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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18일 주일예배
✦ 믿음 23 ✦
뜻밖의 만남을 통해 일어난 믿음의 기적
(여호수아 2장 1~14절)
[들어가는 말]
인생에서는 만남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 실감하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그렇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바뀌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떤 친구를 만나서 사귀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가족은 자기가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태어나 보니 부모의 아들이나 딸이고, 또 누구의 형제이거나 자매입니다.
교회는 자기가 선택하는 것인데, 교회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고, 또 지난번 <일터의 삶> 공부에서도 바로 그런 것을 다루었지만, 우리 삶에서 가정과 일터와 교회가 우리 삶에서 삼위일체를 이룬다고 할 정도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중 하나만 삐끗해도 우리 삶이 삐끗합니다.
사실 어린 자녀를 두신 부모님들은 굉장히 기도를 많이 하면서 신중하게 살 곳을 잘 정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어디로 이사를 하기로 결정하느냐에 따라서 내 자녀의 평생 친구들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같은 콜럼버스 지역 안에서도 내가 어디 사느냐에 따라 내 자녀의 친구가 결정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가 여기 살지 않고 저쪽 다른 동네에 살았더라면, 내 아이는 이 동네 친구들이 아니라 저쪽 동네에 있는 친구들과 친해졌을 겁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살기로 결정함으로써 내 자녀는 이곳에 사는 아이들과 친구가 된 겁니다. 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셔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 그것이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자녀에게도 굉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 보면 그렇게 자기가 의도해서 만나는 만남도 있지만, 뜻하지 않은 만남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물론 내가 누구를 만나는가가 굉장히 중요하지만, 또한 나를 만나는 사람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가는 더욱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만 신경 쓸 게 아니라, 저 사람이 나를 만났는데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 주는가,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겁니다.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인생을 망쳤다는 말을 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인생을 망친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친구와 어울리다가 그렇게 된 것뿐입니다.
잘못된 친구가 자기를 만나서 제대로 된 사람으로 변화되도록 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자기도, 그 친구도 다 잘못된 결정을 내림으로써 잘못된 것이지, 친구를 잘못 만나서 인생을 망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내 친구가 나를 만나서 그 인생이 바뀌었다면, 그 삶은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라합이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우리가 함께 협력하는 선교사님 중에 이라합 선교사님이 계신데, 이전에 오셔서 이 라합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왜 선교 이름을 하필 라합으로 정했는지 설명해 주셨는데, 물론 오래되어서 잊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라합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라합이라는 여인은 직업도, 출신 배경도 아주 좋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을 통해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구출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여인을 통해 주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모든 역사는 라합이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만났기 때문인 동시에, 그 두 사람이 또 이 라합이라는 여리고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기막힌 만남을 주선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1. 여리고로 간 두 정탐꾼 (1~3절)
여리고라는 곳은 요단강을 건너서 처음 만나는 성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리로 정탐꾼을 보내어 여리고의 상황이 어떤지 살피도록 합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1절)
그들이 출발한 장소는 싯딤인데, 요단강에서 동쪽으로 약간 바깥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문자적으로 ‘아카시아’라는 뜻으로, 험한 환경을 암시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험한 환경에 있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의 첫 성을 정탐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좀 이상한 일입니다. 1장을 보면, 분명히 그들은 3일 동안 준비해서 요단강을 건너겠다고 합니다(1:11). 그런데 왜 요단강을 건너지는 않고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내는 겁니까?
왜 여호수아가 다른 일을 제쳐놓고 싯딤에서 여리고로 정탐꾼을 보내야 했을지 그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정복전쟁에서 첫 번째 성인 여리고 성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정탐꾼을 보내서 정탐하게 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방법은 40년 전에 광야에서 이미 실패했던 방법입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각 지파별로 한 사람씩 대표를 뽑아 가나안을 향해 정탐하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열두 지파에서 한 명씩 지도자급 되는 사람이 나와 열두 명이 정탐꾼으로 갔습니다.
