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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N-lYICQ-Hfc?si=yghbTwpP3dXph5Ic&t=217

 

 

2025615일 주일예배

믿음 27

순종으로 승리한 전쟁

(여호수아 615~27)

 

[들어가는 말]

 

오래전에 들었던 한 형제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일찍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의 유익에 관한 책을 읽고 크게 감명받은 형이 동생에게 말했습니다. “, 나는 이제부터 아침형 인간이 되겠다.” 그랬더니 동생이 피식 비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먼저 인간부터 되어라.”

 

그 후 이 형제 이야기의 2탄도 나왔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형은 정말로 아침형 인간이 되었는데, 동생은 여전히 매일 늦게 일어나고 게으르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동생을 답답하게 여긴 형이 동생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 너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는 말도 못 들어봤냐? 이런 식으로 매일 게으르게 지내지 말고 나처럼 아침에 일찍 좀 일어나봐라. 네 인생이 달라질 거다.”

 

그 말을 들은 동생이 누워서 형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습니다. “형은 벌레가 괜히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돌아다니다가 새에게 잡아먹혔다는 말은 못 들어봤나 보네. 그러니 나 좀 더 자게 내버려둬.”

 

이 동생의 말이 굉장히 맞는 것 같지만 사실은 궤변입니다. 벌레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새에게 잡혀서 먹힌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잡혀서 먹힌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중 중요한 한 가지는 그들 모두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쓴 책을 보십시오. 실컷 늦잠 자면서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아침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었고, 보통의 성공한 사람들처럼 자기 일을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나님과 만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몇 시에 일어나십니까? 아침 시간을 잘 활용하면 너무나 유익합니다. 물론 밤 체질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특히 학생들은 밤늦게까지 공부하지 않습니까?

 

미국의 고등학생들은 잠이 굉장히 모자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밤늦게까지 공부도 하지만 스마트폰도 하고 인터넷도 하고 그러다가 늦게 자는데, 학교에는 굉장히 일찍 가니까 잠을 몇 시간 못 자고 학교에 가서 비실비실 조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밤은 아침보다 긴장감이 훨씬 덜합니다. 아침에는 사실 1분이 급하지 않습니까? 학교에 갈 때 아이들도 서둘러 나갑니다. 그래서 부모님들도 , 빨리해, 5분밖에 안 남았어!”라고 합니다. 아침에는 분 단위 개념의 말이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밤에는 어떻습니까? “너는 저녁 830분에서 40분 사이 인터넷에 접속해야만 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그냥 밤 아무 때나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밤에는 그만큼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여유 있게 이것저것을 하고 쓸데없는 일도 합니다.

 

그러니까 밤에는 시간이 쉽게 낭비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침에는 그토록 서두르면서 저녁때는 티브이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또는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한두 시간 보내는 것은 보통입니다.

 

그러나 정말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할 게 아니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부터 들여야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어나서 하나님, 간밤에 잠을 잘 재워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오늘도 하나님께 맡기면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1.   승리를 주셨기에 외치라 (15~21)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합니다.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날뿐이었더라” (15)

 

이것은 그들이 일곱째 날에만 일찍 일어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12절을 보아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또 일곱째 날에도 그들은 계속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의 명령을 감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아침 일찍 일어나 여리고 성을 아침에 돌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여리고 성으로 갔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물론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열심이 굉장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중동의 뜨거운 열기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갔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그들의 열정이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새벽에 일어났다는 것은 그들이 억지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열심을 내어 일찍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아침 일찍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에 대한 흥분이 있었고 또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억지로 하는 일에는 열심을 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는 게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에 열정을 보이지는 않잖습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일에는 열정을 보이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싫어하는 일에는 열정을 내기가 힘이 듭니다.

