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H-RB2pTtgdg?si=cIgCji0_udjONpCl&t=155
2025년 5월 25일 주일예배
✦ 믿음 24 ✦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 2장 15~24절)
[들어가는 말]
인생에는 만남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실제로 깜짝 놀랄 만한 만남이 이루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가장 놀라운 만남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그것을 생각해보니까, 고등학교 때가 생각났습니다. 1학년 때 저희 반 선생님은 가장 키 큰 학생과 가장 키 작은 학생이 일주일 동안 주번을 하게 시키셨습니다. 당시 저희 반이 63명이었는데, 1번과 63번이 짝이 되게 하시고, 그다음에는 2번과 62번이 하도록 하시며 계속 돌아갔습니다.
그때 가장 키가 큰 63번이 저였고, 가장 작은 친구는 항상 잘 웃으며 인상이 좋은 친구였습니다. 고등학교에 가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성화회’라고 하는 기독교 학생회로 활동했고, 그 친구는 불교학생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고, 그 친구는 부처님의 자비를 이야기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대학에 들어갔고 그 친구는 재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학교 1학년 봄학기가 끝나기 전인 어느 날 갑자기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주 친한 친구도 아니었고 만나던 친구도 아닌데 갑자기 전화가 온 겁니다. 저는 친구에게 재수하는데 잘 지내느냐고, 힘들지는 않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잘 지내고 있어.
그때 제가 귀를 의심했습니다. ‘부처님의 자비로 잘 지내고 있어.’라고 했어야 할 친구가 주님의 은혜를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때 심지어 불교학생회장이었던 친구가 ‘주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니 정말 놀라웠습니다. 알고 보니 그 친구가 어려운 시기에 전도를 받고 주님을 믿게 된 것이었습니다. 불교학생회장이 크리스천이 된 겁니다.
이렇게 깜짝 놀랄 만한 일들도 있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제가 15년 전 장인어른이 돌아가셔서 한국에 갔을 때, 모든 장례 절차를 마치고 하루 시간이 남아서 그 당시 7살이었던 제 아들에게 서울 구경을 시켜주었습니다.
그때 서울 투어버스를 탔는데, 광화문 근처에서 음료수를 사러 어느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전 교회 장로님 부부가 계신 겁니다. 그때는 그 교회를 떠난 후 9년 이상 지난 때였고 미국에 계신 분들인데 어떻게 그분들이 그때 서울에서 저희가 갔던 그 가게에 있는 겁니까? 확률이 거의 없는 일이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다음에 서울 투어버스를 타고 삥 돌고 나서 내리는데, 내리다가 보니까 저쪽에 우리 교회 오기 전 부목사로 섬겼던 교회의 집사님 한 분이 자리에 떡 앉아 계신 겁니다. 그래서 또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같은 날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한꺼번에 만납니까? 그렇게 확률이 없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라합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서로 만날 만한 접점이 없는 사람들이 만났습니다.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에 라합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을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이 이방 땅에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아주 놀라운 만남이었습니다.
1. 라합의 도움과 조언 (15~16절)
지난주 본문에서 여리고의 추격자들이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뒤쫓아 성을 나간 후 성문을 닫습니다(7). 그래서 정탐꾼들은 이제 성문을 통해서 여리고 성을 나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15절)
문이 닫혀 있으니 문으로 나갈 수 없어서 성벽 위로부터 달아 내리게 됩니다. 마침 라합의 집은 여리고 성벽 위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삶> 공부 때 언급하지만, 여리고 성은 그 당시 이중벽으로 되어 있어서 외벽과 내벽이 있었습니다. 라합의 집은 외벽 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집이 성벽 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집 창문을 통하여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합은 정탐꾼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립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 주고 또 탈출하게 도와줍니다. 그뿐 아니라 여리고 성을 빠져나가서 안전하게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갈 방법까지도 아주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16절)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자신의 말에 속아서 요단 나루터까지 간(7) 추적자들의 눈을 완전히 피하기 위하여 산에 숨어 있으라고 조언합니다. 요단강 쪽으로 곧장 가면 서로 만날 수 있으니까, 그리로 가지 말고 반대편에 있는 산으로 가서 3일 정도 숨어 있다가 가라고 합니다. 여리고 군사들의 추격이 보통 3일 정도 계속된다는 것을 라합은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추격이 완전히 끝난 다음에 요단 나루턱으로 가라고 조언합니다.
이러한 라합의 행위를 가리켜 히브리서 11:31에서 믿음으로 한 것이라고 칭찬한다는 것을 지난주 살펴보았는데, 그것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정탐꾼들을 호의로 영접해 주어서,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히 11:31, 새번역)
그냥 ‘라합’이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창녀(기생) 라합’이라고 표현한 것은, 원래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면서, 이런 사람도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것은 바로 믿음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뜻입니다.
