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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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8일 주일예배
✦ 믿음 26 ✦
황당한 명령에 순종하는 이상한 백성
(여호수아 6장 1~14절)
[들어가는 말]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한 이야기가 떠돌고 있습니다.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아주 유명한 이야기인데, 아마 누군가 지어낸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교회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그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은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넵니다. “얘들아, 여리고 성은 누가 어떻게 무너뜨렸지?” 그러자 아이들이 놀라서 달아나며 대답합니다. “우리가 안 했는데요!”
어이가 없어진 목사님은 마침 주일에 있는 교사 모임에서 교회의 성경 교육에 문제가 있으니 더 철저히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언급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의 말을 들은 교사들이 놀라서 대답합니다. “목사님, 우리 아이들이 너무 착한데 다른 사람의 성을 무너뜨릴 리가 없습니다.”
충격을 받은 목사님은 교사들부터 저러니 교회 교육이 큰일이라고 걱정하며 당회에서 장로님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장로님들이 대답합니다. “목사님, 그 성을 복구하는 데 얼마나 들죠? 교회 재정으로 손해배상을 하겠습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생길 정도로, 여리고 성이 무너진 사건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단순히 성경에 있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누가 꾸며내거나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고학이 발달해서 사실로 판명된 실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오늘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발견하길 원합니다.
1. 여리고 성을 이기는 방법 (1~5절)
이제 요단강을 건너 열흘이 넘는 기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요단강에서 가지고 나온 열두 개의 바위로 길갈에 기념비를 세웠고, 군사들은 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또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만나가 그치고 그 땅의 곡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성결하게 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을 시작할 준비를 모두 갖추었고, 이제는 진격할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1절)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서 처음으로 공격할 성이 여리고인데, 고고학 연구에 의하면 이 여리고는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지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입니다. 최소한 BC 8,000년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여호수아가 정복할 시기의 여리고 성은 그 당시 중간 정도 규모의 도시 국가였는데, 아주 큰 성은 아니었지만 여리고 성은 굉장히 강력하며 튼튼했고, 그곳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큰 위협을 느끼며 아예 문을 걸어 잠가 버립니다. 조사해 보니 여리고 성은 성벽이 두 개로 되어 있는 성이어서, 쳐들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의 문을 잠가 버렸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첫 성인 여리고를 점령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스라엘은 이 여리고를 공격할 방법이 없습니다. 외벽이 있고 내벽이 있으며 문이 꽉 닫혀 있으니 여기를 공격할 방법이 없는 겁니다. 게다가 성이 얼마나 높습니까?
1절에서 ‘굳게 닫혔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여리고 성의 문이 아주 철저하고 강력하게 닫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용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리고 성과 주변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성으로 다 들어가서 문을 굳게 닫아 잠그고 출입을 삼가면서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않고, 이스라엘이 공격을 포기하고 그냥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생각이었던 겁니다.
여리고 왕과 장군들은 그렇게 버티는 작전을 펼쳤습니다. 원래 가나안에서도 가장 견고하기로 소문난 여리고 성이었는데, 아예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상태니까 어떻게 해볼 수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결론부터 말씀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2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의 첫마디가 무엇입니까? “보라”입니다. 무엇을 보라는 말씀입니까?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다.” 이 사실을 보라고 하십니다. 주어를 보십시오. “내가”, 즉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넘겨주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어에서 완료형으로 쓰였습니다. 이것은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마치 이미 완료되고 끝난 것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미 이 전쟁의 결과는 정해졌다고 확신을 주며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네 손에 이들을 넘겨주었다”라고 하시면서 승리의 원인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십니다. 처음부터 이 전쟁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여호수아야, 나 때문에 너는 이미 이 전쟁에서 이겼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지금 여리고 성문은 굳게 잠겨 있고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아주 막막한 상황입니다. 성은 높고 외벽과 내벽의 이중으로 철저히 되어 있는 성입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공격해서 점령해야 하는 성이지만 여호수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방법이 없는 상황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선포하십니다. “이 전쟁은 내 것이다. 나는 너에게 이미 승리를 주었다.”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승리는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지금 막막하고 답답한 현실 앞에서 얼마나 힘듭니까?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포하십니다. ‘이 일은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염려하지 말아라. 나는 너에게 이미 승리를 주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염려합니까? 왜 불안해하며 근심합니까? 무엇이 그렇게 걱정이 됩니까?