 

제가 어릴 때를 생각해 보아도, 아침에 학교에 가거나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그렇게 일어나기가 싫습니다. 아침잠이 그렇게 달고 좋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깨워주지 않으셔도 눈을 번쩍 뜨고 혼자 벌떡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체육대회를 할 때와 소풍 갈 때입니다. 그때는 알람을 맞춰놓지 않아도, 부모님이 안 꺠워주셔도 일찍 눈이 떠집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제가 어릴 때 그렇게 하면서 참 신기하다고 느꼈던 기억이 분명히 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는 흥분이 되어 자기도 모르게 일찍 일어나는 겁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나간 것이 바로 그런 겁니다.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적극적이었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역사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자발적인 헌신으로 일찍 일어나 여리고로 가서 성을 일곱 번째 도는 이스라엘 군대에게 여호수아가 뭐라고 선포합니까?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6)

 

핵심 명령은 아주 단순명료합니다. “외치라!” 제사장들이 나팔을 부니까 여호수아가 외치라고 합니다. 이 외치라는 이 명령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여기서 주셨다라는 단어도 완료형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여리고 성을 주신 일은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아직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과는 이미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제한을 받아서, 과거에 일어난 일은 알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마치 하나의 점으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한꺼번에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단지 이미 이루어진 일을 이스라엘 편에서 확인하는 절차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는데 사람들은 모르니까, 그것을 확인하는 절차만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외치면 주실 것이다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건문이 아니라, ‘이미 주셨기 때문에 외치라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크게 외쳤기 때문에 성이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고고학자들이 여리고를 조사해 보니까 그 지반이 약했다는 겁니다. 땅이 약한데 사람들이 하고 소리를 지르니까, 사람들의 소리에 굉장한 파워가 있어서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군대가 지르는 소리에 의해서 약한 지반이 무너졌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땅이 흔들려서 성이 무너졌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많이 봐줘서, 소리를 지르니까 지반이 약해서 무너졌다고 하더라도, 왜 하필 그때 딱 무너집니까? 왜 딱 그 순간입니까? 그러니까 땅이 약해서 무너진 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이 여리고에서 승리하는 것은 자기들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성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17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18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17~19)

 

여호수아의 명령은 외치라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리고 안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것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성벽이 무너진 사건은 생각보다 아주 짧게 언급됩니다. 자세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대신 무너진 여리고의 전리품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그 방법에 대한 지시와 그에 따른 실행이 본문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온전히 바치다’, ‘바친 것’, ‘바친 물건’, ‘바침등의 단어들은 모두 히브리어 헤렘과 관련됩니다. 헤렘이라는 말은 온전히 드려진 것이라는 뜻인데, 한 번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 되면 그것을 다시 무를 수가 없습니다. 헤렘으로 드려지면 그것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금지됩니다. 헤렘은 사람이나 물건을 완전히 진멸하여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진멸하여서 그것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전멸시켜서 바치는 희생 제물에 손을 댔다가 스스로 파멸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이 전멸시켜서 바치는 그 제물을 숨겨서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 진은 그러한 사람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18).

 

이러한 경고 아래 여리고 성 주위를 침묵 가운데 돈 지 7일째 되는 날, 마지막으로 일곱 바퀴를 다 돈 다음 나팔 소리와 함께 온 백성이 엄청난 승리의 고함을 지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21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20~21)

 

믿기 힘든 일이 이스라엘의 눈앞에서 현실로 벌어집니다. 가나안에서 가장 견고하다는 여리고의 성벽, 그것도 외벽과 내벽이라는 이중 벽으로 되어 있는 것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11:30)

 

성을 돈 것을 믿음으로 했다고 평가합니다. 정말 믿음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이러한 작전을 어떻게 펼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성이 무너지자 이스라엘 군대는 성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여리고 성안의 모든 사람은 물론 가축까지도 살아 있는 것들을 다 죽입니다.

 

여기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이런 점에 대해 쓰인 책도 많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여리고에 대해 이토록 잔인한 일을 명령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왜 남자, 여자, 어린이, 노인, 짐승 할 것 없이 다 죽이게 하셨습니까? 너무 폭력적이고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냐고 하며 책도 쓰고 논문도 쓴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리고는 달의 여신을 비롯하여 수많은 우상들을 섬기는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고대사회 도시 국가들은 다 그랬습니다. 온갖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여리고뿐 아니라 모든 가나안 사람들은 여러 가지 미신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신과 우상숭배라는 것은 굉장히 성적으로 음란한 제사 의식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성적으로도 음란하며, 잔인하고 폭력적이었습니다. 얼마나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였는지 모릅니다. 또 제물로 사람을 갖다 바쳤습니다.