“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내보내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약 2:25, 새번역)
이 구절을 잘 보면, 라합이 거짓말을 했던 행동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라합이 정탐꾼들을 접대하고 다른 길로 가게 한 행동을 칭찬합니다. 그러니까 라합은 여리고 군사들을 속였기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정탐꾼들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해주고 보호해 주며 안전한 방향으로 보내준 행동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렇게 한 모든 것은 이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행동들이 의로웠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로부터 의로운 자들을 보호해 준 것을 믿음으로 한 행위라고 칭찬합니다. 저번에 ‘하얀 거짓말’도 이야기했지만, 하얀 거짓말이나 의로운 거짓말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라합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하여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주 제한적인 지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기초로 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의로운 행동을 한 겁니다. 지식이 완전하지 않은데도 그것이 진리라고 확고하게 믿고 그렇게 행했다는 것이 놀라운 믿음입니다.
라합의 그러한 행동은 마음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된 증거였던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고서는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긴가 민가 하는 일에 목숨을 걸 사람은 없습니다. 한때 가나안의 사람으로 창녀였던 여자가 변화되어 하나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환영해준 것은 믿음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믿음으로 인정받습니까? 사실은 라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영접하고 보호하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정탐꾼들을 숨겨 준 게 발각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뿐 아니라 자기 집안 전체가 반역죄로 동족에 의해서 처참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돕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 믿음입니다.
자기가 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받아들일 것을 결정했기 때문에 이런 행동이 따라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고 믿음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나온 것입니다.
라합은 왜 이렇게까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도와줍니까? 자기 민족을 완전히 배신하고 이스라엘 쪽에 붙어 버린 민족의 반역자가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멸망 당하더라도 자기만 살겠다고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닙니까?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여리고 성 사람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 백성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라합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게 아닙니다. 여리고 성 사람 전체가 다 간담이 녹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악한 죄인이며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그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곧 닥쳐올 이스라엘의 공격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이 이집트를 초토화하고 홍해를 가르며,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40년이나 살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그런 기적을 일으킨 신이 이제 우리를 멸하려고 한다.’라고 무서워하며 떨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게 무서우면 변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변화하기를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마음이 강퍅합니다. 자기들의 악하고 죄악 된 삶을 바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자기들이 잘못되고 악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라합은 어떤 길이 정말로 옳은 길이며 새로운 삶의 길인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내 삶을 바꾸긴 바꾸어야 하는데’ 하며 속으로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죄악 된 삶을 바꿀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무서워만 하고 있는데, 히브리서 11:31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길에 ‘순종’하지 않은 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대로 살겠다고 결단해야 하는데 결단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대로 가다가 결국 멸망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살아남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살 수 있는 길로 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집안 사람들을 모으라고 했는데, 전체가 다 모였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중 일부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합은 이제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계속 이렇게 죄 가운데 살다가 이 성과 함께 멸망 당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삶을 바꾸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받아들여서 새로운 삶의 길로 나아가든지 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더 이상 결단을 미룰 수가 없습니다.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이때 라합이 어떻게 결정합니까? 새로운 삶, 올바른 삶을 살기로 선택합니다. 그래서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히 11:31). 그런 결단을 했을 때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하나님이 연결해주신 것입니다.
20여 년 전에 제가 알던 분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이분처럼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생각이 많았습니다. 사람이 너무 좋고, 정말 인격자이며, 너무 부드럽고 좋은 분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많았습니다.
30년도 훨씬 전에 처음 만났고 20년 전에는 같은 지역에도 있었는데,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아주 많았습니다. 그런데 늘 무엇을 할지, 어느 길로 갈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고민만 하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아내가 집안의 가장이 되어 가정을 이끌어 가다시피 했습니다.
어디서 일하라는 제안이 와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사양하거나, 아니면 고민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로 기회가 가거나 하는 식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다 10년 정도 지난 후에 소식을 들었는데, 결국 어떤 직장을 정하고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 이분이 드디어 결정을 내렸구나. 잘했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 거기도 그만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보다 나이도 훨씬 위인데, 지금도 이걸 할지 저걸 할지, 아직도 고민만 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분처럼 생각만 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삶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신앙 문제에 대해서는 빨리 결단해야 하는데, 결단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고, 어떤 것이 올바른 길인지도 압니다.
