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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7x_NuZncAgw?si=ErN7jn99Ois_GSEt&t=228
2025년 6월 1일 주일예배
✦ 믿음 25 ✦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여호수아 5장 1~15절)
[들어가는 말]
100전 100승의 명장으로 유명했고 나중에 로마의 우두머리가 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전쟁기를 직접 자세하게 쓴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사실 그는 그렇게 로마 황제가 되고 싶어 했지만, 공식적인 황제의 직위는 그가 죽은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게르만 민족과의 전쟁에 대한 그의 회고록인 <갈리아 전쟁기>가 아주 유명합니다. 그 책의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는데, 모든 전쟁 준비를 갖추고 이제 막 적군과의 전쟁이 벌어지는 시점에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막 전쟁 준비 갖추고 전쟁에 나갔으면 이제 전쟁이 어떻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그렇게 급박한 시점에 엉뚱하게도 그 지방 풍속이 어떻고, 지형이 어떻고, 특색으로는 이런 것이 있고, 또 그곳 주민들의 모습이 어떻다는 것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는 겁니다. 좀 뜬금없지 않습니까?
왜 그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학자들이 추측하기로는 카이사르에게 있어 전쟁의 목적은 단순히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저 싸워 이기는 게 아니라, 그 지방을 싸워 이겨서 점령한 다음 잘 통치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자세히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호수아 본문에도 이와 비슷하게,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집니다. 지난번에 여호수아 2장을 살펴보았는데, 오늘 5장 이전인 3~4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이 언덕까지 넘치는 요단강을 건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게 범람하는 요단강을 홍해처럼 가르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기적으로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가나안 정복의 1차 관문인 여리고 성을 바로 눈앞에 둔 상황입니다. 이제 곧 전투가 시작될 급박한 상황입니다.
요단강물이 내려오지 않도록 하나님이 물을 막으셔서 둘로 갈라져 건넌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그들의 사기는 엄청났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는 최고였고, 여리고 성의 사기는 최악이었습니다. 군사작전은 타이밍과 사기가 중요하므로, 이스라엘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공격해 들어가야 할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은 나가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모든 군사 행동을 멈추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어떤 명령입니까? 이것을 통해 오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할례를 행하라 (1~9절)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요단강을 건너서 강을 뒤에 두고 강 앞에 서 있기 때문에, 이때 공격을 당하게 되면 피할 수도 없고 방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진을 만들든지, 공격을 피할 수 있는 다른 곳으로 빨리 이동하든지, 아니면 강을 건넌 여세를 몰아 여리고 성으로 쳐들어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군사적으로 급박한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엉뚱한 것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2~3절)
할례는 포경수술과 같은 것인데, 남자들이 할례를 받으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게 됩니다. 사실 고대 시대 당시에 할례 의식은 이스라엘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행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들은 성인 의식이나 위생의 목적으로 행했던 데에 비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할례는 하나님과 언약의 상징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그 약속의 표시로 아브라함 집안의 모든 남자는 가족이든, 친척이든, 외국인이든 태어난 지 8일 만에 다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의 이름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시면서,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민족이 될 것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한 할례를 지금 행하라고 하시는 것인데, 1분 1초가 아쉬운 지금 할례를 행하라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전쟁 준비를 하고 쳐들어가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전쟁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여호수아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오직 ‘지금 어떻게 하면 저 여리고 성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승리할까?’ 하며 전쟁에서 이길 것에만 모든 생각을 지금 집중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은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 이상을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장 오늘의 급박한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여호수아 당시 이 사건은 지금부터 약 3,400년 전 이상 전에 일어난 것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속성은 똑같습니다. 당장 내 삶에 벌어지고 있는 사업에 성공하는 일, 학생으로 시험에 합격하는 일, 직장에서 살아남고 승진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사업할 때 돈은 얼마를 벌고, 직장에서 연봉은 얼마를 받는지 등을 생각합니다. 이런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위해 서로 기도를 부탁하고 또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 삶에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일이 잘되기 이전에 더 중요한 게 뭔가 하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뭔가가 잘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다면 아무리 성공하고 잘 풀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면, 아무리 어려워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어도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어도 모든 것을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4~5절)
백성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사이 20세 이상이었던 1세대는 다 죽고, 20세 미만의 1.5세대와 광야에서 태어난 2세만 남아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광야에서 태어난 2세대는 광야 길을 가면서 태어났기 때문에 할례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6~7절)
