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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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54일 주일예배

믿음 22

매일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출애굽기 21~10)

 

[들어가는 말]

 

지난 20203월 미국에서 코로나19 사태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이후로, 저는 극장에서 영화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대단한 영화광은 아니지만, 그래도그동안 꽤 많은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중에도 기억에 남는 영화들이 몇 편 있는데, 내용과 상관없이 아주 생생하게 기억나는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오래전인 1998년에 봤던 영화인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왜냐하면 제가 태어나서 유일하게 영화관의 좌석이 아니라 계단에 앉아서 본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너무 사람들이 많이 와서 좌석이 부족하여 계단에 앉아서 본 영화였습니다. 지금까지 계단에 앉아서 본 영화는 띡 그 영화밖에 없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은 바로 <The Prince of Egypt(이집트 왕자)>(1998)입니다. 이 영화는 모세와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야기를 다룬 디즈니 애니메이션입니다. 제가 당시 살던 마이애미(Miami, FL) 지역에 유대인들이 많아서 그때 그 영화를 많이 보러 왔기에 앉아서 볼 자리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그 영화를 보면 실제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기보다는 각색하고 또 허구적인 요소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영화를 보면 사람들은 심지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조차 실제 역사가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성경을 읽으시면서 비현실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찬 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성경은 역사 속에 있었던 모든 사건을 다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 속에 나오는 이야기는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모세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을 함께 나누며 그 사실을 같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히 <말씀의 삶>에서도 다루는 내용 중에서 약간 나누려고 합니다.

 

 

1.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누구인가

 

출애굽기 17절까지만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크게 번성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번성했다면 그 후로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까? 계속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이어졌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1:8)

 

우리가 지난주까지 요셉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요셉은 파라오 왕 다음의 이집트 이인자인 총리였으며, 당시 기근이 왔을 때 이집트 백성뿐 아니라 주변 지역의 많은 다른 민족들도 구원한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이집트의 국민 영웅이었습니다. 요셉의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도 이집트에서 위대한 민족으로 여겨졌습니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은 노예가 되었습니다. 잘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노예가 된 겁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겁니까? 그들이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살았다고 성경에 나오는데, 430년 내내 노예였던 게 아닙니다. 처음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후반기로 가서 노예가 된 겁니다. 요셉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 새 왕은 누구였을까요?

 

이집트 역사 기록을 보면 요셉이 나오지 않고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모세나 출애굽 이야기가 만들어낸 허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전 3세기 마네토(Manetho)라는 이집트 역사가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원래 성경이 사실이라고 밝히려고 했던 게 아니라, 연구하다 보니까 힉소스라는 민족에 대한 자료가 나왔고, 그러다 보니 출애굽이 사실이었다는 게 밝혀진 겁니다. 자기가 원래 밝히려고 해서 밝힌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알려지지 않았던 힉소스 왕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힉소스는 중앙아시아에서 말을 타고 온 유목민족인데, 그들은 셈 계통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이 셈과 함과 야벳인데, 셈은 아시아 계통이고 함은 아프리카 계통이며 야벳은 유럽으로 퍼졌다고 생각됩니다. 힉소스는 셈족인데 이집트에 와서 점령한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나일강 삼각주 북쪽의 하 이집트를 점령한 것입니다.

 

이집트 지도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위에 지중해가 있고 그 밑에 이제 이집트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 이집트는 북쪽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강이 바다 쪽으로 즉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하류가 하 이집트이고 상류가 상 이집트입니다. 그러니까 하이집트는 북쪽, 상이집트는 남쪽입니다. 바로 그 하이집트, 즉 북쪽을 힉소스가 차지한 겁니다.

 

힉소스(Hyksos)’라는 말은 유목민의 왕또는 '외국 땅의 지배자'라는 뜻입니다. 힉소스는 주전(BC) 18세기 또는 19세기경에 하이집트(북쪽)를 점령하고, 이집트 제2중간기 동안에 제15왕조와 제16왕조(주전 1663~1550)를 세웠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다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의 요셉(야곱의 11번째 아들)은 중왕국 시대에 속하는 제12왕조 때 잡혀서 이집트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학자들이 계산해 보니까 그때가 주전 1898년이었다고 말합니다. 힉소스는 제13왕조 때 이집트를 침략했고, 이것이 제2중간기가 시작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힉소스는 요셉과 같은 셈족이었고, 그래서 셈족 혈통이었던 요셉이 하 이집트를 점령한 힉소스 사람들의 총리로 발탁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큽니다.