그때 여호수아 자신도 에브라임 지파 대표로 정탐꾼이 되어 나갔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이 아주 부정적인 보고를 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그들의 부정적인 보고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고, 우리는 다 죽었다.”라고 했고, 그 때문에 무려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40일 동안 정탐했는데 하루를 1년씩 쳐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지금 왜 굳이 과거에 실패했던 방법을 또다시 들고나옵니까? 이번에도 정탐으로 갔던 두 사람이 돌아와서 ‘우리 힘으로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는 너무 강한 성입니다.’라고 보고하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려고 합니까?
이것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좀 더 쉬워질 수 있습니다. 인격이 아직 어린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면서 갑자기 정보를 아주 많이 주게 되면 머리가 복잡해지고 오히려 ‘이것을 어떡해야 하지?’ 하며 많은 걱정과 근심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어느 정도 성숙하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정보도 주지 않으면서 무조건 알아서 하라고 하기보다는, 미리 관련된 정보를 주면서 이런 방향으로 연구해 보라고 하면 앞으로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에 미리 대처하게 되어서 시간과 에너지가 절약되고 유익합니다.
40년 전에 모세가 정탐꾼들을 보냈을 때는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미성숙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대한 정보가 주어지니까 혼란만 일어난 겁니다. ‘가나안 땅이 이렇다, 저렇다.’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 정보를 접했을 때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하며 도망가려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광야에서 생활하며 40년 가까이 지나는 동안 이스라엘은 많이 훈련되었습니다. 사실 광야라는 곳은 40년이 아니고, 4년도 아니고, 4개월도 아니고, 며칠도 살 수 없는 환경입니다. 광야에 뭐가 있습니까?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며칠이라도 버틴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광야에서 40년을 살았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매일매일 체험했고, 그래서 많이 훈련되었습니다. 이제는 제대로 된 정보가 주어지는 경우 그것을 잘 받아들여서 가나안을 정복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는 시기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고 대처를 잘할 수 있는 훈련이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제 두 사람의 정탐꾼을 여리고로 보냅니다. 자신이 정탐으로 나갔던 40년 전에는 이 여리고 지역을 살피지 않았고, 게다가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서 여리고 성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며 두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보낸 두 사람은 여리고로 가는데, 이상하게도 라합이라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합니다(1). 왜 하필 기생의 집입니까? 그러나 꼭 기생의 집이라서 들어갔다기보다는, 성문 위에 있는 여관 같은 곳이었기에 그리로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비밀스러운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곳이 가장 완벽한 장소가 됩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문에 있던 여관을 운영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을 통해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다 알 수 있습니다. 여리고와 주변 지역의 최신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 낯선 사람들이 방문할 때 그들을 여리고 정부에 알려야 할 의무도 이 여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은 여리고의 최신 정보를 얻기 위하여 라합의 집을 선택해서 거기 머물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2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2~3절)
이 두 사람의 정체가 탄로 났습니다. 누군가가 여리고 왕에게 보고하기를, 이스라엘 민족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려고 들어왔는데, 그들이 밤에 와서 라합의 집으로 들어갔다고 보고합니다.