여기서 이스라엘이 왜 광야에서 할례를 행하지 못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이것을 보면, 불순종한 백성의 안타까운 최후와, 앞으로 이스라엘이 순종하여 얻게 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대조해서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앞으로 불순종하여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겠는가, 아니면 순종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겠는가, 둘 중 선택하라고 강력하게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여리고 성을 코앞에 둔 거리에서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다 할례를 받으라고 하신 것은 엄청난 믿음의 테스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강을 건넌 후 어디로 피할 곳도 없고 도망칠 곳도 없는 상태에서, 군인인 남자들에게 모두 할례를 받으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만약 가나안 사람들이 이 정보를 입수하고 쳐들어오면 큰일 나는 게 아닙니까? 다 죽는 겁니다.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8절)
의학적으로 남자들이 할례받고 회복하려면 최소한 며칠은 걸립니다. 오래전에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야곱이 가족들을 데리고 저 북쪽 하란에서 고향인 남쪽의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세겜이라는 곳에 먼저 머물렀습니다. 그 세겜에서 참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세겜의 추장인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성폭행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격분한 둘째 오빠와 셋째 오빠 시므온과 레위가 가서 세겜의 남자들을 다 죽이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단 두 명이 어떻게 세겜의 남자들을 다 죽일 수 있었습니까? 세겜이 찾아와서 디나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하니까 ‘그러면 당신들과 우리가 같은 언약 백성이 돼야 하니까 당신들도 우리처럼 할례를 받아라.’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일을 속임수 쓰는 데 이용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것을 좋게 여기며 세겜 남자들이 다 할례받고 아파서 누워 있는데, 그때 가서 다 죽여 버린 겁니다.
그 정도로 할례를 받았을 때는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굉장히 힘듭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에서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아주 무모한 짓입니다. 옛날 야곱의 아들들이 했던 것처럼, 자기들이 할례받고 누워 있는데 가나안 민족이 쳐들어와서 자기들을 다 죽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게다가 가나안 군사들은 거대한 장수들이었고, 당시 고대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였습니다. 숫자도 이스라엘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객관적인 군사력으로 훨씬 뒤처지는 상황에서 할례까지 받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예 스스로 죽는 길로 들어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바로 이런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전쟁은 너희들의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다.’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길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 이길 수 있는 것이지, 자기들의 군사력이 강해서 이기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계획과 자존심과 모든 것을 다 내려놓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신뢰하며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이 새로 들어가는 이 가나안 땅에서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어설프게 자기 힘으로 하겠다고 나서면 오히려 살 수가 없는 곳이 가나안 땅입니다.
이곳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해야 살 수 있는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하는데, 물론 실제로 거기에는 젖과 꿀이 흐를 정도로 풍요롭고 비옥한 땅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굉장히 척박한 광야도 많은 땅이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왜 거기를 계속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합니까?
사실 젖과 꿀이 진짜 흐르는 땅은 이집트입니다. 자기들이 노예로 살았던 이집트가 훨씬 비옥하고 풍요롭고 강도 크고 물도 많고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더 척박한 가나안 땅을 가리켜 오히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왜 그렇게 표현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살 수 있는 땅이라는 뜻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슬을 내려주시고 비를 내려주시고 때에 맞춰서 바람과 햇빛 같은 것들을 내려주셔야만 살 수 있는 땅이 바로 가나안 땅이고, 그렇게 믿음으로 사는 땅이라는 것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지금까지 명령에 순종하는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1절)
이것을 잘 보면 가나안 모든 왕들의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이스라엘을 두려워한 것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이 요단강물을 가르셨기 때문입니다. 있을 수 없는 기적을 일으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군대가 너무 강해서 두려워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신이 이스라엘을 위해 기적을 일으키시고 저 엄청난 일들을 일으키시며 지금 함께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겁니다. ‘저런 신이 함께하는 군대를 우리가 어떻게 이기겠나?’라고 생각해서 두려워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 힘이 없습니다. 자기들이 잘나고 힘이 강해서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인도해 주시니까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정말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표시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나를 의지해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빨리 가나안 땅에 들어가 성공하는 것보다, 당신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진짜 성공의 길이고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상식이나 논리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모든 의지와 생각을 철저히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이 일이 빨리 진행되어서 잘되고 좋은 결과를 얻기를 원합니다. 지체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왕이면 당장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일이 빨리 진행되어서 좋은 결과를 빨리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일이 빨리 진행되는 게 아닙니다. 빨리 잘되더라도 인생이 망가지고 죄로 물들게 된다면 그것이 어떻게 좋은 일이겠습니까?