 

힉소스 왕조는 제15왕조와 제16왕조를 세우고 그때 강력했습니다. 그때 상 이집트(남쪽)를 차지하고 있던 본토 이집트 사람들이 있었는데, 15, 16왕조와 동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힉소스에 맞서 격렬하게 싸웠고, 마침내 힉소스를 물리치고 쫓아냈습니다.

 

이집트를 이끌고 힉소스를 물리친 이집트 왕은 누구였을까요? 그게 바로 여기 나오는 왕입니다. 이집트 독립을 이루고 원래 이집트의 모든 영토를 되찾은 사람은 아흐모세 1(Ahmose I)입니다. 그는 힉소스를 몰아내면서 이집트 제18왕조를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1:8)이 바로 이 아흐모세 1세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아흐모세 1세가 왕위에 오른 주전 1570년경부터 노예가 되어 억압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부터가 아니라 주전 1570년 정도부터 노예가 되고 억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9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0 ,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1:9-10)

 

여기서 는 새 왕인 아흐모세 1세인데, 10절에서 새 왕 아흐모세 1세가 우리 대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여기 보면 분명히 이스라엘 자손이 있고 우리 대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우리 대적이 아닌데 그게 누구냐는 겁니다. 역사의 정황으로 볼 때 그들은 이집트에서 쫓아낸 힉소스 사람들이 분명해 보입니다.

 

아흐모세 1세가 주전 1570년에 힉소스에게 승리하여 힉소스 사람들이 하 이집트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 근처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언제든지 다시 돌아와 이집트를 공격하고 싸울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아흐모세 1(새 왕)가 걱정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지 않습니까? 그에게 최대 위협은 힉소스와 이스라엘이 연합군을 이루어서 자기들을 대항하여 싸우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고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억압하기 시작한 겁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오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지만, 우리가 이런 역사를 조금만 알면 이것이 진짜 사실인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또 다른 왕의 끔찍한 칙령이 내려집니다.

 

“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1:15-16)

 

여러분, 아들의 비극을 아십니까? 아들로 태어나면 무시무시했던 겁니다.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는데, 그 당시는 미리 남녀 성별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배 모양을 보면서 남자아이라고 하거나 여자아이라고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남자아이 같아 보이면 어떡하냐? 큰일 났다.’라고 하고, 여자아이 같으면 , 좋다.’라고 했겠지만, 막상 낳아 보면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남자아이가 태어났다면 기뻐해야 할 그날이 슬픔의 날이 되는 겁니다. ‘아이고, 왜 하필 남자로 태어났니?’라고 했을 것이니, 이것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당시 바로 왕의 억압에 의해서 그런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왕이 누구입니까? 18절에 나오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아흐모세 1세라고 했는데, 여기 나오는 왕은 다른 왕일 가능성이 큽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18절의 새 왕은 아흐모세 1세였고, 역사에서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은 아멘호테프 1(Amenhotep I)입니다. 그런데 115절의 애굽 왕은 그다음 왕인 투트모세 1(Thutmose I)였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죽이라는 그의 첫 번째 명령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히브리 남자아이들의 생명을 살려주었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그러자 투트모세 1세는 더욱 끔찍한 칙령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1:22)

 

여러분, 아들의 비극이 계속되었습니다. 아들로 태어나면 이렇게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위험한 시기에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에게는 누나가 있고 형이 있는데, 누나는 미리암이고(조금 후에 나옴) 형은 아론입니다. 아론은 모세보다 세 살 위입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 3년 전에는 이런 칙령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갑자기 왕이 히브리 사람의 남자아이는 다 강에 던져 죽이라고 한 지 얼마 안 됐다는 뜻입니다. 아론 때는 이것이 없었고 모세 때에 그랬다는 겁니다.

 

이 바로 왕의 명령 때문에 그의 부모는 더 이상 모세를 집에서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역청과 진흙을 칠한 갈대 상자에 그를 넣어서 강에 띄워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이집트 공주가 나일강에서 버려진 모세를 발견하고,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다 죽이라는 자기 아버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들로 입양합니다.