여러분, 혹시 지금 ‘아, 이걸 어떡하지?’ 하고 염려가 되는 게 있으십니까? 작은 염려와 걱정일 수도 있고, 굉장히 큰 염려라서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걱정되십니까?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은 다 전공이 있습니다. 저도 대학에 다닐 때 전공이 철학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전공하셨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대학에 다녔든 안 다녔든,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무엇을 전공했든 상관없이, 우리는 공통적으로 한 분야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전공하는 게 있습니다. 지금도 이것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염려입니다.
이 분야에 있어 최고 명문인 걱정대학교 염려학과에 우리는 재학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또 다른 명문인 불안대학교 근심학과 재학 중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최고 명문인 절망대학교 포기학과 재학 중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염려하고 계십니까? 돈 문제? 자녀 교육 문제? 노후 대책 문제? 사업 문제? 직장 문제? 진로 문제? 비자 문제? 세월이 지날수록 은퇴나 노후 대책을 염려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노후 대책이 아니고 사후 대책입니다.
여러분, 내가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후에 대해서 지금 대책이 있으십니까? 네, 그것이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사후 대책이 전혀 없고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하면,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체크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세상일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이미 승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걱정할 시간에 순종하면 됩니다. 그러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3~5절)
하나님은 ‘이 전쟁은 이미 내가 너에게 승리를 주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승리를 주셨다고 해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아, 우리는 이미 이겼구나.’ 하며 가만히 있으면서 먹고 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들도 뭔가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승리를 주셨고, 그러면 그들도 그 승리를 확신하면서 나아가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 승리의 비결을 알려주시면서 몇 가지를 지시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정말 황당한 명령입니다. 뭐 이런 명령이 다 있습니까? 차라리 나가서 싸우라고 하면 싸우겠습니다. 그런데 성을 빙빙 돌라고 하시니, 이게 무슨 군사작전입니까?
여리고 성을 눈앞에 두고 군사작전을 펼쳐야 하는 이때, 군사 명령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상하고 황당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군사들이 제사장들과 함께 하루에 한 번씩 6일 동안 성을 돌라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7일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나서 제사장들이 나팔을 한 번 길게 불면 모든 백성이 ‘와!’ 하며 큰 함성을 지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니까, 그때 모두 함께 성으로 진격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라고 하시는 일은 무기를 준비하거나 성벽을 무너뜨릴 장비를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에서 보면 옛날에 전쟁이 벌어질 때 큰 바위를 날아가게 하는 기계도 있고, 여러 가지 장비가 있지 않습니까? 또 화살이라든지 여러 가지 무기가 있는데, 그런 걸 준비하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저 하루에 한 바퀴씩 6일 동안 여리고 성을 돌고, 7일째에는 7바퀴를 돌라고 하십니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왜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까? 무엇을 보여주길 원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황당한 명령을 내리시는 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리고 성을 함락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순종입니다. ‘내가 이미 너희에게 승리를 주었으니, 너희는 내 말만 따라와라.’ 이겁니다. 그 말씀에 순종만 하면 이미 주신 승리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이 황당하게 들려도, 그대로 행하는 이스라엘의 순종을 보길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승리는 군사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 달려 있음을 알기 원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신앙인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스스로 재능이 많고 유식하고 돈이 많고 학벌이 높고 똑똑하고 말 잘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 사는 사람, 어떻게 보면 꽉 막힌 것 같이 보이는 사람의 모습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지 않으시면 길이 없는 사람, 그래서 오직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한 사람들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합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미지근한 신앙의 사람, 세상의 방법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그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이며 처세술이라고 외치는 사람은 오히려 인정하지 않습니다.