정말 이상한 것은, 사람이 어려울 때는 그럭저럭 잘 버티는데, 일이 잘 풀리고 돈을 잘 벌고 편안해지고 안락해지고 그러면 이상하게 타락하는 길로 간다는 겁니다. 딴생각을 자꾸 한다는 겁니다. 힘들고 어렵고 병이 생기고 아프고 그럴 땐 딴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이상한 짓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건강해지고 돈을 잘 벌고 성공하고 편안해지고 안락해지면 자꾸 딴생각을 합니다. 이상한 방향으로 나갑니다. 정말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이 그런 것을 통해서도 증명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어딘가를 빨리 가는 게 아닙니다. 늦어지더라도 제대로 가는 것입니다. 저기 낭떠러지가 있는데 아프리카 산양들이 마구 달리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경우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앞에 있는 다른 산양들이 빨리 뛰니까 자기도 그냥 따라서 마구 뛰다가 다 떨어져 죽는 겁니다. 빨리 가는데 죽는 길이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느리게 가더라도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올바른 길을 빠르게 갈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하나님은 대개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갈 때 조금 늦어지게 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저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이 땅에서 성공하고 잘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9절)
어떻게 보면 여호수아가 이끌고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싸우던 이 시기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하나님께 순종을 잘했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중에 성경을 쭉 읽어 보십시오. 순종하는 때가 별로 없습니다. 이때는 “할례를 행하라.” 하시니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했다.”라고 금방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을 하라고 하시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시면 안 하고, 굉장히 순종을 잘합니다. 그런데 다른 때는 거의 순종을 잘 하지 않습니다.
할례를 행한 장소의 이름이 ‘길갈’인데, 이것은 ‘굴러가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의성어로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입니다. 바퀴 같은 것이 굴러갈 때 나는 소리를 따라 그렇게 이름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굴러간다는 것입니까? 애굽의 수치가 굴러간다고 해서 길갈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의 삶이 정말로 수치였습니까? 어떻게 보면 그렇기도 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중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예라고 항상 안 좋은 것은 아닙니다. 노예라도 거기에 사랑도 있고 꿈도 있고 성취의 기쁨도 어느 정도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집트가 꼭 수치의 땅만은 아닙니다. 거기서 사랑도 하고 가정도 이루고 원하는 것도 했습니다. 지난 400년 이상 살았기에 자기들 삶의 뿌리를 내린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수치였다고 하시며 그 수치를 굴려버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참 매정한 말씀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만, 동시에 우리는 또한 사회인이 아닙니까? 이 사회의 일원이며 이 땅의 시민이기도 합니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명함에 새겨 넣을 직함도 있고, 나름대로 쌓은 업적도 있고, 뿌듯한 이력도 있습니다. 또 열심히 살아서 내 자녀와 자녀의 자녀가 계속 잘되어 뿌듯하고 행복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가리키며 수치니까 다 버리라고 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그저 여리고만 이기기 위한 싸움이었다면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냥 여리고만 차지하고 끝날 거라면 내 업적이나 자랑거리를 다 동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더 큰 승리를 얻는, 하나님을 얻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애굽에서 지낸 400년 이상의 역사를 할례와 함께 거기서 굴려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운 승리를 기대하면서 이전의 모든 삶을 굴려버립니다.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요즘 말로 하면 엄청난 스펙을 가진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3장을 보면, 자기의 그런 과거의 모든 영광을 다 해로 여긴다고 합니다. 심지어 오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과거는 그렇게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가장 좋은 학교들인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스탠퍼드 같은 곳을 나오고, 그런 학교에서 박사 학위가 몇 개씩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집안도 좋고, 가말리엘이라는 당시 최고의 학자 문하에서 최고의 스승 밑에 배운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다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해롭다고 합니다. 오물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자기가 그런 것들을 다 버렸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버린 게 아니라, 그런 것을 최우선 순위에 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자기의 로마 시민권이나 지식 같은 것이 우리 기독교의 기초를 세우는 데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경에서 편지를 제일 많이 쓰지 않았습니까? 그가 성경에서 가장 많은 책을 쓴 사람인데, 바로 그런 데에 쓰임을 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다 버렸다’라는 말, ‘오물로, 배설물로 여겼다’라는 말은 진짜로 그런 좋은 것들을 다 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중요하다. 이런 것들은 더 이상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라는 말을 한 겁니다. 즉,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똑같이 이야기하십니다. “네 자랑거리들을 버려라.” 그런데 진짜 버리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소중하고 귀한 것을 진짜 다 버리라는 게 아니라, ‘그것이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준 이름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랑거리들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내일 당장 가서 회사에 사표를 내라는 것은 아니니까 오해 마시길 바랍니다. 다만 내가 이룬 것들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올바르게 세우라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면 내가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잘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진 좋은 것들에만 몰두하다 보면, 최고의 것을 놓쳐 버리고 또 이상한 방향으로 잘못 흘러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버리기 위해서 버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버리기 위해 그냥 굴려 버리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더 귀한 것으로 채우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자랑거리,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때, 주님께서 주시는 가장 아름다운 영광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최고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2. 유월절을 지키라 (10~12절)
40년 만에 할례 의식을 행하게 하신 하나님은 또 한 가지 의식을 40년 만에 하라고 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유월절을 지키는 일입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10절)
유월절을 영어로 Passover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그냥 지나가다’라는 뜻입니다. 40년 전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오려 할 때 바로 왕이 못 나가게 했습니다. 그가 고집을 꺾지 않음으로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셨고, 그 마지막 재앙이 모든 장자의 죽음이었습니다.