 

이 바로의 딸이 누구입니까? 역사에 의하면 그녀의 이름은 핫셉수트(Hatshepsut)입니다. 이집트 제18왕조 투트모세 1세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실제로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여성 군주 중 한 명이었습니다.

 

투트모세 가계도.jpg

 << 투트모세 가족 관계도 >>

 

투트모세 1세는 그의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습니다. 그 딸이 바로 핫셉수트 공주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로의 딸입니다. 그래서 첩을 후궁으로 들여 투트모세 2세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나중에 핫셉수트는 그의 이복형제인 투트모세 2세와 결혼합니다. 투트모세 1세가 죽은 다음에 투트모세 2세가 왕이 되지만, 투트모세 2세는 병약했습니다. 그래서 부인인 핫셉수트는 병든 남편을 대신하여 이집트를 다스렸습니다.

 

핫셉수트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투트모세 2세는 이시스라는 하녀를 후궁으로 들여서 그녀가 투트모세 3세라는 아들(서자)을 낳습니다. 투트모세 2세는 원래 병약했다가 14년간 통치한 후 죽었고, 투트모세 3세는 6세의 나이로 왕이 됩니다.

 

후에 투트모세 3세는 위대한 정복자가 되며, 심지어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고까지 불리는 위대한 왕이 됩니다. 그러나 그는 29세가 될 때까지 23년 동안이나 핫셉수트의 영향력 아래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향한 그의 분노가 23년 동안 얼마나 많이 쌓였겠습니까? 자기가 왕인데도 어머니가 되는 핫셉수트가 다스렸으니 얼마나 분노가 많았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나중에 모세가 이집트에서 도망가는데, 물론 이집트 사람을 죽여서 도망갔다고 성경에 나오지만, 역사에 보면 핫셉수트가 투트모세 3세에 의해서 축출당하면서 그 아들인 모세도 권력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나간 겁니다. 이런 자세한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으니까 우리가 그냥 넘어가지만, 이런 뒷 이야기를 우리가 찾아서 보면 아주 흥미진합니다. <말씀의 삶>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막 일어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핫셉수트가 모세를 발견하여 아들로 입양한 시기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투트모세 1세가 여전히 왕으로 살아있을 때였는지, 아니면 그는 죽고 그녀의 남편 투트모세 2세가 왕이었을 때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투트모세 3세가 태어나기 전에 나일강에서 발견되었는지, 아니면 그 이후인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핫셉수트 공주, 바로의 딸이 히브리 남자아이인 모세를 입양한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녀는 아들을 입양함으로써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녀는 나일강에서 그를 발견한 후 모세를 아들로 삼았습니다.

 

 

2.   믿음으로 모세를 구원한 부모 (1-4)

 

이제 이런 배경을 알고 오늘 본문을 보면 본문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바로 왕(투트모세 1)은 이미 모든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나일강에 던지라고 명령한 상태입니다. 그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레위인 남자가 결혼하여 아내에게서 아들을 낳습니다.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1~2)

 

레위 사람 집안에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남자아이면 나일강에 던져서 죽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부모가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결정적으로 왜 그랬습니까? 아이가 잘생겨서. 그러면 아이가 못생겼다면 나일강에 던졌을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았을 때 자기 아이가 못생겨 보이는 부모는 없습니다. 아이의 부모에게 자기 아이는 무조건 예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로의 명령이 이미 떨어져 있 때문에 그들은 그 아이를 나일강에 던져야만 했습니다. 2절에서 아이가 잘생겼다고 되어 있지만, 부모가 그 아이를 볼 때 너무 귀한 겁니다. 너무 아름답고 너무 소중합니다. 그래서 3개월 동안 키웠습니다. 100일이 다 되어 가니 아이가 크고 울움 소리도 커집니다.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모세 부모의 그러한 행동을 믿음의 행위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지금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순서대로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11:23)

 

분명히 부모가 믿음으로그렇게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3개월 후에는 더 이상 그를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일강은 위험했습니다. 악어가 강둑에 매우 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기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나일강으로 데려갈 때 최선을 다합니다.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3~4)

 

모세의 어머니 이름이 요게벳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녀는 갈대로 작은 상자를 만들어 역청과 나무 진으로 방수 처리합니다(3). 이때 그 어머니의 심정에 대하여 <요게벳의 노래>라고 노래를 지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 일을 상상해서 만든 노래입니다.