술 마실 때 적당히 같이 마시고 노름할 때 하며 같이 잘 노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도, 사실 그런 사람에게는 별로 감동을 느끼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런 분도 있었습니다. “내가 술 마시는 사람을 전도해야 하기 때문에 같이 술집에 같이 가고 술을 같이 마시면서 전도하겠습니다.” 그런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전도한 사람은 0명입니다. 예,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겉으로는 ‘어유, 당신은 쿨하다.’라고 칭찬해 줄지 몰라도, 뒤로는 ‘지나 나나 똑같아.’라고 하며 비웃습니다. 반면에, 부드러우면서도 유혹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타협하지 않는 사람, 믿음 안에서 심지가 굳은 사람에 대해서 앞에선 막 욕합니다. ‘야, 사람이 뭐 저러냐? 꽉 막혔다. 어휴, 저런 사람과는 상종을 못 하겠다.’ 이러면서 욕할지 몰라도, 뒤에서는 ‘저 사람 진짜야.’ 하고 감탄합니다. 사실이 아닌 것 같으시면 한번 해보십시오. 해보시면 됩니다.
사탄은 사람 숫자가 많은 것에 놀라지 않습니다. 이단도 사람들로 얼마나 바글바글합니까? 똑똑한 것에 감동받지 않습니다. 똑똑한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을 볼 때 ‘이게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하지?’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볼 때 두려워서 떱니다.
사탄은 그런 사람은 함부로 건드리지 못합니다. 마음을 딱 정하고 ‘나는 아는 건 별로 없어도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라고 하는 사람은 절대 못 건드립니다. 하지만 적당히 타협하면서 영적으로 더러운 부분을 방치하는 사람에게는 다가가서 콕 찔러보고, 움찔하면 재미 있어서 계속 찌릅니다. 더 파고 들어오고 결국은 넘어뜨립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아니, 나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사탄이 와서 ‘이 사람은 건드리면 안 돼.’라고 하는 사람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탄이 콕 찔러보고 ‘어, 이것 봐라? 흔들리네. 재밌네.’ 하며 계속 찔러보고 넘어뜨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2.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이스라엘 (6~14절)
1) 예배하라
“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7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 (6~7절)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 성을 6일 동안 한 바퀴씩 돌 때 어떤 순서로 돌아야 합니까? 맨 앞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갑니다. 그 뒤에는 양각 나팔을 손에 잡은 7명의 제사장들이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따라갑니다. 그리고 맨 뒤에는 또 다른 군대, 즉 후군이 따라갑니다.
“8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9 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 (8~9절)
행진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언약궤가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언약궤가 중심이었는데, 이제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는 데 있어서도 언약궤가 가운데에 위치합니다.
오래전에 나왔던 <인디애나 존스> 영화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가 <잃어버린 성궤의 추적자들(Raiders of the Lost A가)>인데, 그 ‘성궤’가 바로 이 언약궤입니다. 여기서 착안하여 그 영화를 만든 겁니다.
이 언약궤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물론 이 궤 안에 하나님이 들어가 계신 것은 아니지만, ‘언약궤가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상징입니다.