그렇게 스파이가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은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서 말합니다. “네 집에 들어온 사람들을 데려와라. 그들은 이 땅을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의 첩자들이다.” 여리고 왕과 그가 보낸 사람들은 라합이 자기 집에 들어온 남자들의 정체를 모르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워낙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여관 손님으로 온 것인 줄 안다고 왕이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정체를 알려주면 라합의 협조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이제 이 두 사람의 운명은 기생 라합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정체가 탄로 나고 이제 여리고 군사들이 이곳으로 몰려온 이때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의 상황은 절체절명의 상황입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이제 곧 군인들에게 잡혀서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아주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 사건, 즉 두 정탐꾼의 정체가 들통난 사건을 통해 이 두 사람은 라합의 진정한 믿음에 대해 듣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를 생생히 보게 됩니다. 이 엄청난 위기와 죽음의 상황이 오히려 믿음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 모든 것이 막히고 안 풀리고 최악의 상황이라 어떡하지 하는 바로 그 순간, 그런 최악의 상황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그러한 엄청난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몇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나에게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아, 하나님께서 뭔가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려고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2. 라합의 믿음 (4~7절)
“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4~5절)
이런 구절을 읽으면 우리가 고민이 됩니다. 요즘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는 <생명 언어의 삶> 공부에서 ‘진실 언어’를 공부합니다. 거기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빨간 거짓말도 있고, 까만 거짓말도 있고, 하얀 거짓말도 있는데, 하얀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거짓말하는 것보다는 안 하는 게 낫다. 우리는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건 완전히 거짓말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왔는데 ‘나는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겠고 그들은 이미 떠났다.’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인데, 그럼 이게 어떻게 되는 거냐? 우리가 솔직하게, 진실하게 얘기해야 하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상당히 고민되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바로 얼마 전 수요예배 때도 이런 것을 다루었는데, 악한 일을 행하려는 자들에 대하여 이런 식으로 막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짓말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내 이득을 위해서 슬쩍 속이는 것은 거짓말로 보십니다. 그러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거짓말로 보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진짜로 ‘그 사람들, 여기 있어요.’라고 했으면 다 잡혀가서 죽는 겁니다. 그런데 라합은 이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는 일을 한 것입니다.
라합은 일단 왕이 보낸 사람들의 말에 동의하면서 그들의 신뢰를 얻습니다. “그 사람들이 저에게로 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다음 이어지는 대답을 보면, 라합은 단순히 ‘알지 못한다’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추격자들을 완전히 따돌리기 위해 적극적인 제안까지 합니다(5). 따라가라고 합니다.
라합은 “그들은 날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떠났는데,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빨리 사람을 풀어 그들을 뒤쫓게 하시면,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여리고 군인들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그 사람들은 요단 나루터까지 그들을 쫓아갔고 그들을 뒤쫓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7절)
너무나 놀랍게도, 그들은 아무 의심 없이 라합이 제안한 것을 그대로 따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라합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6절)
7절에서 ‘성문을 닫았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추격하는 여리고 군사들이 다음 날까지 성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두 이스라엘 정탐꾼도 아침까지는 꼼짝없이 여리고 성안에 갇히게 되었다는 상황을 말해줍니다.
두 정탐꾼은 여리고 왕이 보낸 군사들로부터는 안전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라합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만일 라합이 마음을 바꾸어 그들에 대해 왕에게 여기 있다고 알린다면 그들은 살아남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호수아가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 성에 보낸 것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기도 전에 이 정탐꾼 두 명이 잡혀서 죽임을 당했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굉장히 낙심하고 침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아예 요단강을 건너고 싶은 마음조차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놀라운 것은, 이 두 명의 정탐꾼이 큰 위험에 처하게 되는 일을 통해서 바로 이 라합의 믿음이 드러나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펼쳐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발각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라합에게 기회가 있었겠습니까? 만약 이 두 사람을 돕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라합의 집에 구원이 임했겠습니까? 이 두 사람이 위기에 빠졌기 때문에 라합과 그 집안 전체가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우리가 인생의 위기라고 생각하는 일이 우리에게 놀라운 믿음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나의 삶에 어떤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굉장히 어렵지는 않더라도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면서 약간 염려되거나 불안한 상황에 있습니까? 