 얼마나 많습니까? 큰 일에 대해서는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며 자기도 열심히 기도하려고 하는데, 별것 아닌 것 같이 보이는 일에는 ‘이런 건 기도를 안 해도 그냥 내가 알아서 하면 돼.’라고 하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5장에서 하나님의 군대 대장은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군대의 사령관이 아니라 부하이고 부관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부관으로 순종하며 따름으로써 여리고 성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실 그때 자기들이 한 게 무엇이 있습니까? 성을 돌다가 성이 무너지니 이긴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이 성 전투에서는 자기가 사령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탐꾼들의 보고에 의지하여 3천 명의 군사를 보내었다가 크게 패합니다.
“4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5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4~5절)
정탐꾼들은 인구가 12,000명인(8:25) 아이 성 공격에 있어서 이스라엘 전체가 다 나설 필요 없이 2~3천 명으로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3천 명을 보냈는데, 결과는 비참한 실패였습니다.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2~3천 명 정도로 아이 성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들은 여리고 성 승리에 도취 된 나머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이 자기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었다는 것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에 벌써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도 잊어버리는 게 많은데, 삶 공부도 설교도 그렇습니다. 이런 것이 잘 사용되면 ‘망각의 은사’(?)입니다. 삶 공부를 한 번 하고 나서 몇 년 후에 다시 들으시는 분들에게 “이전에 했던 게 생각나세요?”라고 물으면 “하나도 생각이 안 납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감사합니다. 같은 것을 또 해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좋은 의미이고,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얼마 전에 행하신 일을 바로 잊어버렸습니다. 얼마 전 일어난 일을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리고 스스로에 대해 과대평가를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잊어버리면 자기에 대해 과대평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적은 과소평가하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께 여쭈어보아야 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 공격 때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더라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죄를 범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셨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여호수아는 그 죄를 즉시 다룰 수 있었을 것이고, 이렇게 당황스러운 패배를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정복 전쟁을 쭉 살펴보면 딱 한 번을 졌는데 그게 여깁니다. 다 이기고 딱 한 번을 졌는데, 그것도 최약체에게 졌습니다. 엄청난 강팀이 최약체 팀에게 가끔 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을 이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역도 최대 이변이 일어난 겁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데는 다 이기고 제일 약한 성에게 졌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에서 기도는 호흡과 같습니다. 기도가 없으면 죽은 겁니다. 인생의 새로운 도전을 만날 때마다 아무리 쉽고 만만해 보여도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하기 전에 충분히 기도하는 것이 기도를 안 하고 빨리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빠릅니다. 우리는 뭔가를 하려고 나서며 서두르는데, 충분히 기도하고 나가는 것이 기도를 안 하고 빨리하는 것보다 빠릅니다. 기도 없이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보다 먼저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합니다. 인생의 실패는 기도의 실패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아이 성의 첫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사 36명이 죽임을 당합니다(5). 이것은 전체 병력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인데, 그들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엎질러진 물처럼 되어서 어떻게 할 줄을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패배를 당한 충격으로 인해 너무 속이 상하고 분하여 떨려서 마음이 수습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서 나아가지 않으면, 몸도 힘이 빠지고 준비한 것들이 별 소용없이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 아주 위험한 것이 바로 이런 무기력 증세입니다.