여리고 성을 도는 첫 6일의 이야기가 나와 있는 오늘 본문(1~14절)에서 언약궤라는 단어가 무려 10번이나 나옵니다(4, 6, 6, 7, 8, 9, 11, 12, 13, 13). ‘언약궤’, ‘여호와의 궤’, ‘여호와의 언약궤’, ‘궤’라고 나옵니다. 특히 8절에서 언약궤 앞에 나팔을 불며 행진하는 제사장들을 가리켜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라고 합니다. 분명히 궤 앞에서 나가는데 여호와 앞에서 나간다고 하는 것을 보면, 히니님과 언약궤가 같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가 행진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군대의 중심에 계시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 확실하게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그냥 아무 의미도 없이 여리고 성 주변을 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도는 것이 됩니다. 즉, 하나님을 자기들의 총사령관으로 모시고 행진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나아갈 때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 전쟁의 승리는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를 주셨고, 또 “하루에 한 번씩 6일 동안 돌고 7일째는 일곱 바퀴를 돌아라.” 하시며 이미 명령을 주셨지만, 방식까지도 지정해 주십니다. ‘네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도는 게 아니라 이 순서대로 서서 돌아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서 그대로 그 방식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가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승리를 주셨지만, 그다음에 우리가 가서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데, 그냥 내가 알아서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열심히 나아갈 때 하나님이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숫자 ‘7’의 사용을 통해서도 암시해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일곱’이나 ‘일곱 번째’라는 말도 똑같이 10번이나 사용됩니다(4, 4, 4, 4, 6, 6, 8, 8, 13, 13). 이 숫자는 모두 일곱 명의 제사장들이 일곱 개의 양각 나팔을 불면서 7일 동안 여리고 성을 돌았고, 7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다는 사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잘 아는 것처럼,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며 거룩한 숫자로서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서 그렇습니다. 7과 12는 의미 있는 숫자입니다. 3은 소위 ‘하나님의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세 분이십니다. 그리고 4는 어떻게 보면 ‘인간(또는 땅)의 수’입니다. 이 땅에는 동서남북 사방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의 생각에 의하면 3과 4를 더한 7이 완전수가 되는 것입니다. 또 3과 4를 곱하면 12가 되며, 이것도 완전수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괜히 열두 지파인 게 아니고, 예수님이 괜히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신 게 아닙니다. 이게 다 완전수이고 거룩한 숫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7이라는 숫자는 여리고 성 함락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선포해 줍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괜히 일곱이라는 숫자를 반복해서 사용하게 하신 게 아닙니다.
사실 제사장이 일곱이면 어떻고 여덟이면 어떻게 열이면 어떻고 열둘이면 어떻습니까? 또한 왜 하필 7일이고 7바퀴입니까? 7일째에도 한 바퀴를 돌라고 하실 수도 있고 열 바퀴를 돌라고 하실 수도 있는데, 왜 7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라고 하십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절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다.’라는 것을 하나님이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그것을 인간이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이런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십니다. 그냥 한 번 톡 건드리시면 여리고 성은 그냥 다 무너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7일째는 일곱 바퀴를 돌며 일곱 개의 나팔을 불라고 하시는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 중 누구라도 ‘아, 이건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라고 깊이 마음속으로 깨닫도록 이렇게 일곱이라는 숫자를 사용하신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중요한 것은, 내 삶의 중심에 정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에게 “저기 구석에 가 계세요.” 하고서 내 맘대로 막 살아가는 경우가 사실 얼마나 많습니까? 삶의 문제들 앞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하는 신앙인이 의외로 적습니다. 그냥 결정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수많은 크리스천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그냥 나름대로 생각하거나 뾰족한 수가 없으면 다른 사람들, 특히 전문가들을 먼저 찾아가 상의하거나 친구를 찾아가 상의하거나, 또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상식에 따라서 그냥 결정을 내려 버립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회자 중에 크레이그 그로쉘(Craig Groeschel)이라는 목사님이 있는데, 오클라호마에서 시작한 Life Church(라이프교회) 담임목사입니다. 이분이 책을 많이 썼는데 그중 2010년에 쓴 베스트셀러 제목이 <The Christian Atheist: Believing in God but Living as if He Doesn't Exist>(크리스천 무신론자: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삶을 보면 전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살고 있는 신자들이 많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실 예배의 문제입니다. 예배는 그냥 여기 와서 한 시간쯤 지겨운데 참아주는 시간이 아니라, 누가 주인인가를 확인하고 선포하는 시간과 장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성패는 예배에서 판가름 납니다.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물론 이런 공 예배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집에서도 개인 예배를 드리고, 가정 예배를 드리고, 또 이렇게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예배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언약궤를 중심으로 행진할 때 그 앞에 있던 일곱 명의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부는데, 이것은 양의 뿔로 된 나팔을 말합니다. 이것을 분 것은 군사작전이라기보다 예배 행위입니다. 양각 나팔을 부는 것은 군사작전이 아니라 예배의 행위로서 찬양입니다.