아니면 정말로 어떤 큰 문제에 봉착해서 굉장히 괴로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그런 일이 벌어지면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데, 이것이 지속되면 약간 원망의 마음이 올라옵니다. 그럴 때 흔히 하는 말은 “Why me?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와 같은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미리부터 결론을 내리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고 해서 ‘이건 나쁜 것이다.’라고 금방 결론을 내리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과연 이것이 나쁜 일일까?’ 그것을 물어야 한다는 겁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다고 기뻐할 것만이 아니라 ‘이것이 정말 좋은 일일까?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좋은 일일까?’ 그것을 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특히 어려운 상황이 될 때 미리부터 결론을 내리고 ‘이것은 아주 나쁜 상황이다.’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위기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 이 위기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위기 상황이 지금 내 삶에 벌어지고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동안 계속 “얘야, 얘야” 부르시는데 내가 하도 듣지 않으니까 꽝 하고 큰소리를 내셔서 “어, 뭐지?”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그렇게 지금 이야기하실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도 하나님 말씀을 안 들어서 크게 소리를 내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를 인도해 주고 싶으신 길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가 생각하지도 못하는, 상상하지도 못하는 엄청난 일을 준비하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주인공이 어려움을 당하는 장면이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미국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진짜로 어느 목사님에게서 들은 얘긴데, 소그룹 모임을 하다가 서로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는데, 한 분이 기도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탐(Tom)을 위해서 좀 기도해 주세요.” “탐이 어떻게 됐는데요?”라고 물었더니 “탐이 지금 굉장한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탐이 누군데요?”라고 묻자,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주인공인데, 지금 큰 위기에 봉착했으니까 기도해 주세요. 그래서 드라마가 잘 진행되게요.” 드라마에 너무 심취하면 이렇게 되니까 너무 심취하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시청자는 위기 상황을 보면서 극도로 긴장이 되고 마음 졸이며 손에서 땀도 나면서 보게 됩니다. 너무 걱정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청자만 그럴 뿐, 연기하는 배우나 작품을 이끌어가는 감독은 주인공이 어떻게 될지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배우는 ‘내가 어떻게 하면 실감 나게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감독은 ‘이 장면을 어떻게 구성해야 더 흥미진진하게 작품을 이끌어갈 수 있을까?’ 그런 것에 대해서만 걱정합니다.
우리 인생을 내 눈과 입장으로만 보면 힘들 수 있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의 감독이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염려할 게 없습니다.
여러분, 드라마에서 주인공에게 위기가 닥치는 장면이 있으면 맨 끝으로 먼저 가서 어떻게 되나 보니까 ‘아, 이게 잘 풀리게 되는구나.’ 그걸 알고 나서 다시 그 위기 장면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끝을 읽어보니까 잘 풀립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읽던 장면으로 돌아가면 걱정이 됩니까, 안 됩니까? 하나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결론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좋은 결론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 땅에서 힘들어도 우리의 결론은 뭡니까? 천국,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걱정할 게 뭐가 있습니까? 결국 우리는 다 잘될 텐데 걱정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때가 되면 이 땅에서도 놀라운 반전을 일으키십니다. 아직 때가 안 된 것뿐입니다. 때를 기다리면 하나님이 잘 풀어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최선을 다해 주님을 의지하면서 내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이렇게 열심히 예배드려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열심히 예배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삶을 사는 사람과,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런 데에 소홀하고 신앙생활을 대충대충 하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둘 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둘 다 보호해 주시고, 둘 다 인도해 주십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붙어 있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이끌어 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보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그게 다 보인다는 겁니다. ‘아, 하나님이 지금 나를 이렇게 인도하고 계시는구나.’라는 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인도해주고 계시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불안한 겁니다. 우리가 늘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을 붙들어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3. 라합과 정탐꾼들의 대화 (8~14절)
이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 오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라합이라는 여인을 사용하셨는데, 우리가 살펴보는 히브리서에서는 라합이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숨겨준 일이 놀랍게도 믿음으로 한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히브리서 11:31)
믿음올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라합은 어떤 여인입니까? 그녀의 본래 직업은 ‘기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상당히 누그러뜨린 표현입니다. 히브리어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창녀’ 또는 ‘매춘부’입니다. 새번역 성경에서 ‘창녀’라고 되어 있습니다.