 

특히 달의 여신은 아주 음란한 신이었기 때문에, 남녀 간의 문란한 성생활뿐 아니라 동성애와 심지어 짐승과의 교접 같은 타락한 문화가 당시 그들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는 성병이 만연해 있었고, 그들이 자랑하던 황금 그릇들이나 장식물들에도 온갖 음란한 그림들이 그려지고 또 우상의 모습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더구나 여리고는 가나안의 관문 역할을 했기 때문에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리고는 인간의 물질주의와 잘못된 성 문화, 그리고 폭력과 교만으로 가득한, 아주 악한 곳이었습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죄악의 상징이었던 곳이 당시 여리고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곳의 사람들과 물건들을 그대로 놓아둔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오염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토록 악한 여리고의 철저한 파괴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교회를 안 다니고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을 압니다. 예수님이 핵심적으로 가르치셨던 것이 사랑이었던 것도 압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사람들을 이렇게 죽이라고 하느냐? 어떻게 사람들을 끔찍한 지옥으로 보내느냐?”라고 묻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지옥으로 보내시는 게 아니라, 자기가 선택해서 가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지만,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죄악이 큰데도 가만히 놓아두면 공평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악을 범하고 죄를 짓고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을 보고서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용서해 주겠습니다. 그냥 가세요.”라고 하면 그게 올바른 겁니까? 그게 공평한 겁니까? “나는 사랑이 많기에 살인을 저질렀어도 그냥 보낸다.”라고 하는 것은 절대 공평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리고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만 하나님이 마구 심판하시는 게 아닙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두 나라로 분리되었는데, 북이스라엘이 멸망 당하고 남유다도 멸망 당할 때 보십시오. 그들은 계속 악만 행했습니다. 죄만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죄만 짓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이 참고 참고 참으시다가 결국 아시리아와 바벨론을 통해서 그들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때 얼마나 무참히 살육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얘는 내 아이니까 나는 얘가 어떤 죄를 범해도 무조건 보호해 준다.’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나님이 그냥 두시는 게 아닙니다. 물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심판의 날이 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라는 두 가지 성품이 잘 드러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심판하실 수밖에 없지만, 또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을 멸하시는 대신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시고 우리가 살게 해주셨습니다.

 

 

2.   진격하는 가운데에도 지킨 약속 (22~25)

 

이렇게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는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은 죄를 철저하게 다스리시는 거룩한 분이시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시는 자비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렸던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과 그 식구들을 살리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여리고 성이 함락되면서 라합의 안전이 어떤지가 가장 먼저 언급됩니다.

 

“22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23 정탐한 젊은이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의 부모와 그의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의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의 진영 밖에 두고 24 무리가 그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불로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22~24)

 

라합과 그 가족들이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은 바로 라합의 믿음의 결과입니다. 라합은 가나안을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 정탐꾼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 것을 이미 살펴본바 있습니다(2:9-13).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11:31)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25)

 

여호수아서가 기록된 당시까지 라합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기생, 즉 창녀에 불과했던 비천한 라합의 믿음을 아주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라합과 맺은 약속을 그대로 이행하도록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심지어 라합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까지 오르는 영광을 얻게 해주셨습니다. 라합의 이야기는 7장에 나오는 아간의 이야기와 한 쌍을 이루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깊은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여리고 성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헤렘)이 되었습니다(17). 그러한 헤렘이 선포되면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멸해야 했습니다(21). 죄악에 물든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그럼에도 라합과 그 가족들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라합이 이방인이었고, 그것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와 관련된 창기였지만, 하나님은 그녀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시고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녀뿐 아니라 가족들과 친척들까지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모두 라합의 말을 듣고 믿음의 길로 들어왔다는 겁니다. 라합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이게 귀한 믿음입니까? 라합 한 사람 때문에 온 집안이 살게 되었으니까 라합이 얼마나 귀한 일을 한 겁니까?