 

그 어머니는 아기를 방수 처리한 상자에 넣어서 나일강가의 갈대 사이에 둡니다. 거기 갈대가 많아서 그 사이에 놓으면 떠내려 가지 않으니까 거기 두고 아기의 누나가 그를 지켜보게 합니다(4). 비록 아무 희망이 없어 보였지만, 모세의 어머니는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주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이야기를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사실 이것은 아주 끔찍한 일입니다.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다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끔찍합니까?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모세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고 또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선포한 내용이 성경 여러 군데에 나오는데, 그중 유명한 구절이 이사야 43장 말씀입니다.

 

= “1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2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3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이다.” (43:1-3a, 새번역)

 

어떻게 물속에 들어가는데 물이 해치지 못하고, 불 가운데 있는데 불이 태우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엄청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뭔가를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뭔가를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지금 모세를 보면 우리가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3.   일련의 사건들은 우연이 아니다 (5~10)

 

오늘 본문에서 일련의 일들이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5)

 

어머니가 아기를 바구니에 넣어 갈대 사이에 두었을 때, 하필 바로 그날 그 시간에 파라오의 딸인 공주가 목욕하러 그곳에 왔습니다. 이게 우연입니까? 고고학자들은 이집트 파라오 왕궁에 좋은 목욕 시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파라오의 딸인 핫셉수트 공주는 목욕하기 위해 나일강으로 옵니다. 악어도 있고 위험한 곳으로 왜 옵니까? 그녀가 야외 목욕을 선호했던 겁니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아들을 낳기 위해 나일강에서 어떤 종교의식을 행하고 싶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이 이집트 공주는 하필 아기 모세가 들어 있는 바구니가 있던 바로 그곳으로 옵니다. 그녀가 조금만 늦게 왔더라도 바구니는 물에 휩쓸려 가거나, 악어가 먼저 아기를 발견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더운 날씨 때문에 아기가 질식해서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딸은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우연입니까?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6)

 

또한 이 공주는 많은 갈대 사이에서 바구니를 찾지 못했을 수도 있는데 찾았습니다. 게다가 바구니를 열었을 때 그 아기가 히브리 사람의 아기라는 것을 단번에 알았습니다. 사실 이 공주는 모든 히브리 남자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한 그 바로 왕의 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버지의 칙령을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딸이자 이집트 공주로서 그녀는 이 아기를 발견했을 때 강물에 떠내려 보내라고 명령할 수도 있고, 빠뜨려 죽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녀가 아기를 발견했을 때 아기가 울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를 불쌍히 여겨.” 아기가 우는데 그것을 보면서 아이 짜증 나.’라고 할 수도 있고 울긴 왜 울어?’ 할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 불쌍히 여겼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래서 구해주었습니다.

 

핫셉수트가 그 남자아이를 보았을 때 불쌍히 여겼다고 되어 있지만 여기에 복수의 의미가 있습니다. 뭔가 반짝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겁니다. 단순히 불쌍했던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일단 구했습니다. 그리고 입양해서 왕자로 만듭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습니까? 불쌍해서 그랬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 핫셉수트 공주의 권력욕이었습니다. ‘나도 이제 아들이 생겼다.’ 하는 무시무시한 권력욕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내 일상생활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안 보이십니까? 당연히 눈에는 안 보입니다. 그러면 안 계신 겁니까? 이 모든 일들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아래 일어난 것입니다.

 

조금 더 계속해서 보면, 모세의 누나가 거기 가는데 어린 소녀였습니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1, 2학년 나이 정도밖에 안 됐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 소녀는 바로의 딸에게 아기를 대신 돌볼 유모를 구해드릴까요 하고 제안합니다.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7)

 

이 어린아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합니까? 눈치를 채고 빨리 가서 이렇게 말하는데, 이것은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입니다. 바로의 딸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이집트의 공주입니다. 이집트를 다스리게 될 정도로 강한 여자입니다. 그런데 그때 많은 이집트 유모들이 있었을 텐데도 이 어린 히브리 소녀가 유모를 불러드릴까요 했더니, 생각해 보니까 히브리 아이니까 이왕이면 이집트 여자보다는 히브리 여자가 낫겠지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허락합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8)