라합의 집은 여관을 겸하고 있었지만, 라합은 분명히 몸을 파는 윤락여성이었던 겁니다. 어떤 학자들은 라합을 가리켜 당시 여리고 성의 신전에서 신들에게 제사하며 남자 사제들과 여자 사제들이 성적 행위를 하는데, 그 신전 여사제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창녀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말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이 쓰실 사람이 없어서 이런 더러운 여자를 쓰신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이 사실만 보아도, 하나님이 얼마나 공평하신 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력하고 성공한 사람만 쓰시는 게 아니라, 아주 천한 사람도 쓰십니다. 누구나 쓰십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라합이 천한 기생이며 창녀라서 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라합을 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녀의 믿음 때문입니다. 직업이나 삶과 상관없이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녀를 사용하셨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진 라합을 살리시기 위해서 오늘 이 두 이스라엘 정탐꾼을 그 집과 연결해 주신 것입니다.
사실은 라합이 두 정탐꾼을 살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통해 믿음의 사람인 라합을 살리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합은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실 정도로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1)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올바르게 반응했습니다.
“8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8~10절)
바로 이것이 간증입니다. 라합이 간증하고 있습니다.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정탐꾼을 숨긴 라합은 그들이 눕기 전에 가서 말합니다. 라합의 말을 들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 홍해를 건넌 사건은 전 세계적인 톱뉴스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미디어도 없던 때에 이 소식이 주변에 다 퍼졌습니다. 이미 40년이 지났지만 이 40년 동안 이 소식이 다 퍼져 있었던 겁니다.
주변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알게 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참 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집트의 바로를 이기고 또 이집트의 모든 신들을 이기고 홍해를 갈랐으며, 요단강 동편에 있는 두 왕 시혼과 옥을 전멸시킨 아주 강력한 신이었습니다. 엄청난 능력을 지닌 그 신이 죄인의 나라들을 모두 심판하신다는 것을 라합이 들은 것입니다.
기생이었던 라합은 여리고 성에서 일어나는 모든 추잡하고 더러운 죄들을 얼마나 많이 알았겠습니까? 사람들이 아주 악하고 더럽고 추잡하다는 것을 얼마나 잘 알았겠습니까?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지 다 보고 경험해서 알았을 것입니다. 라합은 죄와 깊은 관련이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 자신도 죄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 죄악 된 삶을 이제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소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서 ‘바로 이거다. 내가 이제는 그 신을 믿고 이제 내 삶을 바꾸겠다.’라고 하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라합의 바로 그 마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이 두 정탐꾼을 라합에게 연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라합이 이 두 사람을 살린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라합을 살리셨습니다. 여리고에 여관이 이 집밖에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 이리로 두 사람이 왔겠습니까? 자기들의 판단으로 그냥 그 집에 간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라합이 이 사람들을 숨겨줄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만약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신고해서 넘기면 많은 돈을 상으로 받고 인정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여관은 ‘정부 인정 1위 여관’이라고 하며 장사가 더 잘되었을 것입니다. ‘애국자 여관’이라고 정부에서 인정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정부에서는 라합을 가리켜 ‘우리 여리고 성의 자랑이요 영웅’이라고 떠받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세상에서 죄를 지으며 돈을 많이 벌고 장사가 잘되는 것보다, 깨끗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를 정말로 원했던 것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정말로 원했습니다. 더러운 돈보다 새로운 삶, 깨끗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돈을 엄청나게 벌고 신나게 장사하며 온갖 쾌락을 다 누린다고 해도, 이제 얼마 후면 이 성이 멸망 당하고 다 죽습니다. 그러면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벌고 쌓아놓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 망하고 죽으면 그 많은 돈과 비즈니스 성공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 됩니다.
라합은 이 죄악 된 여리고와 함께 그런 식으로 멸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새롭고 정결한 삶을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라합은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정탐꾼 두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살리는 길이었던 동시에, 사실은 자기와 자기 집을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여리고의 다른 사람들도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다 들었습니다. 여리고 주민들이 그것을 다 들었습니다. 그들의 간담이 녹았습니다. 벌벌 떨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알았으면서도 죄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죄악 된 삶을 청산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길을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라합은 여리고에서의 죄악 된 삶의 미련을 과감히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들은 소문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곳마다 죄악의 도시와 민족은 다 멸망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음 차례가 바로 자기가 사는 여리고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쾌락을 누리며 돈을 많이 벌고 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라합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신 일을 들었고 거기서 믿음을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먼저 들어야 합니다. 또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듣는다고, 본다고, 배운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단해야 합니다. 여리고의 다른 사람들도 다 듣고 보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결단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에 매주 참석하고 열심히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은 아주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다 되는 게 아닙니다. 결단해야 합니다. ‘정말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며 결단하고 나가서 일주일 동안 그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며 살아야 그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겁니다.