 

비록 도시 전체나 온 나라가 죄악에 물들고 그 백성 모두가 심판을 받아서 죽어 마땅한 상황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이처럼 하나님은 신실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살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오늘 성경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걸 보면서 아이고, 말세다, 말세.” 자연재해나 사고가 아니라 어떤 악한 범죄가 저질러지는 것을 보면서 , 말세다. 이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가?”라고 하고, 어떤 경우에는 이제 세상은 정말 소망이 없다.” 하며 절망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계 전체가 그렇게 되더라도 한 사람만 믿음의 사람이 되어도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이렇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라합이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변명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이래서 이렇다, 사회가 이러니까 이렇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러니까 나도 어쩔 수 없다.’라고 변명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내가 그 한 사람이 될 때 나 한 사람 때문에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내 주변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반면 아간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아간은 여리고 성의 모든 물건을 손대지 말고 하나님의 집 곳간에 바치라고 했는데 거기서 슬쩍 물건들을 빼돌립니다(7:21).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고, 여리고보다 훨씬 작고 약한 아이 성에서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밝혀진 다음에 아간은 탐욕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과 짐승들까지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7:24-26).

 

이 말이 무엇입니까? 바로 아간과 그 가족들이 헤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헤렘으로 되어 있던 데가 어디입니까? 여리고 성과 그 안의 모든 것입니다. 그런데 헤렘으로 되어 있는 것을 슬쩍하니까 자기가 헤렘이 되어 버렸습니다. , 자기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되어서 진멸당했다는 것입니다.

 

헤렘으로 지정된 여리고를 진멸해야 할 이스라엘에 속한 아간은 오히려 헤렘이 되어서 멸망 당하고, 원래 헤렘으로 지정되어서 멸망 당해야 했던 라합은 살아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어느 민족이냐, 출신이 어디냐를 보고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 이스라엘 사람이면 무조건 오케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면 무조건 오케이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느 민족이냐, 출신이 어떠냐, 인종이 어떠냐, 이런 걸 따지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은 악한 죄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은 여리고 성이 함락되기 전에 시간을 주셨습니다. 7일이라는 시간을 주면서 기다리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저렇게 무조건 다 죽이라고 하시며 무시무시한 폭력적인 하나님이시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죄만 짓고 악만 행하며 살던 여리고 사람들에 대해 참고 또 참고 몇백 년, 몇천 년을 기다리셨는데, 이제 최후의 통첩을 하시고 7일 동안 시간을 주신 겁니다.

 

7일 동안 여리고 사람들은 얼마든지 문을 열고 이스라엘에게 항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잘 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6일 동안 여리고 성을 매일 한 바퀴씩 돌 때도 기회가 있었고, 마지막 날 일곱 바퀴를 다 돌 때까지도 기회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마지막 날 ‘7’이라는 숫자가 완전수이며 이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일곱 바퀴를 돌라고 하신 것이라고 살펴보았지만, 거기에는 마지막까지 여리고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 마음이 보이십니까?

 

그러나 그들은 안에서 버티며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철저히 멸망 당하게 되었습니다. 죄악에 대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라합뿐 아니라 여리고 성의 누구든지 라합처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음을 돌이켜 주님께 나아왔더라면, 멸망 당하는 대신 살아남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리고뿐 아니라 가나안의 모든 사람들은 이미 이스라엘의 신이 어떤 일을 행했고 이스라엘이 어떤 민족이라는 것을 다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렇게 두렵고 떨리면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하면서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을 걸어 잠그고 대적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 쳐들어오나 하는데 드디어 저쪽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정말 이상합니다. 군대가 쳐들어올 때 보통은 말을 타고 오든지 창과 활로 공격해오니까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방어를 하려고 할 텐데, 무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옵니다. 그것도 무슨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이는데, 제사장들은 옷이 특이하지 않습니까? 그런 옷을 입을 입은 사람들이 나팔을 들고 오는 겁니다.

 

게다가 그 뒤에는 또 무슨 이상한 궤짝 같은 걸 들고 오는데, 전쟁에 그런 식으로 나오는 군대는 없습니다. 무슨 나팔을 든 사람들이 나오는데, 전쟁에서는 나팔도 뒤에서 공격하라고 부는 것이지 저런 식의 나팔을 들고 오지는 않습니다. 또 궤를 들고 오는데 이건 정말 이상합니다.