성경을 조금 읽어 보거나 또 이렇게 말씀을 듣거나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이 옳른 옳은 길인가 우리가 어느 정도는 다 알지 않습니까? 이 길이 거의 확실할 것 같다고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마음에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목회편지>에도 썼지만,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신 게 뭡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새 계명’으로 주신 게 뭡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저번에 살펴본 <산상수훈>에서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잘 압니다.
그렇다면 실행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행하고 있습니까? 아는데 하지 않는 것은 아는 게 아닙니다. 행동으로 나와야 진짜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로마서 10:10, 새번역)
마음으로 믿었으면 입으로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 믿은 사람은 그 믿음이 말과 행동으로 삶 속에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믿었다고 하는데 그 믿음이 전혀 삶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그게 정말 믿은 것인가 의심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새가족반> 때 ‘예수 영접 모임’이라든지 <생명의 삶> 공부 때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이제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겠습니다.” 하며 믿고 세례받는 분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고 세례까지 받았는데 삶이 별로 변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믿었으면 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인이 바뀌었는데, 소속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삶이 바뀌지 않습니까? 그런데 삶이 똑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전혀 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정말로 믿은 것인가, 정말 의심해 봐야 한다는 겁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라면 성령을 선물로 받고 자기 안에 성령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렇다고 완벽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넘어지고 잘못 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성령님이 찔러 주시기 때문에 바로바로 깨닫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되지.’ 하고 마음에 찔립니다. ‘아,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예수님을 믿었는데 이러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당연히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고 변화해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전혀 그런 게 없다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는데 계속 죄악 된 삶을 살아도 아무 양심의 거리낌도 없고 찔림도 없고 ‘뭐 어때?’라고 하며 계속 그렇게 산다면, 그것이 정말 믿은 것인가 의심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과 행동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머리로만 ‘그것이 옳습니다.’ 하며 동의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옳은 것도 알고 믿음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 주저하는 게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고 알면서도 미루고 계속 주저하는 그런 것이 혹시 있습니까? 지금 무엇이 옳은지를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한 채 생각만 하는 것은 없습니까? 그러나 믿음으로 결단했으면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올바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라합이 이렇게까지 자세한 조언을 해가며 정탐꾼들을 돕는 것은, 이 두 사람이 무사히 살아서 돌아가야 자기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라합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도왔다는 것을 증명해 줄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이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만일 이 두 정탐꾼이 잡혀서 죽기라도 하면 라합의 모든 수고는 소용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라합은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돕습니다.
라합은 분명히 이 두 사람이 자기와 자기 가족들을 살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신저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하긴 했는데 그럼 내가 그다음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하고 있는데, 이 두 사람이 딱 온 겁니다. 그들이 와서 보니까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또 어떻게 해서 안 겁니다. 그래서 이들을 숨겨 주고 보호해 주고 또 믿음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라합이 두 사람과 만났을 때,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얼마나 놀라면서도 감격했을까 생각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믿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여리고 성은 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인데,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었으니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지금 이스라엘 군대가 저쪽 밖에 있고 이제 곧 쳐들어올 것 같은데, 그럼 내가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데 바로 그때 이스라엘 사람 두 명을 탁 만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일하심과 역사의 흐름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일에는 흐름이라는 게 있는데, 영적으로 민감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그 흐름이 보입니다. 그것이 느껴집니다. 이 사람들을 만났을 때 라합은 분명히 ‘아, 하나님이 내 믿음을 인정해 주시는구나. 나를 받아주셨구나.’ 하고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예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며 하나님과 동행할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흐름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예배에 소홀할 수 있고 기도도 안 할 수 있고 말씀도 제대로 안 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정말 순수하게 믿었다면 구원은 받을 텐데, 안타까운 것은 그런 사람은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은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구원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풍성한 삶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풍성한 삶을 전혀 맛보지 못하고 삽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입니까?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살면 평생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에서 해방되지를 못합니다.
여러분, 지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도 계속 불안하십니까? 염려하십니까? 걱정이 되십니까? ‘아,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왜 그런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받았는지 몰라도,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내가 주인입니다.
무슨 결정을 할 때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결정합니다. 이걸 먹을까 저걸 먹을까도 내가 결정하고, 어디를 갈까도 내가 결정하고, 언제 갈까도 내가 결정하고, 이 모든 것을 다 내가 혼자 결정하니까,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참 안타까운 삶입니다. 아름다운 삶, 행복한 삶, 풍성한 삶을 약속해 주셨는데도, 그런 삶을 알지도 못한 채 살아가니까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렇다고 무슨 대단히 거창한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을 늘 찾으며 살면 됩니다. 그냥 순간순간 기도하며 하나님과 대화하고, 또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뭔가를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 제가 이것을 결정해야 하겠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죠?’라고 하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보통 성경을 통해서나 이런 예배를 통해서나 기도 중에 어떤 생각이 탁 떠오르게 하실 수 있습니다. 또 사람을 통해서 메시지를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기도하면서 자기가 잘 판단해서 결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혹시라도 잘못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부터 하나님이 또다시 내 삶을 써내려가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흐름을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냥 아무렇게 사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깨닫고 감당하며 살게 됩니다.