오늘 어떤 결단을 하고 이 자리를 떠나시겠습니까? 오늘 죄악 된 삶이 있는데 청산하지 못하고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은 없는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과감히 그것을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2)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11절)
여리고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공격해 올 것을 알았습니다. 그 전쟁은 하나님이 죄악을 심판하시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들의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하나님을 믿고 믿음을 가지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더 강퍅해져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길로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가리켜 뭐라고 고백합니까?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11).
여러분, 나도 이렇게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습니까? 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보통 하나님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산타 할아버지를 생각합니다. “호호호” 하고 수염 날리면서 내가 원하는 선물을 척척 갖다주는 그런 분을 생각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능력의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아니면 그저 내가 필요할 때 도깨비방망이처럼 ‘나와라, 뚝딱!’ 하면 내가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척척 갖다주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섬기는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나를 섬기는 하나님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나의 편리와 이득을 위해 존재합니까? 나는 왜 믿고 있습니까? 라합이 고백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야만 하겠습니다.
3) 라합은 자기와 가족들을 선대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12~13절)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선대하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구약 히브리어에서 가장 유명한 ‘헤세드’라는 단어입니다. 보통 ‘인애(steadfast love)’라고 번역합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은혜를 베풀다’로 번역했습니다. 이 ‘헤세드’라는 단어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책임 있는 사랑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헤세드, 인애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성실함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상대방을 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헤세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도 헤세드를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은혜를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헤세드(인애)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헤세드를 실천하지 못합니까? 욕심을 품을 때입니다. 욕심을 품으면 다른 사람을 자기 성공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듭니다. 상대방을 내가 사랑을 베풀 대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기적인 성공을 위한 도구로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헤세드’(인애)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가장 큰 특징을 잃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정탐꾼이 라합에게 은혜를 입게 하심으로 그들이 라합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놀랍게도 가나안 여자인 라합이 헤세드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국 그녀의 모든 가족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악한 가나안 출신이라도, 악한 짓을 하며 살았던 여인이라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라합의 믿음을 귀하게 보시고 그녀를 살리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오르는 인물이 되게 하십니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마태복음 1:5-6)
살몬이라는 사람과 라합이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는데, 그러니까 살몬이 바로 두 정탐꾼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안 나와서 그렇지,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의 로맨스가 꽃피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도 나왔습니다. 영화에서도 그렇게 묘사합니다.
라합의 아들이 바로 보아스입니다. 보아스가 누구입니까? 놀랍게도 성경의 룻기에 나오는 룻, 그 모압 여인 룻을 통해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가 바로 그 위대한 다윗 왕을 낳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스토리입니까?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14절)
하나님께서 이들을 여리고에 보내신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여리고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라합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라합은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처럼 천하고 죄악 된 직업을 가지고 살던 이방인을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자기 한 사람을 위해 이런 계획까지도 갖고 계신 것은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셨고 마음까지 알고 계셨으며 구원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작은 믿음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을 사용하시고 또 만나게 해주십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막막하고 괴로운 현실 속에 갇혀 있습니까? 그런데 괴로움 속에서도 작은 흐느낌과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절대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너무나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나 한 사람을 위해 환경을 바꾸기도 하시고 뜻밖의 사람을 보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믿음으로, 새로운 삶을 향한 간절한 소원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놀라운 만남을 통해 믿음의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데서 일이 갑자기 풀리게 해주십니다.
여러분, 그것을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기다려 보십시오. 하나님의 때에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놀라운 믿음의 역사가 우리 삶 가운데 넘치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