밤에 죽음의 천사를 보내셔서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첫째 아들과 짐승의 첫 수컷 새끼를 모두 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을 죽여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을 넘어갔고, 그래서 넘어갔다는 뜻으로 ‘유월절’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유월절을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명절로 지키라고 명령하셨지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순종함으로 할례 의식과 더불어 유월절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직접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신 명령이 나오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신 것을 이스라엘이 지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전쟁을 바로 눈앞에 둔 초긴장 상태에서 할례를 행하라는 것에 더하여 유월절 같은 종교의식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고, 수많은 고비를 넘기면서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새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 보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뭐가 잘되는 것, 뭔가 성공하는 것,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유월절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유월절을 지키라는 것은 문설주에 발라놓은 어린양의 피 때문에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고 살아났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 생명을 보전한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어린양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 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분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해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혜 하나만으로도 늘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배의 의미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와서 예배드려야 합니까? 개인적으로도 예배드리지만, 왜 이렇게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립니까? 교회를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셨고,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같이 모여 예배하는 것인데, 특히 이 은혜에 감사하며 그것에 보답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이라는 것은 1년에 한 번 있는 절기입니다. 지금은 성전이 파괴된 지 오래되었기에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유월절이 될 때마다 우리 기독교의 절기도 같이 갑니다. 성금요일, 그리고 부활주일 때와 그 시기가 겹칩니다. 예수님이 바로 유월절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주일마다 우리가 함께 이렇게 모여 예배드리는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11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월절에 무교병, 즉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누룩은 부풀리는 발효 기능이 있어서 본래 모습을 바꾸어버립니다. 또 쉽게 상하기 때문에 음식물을 부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룩은 영적으로 인간을 상하게 하고 부패하게 하는, 곧 죄로 오염시키는 것을 상징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위선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신 말씀에는 진실하고 거룩한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12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할례와 유월절 의식을 행함과 동시에 하나님은 만나를 그치게 하셨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아침마다 내려주신 것이 만나인데,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의 곡식을 먹은 바로 그다음 날 만나가 그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때는 막 추수철이 시작된 때였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 어디서든지 곡식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추수철이 아닌 때 가나안에 들어왔다면 이스라엘은 계속 만나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주 정확하게 추수 때 가나안에 들어오게 하심으로써, 수많은 백성의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타이밍은 기가 막힐 정도로 정확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게 왜 이렇게 되지?’ ‘왜 이게 안 되지?’ ‘왜 일이 이렇게 빨리 됐지?’ 하며 의아해하고 힘들어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의 타이밍은 항상 정확합니다. 가장 적절한 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이든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가장 적절한 때 인도해 주시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기도하면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속으로 ‘에이, 설마 그런 게 어딨어?’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기도를 안 해보신 겁니다. 한번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내 눈에 직접 보이는 건 아니더라도,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고 예배하며 나아가면 영적으로 민감해져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흐름이 진짜 느껴집니다.