전투할 때 쓰는 것은 은 나팔인데, 제사장들이 이때 분 것은 예배를 위해 불던 양각 나팔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배에 승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전투에 나아가 승리하더라도 하나님 없이 승리한 건 진짜 승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중에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이 전쟁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하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가 있습니다. 예배는 내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표시입니다. 여기 주일에 한 번 나와 드리는 공 예배만 예배가 아닙니다. 매일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이 예배이고,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표시가 바로 예배입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 황금 같은 주일(비신자에게는 일요일) 아침에 나와서 예배드립니까? 내 삶의 주인이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 우리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함께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일요일이 아니라 ‘주일’(주님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이날은 내 맘대로 하는 날이 아니라 주님께 집중하며 나아가는 주님의 날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날이 주일입니다.
물론 주일만 주님의 날이 아닙니다. 일주일의 7일 모두가 주님의 것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주일은 내 맘대로 내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을 쓰는 날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내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을 쓰는 날입니다. 평소에 만나지 못한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모여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날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날,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더욱 실천하는 날입니다. 평소에는 바빠서 거기에 많이 힘쓰지 못하더라도,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서로를 사랑하기를 실천해보자는 겁니다. 거기에 집중해 보자는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나 중심으로 사는 날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배자의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을 잘 지키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정말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의 날을 안 지킨다면, 어떻게 주님을 정말 믿는 것이겠습니까?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다른 것이 있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며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아프거나 여행 또는 출장을 간 경우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평소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정말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주일 하루 잠깐 교회에 나와 예배에 참석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몸은 예배에 와 있지만 생각은 다른 데에 가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일예배 때 성경을 읽는 것이 혹시 일주일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성경을 읽는 시간이라면 사실 얼마나 문제가 있는 겁니까? 또 예배 중 잠깐 머리 숙여 기도하는 시간이 일주일 동안 유일한 기도 시간인 경우도 꽤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신앙인이라고 하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정말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공동 예배 때 하나님 중심으로 모여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생각과 감정과 근심과 걱정과 계획과 주장을 다 내려놓고, 우리 모두 마음을 하나로 묶어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바로 공 예배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날에 다른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주일을 지키고 공 예배를 제대로 드리는 사람은 주중에 각자의 삶으로 흩어져 살 때도 자기의 개인 예배를 잘 드리며 살 수 있게 됩니다. 또 주중에 개인 예배를 잘 드린 사람이 주일에 와서도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신앙의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일예배를 잘 드리지 않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경우를 저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주중에 삶 속에서 개인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이 주일을 잘 안 지키는 경우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일에 함께 예배하고, 주중에 스스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고자 말씀 한 가지를 붙들고 열심히 그것을 실천하고자 애쓰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열심히 애쓰며 나아가고, 그러다 주일에 같이 또 모여서 같이 예배하는, 이런 선순환이 계속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함께 행진해 나가는 백성,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2) 잠잠하라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10절)