 

거기에 군대가 분명히 오는데 공격을 해오지 않고 한 바퀴 쓱 돌더니 돌아갑니다. 그때 얼마나 공포스러웠겠습니까? ‘언제 공격하려나? 저러다가 갑자기 기습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며 긴장하고 있는데, 그냥 한 바퀴 쓱 돌더니 돌아갑니다. 그럼 그때 여리고 사람들은 뭘 느꼈겠습니까? ‘, 갔다. 뭐 별일이 없네. 저 사람들은 왜 저러지?’ 뭔가 굉장히 이상하면서도 어휴, 오늘 살았다.’라는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둘째 날에 또 옵니다. 그래서 , 오늘은 공격해 오려나 보다.’라고 생각하는데, 또 똑같이 합니다.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이거 뭔가 좀 이상하다. 공격할 마음이 없나?’라고 생각합니다. 3일째에 또 옵니다. ‘이제는 진짜 공격하겠지생각하는데 전과 똑같이 한 바퀴만 돌고 갑니다.

 

그렇게 4일째쯤 되면 이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오늘도 그냥 돌겠지.’라는 것이 기대가 되는 겁니다. ‘오늘도 별일 없겠지.’ 그러면서 이제 마음이 조금 느슨해집니다. 5일째가 되어 돌고 갔을 때 아마 거기서 잔치가 벌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 쟤네가 우리에게 겁먹고 공격을 못 하나 보다.’ 그러면서 잔치를 벌이고 흥청망청하며 이전에 짓던 죄들을 또 짓고, 지난 며칠 동안 긴장해서 짓지 못하던 죄를 한꺼번에 지으며 이상한 짓을 하는 겁니다.

 

그다음 날인 6일째가 되니까 , 오늘도 돌다 가겠지.’라고 생각하는데, 예상대로 한 바퀴를 돌고 갑니다. 이제 7일째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돌다 가겠지.’라고 생각하는데 한 바퀴를 돌더니 안 갑니다. 그래서 뭔가 이상하네.’ 생각하는데, 두 바퀴째를 돕니다. ‘이젠 가겠지.’ 하는데 또 세 바퀴, 네 바퀴, 다섯 바퀴를 도니까, 계속 오늘은 뭔가 이상하다. 뭔가 이상하다.’ 하고 느낍니다.

 

점점 긴장이 됩니다. 그러나 그래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긴장이 되고 그러면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우리가 백기 들고 항복합니다.’라는 식으로 나와야 하는데,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무너지고 진멸 당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마음을 돌이켜 주님께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누구라도 뭔가 이상합니다. 빨리 항복합시다.’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과 그 백성을 대적하기로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어서 당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선택할 시간을 충분히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올바로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멸망 당했습니다. 이처럼 멸망 당한 것은 자기들이 그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하고, 조상탓, 부모 탓을 많이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잘못된 결정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9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벧후 3:9-10, 새번역)

 

하나님은 지금도 음란과 폭력이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해서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며, 아직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직 시간을 주고 계시는 겁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냥 벌을 내리시고 심판하셔도 되는데, 지금까지 기다려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자비입니다.

 

여러분, 여리고 성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삶에도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어떤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어떤 죄를 짓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죄를 지을 때는 심장이 두근두근하면서 이러다 혹시라도 벌받는 게 아닐까?’ 두렵지만, 죄를 지어도 아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 이래도 괜찮은가?’합니다.

 

그러다 그다음에 또 죄를 짓는데 또 다시 별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 이래도 괜찮은가 보다.’라고 생각합니다. 또 세 번, 네 번 계속 해도 아무 일도 없고, 오히려 일이 잘 풀리며 모든 게 아주 잘 됩니다. 그러니까 ,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절대 괜찮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마냥 한없이 기다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의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러므로 허락된 시간 안에 라합처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사랑의 품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심판, 특히 마지막 심판 날에 대해 두려우십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당장 오지 마시고 한참 있다 오시면 좋겠다고 하십니까?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도 두렵고 떨린다면, 자신이 정말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여리고 성의 완전한 파괴는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라합과 그 집안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보십시오. 그들의 믿음이 완전했겠습니까? 완전한 믿음이 아니었더라도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받아주신다는 사실 또한 분명히 보여줍니다.