무기력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영적인 부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배입니다. 개인 예배도 있고 이렇게 공 예배도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해서 괴로울 때는 사실 혼자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럴 때는 열심히 교회의 공 예배에 참석해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무기력 증세가 있습니까? 아니면 영적 공황 상태에 있습니까? 평소에도 예배에 잘 오신 것이지만, 특히 오늘 그런 경우에 이 예배에 너무 잘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괴롭고 어려울 때 더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발길을 딱 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을 끊고, 예배를 안 나가며, 소위 요즘 말로 잠수를 탑니다. 연락도 안 됩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와서 예배에 참석하셨으니 너무나 잘 오셨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배할 때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한 우리를 위해 이렇게 주일예배가 있고, 또 수요예배가 있으며 새벽기도도 있습니다. 최대한 나오셔서 주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할 때 회복이 주어집니다. 주님이 만나주시고, 또 만져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조심해야겠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하나님께 나아가 여쭈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때까지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아이 성에서 실패했고, 그 후에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는 이 실패를 통해 큰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 교훈이란,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께 여쭤보아야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아 주님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는 특히 어떤 영적 부흥을 경험하거나 기도의 응답을 받았을 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주 성령 충만할 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삶 공부를 한다든지 예배라든지 또 부흥회라든지 ‘큰 은혜를 받았다.’라고 할 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언제 실패했습니까? 여리고 성에서 졌을 때가 아니라 엄청난 승리를 경험했을 때입니다. 승리를 경험할 때, 영적 부흥이 일어날 때, 간절한 기도의 응답을 받았을 때, 너무 기쁘고 흥분될 때, 그럴 때가 더욱더 조심할 때입니다. 그럴 때 방심하게 될 수 있고, 흥분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를 놓고 합심해서 기도했는데 주님께서 들어주시면 얼마나 기쁩니까? 내가 건강을 위해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또 재정의 문제를 놓고 기도했더니 재정 상황이 좋아졌습니다. 진로의 문제를 놓고 기도했는데 길이 열렸습니다. 가정의 어려움을 놓고 기도했는데 다 잘됐습니다. 자녀가 힘들어 해서 자녀 문제를 놓고 기도했는데 너무나 잘 풀렸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기쁩니까? 무엇보다 믿지 않는 VIP 영혼을 놓고 기도하며 함께 섬기고 그랬는데, 주님을 영접하고 마침내 세례를 받았다면,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하지만 그럴 때가 더욱 조심하고, 더욱 정신 차리며, 더욱 깨어 기도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응답을 받았다고 끝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때부터가 새로운 시작입니다. 일이 잘될 때 마음이 느슨해지고 방심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이 마치 내 힘으로 된 것처럼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3. 여호수아의 슬픔과 하나님의 대답 (6~12절)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6절)
여호수아는 아이 성 싸움에서 패배하여 큰 충격을 받고 침체에 빠집니다. 여기 보면,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렸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너무나 마음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겉옷을 찢는다는 것은 그 당시 참담함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궤, 즉 언약궤 앞에 장로들과 함께 엎드렸는데, 사실 이것은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너무 상하거나 분하거나 화가 나면 기도도 되지 않습니다. 다 그런 경험이 있지 않으십니까?
이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장로들은 아이 성의 패배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 나가 하루 종일 씩씩거리며 엎드려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와서 그 시간부터 해가 질 때까지 몇 시간이고 계속 엎드려서 씩씩거리고 있었습니다. 너무 화가 나고 분하고 슬퍼서 그냥 엎드려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패하게 하신 것일까? 왜 하나님은 여기까지 우리를 이끌어 오시고 이 땅을 주겠다고 약속해 놓으시고는, 이렇게 우리를 피하게 하신 것일까? 왜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변덕을 부리시는 것일까?’
아마 여호수아는 이때 별의별 생각을 다 했을 것이고, 굉장히 마음이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것이 기도는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어도 그것은 기도가 아니었고, 그때는 하나님의 응답도 없었습니다.
기도는 언제 시작됩니까? 우리가 입을 열어 자기 생각을 주님께 말씀드릴 때 시작됩니다. 물론 묵상으로 해도 됩니다. 속으로 ‘하나님,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라고 말씀드릴 때 기도가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새벽 기도 시간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왜 일이 이렇게 됐을까?’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이것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릴 때 기도가 시작되는 겁니다.
여호수아는 너무 속이 상하고 분하고 하나님의 하신 일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기도의 입술을 여는 데 하루 종일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어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하니까 하나님도 응답해 주십니다.
진작 한마디를 했었으면 그렇게 오래 무릎 꿇고 있지 않았어도 되는 거였는데, 그걸 안 하고 계속 엎드려 있다가 드디어 “하나님”이라고 하는 순간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다.
“7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8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9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7~9절)
여호수아는 자신의 모든 불만과 억울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토해 냈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위대한 점입니다. 여러분, 위대한 신앙인은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봉사와 헌금을 빠지지 않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훌륭한 신앙의 결과로 나오는 것이지만, 그렇게 한다고 반드시 위대한 신앙인인 것이 아닙니다.