여호수아는 모든 명령에 이어서 한 가지 특별한 주의 사항을 전달합니다. 그것은 7일 동안 여리고 성 주위를 돌면서 모두 조용히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일곱째 날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철저히 입을 다물고 조용히 여리고 성 주변을 돌아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 점을 몇 번씩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11 여호와의 궤가 그 성을 한 번 돌게 하고 그들이 진영으로 들어와서 진영에서 자니라 12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13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진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니라 14 그 둘째 날에도 그 성을 한 번 돌고 진영으로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11~14절)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은 황당해 보이는 명령에 말없이 순종합니다. 하루에 한 번을 돌라고 하면 한 번 돌고,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고 하면 침묵합니다. 하나님의 황당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순종하는 참으로 이상한 백성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개인 의견이었다면 아마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이 없는 사람일수록 말이 많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만큼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원래 전공은 불평불만과 원망입니다. 이 사람들은 당시 이집트 최고 명문(?)인 불평대학교 불만학과와 원망학과 출신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보다 하나님이 더 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것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셔도 그들은 끊임없이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어떤 명령을 주시면 늘 불평, 불만, 원망으로 반응했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자기들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순종했습니다. 도무지 만족을 모르고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가리켜 ‘목이 뻣뻣한 민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광야에서 나가지 못하고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았습니다. 그래서 며칠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이나 헤매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뺑뺑이를 돈 다음에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보다 훨씬 더 지혜로우시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다.’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입을 다물 수 있게 되는 데에 무려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40년 동안 훈련받았더라도, 인간은 기회만 있으면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침묵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스라엘 군사들은 며칠이 되지도 않아 별의 별말을 다 내뱉었을 겁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작전이냐? 뭐 이런 게 있냐? 화끈하게 한 판 붙어야지, 이게 뭐냐? 여호수아는 우리의 사령관이랍시고 이런 작전을 따르라고 하냐? 순 겁쟁이, 쪼다다.’
이런 말 외에도 온갖 불평불만이 쏟아져 나왔을 겁니다. 특히 이렇게 긴장되고 예민한 상황에서는 누구나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말들을 하기가 더 쉽습니다. 평소에 신사 같고 숙녀 같은 사람이라도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말에는 엄청난 전염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다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말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삽시간에 분위기가 뒤집힐 수가 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 때문에 분위기가 확 바뀌어서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았습니까?
오래전에 읽고 너무 마음에 와닿아 내용을 적어 놓았던 책들이 많은데, 그중 <무지개원리>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한 사람이 쓰는 말을 보면 그 사람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시간과 말입니다.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듯이,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고 남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자주 쓰는 말을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면 자신의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 어떠십니까?”라고 질문하면 보통 사람들은 세 가지 중 하나로 답한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 부정형’으로, ‘별로에요. 피곤해요. 죽을 지경입니다. 묻지 마세요. 죽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두 번째는 ‘평범형’입니다. ‘그저 그렇죠. 대충 돌아갑니다. 먹고는 살죠. 늘 똑같죠. 거기서 거깁니다.’ 세 번째는 ‘긍정형’인데 이들의 말에는 열정과 힘이 가득 실려 있습니다. ‘좋습니다. 대단합니다. 환상적입니다. 아주 잘 돌아갑니다.’
우리 목장들도 목장이 잘되려면 이것을 잘해야 합니다. 서로 누군가가 말할 때 잘 집중해서 들어주며 두 가지만 잘하면 된다고 합니다. ‘오’와 ‘아’입니다. 누군가가 뭐라고 말하면 “오~”라고 해주고 또 “아~”라고 해주는 겁니다. 이 두 가지만 잘해도 목장이 잘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말할 때 또는 부모님이 말씀하실 때 “오~” “아~” 이것을 해보십시오. 분위기가 바뀝니다.
물론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좋은 말만 한다고 무조건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감사를 말로 표현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최악의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에서 감사 제목을 나누는 게 중요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말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좋은 말입니까, 비난과 불평입니까?
사실 우리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데, 침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침묵하며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침묵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나아갈 때는 주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내가 떠들면서 말을 많이 할 때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갈등과 다툼과 분열과 씁쓸함만 일어납니다.
오늘 자신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참된 예배자인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인내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인가?’ 이러한 풍성한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