2. 정탐꾼과 라합이 맺은 언약의 확인 (17~21절)
“17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17~18절)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은 여기서 두 가지 명령을 합니다. 첫 번째는 “이 붉은 줄을 매라.”이고, 두 번째는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입니다.
먼저는 라합의 집을 다른 집들과 구별할 표시가 필요한 겁니다. 이들이 타고 내려간 창문에 매어놓은 붉은 줄은 라합과 정탐꾼들만이 알 수 있는 암호입니다. 그 표시를 하고서 라합은 자기 가족들을 모두 자기 집으로 모아야 합니다. 그러나 줄을 묶고 가족들을 모은다고 라합 가족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집 문을 나가 거리로 가서는 안 됩니다.
“19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0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19~20절)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출애굽 하던 당시 유월절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을 보면, 첫 유월절 때 이스라엘 백성은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 안에 온 가족이 모여 그 문밖으로 절대 나가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무리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도 그 집을 나가면 안전이 보장되지 못합니다.
그때 죽음의 천사가 애굽에 내려와서 문기둥에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집은 넘어갔습니다.
넘어간 것이 ‘유월’(pass over)이기 때문에 그것을 ‘유월절’(Passover)이라고 부릅니다. 유월절이 유월에 있는 줄(?) 아는 분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 넘어갔다는 뜻의 한자어 ‘유월’이라서 ‘유월절’입니다.
그때처럼 이제 라합의 집에 매인 붉은 줄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 라합의 집을 멸망시키지 않고 그냥 넘어가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조건은 라합이 그들에 대한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20). 이것에 대해 절대 다른 사람에게 누설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조건들에 대해 라합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21절)
라합은 그들의 말대로 행동합니다. 두 정탐꾼을 보내고 라합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단 것입니다. 여기서 ‘줄’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티크바)는 ‘희망, 소망’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라합은 ‘줄’을 창문에 매달면서 거기에 자기의 ‘희망’을 걸었던 것입니다.
정탐꾼들은 이스라엘이 여리고에 들어올 때 붉은 줄을 매달라고 했습니다(18). 그런데 라합은 이스라엘 군대가 들어올 때가 아니라 이들이 떠나자마자 붉은 줄을 자기 집 창문에 매답니다. 사실 정탐꾼들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서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가려면 최소 며칠이 걸릴 것이고, 또 이스라엘이 쳐들어오는 것도 여러 날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라합은 그들이 돌아간 즉시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준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매단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라합은 멸망에서 구원받는 것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정탐꾼들이 떠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단 이날 이후로 라합의 집은 어떤 모습으로 살았겠습니까? 창문에 붉은 줄만 매달아 놓고 이전과 똑같이 살았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분명히 이전과는 다르게 살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전처럼 여리고 사람들과 어울려서 흥청망청 놀지 않았고, 라합도 더 이상 술장사나 여관 일이나 매춘업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다 해놓고는 똑같은 죄를 지으며 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친했던 이웃들과도 더 이상 같이 만나거나 놀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보이면 안 되니까 굉장히 조심해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간이 라합과 그 가족들에게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얼마든지 행하며 즐기던 것을 하지 못하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하던 것을 며칠만 못하게 하면 굉장히 힘듭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자기들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살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방탕한 삶 가운데 쾌락을 추구하며 살다가 망하고 비참하게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멸망 당하는 성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이 최우선 순위입니다. 라합과 가족들은 이제 삶이 더 힘들어졌지만, 새로운 삶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고 그 기준에 따라 살겠다고 결단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안 다니고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에게 “예수 믿으세요, 교회 나오세요.”라고 전도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아직 죽을 때가 멀었다고 생각하며 구원의 문제를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갈 게요. 다음에 믿을게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나중’과 ‘다음’이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압니까?
꼭 구원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 같이 열심히 해보자고 권하면 여러 가지 변명을 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사업하는 분들은 “지금 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이 사업이 정착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니까 사업이 잘되는데도 안 나와서 보면 다른 사업을 하는 겁니다.
아이가 어린 분들은 “우리 아이가 너무 어려서, 나중에 크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컸는데도 열심히 안 해서 보면 둘째를 낳고 또 셋째를 낳습니다. 이런 식으로 평생 열심히 할 때가 없습니다.