3.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13~15절)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와 유월절을 통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게 하고 있을 때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이때 여호수아는 무엇을 합니까?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3절)
아무리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해도, 정규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백성을 이끌고 나가 고대 중동의 최고 병력인 가나안 민족들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두려울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 근처까지 혼자 가서 그들의 동태를 자세히 살피며 여리고와의 전투를 위해서 치밀한 전략을 세우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혼자 그리로 간 여호수아 앞에 갑자기 한 사람이 떡 나타나는 겁니다. 깜깜할 때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면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그것도 칼을 빼 들고 나타났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감히 총사령관인 여호수아 앞에서 칼을 뺄 수 있는 이스라엘 군인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적군이 아닌가 하며 여호수아가 정말로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가슴이 철렁한 것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가 정말 대단한 장군인 게, 보통 사람 같으면 이때 벌벌 떨고 입에서 아무 말이 안 나왔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담대히 나아가서 질문합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여호수아가 얼마나 용맹한 사람이었는지 이것만 봐도 드러납니다.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4절)
이 사람이 “아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나는 네 편도 아니고 네 적군 편도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 대장이라면 당연히 뭐라고 해야 합니까? ‘나는 네 편이야. 나는 이스라엘 편이야.’라고 해야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아니라”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굉장한 충격입니다. 아니, 이스라엘 편이 아니라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적의 편도 아니지만 이스라엘 편도 아니라니?
지금 여호수아는 어떤 상태입니까? 모든 관심이 오직 저 여리고를 어떻게 정복할까에만 쏠려 있습니다. ‘어떻게 저 성을 공격할 것인가? 과연 저렇게 강력한 성을 우리가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인가? 병력은 어디에 배치하고, 어디를 먼저 공격해 들어가야 하나?’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칼을 빼 든 사람을 발견한 여호수아의 반응은 우리 편이냐 적군 편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군대 대장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아니라.”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의 군대 대장이라고 밝힙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정말 놀라운 믿음의 반응을 보입니다. 꿇어엎드리면서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거기서 하나님의 군대 대장 앞에 꿇어엎드립니다. 그러자 그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15절)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여호수아야, 너는 지금 하나님이 우리 편일까,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도와주실 것인가에만 정신이 팔려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네가 하나님 편인가 하는 것이다. 네가 가진 모든 생각, 모든 계획, 모든 두려움, 모든 염려, 그 외의 모든 감정을 다 내려놓아라.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그분 앞으로 나아와라. 너는 네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라. 그러면 승리한다. 하나님이 직접 승리를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 때, 특히 다른 사람과의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보통 어떻게 기도합니까? “하나님, 좀 도와주십시오. 이 관계를 풀어주십시오.”라고 할 때도 있고, 상대방에 대해 화가 나면 “하나님, 왜 저 사람을 그냥 두십니까? 저 사람을 손 좀 봐주십시오. 하나님,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며 ‘하나님은 내 편이시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이것은 굉장한 충격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내 편이신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게 아니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겁니다. 지금 나는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다 “내 편이냐, 내 적의 편이냐?”라고 하는데, “아니라.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라고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어 불안해하면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대비해 보지만, 준비가 제대로 안 되면 어떡하나 걱정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하나, 저렇게 해야 하나? 이것이 주님의 뜻인가, 저것이 주님의 뜻인가?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나가는 것인가?’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지금 네가 할 일은 이거냐 저거냐 걱정하는 게 아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예수님을 주와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발에서 신을 벗는 것입니다. 즉, 내 맘대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가’에서 ‘주님께서’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늘 본능적으로 ‘나’에게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늘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이겨야 하고, 내가 잘되어야 하고, 내가 성공해야 하고, 내 가족이 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늘 ‘내가’가 아니라 ‘주님께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계획, 모든 염려, 모든 생각과 감정을 다 주님 앞에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신가, 아니신가? 이렇게 해야 하나, 저렇게 해야 하나? 하나님이 내 말을 들어주실까, 안 들어주실까?’ 이런 것이 아니라, ‘나는 정말 주님의 편에 서 있는가? 나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것을 먼저 살피라는 것입니다.
지금 급박한 상황인데 “할례를 행하라.” 하십니다. 지금 나는 급한데 “유월절을 지켜라.” 하십니다. 지금 막 위기 상황이고 급하고 이것이 어떻게 될지 두려운 상황인데 “아니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지금 어떤 신을 신고 있습니까? 그것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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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생각과 감정과 지식과 경험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계획과 스케줄을 내려놓고, 내 일정표를 다 내려놓고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바쁜데 “예배하라” 하십니다. 지금 급해 죽겠는데 “기도하라” 하십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든 하나님이 내 편이 되게 하시는 삶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삶을 살 때 풍성한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풍성한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