 

아기의 어머니인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모세의 어머니는 소중한 아들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손으로 자기 아들을 직접 키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 이야기는 아직 끝이 아닙니다. 바로의 딸이 또 뭐라고 합니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9)

 

이 얼마나 놀라운 거래입니까? 여기 아기를 낳으신 어머니들께 여쭤보겠습니다. 자기 아이를 낳고 젖먹이고 키우는 데 대해 돈 받고 한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젖을 먹여야 하겠는데 나 돈 줘. 안 주면 안 먹여.’라고 했던 어머니가 여기 계십니까? 아니면 남자분들은 한번 어머니께 여쭤보십시오. ‘어머니가 나를 젖먹이고 키우신 것을 돈 받고 하셨어요?’ 그런 어머니가 어디있습니까? 그런데 자기 아이를 키우는 데 돈까지 받아 가면서 키운다니, 이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이고 놀라운 일입니까?

 

게다가 그 돈은 누구 돈입니까? 그렇습니다. 모세를 비롯하여 모든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던 이스라엘의 대적 바로 왕의 금고에서 나오는 돈입니다. 바로는 모세를 죽이려 했지만, 바로의 딸이 그를 구했습니다. 모세의 친어머니가 그를 키웠고, 심지어 바로의 국고에서 나오는 돈까지 받아 가면서 키웠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10)

 

모세는 바로의 딸에게 입양되어 아들이 되었고,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이집트 왕자가 되어서 이집트의 모든 위대한 문화적, 지적 유산을 다 배웠고 학문을 다 배웠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바로의 그런 악한 계획조차 사용하셔서 모세를 구출하셨는데 그것도 바로의 딸을 사용해서 구출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을 구출할 준비를 시키신 겁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바로 왕 자기가 죽이려고 했던 그 아이가 자기 궁에 들어와서 자기 집안의 왕자로 자라며 모든 문물과 학식과 학문을 다 배우고 위대한 지도자로 자라도록 키워준 사람이 그를 죽이려 했던 그 왕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이런 일은 모세에게만 일어난 게 아닙니다. 우리 삶을 자세히 보십시오.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내 삶에 지금 어려움이 있다면 왜 이러한 어려움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왜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요?

왜 그날 바로 그 순간에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

왜 그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했을까요?

왜 우리는 지금 콜럼버스 지역에 살고 있을까요?

왜 우리는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에 다닐까요?

왜 지금 이 직업을 가졌거나 사업을 할까요?

왜 이 학교를 다닐까요?

왜 나는 오늘 이 모세 이야기를 듣고 있을까요?

 

우연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우연히 이 예배당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일상생활에서도 일하시고 전 세계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우리 삶에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내 삶이 우연이 아니라 목적이 있다면, 왜 나는 내 삶에서 이렇게 많은 어려움을 당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 29:11, 새번역)

 

지금 안 좋은 일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무엇을 질문하라고 했습니까? 어떤 나쁜 일이 탁 일어났을 때 과연 그럴까? 과연 이게 나쁜 일일까?’ 또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도 이게 과연 좋은 일일까?’ 질문해 보라고 했습니다. 이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펴보라는 겁니다.

 

특히 우리 삶의 고난과 문제들은 지금 우리 안에서 모세를 만들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복의 수단일 수 있는 겁니다. 그러한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이런 모세가 나올 수 없습니다. 이런 죽음의 위기를 통과하지 않고는 위대한 모세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해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이더라도 우리 삶에는 어려움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 어려움을 극복하게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든지 하나님이 나의 삶을 위해 지금 모세를 준비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잘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일에 선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목적을 발견해서 그분의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우리 삶이 때론 어렵기 때문에 왜 이런지, 하나님이 왜 이러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모세를 준비시키시는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엮으셔서 어떤 결과를 만드실지 기대가 되지 않으십니까? 어떤 어려움이 오면 , 나를 빚으셔서 사용하려고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에게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모든 사람 중 우연히 만난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일이든 힘든 일이든, 하나님은 지금 분명히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주십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그 선하신 계획 가운데 우리 삶에, 우리 교회에 과연 어떤 일을 이루어주시는지 기대가 되지 않으십니까? 그것을 보고 깨달으며,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그래서 주님의 능력의 도구가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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