또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가장 흔한 핑계인데, 덜 바빠져서 이제 좀 해볼까 했더니 건강이 나빠져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렇게 안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는 좀 제대로 해볼까 하는데, 건강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여러분, 내 건강이 평생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렇게 교회에 내 발로 나올 수 있고 내가 직접 운전해서 나올 수 있다는 게 평생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제대로 하는 사람은 변명이나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곧바로 합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우선순위가 분명히 서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덜 중요한 것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를 뒤로 미루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우선순위가 핵심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덜 중요한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오래전 베스트셀러 책 제목 중에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가 있는데, 영어 원제는 <Good to Great>입니다. Good은 좋은 건데, 좋은 것에 만족하면 최고를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Good에 머물러서 Best를 하지 못합니다. ‘이 정도면 됐지. 적당히 하지.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하니까 최고를 누리지 못하는 겁니다. 좋은 것에 그냥 만족하다 보니 그렇습니다.
그러면 결국 누구에게 손해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손해가 가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 손해가 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손해가 가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엄청난 손해를 보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모르니까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선순위가 주님께 있지 않은 사람은, 지금 당장은 이익을 보는 것 같고 당장은 편한 것 같아도, 결정적일 때 손해를 보거나 일이 잘못되어서 크게 후회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미 늦었습니다.
우리는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고 살아야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최우선 순위를 두며 살고 있습니까? 내 시간과 돈과 에너지와 재능을 주로 어디서 뭘 하는 데 쓰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을 잘 점검하며 살아야겠습니다.
3. 정탐꾼들의 무사 귀환과 보고 (22~24절)
“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뒤쫓는 자들이 돌아가기까지 사흘을 거기 머물매 뒤쫓는 자들이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찾지 못하니라” (22절)
정탐꾼들이 안전하게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라합의 생각이 적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으로 볼 때 라합은 확실히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두 정탐꾼은 여호수아에게 돌아와서 이 모든 일을 보고합니다. 여기서 그들의 흥분하는 마음을 느껴보십시오.
“23 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가서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고하고 24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 (23~24절)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얼마나 입이 근질근질했겠습니까? 며칠이 걸려서 간신히 돌아와 이렇게 보고합니다. 이때 이들이 막 흥분해서 보고하는 모습이 상상되십니까? 이 두 사람은 “주님께서 그 땅을 모두 우리 손에 넘겨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를 무서워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합니다. ‘간담이 녹았다’라는 말이 ‘무서워한다’라는 말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그때까지도 어떻게 요단강을 건너야 할지, 어떻게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기들이 여리고를 이길 것이란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깨달았습니까? 여리고 사람들 모두가 자기들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여리고 모든 주민이 이스라엘 앞에서 간담이 녹고 무서워합니까? “이들이 우리를 무서워합니다.”라는 게 핵심이 아닙니다. 그 앞을 보십시오.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두 정탐꾼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마치 여호수아와 갈렙이 38년 전 정탐했을 때 보고했던 내용과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를 무서워하고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결국 승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혹시 이 두 사람은 믿음이 아주 철저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라합을 만나니까 믿음의 상승 작용이 일어납니다. 라합도 아주 기초적인 신앙인데 이 두 사람을 만남으로써 믿음이 더 커진 것이고, 이 두 사람도 라합을 만남으로 믿음이 더 커졌습니다.
결국 승리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삶의 성패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기만 하면, 철저히 주님의 말씀을 붙들며 나아가기만 하면 승리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승리하게 될지는 모릅니다. 아직 승리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방법이나 시기를 모르더라도, 승리한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확실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면 상대방의 간담이 녹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아느냐입니다.
남북전쟁 때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게 부관이 와서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서 주실까요?” 그때 링컨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보게,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느냐가 아닐세. 정말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일세.”
[나가는 말]
라합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도왔다고 해도, 앞으로의 결과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아닙니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결과를 우리가 어떻게 장담합니까? 아무리 자기가 최고의 조언을 하고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최선을 다해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기다릴 때입니다. 최선을 다한 후에 결과를 기다릴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로 와서 자기와 가족들을 구해줄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이 기간은 정말 인내의 시간입니다. 아주 답답할 수 있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고구마를 몇 개나 먹은 것 같이 답답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견뎌야 할 때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인내로 기다리며 나아갈 때, 구원의 날은 반드시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인내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가운데 우리의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일을 감당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 바라며 기도하는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서 답답한 가운데 있습니까? 지금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는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때입니다. 그리고 인내할 때입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떤 결과가 나와도 감사하며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