 

 

3.   여리고 정복 후의 경고와 결과 (26~27)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26)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여리고 성을 철저히 파괴합니다. 여리고 성 정복 후에 여호수아는 이 성을 다시 건축하는 자에 대해 저주를 선포합니다. 그런데 이 저주는 이곳에서 사는 것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됩니다. 여리고 성에 절대 다시는 살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세히 보면 여호수아는 이 성을 다시 요새화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여리고 성을 다시 요새로 만들려고 성의 기초를 놓을 때 장자가 죽고, 문을 세울 때 막내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랜 후에 이 저주가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열왕기상 16장에 보면, 여호수아 때로부터 약 500년이 지난 아합 왕 때,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라고 하는 그 아합 왕 때 히엘이라는 사람이 여리고를 다시 세우는데, 기초를 놓을 때 맏아들 아비람이 죽고 문을 달 때 막내아들 스굽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인지 아닌지 이렇게 시험해 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조금 전에 아간 이야기를 했지만, 아간도 똑같습니다. 아이 성 전투에서 패한 다음 여호수아가 눈물로 호소하며 나오니까, 하나님은 누군가가 죄를 범했다고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 그 범인을 찾아냅니다.

 

제비를 뽑을 때 먼저 전체 백성을 놓고 하고, 그다음에 지파를 뽑고, 지파에서도 집안을 뽑고, 집안에서도 더 아래 가문을 뽑고, 거기서 결국 아간이 뽑힙니다. 이것이 1, 2분 만에 결정됐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데에 몇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그 몇 시간 동안 회개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간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제비를 뽑게 됐을 때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나왔으면 용서받았을 수도 있는데, 끝까지 버팁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자기가 딱 뽑혔을 때, 그제야 자백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그걸 시험하는 것은 참 위험한 일입니다. 멸망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가지고 그 말씀을 소중히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삶이 우리를 살립니다.

 

왜 어렵게 정복한 여리고 성의 재건을 저주합니까? 먼저, 여리고 성은 가나안 정복의 첫 열매이므로 성의 폐허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기억하라는 표시가 됩니다. 여리고 성에서 승리한 것은 자기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깨닫게 해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여리고 성의 폐허는 주변 나라들에게 충격적인 이미지로 새겨져서 이스라엘을 두려워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여리고 성의 폐허를 보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상징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공포의 이미지로 마음에 새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여리고 정복 사건이 또 어떤 역할을 합니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27)

 

이 일을 통해 여호수아의 명성이 온 땅에 퍼집니다. 그 이유는 그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여호수아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인정 아래 모세의 후계자로 세워졌습니다. 백성이 모세를 두려워하며 따랐던 것처럼, 그들은 여호수아를 두려워하며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를 따르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나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과연 우리를 이끌고 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는, 그럴 만한 지도자인가?’ 오늘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해 확실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 여리고 사건은 여호수아의 리더십을 세워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나가는 말]

 

5장과 6장에 전개되는 전쟁과 그 준비 과정의 이야기를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그러면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고 승리를 주실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성공의 비결이 됩니다.

 

여리고와의 전쟁에 있어 진짜 상대는 여리고 군사들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진짜 상대는 바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었습니다. 그 싸움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복종시키느냐 안 하느냐, 하는 순종의 싸움이었습니다. 누가 주인이냐의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단순히 여리고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정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삶의 승리도 바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 즉 누가 주인이냐의 싸움이며, 이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을 때, 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을 때, 그래도 주님께 나와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말씀에 순종하겠는가?

 

오늘 이 시간 나 자신이 무너뜨려야 할 내 마음속의 여리고는 무엇입니까?

주님께 순종하며 내어드려야 할 그 부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리고 주님 앞에 고백하며 마음을 돌이켜야 할 부분은 또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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