정말 위대한 신앙인은 솔직한 마음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포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숨길 게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다 아시기에, 내 마음 그대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수아가 한 일입니다.
물론 이 여호수아의 기도 내용은 아직 주님의 뜻을 모르고 한 것이지만 그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서 “슬프도소이다”, 즉 “하나님, 제가 슬픕니다.”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우리도 뭔가 괴롭고 힘든 일을 당할 때 그냥 이야기하면 됩니다. 하나님께 그냥 말씀드리면 됩니다. 격식을 따져서 하지 말고 “하나님, 제가 괴롭습니다.”라고 그냥 말씀을 드려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모든 인도에 대한 자기의 신뢰가 무너졌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것이 가나안 사람들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요단강을 건너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뻔했습니다.”라고 따집니다.
여호수아는 철저히 하나님 말씀에 헌신하며 순종하는 사람인 것을 그동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 실패하니까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에 대해 다 의심이 생기는 겁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승리를 주신 이유가 뭔지 의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지 못할 것 같은 불신도 생긴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 침체는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주 나쁘고 괴팍한 분으로 생각하기 쉽고, 지금까지 하나님이 주신 복들을 다 저주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영적 침체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신앙생활을 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 영적 침체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미래를 믿음으로 볼 수 없고 말씀의 능력을 믿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여호수아가 잘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속으로 생각만 하지 않고 입을 열어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그전에 또 잘한 게 있습니다. 씩씩거리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왜 이러지?’ 하면서 분노하고 괴로워하다가 ‘에이, 관두지.’ 하고 그냥 그 자리를 떠나 버린 게 아니라, 계속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었고 마침내 입을 열어 하나님께 “슬픕니다”라고 하면서 기도를 시작했다는 것이 참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입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위기를 당하거나 침체를 겪을 때 ‘나는 괜찮습니다.’라고 하거나 ‘너무 괴롭습니다.’라고 속으로 생각만 하지 말고, 입으로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그 믿음 좋고 순종을 잘하던 여호수아가 한순간에 이렇게 불신앙의 자세를 취한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속성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실패를 경험하면 그동안 쌓았던 믿음이 한순간에 이렇게 다 우르르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계속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완성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 종일 엎드려 있던 여호수아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이 일의 원인을 알려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10절)
여호수아가 분을 누르고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올 때 하나님도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하지만 이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아마도 못 일어났을 겁니다. 다리가 저려서. 피가 안 통해서 지금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이때 여호수아가 아차 했을 겁니다. ‘진작 기도할 걸 괜히 버티면서 성질부렸네. 진작 하나님 슬픕니다, 했으면 일어나라고 하셨을 텐데, 괜히 몇 시간 있다가 다리만 아프네.’
하나님은 지금 이렇게 엎드려 있지만 말고 빨리 일어나서 이스라엘 안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지금 할 일은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숨은 죄가 있다는 것과 그것 때문에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1~12절)
숨어 있는 죄의 힘이 이렇게 크다는 것을 하나님이 지적하십니다. 드러난 죄는 다른 사람들도 다 알기 때문에 어느 정도 조심하게 되는데, 숨어 있는 죄는 한순간에 누룩처럼 퍼집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호수아가 잘못했다고 야단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이스라엘이 전혀 잘못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불만을 토해 냈습니다. 바로 그것이 여호수아의 실수였습니다. 여호수아라고 해서 그 죄를 미리 막을 수는 없었지만, 일단 일이 터진 다음에는 빨리 수습해야지 이렇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분노한 채로 계속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의 원인을 알 수도 없고 또 일어나지 않도록 다 막을 수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할 일은, 그때그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면서 빨리 수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회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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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더라도 숨어 있는 죄는 부흥의 불길을 꺼뜨리고 주님의 교회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아주 작은 일이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죄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할 뿐 아니라, 특히 일이 잘될 때 더욱 조심해야겠습니다.
또 어려움이 생겼다고 두려워하거나 절망하거나 불평, 불만, 원망할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의 자기 감정을 잘 수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도록 기도하며 나아가야겠습니다. 그렇게 나아갈 때 아름다운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